목회자 자신의 개혁
목회자는 자기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각성하고, 부단히 자기개발(self-development)에 힘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항상 묵상(meditation)하시고, 기도하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막 1:35, 눅 5:16, 6:12, 11:1). 특히, 현대와 같이 목장(pasture: ministry field)이 광대하고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려면 목회자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충분히 대처해나갈 수 있는 인격적 감화력과, 지적 감화력, 그리고 영적 감화력을 얻기 위하여 자기개발에 부단히 힘써야 할 것이다.
첫째, 목회자는 시대감각이 있어야 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지만, 그 진리의 표현방식(表現方式)과 실천양식(實踐樣式)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다(히 1:1,2).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원리에 있어서 진리의 유일성(unity of truth in methodology)과 그리고 방법론에 있어서 진리의 다양성(diversity of truth in methodology)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설명하자면, 진리의 문화적인 표현(cultural expression!!! of truth)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표현방식도 지엽적인 것은 문화적 배경(cultural differences)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성경말씀의 근본적인 근간교리(doctrinal basis)는 문화적인 차원을 넘어서 불변성이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문화적인 표현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시대적, 범세계적 기독교회를 우리나라 기독교의 표현방식의 틀에 잡아넣고, 고루한 아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방식(narrow-mind)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현시대의 세계적인 기독교의 복음운동의 "제3의 파도"(third wave)를 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걸맞지 않는 전근대적인 목회방식 때문에,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시대를 빨리 파악하여 성서적인 기초하에 시대에 걸맞는 목회, 즉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는 목회(마 24:45)로 충실해야 한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비성서적이 아닌한, 시대에 걸맞는 목회방법을 남보다 빨리 도입하여 개발해가지고 실천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성장시킨 사례를 많이 볼수 있다.
둘째, 목회자는 인간적(유교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의 교인들을 리드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의 원천인 영적 권위(spritual authority)가 있어야 한다. 이 영적 권위는 위에서 부터 오는 것이고, 그 권위를 잘 관리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목회자의 권위(pastoral authority)를 목회자 자신이 잘 관리하지 못하여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권위(God's authority)와 무관하게 자기가 멋대로 세우려고 하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로 인하여 교회성장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본의 아니게 교회성장을 막는 저해요소(church growth barriers)가 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 권위주의로 인하여, 평신도들을 자기의 목회의 세계관 속에 가두어 놓고, 목회에 관한 모든 것을 강요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써비스 받아야 할 메시지(words of God)를 통하여 죄로, 또는 세상에서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양들이 위로받고, 치료받기 보다는 더욱 깊은 상처를 받도록 강요되는 권위주의적, 설교는 물론, 헌금을 비롯한 모든 교회생활에 있어서 자원봉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는 식의 권위주의적 목회방식은, 더구나 현대 목회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이 권위주의의 부작용(side-effect)로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들의 멘탈리티(ministerial memtality)가 왜곡되어 대립과 분쟁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다. 미국과 같은 서구 교회들(Western churches)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사고방식(mentality)이 별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로 인한 분쟁을 볼 수가 없다. 물론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는 유교에서 유입된 것으로서, 수직적인 종속관계(vertical subordinate relationship)를 강조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이 수직적 종속관계는 올바른 권위를 통하여 수립되는 것이지, 무조건적 강요식의 권위주위로 수립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에서, 특히 현대 교회에서 영권(靈權)을 빙자하여 파쇼(facio, facism)식으로 목회를 하게 되면 무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머리(brain)로만 하는 목회는 피곤하며, 덕이 없이 하는 목회는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따르지 않아 고전하게 된다. 목회는 머리로 하는 것 보다 가슴으로 사랑의 덕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교회(contemporary church)의 목회자들(ministers)은 공(公)히 영적 감화력(spiritual touch)을 통하여 강단의 권위(authority of pulpit)를 세우고, 또 지적 감화력(intellectual understanding)을 통하여 현대 교인들을 교육, 이해로 유도하며, 인격적 감화력(moral influence of personality)을 통하여 크리스챤 생활에 본이 되고 존경받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감화력을 통하여 초대 교회와 같이 서로서로 아낌없이 바치며(행 2:35, 4:32-35), 함께 사역(co-working)하고 주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마 25:23) 목회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셋째, 목회자는 유아독존적 독선으로 독주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목회자나 평신도가, 목회는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멘탈리티(metality)가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 머리속에 오리엔트되어(oriented)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목회사역을 전유물로 착각하여 "목회에 관한한 모든 것은 전문가인 내가 알지 누가 알겠느냐? 그런고로 내가 하는대로 무조건 순종하라"는 식의 독선으로 독주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독선에 의하여, 독주하게 되면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누릴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게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교회의 모든 짐을 목회자 혼자 져야하기 때문에, 아주 지쳐서 번아웃(burn-out)되어서 장수 목회(long-run ministry)가 불가능하게 되고, 둘째로, 더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셋째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목회자 혼자서 져야 된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게되는 것이다. 모세(Moses)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문제를 혼자 담당하다가, 지쳐서 번아웃 될뻔 했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advice)에 따라 십부장(rulers of tens), 오십부장(rulers of fifties), 백부장(rulers of hundreds), 그리고 천부장(rulers of thousands)을 통한 분담목회(sharing ministry)의 방식을 도입하여 백성들을 무리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출 18:18).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목사가 같은 교회에서 장기 목회(long-term ministry)를 하기가 어렵게 되거나, 건강을 해쳐서 일찍 은퇴(retire)하고, 장수 목회(long-run ministry)를 할 수 없게 되는 사례들이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모든 일의 책임, 더 나가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책임도 목회자 혼자서 져야 하는 외로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교인들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목회자에게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평신도들과 함께 뛰지 않고 목회자 혼자 독주했으니,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도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논리이다. 목회자 보고 책임지라는 뜻이다. 물론, 교회성장의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다. 왜냐하며 교회성장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리더쉽(leasdership)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목회자만의 원-맨쇼(one-man show)의 극장(studio)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목회자는 평신도와 함께, 함께 사역하고(co-working),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님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반석위의 교회(마 16:18)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목회사역은 목회자나 평신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에 따라, 월권하지 않고 각각 자기의 맡은바 직분에 충실할 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분명히 그어진 구별선을 무질서하게 넘나드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성할 때에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해나간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의 훌륭한 리더쉽(leadership)과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co-operation)을 요한다는 뜻이다.
목회자의 목회 방법론의 개혁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현대 교회의 고민이 바로 "평신도가 없는 설교"(church without laypeople), "교회없는 신학"(theology without church), 그리고 "신학이 없는 교회"(church without theology)라는 위기(crisis)에 직면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에서 한 마디로 설교와 더불어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뜻을 알만하다. 목회방식에서 구습을 답습하거나 변화가 없을 때에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교회와 목회방식이 개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우(Reuel L. Howe)는 삶의 변화는 삶이 부딛치는 형식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진리가 제시되고 삶의 의미들이 만나질 수만 있다면, 교회의 목회형식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업기술(technology)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사회와 개개인의 생활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교회도 예외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고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혁자들(Protestant church reformers)은 교회개혁(Reformation)에 있어서 "현재완료진행형"(progressive present perfect form)을 강조한다. "교회는 개혁되었다, 계속해서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quia reforma).
목회방법의 개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다만 (1) 강단의 개혁(preaching), (2) 평신도의 사역(lay ministry), (3) 프로그램의 개발(development of programs)로 나누어 살펴 보고져 한다. 이 세 가지 면에서 개혁되어야만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라"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마 24:25, 고후 6:2) 강단이 개혁되어야 하며, 주님의 목회방법과 사도들의 전통등 성서적 목회방법인 평신도 사역을 보편화하며, 현대 교회에 있어서는 특히 시대에 걸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해야 한다.
(1) 강단(설교)의 개혁
시대와 사람과 삶의 현장의 변화에 따라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의 메시지 내용과 전달방법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본질의 변화없이 현대적인 표현과 현대적인 언어로 전달방법을 개발해나가야 한다.
첫째, 강단의 개혁은 먼저 설교내용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말씀을 이탈하거나 복음의 핵심을 잡지 못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헤메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이유는 설교학(homiletics)의 연구를 무시하거나, 성경, 더 나가서는 신학적 지식(theological understanding)의 빈곤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학적, 설교학적 지식이 풍부하거나, 성경적 기초(biblical basis)가 튼튼하면서 은혜롭게 설교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고져 하는 것은 신학적 지식을 떠나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주신 은혜 가운데, 받은 복음을 변질시킴이 없이 쉽게 전하면 된다는 뜻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 이상으로 전하려 할때, 설교가 비성서적 내지 비복음적인 메시지가 되기 쉬운 것이다. 오히려 성경을 그대로 전하면 염려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 중에 설교 본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하다 보면, 자기 소리만 늘어놓다 말게 된다. 더 나가서 이상한 소리까지 하게되어 교인들의 신앙사상에 지극히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성경해석학(hermenutics)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아무 해석법이나 마구 적용하는 경향이 많다. 한 예를 든다면, 성경을 우화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일변도로 적용하여 성경구절의 의도나(intention), 그 진의(true meaning)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희한한 동음이의의 신소리(pun)로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해석은 설교학적 패턴(homiletical pattern)으로 말하여 설명하자면, 우선 자신이 선택한 성경의 본문(sermon text: Scriptures) 성경해석학(hermenutics)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배경라인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조직신학적 뼈대와 성서신학적 체계에 준한 성경해석학의 도구(tools)를 사용하여 성경본문을 정확하게 해석(exegesis or exposition)한 후에, 성령의 능력(spiritual power)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 효과있게 적용함으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성경해석학은 조직신학과 성서신학과 같은 체계적인 성경원리에 맞추어 제작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연장(tool)이라고 할수 있다. 기계를 분해하거나 조립하기 위하여 종류나 규격이 꼭 맞는 연장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도 해당 구절을 주석하는데 꼭 맞는 성경해석법의 연장(tool)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물론, 성경해석의 가장 우선적인 주도(top priority of initiative)는 성령(the Holy Spirit)께서 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택하거나, 해석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주석(commentaries)이나 다른 신학적인 서적들(theological books)을 먼저 떠들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설교자(preacher)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엎드려 기도함으로 성령의 영감, 즉 설교의 영감을 받은 후에, 성령의 지혜를 통하여 설교 본문의 해석으로 들어가야 한다.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직접적인 연장은 성경해석학의 방법이므로, 성경해석법 중에 어느 방법, 즉 어떤 연장(tool)을 사용해야 할지를 결정하여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경해석이 올바로 된 것인지,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이 확인작업을 하기 위하여,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원리가 필요하고 권위있는 주석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오용하기 쉽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올바른 성서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delivery)해야 할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하여 전달하는 설교의 내용이 철저하게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강단의 개혁은 설교형태의 변화를 통하여 시도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에서 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제목설교(topical preaching)를 위주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초기에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설교형식인 제목설교가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대로 이식(移植)되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제목설교가 적절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조직에 있어서 통일성이 있고, 내용에 있어서 명료해서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교의 통일성과 간결성의 잇점 때문에 제목설교가 한국 교회 선교의 백년사 속에서 주역을 담당해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한국 교회의 초기 단계의 상황으로 보아 제목설교가, 많은 잇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설교유형들 보다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도 많이 바뀌었거나 기성인들도 많이 발전됐다. 성숙했다는 표현이 좋을런지 모른다. 물론, 급진 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앙이 아닌 실존적으로 "성숙한 인간"(man of age)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받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앙이 많이 성장했고, 그리스도인의 문화생활도 많이 발전해서 생활양식(life style)이 달라짐에 따라 이에 부응해서 현대인에게 적절한 영의 양식을, 때를 따라 공급해 줄 사명이 설교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한다면 현대인의 식성에 맞도록, 좀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영양가가 풍부한 식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이다. 효과적인 설교방법을 통하여 복음의 진수성찬을 효과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홀랜드(Dewitte T. Holand)는 설교는 목사의 직무와 함께 계속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양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반대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돨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대부분이 강해설교 형태(expository preaching style)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항상 그렇지만,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어서 강해설교가 적절하다고 본다. 제목설교가 간결성과 통일성의 장점도 있지만, 독창성이나 본문을 등한히 취급하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홍정길 목사는 제목설교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전하기 쉬우므로 바람직한 설교가 아니라고 부정론을 폈다. 그는 제목설교의 위험성을 전제하고, 제목설교는 근본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한국 교회에 바람직한 설교형태는 본문의 강해설교라고 주장했다. 이성헌 목사도 강해설교가 설교의 원형으로서 처음부터, 예수님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설교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콜러(Charles W. Koller)도 강해설교가 설교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강해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나 성경본문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약간의 약점도 없지는 않다. 그 중에 하나가 현장과 연결시키는 적용(application)의 기술이나 배려이다. 성경 본문에만 집중하다 보면, 하나의 주석가로 끝나기 쉬운 약점에 빠지기 쉽다. 목회 현장(ministry field), 삶의 현장(context)을 소홀히 하여, 오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의 말씀, 나의 말씀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끝나기 쉬운 약점이 있다. 강해설교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본서에서는 간단하게 네 가지 방법(four types)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내연형으로 본문의 "집중강해식"(intensive type) 설교방법이다. 이 강해는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씩(one verse by one verse) 세밀하게(in detail) 그리고 집중적으로(intensively) 강해해 나가는 방법이다.
둘째가, 외연형으로 본문의 "확대강해식"(extensive type) 설교방법이다. 이 강해설교 방법은 본문은 물론 본문에 관련된 내용을 전성경(all Scriptures)에까지 확대하여(extensively) 본문의 전달내용을 보강하는 방법이다. 셋째는, 선택형으로 본문의 구절 "선택강해식"(selective style) 설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본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high-light)을 선택해서 그 부분을 중심테마(central theme)로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는, 숙고형으로 본문의 "반영강해식"(reflective style) 설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마치 보석상이 보석을 다면(多面)으로 깎아서 보석의 여러 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선택된 본문의 여러 면의 의미를 반영시키는 방법으로 다면영상(多面映像, multi-screen)의 효과의 장점들을 최대한도로 이용하는 설교방법이다.
셋째, 강단의 개혁은 설교의 전달방법(delivery method)에 있어서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의 방법을 구사하도록 해야 한다.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을 전제로 한 설교로, 인간의 영혼과 육신생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전인격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기적의 메시지(miracle message)로서 인격화된 메시지(personified message)이다. 이 설교 말씀을 통하여 영혼이 거듭나고(born again), 삶의 가치관(a value of human life)이 바뀌고, 육신의 병(physical disease)도 치유되고, 사회(human society)가 변화된다. 이 설교는 설교의 내용과 언어에 멎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육사건"(incarnational event)을 유발시키게 하는 설교방식이다. 본문과 설교내용, 그리고 전달언어 속에만 화육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인들의 영혼과 생활현장에 "화육사건"으로 생생하게 육박해 와서(has been coming) 부딪히는 (touchable) 설교를 말한다. 영혼을 터치해서(touch) 거듭나게 하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그러한 말씀을 말한다.
요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매"(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라고 하였는데, 이 사건이 곧 화육사건이요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가 세상에 말씀되고(spoken) 선포된(preached) 그리스도의 말씀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선재의 말씀(pre-existent Logos)을 말하며, 후자는 화육된 말씀(incarnate Logos or God-Man)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이라는 용어에 대한 두 종류의 헬라어 단어들, 즉 "로고스"와 "레마"의 어원학적인 용법(etymological use)에 절대적인 해석의 키(key to an interpretation)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가 신·구약성경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말씀"의 어원학적 의미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의 배후에는 두 가지 개념, 즉 지성적 요소(a noetic element)인 "사상" (the thought)과 역학적 요소(a dynamic element)인 "능력"(the power)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용어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학적 이해(theological understanding)와 말씀의 설교학적 적용(homiletical application)에 접근하기 쉬운 면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선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용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론(theory of Trinity)을 정립하는데 용이하다. 다시 말하면, 이 용어를 통하여 말씀으로 선재하신 하나님(Godhead)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incarnate Christ)의 선재형(pre-existential image)으로서, 그 선재하신 하나님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학적인 면에서 볼 때, 선포된 말씀은 "믿음"의 상태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은 롬 10:8의 "믿음의 말씀"의 뜻과 같다. 흠정역 성경(KJV)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성경 로마서 10장 17절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으로 번역되었으나, 새국제번역 성경(NIV)과 한글 개역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Word of Christ)으로 번역되어, 오히려 후자의 번역이 신학적, 설교학적 배려(配慮)를 더 한 셈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레도우스(Greathouse, William M.)는 "그리스도의 말씀"(the word of Christ)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말보다 더 주의를 끈다고 말했다. 사실상,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that the word has been preached)은 역사하는 "믿음의 방편"(the means of working faith)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으로 그 말씀이 믿음을 생기게(beget) 하고 자라게도(flourish)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God's revealed word)은 "그리스도"(Christ)로서 곧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이요 "세상에 오신 말씀"(the word came into the world), "역사하는 말씀"(the working word)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the Divine message), 곧 "선포된 말씀"(the word preached)으로 설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포"(preaching)가 "역사하는 믿음의 방편"(the means of working faith)이라고 했으니, 그 선포, 즉 "설교"는 필히 "그리스도의 화육사건"(incarnation event of Christ)의 방식을 취해야 하므로, 이는 근본적으로 화육설교 (incarnational preaching)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화육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스데반이나 바울사도와 같이 준비한 설교말씀에 반드시 사로잡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마 1:20).
(2) 평신도 사역의 활용
평신도 사역에 관한 내용들은 본서의 각 장, 즉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 소그룹 운동론(small group movement), 그리고 제자 훈련론(discipleship training)에서 필요에 따라 상세히 언급한 관계로 본장에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사실, 평신도는 목회학상으로 볼 때에 목회자의 목회활동에 동참해야 하는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companion)요 파트너(partner)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
평신도(lay-people)는 목회자와 함께 교회성장의 양대 자이언트(giant)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저자가 본서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성장 프로젝트(project)의 프로그램(program)의 궤도를 따라 함께 달리는 동반자로서, 즉 목회자는 기관차의 기관(engine), 평신도는 객차(passenger train)로 비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둘 다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partn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목회자와 평신도가 공존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상호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분명하며, 분담사역(sharing ministry)이라 해도, 두 직분 사이에는 직무상의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평신도 사역은 목회자의 목회활동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목회방법이 되어 왔던, 교회의 평신도 사역을 무시하는 "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 structure)의 좀 잘못된 목회방식(ministry pattern)을 뛰어 넘어서, 목회방법의 과감한 개혁으로, 평신도들의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을 백분 활용하는 목회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목회는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멘탈리티(mentality), 즉 "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 passive sheep structure)로부터 탈피해서 정상적인 "목회자/평신도 공동사역 구조"(pastor/laity coworker structure)로 바꿔야 한다. 목회사역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에 따라, 자기 위치에서 월권하지 않고 자기의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할 때, 부작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한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역은 교회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목회자로서 평신도사역을 꺼려한다면 지속적인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해서 교회성장에 활용해야 한다.
평신도 지도자 훈련
모세(Moses)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은혜가 충만하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역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영육간에 피곤에 지쳐서 쓰러질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대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선출하여 사역을 분담함으로(shared ministry) 일을 힘들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출 18:14-18). 예수께서도 복음사역을 위하여 맨 처음에 시작하신 것이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훈련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 한 사람이 열 시간동안 해서 피곤해 지칠 일을, 평신도 열 명을 훈련시켜서 하게 되면 힘들이지 않고도 한 시간 내에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시켜야 할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를 삼아 그들을 훈련시키라고 마지막으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9:19-20). 지도자 훈련에 관하여는 소그룹 운동론과 제자 훈련론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
평신도를 훈련했으면 그들을 목회사역에 참여시켜야 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 참여(participation)는 어떠한 의미에서 모든 평신도의 목회활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서 평신도의 사역이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첫째로,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의 영역이 직접적인 평신도의 세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자도 평신도와 밀착되어 있지만, 목회자는 목회사역의 중요한 부분들, 예를 들면 설교(preaching)와 교회행정(church administration), 교회의 주요 활동(main activities)등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에 평신도를 가까이 접하는 일이 아무래도 평신도만 못하나, 평신도 지도자는 항상 평신도와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평신도와 접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둘째로,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목회자와 평신도간에는 생각(thinking)과 정서적인 간격(emotional gap)이 있지만, 평신도 지도자는 평신도 출신으로 역시 평신도의 위치에 있으므로 같은 입장에서의 평신도와의 접근은 목회자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목회사역에 과감하게 참여시켜야 한다.
간혹 목회자들 중에는 평신도 목회사역의 직접적인 참여에 따른 부작용(side effects), 즉 목회자를 비판하고 교회에 대한 불만을 조성, 어떤 그룹(peripheral group)을 형성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해서 염려하여 평신도 지도자의 직접적인 목회사역을 꺼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자세이며 기우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항상 평신도에 대한 부정적인 콤플렉스(complex)에 빠져, 교회성장을 위한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없게 되어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우선 적극적이고 과감한 자세로 이러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며, 혹시라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철저한 평신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지 못한 평신도(untrained people)들 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problem maker)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나 문제아(trouble maker)가 되기 전에 성격이나 신앙의 성장배경에 따라 목회자가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 (difficult people)들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들을 품에 안아서 다룰 수 있는 아량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훈련을 통하여 얼마든지 변화되어 목회자의 목회사역을 도울 수 있는 평신도 내지 평신도 지도자(lay-leader)로 길들여질 수(trained, edified, and oriented people)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전혀 변화가 되지 못하고 마는 구제불능의 사람(impossible people)이 있는데,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병들게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안됐지만 속히 수술해야 한다. 물론 수술방법과 수술범위, 수술 후의 치료 등 사전에 세심한 배려를 통하여 후유증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런 수술방법은 극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서, 함부로 사용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교회관리론(church management) 가운데 인간관리론(people management)의 분야에서 하게 된다. 부연해서 코멘트 하자면, 목회자가 목회를 위한 연구는 다양하게 전문적으로 해야 하는데, 예를 들자면, 교회관리(church management)중에 인간관리(people management), 시간관리(time management), 재정관리(financial management), 프로그램관리(program management), 건강관리(health care), 행정관리(church administration)등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면 목회사역에 도움이 될 것아다.
(3) 소그룹 프로그램의 개발
교회성장을 위한 교회활동 프로그램의 개발(development of programs)은 목회자의 개발(development of pastor)과 평신도의 개발(development of laity)에 이어 세번째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와 평신도가 있는 교회라 하더라도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program)이 없으면, 그 교회는 비활동교회(inactive church)로 잠을 자는 교회(sleeping church), 아니면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나 마찬가지다. 할 일이 없어서 낮잠이나 자다 보면 무기력하게 되어, 나중에는 병들어 죽어가게 된다. 사람도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단명하며, 적당한 운동(exercises)과, 특히 목적있는 일들(works or activities)을 의욕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건강(physical health)은 물론 정신건강(mental hygiene)에도 좋기 때문에 장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메리칸-인디언(American-Indian)의 경우, 그들은 미국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welfare, food-stamp etc.)를 받아 먹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명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원리(biological principle)는 교회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교회도 바울 사도가 비유한대로 하나의 유기체(organic body)이기 때문이다. 활동하지 않는 교회는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활동 프로그램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오래 전에 한국 교회에 정착된 구역예배 활동을 비롯하여 성경공부반(Bible study class), 제자훈련반(discipleship training class), 각분야별의 그룹 교육훈련, 예를 들면 연령별로 분류해서 노년 그룹(senior group), 장년 그룹(adult group), 청년 그룹(youth group), 청소년 그룹(teenager group), 소년소녀 그룹(boys and girls group), 유년반(children class), 유아반(baby class), 학력별로 분류해서 역시 장년 성경공부반(adult Bible study class), 대학생반(college and university class), 고등학생반(high school class), 중학생반(middle, junior high school class), 국민학생반(elementary school class), 유치반(preschool class), 유아반(baby class), 탁아소(nursery school), 성격별로 분류해서 커풀 그룹(couple group), 씽글 그룹(single group), 직장 그룹(business group),사춘기 그룹(adolescence group), 금연반(non-smoking class), 중독증 교정반(toxicosis treatment class)등, 이 외에도 각 지교회의 적성에 맞게 효과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교회활동에 이용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미국 쌔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에서는 무려 79가지나 되는 소그룹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적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어떤 종류이건 간에 소그룹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한 목회방법으로는 교회를 성장시키기가 어렵다고 본다. 이제는 소그룹 운동을 통하여 평신도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교회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시키지 않으면 세속화 물결에 교인을 떠내려 보내든가 다른 교회에 빼앗기든가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아무렇게나 시도하다가는 실패로 끝나고 좌절하여 포기하기 쉽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교회에 맞도록 효과적으로 시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모 교회에서, 모 목회자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대로 시도하다가 실패한 예도 부지기수인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 내 교회에 적용하기에 적합한지 먼저 검토하고 나서 선택해야 한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도하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이 자기에게 꼭 맞지 않을 경우에도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과감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첫째로, 그 프로그램을 자기의 것이 되도록(identified) 목회자 자신이 먼저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자신이 없을 때에는 그 프로그램의 전문가를 초청해야 하는데, 이것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목회자가 그 프로그램에 미칠 정도로 빠져들어야 한다. 둘째로, 처음에 한 두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된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할 때까지 계속 도전해야 한다. 물론, 그 원인들을 잘 분석하고, 왜 안되는가를 찾아서 반복적으로 처방해서 실시해야 한다.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본서의 제5장은 이러한 판단하에, 교회성장을 위하여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소그룹 활동 중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택하여 실제 워크샵(workshop)을 통한 실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프로그램이다. 본 프로그램은 기존의 제자훈련의 약점들을 보완하여 개발한 것으로서 지역 교회에서 효과적으로 시도할 수 있도록 제작된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전제로 하여, 말씀과 은사를 겸비한 제자들, 즉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켜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임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design)되었다. 현대의 복음사역의 성공을 위하여 "제3의 파도"(third wave)를 탈 수 있는 목회자들만이 시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본서는 목회자 스스로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유일한 안내서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통하여 목회자 스스로가 자체훈련을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해당 세미나(seminar)를 통해서 훈련받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본서를 통하여 자체훈련을 하려면, 먼저 제4장 한국교회 성장론(Korean Church Growth)을 주의 깊게 읽어서 이 프로그램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의 필연성에 동감한 후에, 제1장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을 읽어서 교회성장 원리와 전략에 관한 지식을 얻고, 제2장 소그룹 운동론(Small Group Movement)을 통해 소그룹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제3장 제자 훈련론(Discipleship Training)을 읽어서 제자훈련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에,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운동 중에 제자훈련을 차질 없어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후에, 본서의 제5장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 워크샵(program workshop)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워크샵을 통하여 목회자 자신이 확신을 얻고 훈련을 한 후에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준비작업(preparation for the program)과 동시에 특별 작정기도 후에 시행하도록 한다.
제 5장 다이나밐 제자훈련(워크샵)(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본서(本書)의 1, 2, 3장은 교회성장(church growth)과, 소그룹 운동(small group movement),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등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얻을 수 있도록 했고, 이 지식들(priciples and strategies)을 바탕으로, 제5장에서 시도하려는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program)을 지역 교회 실천목회에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주안에서 충분히 연구하고, 제자훈련을 시도하면 승리하리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때는, 한때 침체되었던 미국의 사회와 기독교계에 정신적으로 돌풍을 몰고 왔던 미국의 "적극적 사고방식"의 사상가들(positive thinkers)인 로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나,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의 목회성공 철학인 "가능성의 사고"(possibility thinking) 또는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의 철학을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로버트 슐러는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생각과 인격을 통하여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그 보다도 더 주님의 보장된 말씀인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If you can believe,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who believes)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과감하게 진행할 때에 성공이 보장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혼자서 시도할 수도 있으나, 처음에는 실패할 수 있는 확율이 많기 때문에, 본 프로그램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해서 훈련받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작업에 들어가서 충분한 준비와 기도, 그리고 홍보를 통하여 교인들의 협력을 얻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식을 따르기 위하여 디자인 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법을 보면 모든 것에 완벽하다. 물론, 그러므로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 방법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신 방법을 모방했을 뿐, 전적으로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자기가 누구이심을, 즉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론을 가르치셨다(마 16:16-17). 아울러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는 이 세상 어느 혈육의 선생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말씀해주셨다.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이론적으로도 가르치지만, 역시 그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여 훈련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속죄론을 가르치셨다(마 20:28).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역시 제자의 길도 십자가의 길이다(마 16:24).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증거하시므로 천국론을 가르치셨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천국에 대한 교리를 제자들에게 자세히 가르치셨다(마 13장). 인간은 완전한 죄인임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인죄론과 구원론을 아울러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자기가 하나이심을 증거하심으로 삼위일체 신론을 가르치셨다(요 10:30, 14:9-11). 예수께서는 직접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며(마16:18) 하나님의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선포하심과 동시에 이 교회를 관리하는 종들에게 그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을 관리하고(요21:15-17), 또 천국문을 열수 있는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교회론을 확립해주셨다(마 16:18-19).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시게 되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권능을 주시므로 복음사역에 동역해주실 다른 보혜사 즉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성령론을 가르치셨다(요 14:16-17, 26, 16:8-10). 예수께서는 승천하셨다가 때가 되면 다시 오시는데, 그 전에 세상 끝날에 환란이 있겠고(마 24장), 주님께서 재림하셔서(요 14:1-3, 행 1:11) 세상을 심판하시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아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 종말론을 선명하게 가르치셨다(마 25장).
이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가르치심과 동시에 천국윤리와 세상윤리를 분명히 말씀해주심으로 제자들의 생활윤리를 철저하게 교육시키셨다(마 5장).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소상하게 가르치셨고, 함께 다니시면서 생활속에 파고 들어가셔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도록 훈련시키시기도 하셨다. 또 교회를 어떻게 섬기며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윤리와 봉사활동등을 소상히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복음은 어떻게 전하여야 되는지 전도의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다(마 10장). 예를 들면,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파하라.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좇아내라. 갈 때에 전대에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고,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고, 어느 곳에 들어가서 합당한 자를 만나면 거기 유하며 전도하고, 들어가는 곳마다 평안을 빌라. 사람을 삼가라. 뱀같이 지혜롭고 비들기 같이 순결하게 하라는 등 매우 소상하게 전도 방법을 가르쳐서 보내셨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훈련에서 성경공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면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며 훈련하는가? 무엇이 다른가? 물론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다른가? 타이틀 [다이나밐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훈련 방법이 "다이나밐"(dynamic)하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첫째로, 일반 제자훈련에서 소홀이 하는 부분인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여 "다이나밐"하게 훈련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선 방법론의 차이다. 물론 일반 제자훈련에서도 앞에서 나열한 내용들을 대부분 가르친다고는 하나, 성령을 통한 실제적인 역사(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훈련하지 못하고 말과 이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열열하게 생활하며 전도해야 된다고 최종적인 방법론을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말과 이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훈련 현장인 크라스룸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가지고 생활 현장, 전도사역 현장에 뛰어들게 한다. 강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리 잘 배워도 이론적인 교리와 윤리적 행위에 멎어지고 만다. 성령의 강한 체험이 없으면, 우선 확신과 자신감이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 속에 뛰어들 용기도, 전도할 자신도 없어서 소극적인 전도행위에 그치게 된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자신있게 나가서 증거하였다. 성령을 받으면, 자신의 죄를 속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 가만히 들어 앉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치욕과 모욕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전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마음(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 골수에 사무쳐서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렘 20:8-9).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크라스룸(class room) 프로그램 중에, 성경연구에 앞서서 훈련생들의 특별한 간증시간(testimony)을 통하여 실감있게 은혜를 나누며(sharing a grace of the Holy Spirit through the testimony), 은혜스러운 분위기에서 마음을 열고 성경연구로 들어가서, 그 말씀을 통하여 자아를 죽이고 성령을 풀어놓아(releasing the Holy Spirit), 성령께서 자기에게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하여 성령충만의 체험을 받도록 유도한다. 성경연구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생활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크라스룸에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선명하게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의 확신을 나누며, 말씀을 함께 토론하며, 생활에 적용하며, 그 말씀을 붙잡고 강력하게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을 확실히 체험하게 한다.
둘째로, [다이나믹 제자훈련]에서는 각자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성령의 은사(the Spiritual gifts)를 받도록 하는 훈련이다. 물론 은사를 받는 훈련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라도 사용하지 않고 땅속에 묻어두고(마 25:24-30)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에 의존하여 개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의 은사를 개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하여(행 4:30-31), [다이나믹 제자훈련] 프로그램 중에 "은사개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시간에는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 확장하기 위하여 각종 은사를 간구하는 강력한 기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QT 시간 다음, 제자훈련 마지막 시간에 갖는다. 힘과 은사와 능력을 받아 가지고 생활과 전도사역 현장으로 뛰어들게 하기 위함이다. 이 시간은 찬양과 강력한 기도로 은사를 받기 위한 "은사의 시간"이다. "주여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낮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물론,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 병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쫓는 능력,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등 갖가지 신령한 은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방법으로, 복음사역에 필요한 것이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이런 신령한 은사에만 치우쳐서는 안되고, 앞서 언급한대로 말씀의 능력에 따라 주는 믿음의 표적들로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역사로 복음은 힘있게 전파되어 사단에게 매인 자들을 풀어주고, 병든자들을 치료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한다. 이런 사역을 현대의 용어로 "치유사역" 혹은 "치유목회"(healing ministry)라고 한다. 과거의 기성교회들은 이 문제를 무시하고, 심지어 신비주의(mysticism)라고 타부시 해왔지만, 1900년 후반에들어 이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본서 제4장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듯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운동을 교회성장학에서는 "오순절 운동" (Pentecostal movement)이라고 하며, 은사를 통한 치유의 운동를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라고 부른다. 은사의 사역을 포함한 인간을 변화시키시는 역사 전반을 성령의 역사로 지칭하나, 좀더 구체적으로 구별하자면,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주로 심령변화를 위한 역사로 지칭되며, 카리스마 성령의 역사는 치유와 표적의 역사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이 둘은 같은 성령으로 나타나는 역사이다. 모든 은사가 다 같은 성령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고전 12: 4).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전자를 "제1의 물결"(first wave), 그리고 후자를 "제2의 물결"(second wave)이라고 규정하고, 현대 교회에서 "제3의 물결"(third wave)인 "복음주의 성령운동"(evangelical Spiritual movement)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현대목회는 제1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제2의 물결인 은사운동으로만 일관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전과 같이 무미건조하게 말씀 말씀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건전한 복음주의 운동이 능력있게 전개되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이 제1, 제2의 성령의 사역을 복음주의에서 수용해서 실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강력한 복음주의 성령운동을 할 수 있는, 제1, 제2의 물결 뿐만 아니라 "제3의 물결" 즉 제3의 파도"(third wave)까지 능숙하게 탈 수 있는 성령의 "서핑선수"(excellent spiritual surfer)가 되어야 현대 목회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사역으로서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 오순절 운동의 역사와 카리스마적인 은사의 역사를 능력있게 사용하여 각 지교회를 섬기고, 더 나가서 전세계에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는 일꾼들을 양육하려는 것이 [다이나밐 제자훈련]의 의도이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단순히 교리나 생활윤리만 가르치는 훈련이 아니다. 제자들을 직접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훈련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내보내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씀의 권능, 병고치는 능력, 사탄을 정복하는 능력을 훈련 현장에서 받게 해서 보내셨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와서 병자가 낫고, 사단이 굴복하더라고 신나게 보고했다(눅 10:17-18).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바로 이 점을 중요시하여, 훈련 현장인 크라스룸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고 은사를 강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한 강력한 "은사개발의 시간"을 갖는다. 예수님은 직접 능력과 은사를 주셨지만 우리는 "은사의 시간"에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된다. 훈련 현장에서 받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생활과 사역 현장에 뛰어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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