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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다리미로…” 5살 그 아이 지금은

맑은샘77 2013. 1. 12. 19:21

“엄마가 다리미로…” 5살 그 아이 지금은

죽음의 문턱 5세 아이 당당한 성인으로 홀로서기
1998년 ‘영훈 남매 사건’ 당사자, 학대 악몽 딛고 취업해 자립
동아일보 | 입력 2013.01.12 09:21 | 수정 2013.01.12 15:43

[동아닷컴]

우리나라에서 아동학대 문제가 부각된 것은 1998년 4월 27일 한 시민 제보로 SBS TV'추적 사건과 사람들-아동학대, 아물지 않는 영혼의 상처'가 '영훈(가명) 남매 사건'을 공개하면서부터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00년 아동복지법을 개정해 아동학대에 대한 정의뿐 아니라 처벌 근거, 관련 기관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98년 당시 경기 의왕시에 살던 영훈 남매의 친아버지와 새엄마는 딸을 굶겨 죽인 뒤 집 앞마당에 묻고, 5세인 영훈을 학대했다. 부부는 각각 자신의 아이 둘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부인이 자신의 딸들은 제대로 키웠지만 남편이 데려온 아이들에게는 몹쓸 짓을 했던 것이다. 영훈의 발등에는 플라스틱 빗의 뾰족한 부분으로 찔러 총알이 통과한 것 같은 자국이 생겼고, 등에는 다리미로 지진 흔적도 있었다. 마당에서 발견한 여아 시체를 부검한 수사기관은 아이가 굶어서 죽었다고 발표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부부는 15년형을 선고받았고, 새엄마는 교도소에서 아기를 출산했다.

같은 해 '추적 사건과 사람들'이 소개한 후일담은 다음과 같다.

"아이 외상은 거의 회복단계에 있고, 몸무게도 7kg 늘어난 20kg으로 또래 몸무게를 거의 따라잡았다. 그러나 아이는 친아버지가 살해한 누나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아직도 끊임없이 과자를 찾는다. 소아정신과 치료 결과, 대인기피 증세와 자폐 증세가 있음이 발견됐다. 아이 친엄마 이모(34) 씨는 정신지체자이기 때문에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친척들은 모두 형편이 어려워 아이가 갈 곳이 마땅치 않다."

우울증 약 2010년 끊어

사건이 알려지고 15년. 올해 성인이 된 영훈(20)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가 엄마라고 부르는 김정미(43) 굿네이버스 경기도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을 만나 영훈의 성장기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어봤다. 김 관장은 "영훈이가 어릴 적 언론에 노출되면서 2차 피해를 심하게 당했기 때문에 인터뷰를 주선할 수 없지만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오는 차원에서 아이의 사연을 소개하겠다"고 밝혔다. 영훈은 김 관장을 통해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공개했다(그림 참조).

영훈은 2012년 일반계 고교를 졸업하고 그 해 11월부터 경기 수원시 아동보호 쉼터(공동생활가정) 부근에서 홀로 산다. 지적장애 3급인 그는 5개월 동안 적응 훈련을 거쳤는데, 남자 자원봉사자와 함께 집 안에 머물면서 새집이란 공간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김 관장을 비롯한 기관 관계자가 수시로 영훈 집을 찾아간다. 학대 아동이 성인이 되면 기관 지원은 끊기지만 영훈은 아동학대의 상징적 인물이라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또한 영훈은 지난해 6월부터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통해 구직활동을 시작해 10월 첫 출근을 했다. 한 업체에 정규사원으로 채용돼 반일 동안 단순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 그는 출퇴근하는 데 4시간이 걸리고 급여도 넉넉지 않아 힘에 부쳐 한다. 그래도 자동차운전면허 필기시험을 1년 동안 준비해 통과한 경험을 떠올리며 긍정적으로 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복용하던 우울증 약은 2010년에 끊었고 집단 심리치료는 2011년 마쳤다.

현재는 또래와 다를 게 없지만, 1998년 처음 복지기관 사람들과 만났을 당시 영훈은 '작은 원숭이' 같았다. 병원에 갔는데, 오랫동안 씻지 않아 때가 많은 데다 피부가 트고 많이 상해 드레싱을 하자 무척 따가워했다. 가정교육을 받지 않아 또래가 다 아는 호랑이, 사자 같은 동물도 몰랐다. 위액은 없었다. 의사는 "2주 정도 굶었으며 조금만 늦게 발견했다면 사망했을 것"이라면서 "친어머니가 지적장애인이라는 선천적 요인과 제때 교육받지 못한 후천적 요인이 복합 작용해 지적장애 증상을 보인다"고 진단했다.

당시 영훈을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수소문해 찾은 친엄마는 지인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는데 아이 존재만 알 뿐 애착이 없었다. 또한 학대 아동을 보호할 만한 시설이 없던 터라 결국 영훈은 젊은 사회복지사 부부에게 위탁됐다. 하지만 영훈의 생활상이 여과 없이 방송되면서 이를 본 어린이집 친구들이 그를 놀렸고, 감정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결국 젊은 부부가 영훈을 감당하지 못하자 1년 만에 중년부부에게 다시 위탁됐다. 영훈은 이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같은 이유로 돌아와 2001년부터 학대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쉼터의 첫 입소자가 돼 아이들 6, 7명과 함께 살았다.





영훈(가명)이 자신의 학대 경험을 표현한 그림들. 1. 학대 경험과 관련해 처음으로 그린 그림으로 "엄마와 아빠가 누나를 굶기면서

비웃고 놀려서 정말 슬펐다. 내가 몰래 밥을 주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고 적혀 있다. 2. 누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그림으로 "누나 나 도와주고 잘 해주어서 고마웠어. 누나는 나한테 몰래 밥 주다가 엄마한테 죽을 뻔했다. 다리미가 등에

다서 타죽는 줄 알았지만 나 많이 나아졌어. 안녕. 끝"이라고 쓰여 있다. 3. 학대 행위자인 새엄마에게 쓴 편지 그림이다.

두 번 위탁 끝에 쉼터에 정착

영훈은 음악, 놀이, 미술 등 심리치료를 꾸준히 받았는데도 자기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한 자원봉사자가 일주일에 한 번 6년간 꼬박꼬박 찾아왔는데,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외면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 5년이 지난 11세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옷을 들추고 등에 다리미를 댔다. 정말 뜨거워서 타 죽는 줄 알았다. 지도 한번 당해보라지"라고 말하며 상처를 드러냈다. 그리고 12세에는 "내가 너무 굶어서 누나가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고마웠는데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해. 누나가 나를 도와주려다가 그렇게 돼서 너무 미안해"라며 누나에게 죄책감을 보였다.

이 일을 계기로 피해의식과 죄의식이 조금씩 줄어든 듯했다. 이후 영훈은 집단 심리치료는 계속 받았지만 개인 심리치료는 중단했다. 한편 쉼터에서 가족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진 친구를 자발적으로 도와주면서 자신보다 더한 아픔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듯했고, 자신의 상처를 객관화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어린 시절 경험을 떠올리며 힘들어 했다. 어릴 적 복용하던 우울증 약도 다시 먹었다. 학년 초만 되면 낯선 환경이 부담스러워 결석하기 일쑤였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파지는 '신체화 증상'도 나타났다. 감정조절 능력을 배우지 못해 폭력성을 보이다가 울음으로 감정을 표현했고, 가출을 반복했다.

다행히 영훈은 쉼터에서 생활지도원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올바른 성인 남자 상을 보고 자라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또래처럼 평범하게 산다. 김 관장은 "학대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아이도 주변에서 꾸준히 사랑으로 보듬어주면 이 아이처럼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랄 수 있다"면서 아동학대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