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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마음 속 파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 신경숙

맑은샘77 2012. 12. 21. 11:53

 제 마음 속 파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 신경숙

시인 남진우가 찍은 소설가 신경숙

제 마음속에 일어난 이 파문을 당신께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과연 설명이 가능한 파문인지조차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문을 몰라 하는 당신이 거기 있으니, 저는 당신께 어떻게든 제 마음을 전해 드려야지요. 지금 제 마음은 어쩌면 당신께 이해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는 것임을, 그것이 당신에 대한 제 할 일임을 괴롭게 깨닫습니다. 제 표현이 모자라서 이 편지를 다 읽으시고도 제 마음이 야속하시면 ... 그러면 또 어떡해야 하나 ......

강물은 ...... 강물은, 늘 ...... 늘, 흐르지만, 그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어찌된 셈인지 제게는 그 강과 함께 흐르기로 마음먹는 일이 제 심연의 물을 퍼 주고야 생긴 일임을, 아니에요,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니지요, 다만, 어떻게 하더라도 제게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남는다는 걸 알아 주시 ......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 여자...... 그 여자 얘길 당신에게 해야겠어요.

신경숙이라는 이름이 독자에게, 그리고 한국현대문학사에 영원히 새겨지게 한 작품 ‘풍금이 있던 자리’의 한 대목이다. 1985년에 ‘겨울우화’로 등단한 이 작가의 이십여 년 작품 세계를, 과감하게 줄여서 말해도 된다면, 나는 그 긴 세월이 ‘풍금이 있던 자리’의 화법으로부터 악착같이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여전히 그 동심원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 1월 12일은, 소설가 신경숙이 1963년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날이다.

신경숙의 대표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위에 인용한 문장으로 한정하여 말하건대, 신경숙은 꽤 오랫동안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개인적 관계들을 소재로 삼아 왔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사소설’이라는 틀에 갇히는 결과를 빚기도 했으나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개인’과 ‘타자’의 관계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인 바 있으므로 그것은 밀폐된 회로 안에서 쳇바퀴를 돌리는 독백이 아니라 절반 이상은 ‘당대성’을 지닌 강력한 담화가 되기도 했다. ‘외침’이 아니라 ‘속삭임’이 필요할 때에 신경숙은 가만히 듣고 있으면(실은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여 숨이 멎을 듯한 대화를 걸어왔다.


신경숙의 독백은, 문학사의 전례로 보면 흡사 졸로프트와 같은 오정희의 빛나는 단편들 이래로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개인 감성의 전면화가 된다. 이 전면화는 그러나 소설의 화법에서는 망설임의 양식으로 나타난다. 불투명한 시공간, 모호한 시제, 안개가 낀 듯한 묘사들, 여러 차례 반복되는 말줄임표, ‘설명이 가능한 파문인지조차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진술하는 서간체 특유의 망설임 등으로 드러나면서, 가히 집단적으로 불면증이나 실어증 상태에 빠져버린 저 90년대의 집합적 감성을 대표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비록 옥타브는 낮을지라도, 적어도 90년대에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한번 물고 나서 간신히 내뱉는 절실한 외침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은 관계의 모호성과 절망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소설로 은서라는 여자 주인공과 두 남자 즉 ‘완’과 ‘세’ 사이의 관계, 즉 간신히 겹쳐지는가 싶더니 곧 어긋나고 마는 별리를 그리고 있다. 세 사람은 서로의 기대를 자주 배반한다. 서로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모를까, 오히려 세 사람은 깍지 낀 손가락들처럼 맺어진 관계들이다. 이해와 존중이 전혀 없는 관계도 아니다. 그럼에도 권유와 화해 보다는 파국으로 향해 저마다 등을 돌리고 만다.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어떻게 하더라도 제게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남는다”고 썼거니와 이 작품의 인물들도 그 말을 서로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자전 기록에 가까운 <외딴 방>

그리고 단편 ‘부석사’가 있다. 지난 2000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게재되었고 이 작품으로 2001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 짧은 작품이 신경숙 작품 세계의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한 것으로 그의 모든 장점과 단점에 동시에 담겨 있는, 신중히 검토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 작품은 여자와 남자의 아픈 상처에 대한 낮은 목소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등단 이후 줄곧 써온 작품의 연속에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신경숙은 이전 작품과 달리 세부 디테일에 대한 세세한 정보까지 제공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렇게 할수록 그 인물이나 배경이 흐릿해지는 가외의 효과(?)를 낳는다.

한 예로, 이 작품 속의 남자는 랜드로바를 신는다. 이것이 가죽으로 된 간편화를 뜻하는 것인지 ‘랜드로버’라는 브랜드를 뜻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자 쪽으로 넘어가면 좀더 분명한 정보들이 제시된다. 여자는 '시사저널', '한겨레21', '주간동아', '스크린', '싸이언스', 한국판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을 정기 구독한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아내로, 투병 끝에 일찍 타계한 재클린 뒤 프레의 음반 '콜 니드라이'를 자주 듣는다.

이런 디테일은, 그러나 그것이 그 무렵의 평균적인, 또는 진부한 코스튬과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랜드로버를 신거나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를 듣는 남녀 주인공의 정황은 오히려 세밀화 될수록 익명화된다. 아마도 그런 역효과(?)를 노렸을 것인데,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애인은 ‘p'이고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는 ’k'이다. 각각 ‘p’와 ‘k' 때문에 상처를 입은, 같은 오피스텔에 입주해 사는 여자와 남자는 어느날 부석사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신경숙 소설은,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그때까지 써온 작품 세계의 한 정점,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내리막길이 되는 지점에 서게 된다. 부석사로 가는 여자와 남자. 길을 잃고 만다. 길을 떠나자 여행이 끝나버리는, 그런데 길을 잃은 듯하였으나 마음 속에 새 길이 생기는, 그런 상투성의 내리막길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신경숙은 '부석사'로 이상문학상을 탔다

조금 ‘치사한’ 얘기를 하자면, 이 소설이 2000년에 쓰여졌고, 작품의 시간대가 ‘현재’임을 감안한다면, 자가 운전을 해야 하는 도시 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학력과 사회 경험을 가진 소설 속의 남녀가 부석사로 잘 달리다가 어이없이 ‘길을 잃고 만다’는 것은 다분히 소설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90년대 초에 이미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인하여 상당수 지식계층 독자들에게 부석사는 익숙한 지명이 되었고, 지자체의 노력에 의하여, 경북 풍기나 영주에 이르면 그 쪽 일대의 거의 모든 표지판이 ‘부석사’를 가리키고 있어서, 비록 밤길이라 하더라도 부석사로 가는 길은 거의 일방통행에 가깝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것은 소설외적인 언급이고, 다시 소설로 들어간다면, 얼마든지 길을 읽을 수는 있는데, 정작 문제는 ‘길을 잃자 곧장 마음 속에 새 길이 열렸다’는 식의 감정 투사에 있다. 이것이 신경숙 특유의 내면적 글쓰기의 한 방식이기는 해도 그것을 십여 년 지속했다는 점에서, 작품 속의 상황이나 인물에 대하여 신경숙은 매우 소극적인 샅바 싸움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쉽게 길을 잃기도 어렵고, 또 그런 상황에서 그토록 쉽게 마음 속의 새 길을 얻는 것도 쉽지 않은데, 조금은 안이한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

신경숙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 이전과는 다른 소재와 형식의 돌파구를 열어보고자 한 것 또한 ‘부석사’라는 한 정점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거의 처음으로 역사 속으로 걸어가 본 장편 소설 <리진>이 얼마 안 되어 연재되고 또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신경숙 작가의 집필실 (사진 <작가의 방> (서해문집)

최근의 일로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를 출간하였고 극심한 출판계 불황에도 불구하고 20여 만 부를 넘기는 기록으로 작가로서의 명망이 여전함을 보여줬다. ‘엄마’가 실종된 뒤에야 가족들이 저마다의 기억을 되짚어 가며 엄마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설인데, 잔잔하면서도 뜨겁다. 신경숙 문장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다만 신경숙 역시 ‘착한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우려도 함께 남겨 놓았다.

이 소설에 대한 어느 인터뷰에서 신경숙은 “인간은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태어날 수도, 성장할 수도, 생활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존재 아닌가”라고 대답한 적 있다. 틀린 말은 결코 아니지만,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발언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상투적이다. 신경숙은, 가족에 대하여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남이 보고 있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반응을 보인 적이 있는데, 그것이 역설이며 또한 그 역설의 시선으로 오늘날의 가족 위기와 해체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

신경숙은 ‘부석사’ 이후, 꽤 오랫동안 자신이 머물렀던 ‘외딴 방’에서 걸어 나와 역사도 만나고 풍물도 살펴보고 신소재도 만져보고 화법도 다양하게 어루만져 보았다. 그런 점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풍부한 감성으로 상처를 어루만지고 따뜻하게 이야기를 빚어내는 ‘착한 소설’의 길이 한쪽에 있고, 다른 쪽에는 이 부박한 시대의 영혼의 위기를 노련한 외과의사처럼 좀더 근원적으로 파헤쳐보는 길이 있다.

신경숙이라면, 오래 전에 “제 마음속에 일어난 이 파문을 당신께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신경숙이라면, ‘두루 원만하고 착한’ 길보다 환부 깊숙이 좀더 메스를 들이대는 작품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을 기대한다.


어느 소설가의 내적 성장
외딴방 |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신경숙은 1963년의 오늘, 1월 12일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셋이 있고 아래로 동생 둘이 있는 형제지간의 장녀로 성장했다. 정읍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신경숙은 1978년에 큰오빠가 있는 서울로 올라오게 되는데, 이 예민한 감성의 사춘기 소녀가 ‘7080’의 한 시대를 보내면서 겪게 되는 내상의 일들은 1995년 작 장편소설 <외딴 방>에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신경숙의 서울 생활은, <외딴 방>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가난의 나날이었다. 그녀는 직업훈련원을 거쳐 구로공단에 취직하였다가 영등포여고 야간부 산업체특별학급을 다녔으며 그 과정에서 그 시대만의 각별한 상흔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후 신경숙은 서울예대 문창과로 진학하여 1984년에 졸업하였고 그 이듬해에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겨울우화’로 등단하였다. 이력을 정리하기 위하여 소설의 흔적을 끌어왔지만 이 소설 <외딴 방> 그 자체를 이력서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세상으로 열린 문을 계속 닫으려고 하는 어느 여린 영혼이 어떻게 삶의 속절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아름다움에 동경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낼 수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로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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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단편 미학
종소리 |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신경숙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2001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부석사’도 실려 있다. 어느 쪽을 펴더라도, 아 신경숙! 할 만큼 그만의 독특한 문제, 아스라이 펼쳐지는 정경들, 저녁 어스름과 같은 미묘한 시간대, 그 사이에 점묘법으로 그렸으되 그 점들이 서로 엉기지 못하고 있는 인물들의 짙은 그림자가 곳곳에 보이는 작품집이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관계들이지만 섣불리 손을 내어뻗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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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위기와 모성
엄마를 부탁해 | 신경숙 지음 | 창비

이 소설에 대하여, 직접 신경숙의 칼럼 한 대목을 옮기는 게 나을 것 같다. 신경숙은 동아일보 ‘살며 생각하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에 이 소설의 제목은 ‘어머니를 부탁해’였다. 이미 수년 전에 쓰려다가 작품이 풀리지 않아 아직 쓸 때가 아닌가 보다 해서 다른 작품으로 건너간 전력도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에 계간지에 연재를 시작하기로 해놓고도 무엇인지가 가로막아 세 번을 펑크낸 뒤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글이 풀리기 시작한 계기도 엄마라는 말 때문이었다. 커다란 장벽을 밀어내며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첫 문장이 어느날 내게로 왔다. 그로 인해 제목도 ‘엄마를 부탁해’로 수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런 것 정도는 물어봐도 될 만큼은 가까운 일곱 사람에게 동시에 문자를 보내봤다. ‘엄마를 부탁해’가 좋은가, ‘어머니를 부탁해’가 좋은가, 하고. 놀랍게도 일곱 사람 모두가 엄마를 택했다. 그걸 토대로 어머니를 엄마로 고치는 순간 닫힌 문을 활짝 열어젖힌 듯 이야기들이 스스로 정렬되며 마구마구 솟아났다.

출처 : YES 행복연구소(행복,폭소,웃음,갱년기)
글쓴이 : 매력있는gir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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