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순종주의자
나도 천성이 순종적이어서 나는 목회도 될 수 있는 한 선배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특히 군목으로 활동할 때는 독특한 군대문화에 맞게 교회를 운영해 나갔던 것 같다. 더욱이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군목 세미나에 초청되어 오는 강사들이 대개가 이른바 대교회의 ‘스타급’ 목회자들이었던 관계로 나는 그 분들이 가르치고 조언하는 대로 목회를 하려고 애를 썼다. 어느 강사가 새벽기도로 목회의 승부를 걸었다고 하면 나도 즉시 그 일을 실행했고, 주일 공예배 시간에 통성기도만 시켜도 교회가 부흥된다고 역설하는 어느 강사의 말에 감동을 받고는 즉시 순종하기도 하였다. 심방이면 심방, 금식이면 금식, 성경공부면 성경공부, 기도면 기도……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분야는 다름아닌 <십일조>였다. 다른 목회자들도 다 그러하듯이 나도 월 20만원 사례비를 받던 전도사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빼먹은 적이 없고 군대에서 목회할 때는 십의 2내지 3조뿐 아니라 매주 감사헌금도 작정하여 드리는 순종의 대명사가 된 것은 모두 강단에서 선포된 선배 목회자들의 말씀에 근거한 때문이었다.
어느 해였던가, 지금은 원로가 되신 어느 서울 강남지역 대교회 담임목회자께서 쓰신 설교집을 읽다가 나는 큰 자극을 받았다. 그는 말라기 3장 8절로 12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도둑놈으로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더욱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평소 성공적인 목회의 푯대로까지 여긴 적이 있는 그 분의 인상 깊은 설교에 도전을 받은 나는 즉시 십일조를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강단에서 ‘돈’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은 나였으나 우리 교인들을 도둑놈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나’ 싶어서 용기를 내어 입에 불을 뿜었던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이라는 말라기 말씀 그리고 십일조 한 번 떼먹었더니 네 배의 손해를 봤다는 어느 목회자의 간증, 십일조로 사업이 번창해졌다는 어느 기업인의 간증, 오랜 동안 자녀를 보지 못했는데 십일조를 하면서 작정 기도한 후 쌍둥이를 얻었다는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고 ‘십일조 했는데 물질적으로 손해를 본 사람 있다면 나중에 나한테 오세요. 내가 다 변상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확신에 차서 설교하고 가르친 덕분인지 나는 대체로 어려운 군대교회에서 11년 간 목회하면서도 물질 때문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어본 기억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인근 학교에 교회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불한 적도 있고 구제 사업에도 적잖은 일익을 감당한 경우도 있었다. 넉넉한 교회 재정 탓에 ‘원 없이’ 활동해본 기억도 많은 것 같다.
런던에서의 충격
런던으로 건너 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퇴직금과 기타 수입으로 마련한 3백 만원의 십일조를 어느 지인께서 개척하신 교회에 기쁜 마음으로 드린 일이었다. 이처럼 나는 십일조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소신과 확신에 찼었고 십 수 년 동안 몸소 실천한 바 있는 신앙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국교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나는 뜻하지 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은 이미 개척교회에다 드린 십일조를 뺀 나머지였으므로 한동안 하지 않았지만 다시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에
내가 재정을 담당하는 성도에게 십일조 봉투를 달라고 요청하자
“십일조 봉투는 따로 없는 데요” 하는 게 아닌가!
“그럼 이 교회 성도들은 십일조 안 해요?” 라고 물으니
“몇몇 하시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하지 않습니다.”
그 분과 대화하면서 가졌던 나의 생각은 ‘도대체 십일조를 안 하다니! 무슨 신앙이 이래?
이러니 영국 교회가 죽어가는 게지!’ 였다.
또 십일조도 안 가르치는 진보적인 마틴 목사 밑에서 내가 무슨 신앙을 배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교회를 옮길까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영국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학교 중의 하나인 런던신학교(Lond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할 때였다. 그 신학교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설교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2년 과정의 신학교인데 영국에서는 어쩌면 가장 보수적인 분위기의 신학교가 아닌가 한다.
어느 날 이 학교 학장이신 필립 입슨(Philip H Eveson)께서 강의하시는 구약학 시간에 뜻밖에도 십일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장로교 합동측 소속의 어느 한국인 목사가 십일조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그처럼 보수적이고 평소에 자상하며 친절하신 그 학장께서 다소 근엄한 얼굴로
‘한국 교회는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어요.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비성서적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십일조 보다 더한 것도 드릴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 문제를 정리했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그는 한국 교회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졌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분이다.
충격에 휩싸인 내가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나이젤(Nigel)이라는 매우 모범적인 영국인 학생에게
“왜 너희들은 십일조 안 해?’라고 물으니
“십일조는 율법 시대에 행해진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의무적으로 행할 이유가 없어진 때문이지”
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막 신학에 입문한 평신도 젊은이였다.
내가 14년 간 목회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던 십일조! ‘하나님께 좀 더 드려야 하는 데’ 싶어 언제나 올려서 넉넉히 드렸던 그 십일조! 하나님께는 헌 것이 아닌 새 것으로 드려야 한다는 어느 교수님의 조언을 좇아 은행에 근무 중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신권으로 교환하기까지 했던 나!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거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교회들에서는 더 이상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까지 하며 시행하고 있지 않은데 한국에서는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까지 가르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내가 그 때 겪었던 정신적 충격은 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내 신앙의 터전이 뿌리 채 뽑혀나갈 듯 심하게 영적인 몸살을 앓은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실을 찾아서
인터넷으로 또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찾으니 역시 한국 것과 영국 것 사이에는 논리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논문들은 여전히 십일조를 유지 보존하는 내용인 반면 영국과 미국 학자들이 쓴 글들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다루어 보는 것이 유익할 듯싶다. 우선 한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십일조의 근거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구약의 근거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드린 십일조 (창 14:18-20), 야곱의 서원과 십일조 (창 28:20-2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성구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언급이 없다가 아모스 4장 4절에 잠시 언급이 되며,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느헤미야와 말라기 시대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가장 빈번히 가르쳐지고 설교되는 본문은 다름아닌 <말라기>이다. 말라기는 부흥회나 이른바 각종 축복성회, 헌신예배, 간증 때 가장 널리 인용되고 사랑 받는 본문이기도 하며 부흥사들의 부흥회 최대 승부처(?)가 되기도 한다. 이 말라기를 들으면 이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교인들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며 믿음 없는 신자가 되며, 교회 직분이나 각종 봉사활동 방면에서도 늘 찬밥 신세가 되고 만다. 십일조 안 하는 사람이 장로나 권사 혹은 기관장이 될 수 있을까? 혹시 되었더라고 큰 소리 칠 입장에 설 수 없는 게 우리의 실정이 아닌가!
나는 십일조에 대한 한국적 입장은 비교적 위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다들 너무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 거의 언급이 안되거나 소개되고 있지 않은 부분들 그래서 더 이상 십일조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되기 어려운 것들만 핵심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첫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십일조는 그 이름만 관련이 있지 실제로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에 의하면 십일조는 반드시 “땅”에서 난 것, 씨나 농작물, 나무에서 난 열매 등, 가축 들에서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 (레 27:30-33; 민 18:20-32; 신 14:22-29). 하지만 멜기세댁에게 드린 아브라함의 것은 자신의 소유에서 거둔 수확물이 아니라 전리품이며 나머지 10분의 9도 아브라함이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회적인 사건이며 오늘날 매달 정기적으로 드리도록 요구되는 십일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전리품은 율법시대에 십일조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창세기 본문의 핵심은 십일조에 있기보다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에 있다. 제사장은 모두 아론의 반차를 좇는 레위 족속 중에서 임명되지만 예수님은 레위 족이 아닌 유다 족속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레위와 무관한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율법을 뛰어 넘어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이다 (히 7장 참조).
둘째,
야곱의 사례 (창 28:20-22) 또한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십일조의 근거가 되기가 어렵다. 이스라엘은 먼저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야곱이 이 기도를 드린 시점은 자신이 아직 아무런 소유를 가지지 않은 때였고 그 후 실제로 십일조를 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 그가 <만약>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만약> 내가 가는 길을 지키시고, <만약> 먹을 빵과 입을 옷을 주셔서 ‘내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시고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의 기둥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것 중에서 드리는 것이 십일조이지 아직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요구하는 것은 십일조의 원리가 아니다.
셋째,
흔히 오해되는 것은 교회가 성전으로, 목회자가 제사장으로, 십일조와 헌금이 제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율법에 의해 제사가 행해졌던 성전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사장과 제물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는 것이다. 현대의 목회자들 중에 레위 지파 출신이 어디에 있기에 그를 제사장처럼 간주하는가? 더욱이 가장 쉽게 간과되는 것 중에 하나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성도들은 결단코 ‘돈’을 십일조로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돈은 십일조 품목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오직 돈만을 십일조로 드리고 있다. 그것도 마치 제물을 드리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만약 구약의 좋은 전통을 오늘날에도 계승해야 한다면 구약 성도들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할례’는 왜 시행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가? 다른 수 많은 구약적 요소들은 재해석을 통해서 시행하지 않으면서 유독 ‘돈’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석도 개입시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성경은 기독교인 중에서 십일조를 한 사례를 들지 않고 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부단한 투쟁을 하였고 (행 15), 초대교회에서 십일조를 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기독교에서 번제, 돌로 쳐죽임, 회당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구약적인 십일조는 근거가 희박하다.
넷째,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제사가 있던 시절에 십일조는 누구나가 다 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 들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은 십일조 의무에서 면제 받았다. 따라서 목수였던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심지어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다.
다섯째,
말라기 3장의 핵심은 십일조를 드렸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드림’ 뒤에 있는 마음과 심령 즉 영적인 태도와 상태에 대한 책망이다. 그들의 죄악 즉 위선적이며 형식적인 신앙상태를 꾸짖는 것이 핵심이지 십일조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라기가 경고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영적 소경, 절름발이, 병자들이 된 당시 유대 성도들의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제사인 기쁨의 제사(시26:6), 의의 제사(시4:5), 감사의 제사(시107:22) 및 즐거움의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촉구하고자 한 것이 ‘말라기’의 보다 직접적인 메시지이다
여섯째,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오늘날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십일조는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에 최초로 나타난다. 샤를 마뉴 대제 (A.D. 742-814, 서로마 제국 황제)의 참사회에서 국가법으로 제정되었는데 주교, 성직자, 가난한 자, 건물 유지 및 존속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내용에 변화가 생겼고 농산물과 가축이 아닌 장사한 것, 점유, 봉급 등에서 발생한 수입을 ‘돈’의 형태로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후 마침내 모든 종류의 소득을 포함하여 십일조를 거두는 것으로 적용 범위가 확장이 되었다.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정말 오랜 동안 십일조의 효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십일조가 축복이냐 저주냐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내가 잘 아는 어느 장로 가정은 자신의 돈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부자였다. 그들은 새벽기도, 십일조, 봉사, 충성, 헌신……십일조는 출석 교회뿐 아니라 새벽마다 나가는 집 근처 교회에도 드리는 거부였다. 그 부부가 물질로 보인 헌신은 한국 교회 어디에 내놓아도 귀감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내외는 최근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렸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건강마저도 치유 불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가정이 겪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은 ‘욥’의 그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인데 나는 더 이상 십일조 신화를 의지할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십일조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아내와 나는 매주 일정한 액수의 헌금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교회의 필요 때문이지 나의 유익 혹은 기복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의 구조적 특성상 앞으로 당분간은 지속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풍토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럽 교회가 걸어간 이 길을 한국 교회도 반드시 걷게 될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로 혼란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내리게 된 결론은 이러하다.
첫째,
성서적인 근거가 미약한 십일조 제도를 주술화 혹은 미신화 시키려 들지 말고 교회 구성원들이 정직한 마음과 자세로 재정 문제에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합목적적으로 운영하면 굳이 부흥회니 뭐니 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둘째,
십일조를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직분 및 직책 수여의 명목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더 이상 십일조를 축복과 저주의 이분법 속에 몰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는다고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영국 교회 신자들 중에 남아날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십일조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넷째,
십일조 헌금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만 고취시키려 들지 말고 과연 그 십일조가 성경의 본래 취지대로 고아, 과부, 가난한 자, 나그네, 장애인 들을 위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섯째, 영국 교회는 재정을 목회자나 주요 직책자들이 임의로 사용할 수 없도록 매우 엄격한 감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교회가 시급히 이런 제도를 도입하여 정착시켜나가야 할 것 같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이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기복신앙이나 주술신앙 혹은 저주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십일조와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범사에 감사하는 심정으로 또한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분량에 따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신완식/런던 트리니티 교회 담임목사/'목사가 새벽기도를 안해?' 의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