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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전받는 목사 왕국 , 양들의 반격

맑은샘77 2012. 4. 26. 14:26

도전받는 목사 왕국
양들의 반격
입력 : 2011년 12월 16일 (금) 08:54:40 / 최종편집 : 2011년 12월 17일 (토) 23:59:22 [조회수 : 1607] 신성남canavillage@yahoo.com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교회 공금 32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가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됐습니다. 분당중앙교회 최종천 목사는 재정 문제와 여신도와의 추문 등으로 교인들과 크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강북제일교회 당회는 황형택 목사가 경력을 위조했다며 총회 재판국에 소송을 제기하여 목사 안수 무효 판결을 받았습니다. 또한, 충현교회 유지재단 김규석 이사는 김성관 담임목사를 교회 재산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이 모두가 소위 보수 정통 교단이라고 자랑하던 수도권 대형 교회들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입니다.

서두부터 이렇게 거룩한 목사님들 명단을 장황하게 나열한 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개혁 교회의 수장이 되어 신도들 위에 군림하던 담임목사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결국, 올 것이 온 느낌입니다. 만일 요즘 한국교회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교권 독재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목회 비리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쓰는 부끄러운 교회사는 오늘도 또다시 반복됩니다. 인간의 죄성은 중세 교회 이후에도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을 조롱하는 목회 비리

목회 비리로 말미암은 갈등은 대개 목사의 독주와 이를 저지하려는 일부 신도들 간의 내분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의 예외 없이 교인과 교인 간의 내전으로 확전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교권을 과도하게 독점한 담임목사들은 교회 자산이나 재정만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까지도 사병화하여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재활용합니다.

그런데 교인들 간의 싸움은 확실히 뭐가 달라도 좀 다릅니다. 싸워도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합심하여 기도하며 싸웁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 싸움이 매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좁은 통로에서 집사님이 멱살을 잡고, 권사님은 욕을 합니다. 장로님은 밀고 목사님은 당깁니다. 정말 아이들 보기에 민망한 풍경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함부로 비웃기 어렵습니다. 쌍방이 서로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임하기 때문에 일단 이 판에 한번 말려들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서 '저런 파렴치한 사람들이 어떻게 목사일 수가 있는가' 하는 탄식을 많이 듣습니다. 아주 당연한 상식의 부재에 모두가 깊이 좌절하는 것입니다. 아마 단일 직종으로 한국에서 부정과 성추행이 가장 심한 직업 중의 하나가 목사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중대형 교회의 세습 비율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말세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상식이 무시당하고 있는 세대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수 목사가 무조건 다 경건한 시대가 아니라, 소수의 경건한 사람만이 참된 목사인 시대입니다.


기복 신앙에 침수된 한국교회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은 교회 분쟁의 일차적 원인 제공자는 담임목사입니다. 실제로 교회 내에서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의 부정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문제가 교회 내분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목사는 크게 다릅니다. 담임목사가 변절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대형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수십 년 동안 목회를 잘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부에 깊은 균열이 있었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분들이 곱게 물러서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목사가 윤리적 책임을 지거나 교회법에 승복하여 스스로 아름답게 퇴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주 부도덕한 행위들이 들통 나도 대부분은 일시적으로 물러서는 척하다가 맹신도들 뒤에 숨어 다시 분쟁을 일으킵니다.

물론 여기에는 교인들의 책임이 매우 큽니다. 한국인의 여러 장점 중의 하나가 '머리가 뛰어나게 좋다'는 것이고, 반면에 단점 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기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잘못 결합하면 극히 우려되는 증상이 생깁니다. 이를 구태여 정의하자면 일종의 '종교적 말단비대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흔한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 금식 기도원, 십일조 강요, 헌금자 공개, 땅 밟기, 구역예배, 총동원 주일 노방전도 등 다양한 활동들이 사실 여러 외국 교회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주 보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한국교회의 열심은 세계 다른 어느 교회도 못 따라옵니다. 여기에는 물론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인 면 역시 심각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신도들의 기복적 욕구를 교묘하게 악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도 중에는 여러 예배나 다양한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금을 잘 바치면 그 결과로 반드시 병을 고치거나 세속적 복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시는 분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성경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기복적 사고는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신앙은 관심과 초점이 주로 세속적 복에 있기 때문에 정작 더욱 중요한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을 경시하거나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적 가치관이 기초부터 변질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무속적이며 미신적으로 숭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목사를 더욱 의식하게 되고 마치 신접한 무당처럼 그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른바 맹신에 이르게 됩니다.

더구나 변절한 목사들은 신도들의 이런 기복적인 약점을 복음으로 바르게 교정하지 않고, 반대로 이를 부추기고 이용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설교는 도리어 신도들의 기복적 입맛을 자극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당연히 이런 목사와 신도들은 서로 아주 찰떡궁합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 불륜 관계가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할 한국교회를 세속의 혼탁한 물속으로 더욱 침수시키고 있습니다.

기복 설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근본적으로는 '신령한 복'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이를 '세속적인 복'으로 격하시키거나 혼합하여 강조하는 데에 있습니다. 만일 세속적인 복이 신자들에게 그리도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면 왜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토록 가난하게 사셨을까요. 오병이어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 생활이 적절한 균형을 가져야 하는데, 사심이 있는 목사는 신도들의 열정을 오도하여 교회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선시킵니다. 물론 이런 불균형한 생활은 신도들이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이 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중심적 생활은 일단 목사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도와 교세를 확장시키고 헌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도들은 목사의 지도를 받고 순응하는 타성이 생겨 자연히 목회 독재의 길을 넓혀 줍니다. 결국, 신도들의 기복적 신앙이 한국교회를 밑뿌리부터 망가트리고 있는 주범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회장직은 다스리는 장로의 직무

전술한 대로 담임목사를 독주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은 역시 기복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신약성경에서는 장로나 집사 그리고 교사와 대등하게 언급된 목사가 홀로 당연직 당회장이 되는 기형적 모순이 오랫동안 방치됐습니다. 이는 교사나 집사가 영구직 당회장이 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과연 목사직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걸까요. 과거 개혁자들은 그 황당한 대리인 행세 좀 집어치우라고 구약의 제사장적 사제직을 폐하고 목사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왜 또다시 캄캄한 중세 교회로 돌아가려 할까요.

이왕 목회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 합니다. 목사는 군림하는 직분이 아니라 단지 가르치고 설교하는 직분입니다. 어떤 근거로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인 목사가 자동으로 교회의 당회장이 되어 교권을 장악하고 교회 사업, 행정, 관리, 재정, 그리고 인사 등 온갖 일에 깊이 관여하여 월권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재벌이나 사기업을 제외한다면, 세상 어느 단체에 이리 심하게 권력을 독점한 직책이 있을까요. 심지어 대통령도 오직 행정부의 수반일 뿐이건만, 한국교회 목사들은 실질적으로 교회 내에서 입법권,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까지 모두 독식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목사 왕국이라는 한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 목사를 중세 교황이나 사이비 교주처럼 수장의 자리에 올려야 합니까. 신약성경을 거꾸로 들고 읽지 않는다면 당회장직은 분명히 '다스리는 장로'의 직무입니다. 당회가 다스리고 관리하는 기관이지 무슨 교육 기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가톨릭 사제보다도 더 과도한 교권을 지닌 직분이 개신교의 담임목사직이 아닌가 합니다. 적어도 어느 사제가 성당을 사유화했다는 말은 별로 들어 본 기억이 없으니까요. 가톨릭의 사제직을 거부하고 만든 개신교의 목사직이 그보다 더욱 극심하게 타락한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신학교에서부터 '목회 기술'보다는 '목회 원칙'을 철저히 가르쳐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목회를 위한 기본적 자질이나 가치관이 바르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슨 잡다한 개론들과 기술만 잔뜩 가르쳐 준다면 결국 지금보다 더 교회를 어지럽히는 종교 업자들로 전락할 것입니다.

아울러 언제부터 교회 직분이 현재처럼 철밥통으로 변질하였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임기가 끝나면 훌훌 털고 떠나는 멋진 목사를 갈수록 보기 어려울까요. 아니 그 임기라는 것이 실제 있기는 한지요.

자기가 좋을 때는 한 교회에 만고강산 눌러앉아 선한 목동 행세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큰 교회에서라도 부르면 기존에 위임받은 양들을 헌 고무신같이 버리고 뱁새처럼 냉큼 떠나는 기회주의적 목사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들은 청빙을 받을 때 대부분 '기도해 보고 답변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응답이란 것이 참으로 신통방통합니다. 수만 명이 넘는 한국교회의 그 많은 충성 되고 신실하신 주의 종들은 '한결같이' 더 큰 교회로만 이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절묘한 기도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기존 교회보다 더 작은 교회로 부임하는 담임목회자를 몇이나 보셨습니까. 한국교회가 비즈니스 논리로 기업화하고 있는 것이 진정 누구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큰 교회 목회만 사역이고 작은 교회 목회는 노역인지요.


양들의 반란

이 글의 목적은 교회의 내분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비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여 바르게 고치고 주님 앞에서 한번 바르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의 갱신을 언급하는 글들에 대해 그 중심은 보지 않고 지엽적인 표현이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아울러 어떤 분들은 "극히 일부를 가지고 전체 교회를 매도하지 마라"고 꾸준히 항변하십니다.

그래서 필자도 작심하고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근거로 극히 일부라고 하십니까. 화성에서 살다가 오셨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더 썩어야 합니까. 발가락이 썩으면 발목마저 다 썩어 절단할 때까지 침묵하고 기다려야 하나요. 아니면 간암에 걸리면 단지 간뿐이니 괜찮다는 것인가요.

이제 양들의 인내가 극한에 도달했습니다. 염소들은 아무나 따르지만, 양들은 다릅니다. 양들은 오직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따릅니다. 그래서 목자를 배신한 거짓 목동들이 아무리 잔 수를 부려도 결국 양들을 속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일부 목사들은 그 명석한 머리를 잘 활용하여 변질과 기만에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우상화하여 세력 키우기에 몰두하고, 복을 받는다고 기만하여 십일조를 챙기고, 또한 모든 신자가 다 '주의 종'이건만 유독 자신들만을 스스로 '교회의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걸레는 아무리 빨고 헹구고 치장을 해도 행주가 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톨릭 신부를 비난하는 일은 보기 드뭅니다. 반면에 개신교 목사를 보면 손사래를 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2010년 '기윤실'이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20.0%)는 가톨릭(41.4)과 불교(33.5)에 밀려 이들 중의 최하위에 머물렀습니다.

목사를 교주나 무당처럼 모시며 복을 구하고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에는 무지한 맹신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여론은 앞으로도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내분도 절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상한 시기입니다. 배도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며 양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단순히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예배당 출입문을 차지하는 무리가 이기는 그런 물리적 싸움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며 마땅히 치러야 할 '영적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롭고 순결하게 이겨야 합니다.

지금은 검을 잡아야 할 때

이제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과 북이 서로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주장하며 싸울 때에,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자'라고 했다지요.

정말 옳은 말입니다. 양들의 반격은 거짓 목동을 거부하고 선한 목자의 편에 서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 복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난한 마음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혁 교회들은 먼저 영구직 당회장을 임기제로 전환하여 장로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회는 목사를 청빙할 때 그 임기를 개교회의 여건에 따라 약 3~6년 정도로 정하고, 그 연임 횟수 역시 1~2회 정도로 엄격히 제한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부도덕한 직분자는 교회법에 따라 엄중히 치리를 하기 바랍니다.

반면에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이미 목사 왕국이 되어 소통이 안 되고 합법적인 치리조차 불가능한 교회라면 더는 몸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떠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까짓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냥 넘겨주십시오. 서구의 많은 교회처럼 한 세대 뒤에는 어차피 그곳에서 텅 빈 공간과 거미줄만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하방에서 소수가 모이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고 따르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입니다.

넓고 평탄한 길은 염소들이 좋아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양들에게 명령하신 길은 오직 '좁은 문'으로 향하는 길뿐입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가 이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시입니다. 불의한 화평에 안주할 때가 아니라,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처럼 주님이 주시는 검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이제 어느 길을 택할지 그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2,000년 전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허름한 말구유에 오셔서 몸소 가난한 삶을 사시고, 마침내는 양들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샬롬!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236#42065

출처 : 플레비언 교회개혁연대
글쓴이 : 주의검을보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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