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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양반 안동교회,백정교회-승동교회

맑은샘77 2010. 9. 24. 15:17
북촌의 양반,백정교회.| ◈----- 문화 유산 순례
둥굴레 조회 66 | 2009.08.26. 21:28 http://cafe.daum.net/cham333/6uPS/425

 

북촌에 승동교회(勝洞敎會)와 안동교회가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7 로마네스크 양식의 뾰족집이 승동교회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이다.
일제시대 3·1운동의 중심지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승동교회의 뿌리는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옛 곤당골의 작은 한옥.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새뮤얼 포먼 무어(S. F. Moore 1860∼1906·한국명 모삼열) 목사가
1893년 시작한 목회이다.
곤당골이란 이름은 조선 선조 때 역관(譯官)을 지낸 홍순언(洪純彦)의 집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파병을 이끌어 낸 공로로 당능군(唐陵君)에 봉해졌고
나라에서 집터를 하사받아 '아흔 아홉간' 집을 짓고
담에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글자를 아로새겼다.
바로 이 '고은담' 때문에 '고은담골'이라 하다가 줄여서 '곤당골'이 되었다.
한문으로 '미장동'(美墻洞)이라 했다가 줄여서 '미동'(美洞)이 되었다.
지금의 을지로 1가, 롯데호텔 부근 일대다.
1893년 봄 곤당골에 한옥을 구입하여 16명으로 시작한 집회 인원은 연말이 되어 43명으로 늘어났다.
무어는 곤당골 교회 안에 학교도 설립했다.
개울 건너 구리개(銅峴, 지금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제중원에도 나가
전도하여 많은 교인을 얻었다.
제중원은 1885년 4월 재동에서 알렌이 시작하였다.
1887년 구리개로 옮겨진 후 헤론, 빈튼에 이어 1893년부터 에비슨(O.R. Avison)이 맡아보았다.
뛰어난 의술로 고종의 '시의'(侍醫)가 되어 궁궐 출입도 하게 된 에비슨은
제중원을 선교 기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제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들이 곤당골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관잣골(貫子洞, 지금의 종로 2가 관철동 일대) 백정 마을에 살던 박성춘(朴成春)이
교회에 나오면서 큰 소란이 일었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때 양반이 예배드리는 곳에
백정이 들어왔으니 조용할리 없었다.
양반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며
박성춘을 다른 교회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무어 목사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양반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개울 건너 홍문섯골(紅門洞, 지금의 삼각동 조흥은행 본점 부근)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따로 예배를 드렸다.
곤당골교회 설립 2년 만인 1895년의 일이다.
무어도 무어지만 박성춘의 입장이 난처했다.
박성춘은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했다.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수원까지 내려가 백정 마을을 돌면서 전도하였다.
"백정을 인간 대접해 주는 종교가 들어왔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따라나섰다.
순식간에 양반교회가 천민교회로 바뀌었다.
홍문섯골로 나간 양반 교인들은 이런 곤당골교회를 보고 첩장(妾丈)교회라며 손가락질했다.
교회를 통해 해방을 체험한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에 나섰다.
그는 무어와 에비슨 등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정책을
철폐할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정부에 냈다.
'백정 해방'의 상징적인 조치로 "백정도 양반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침내 1895년 4월 백정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정부 칙령이 내렸다.
이 일로 일약 민중 지도자로 부각된 박성춘은
1898년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종로에서 개최할 때
정부 대표 및 양반·귀족들과 나란히 단상에 올라 백정 대표로 연설까지 했다.
홍문섯골 교인들이 무어를 찾아와 분열 3년 만인 1898년 홍문섯골에서
양반과 천민이 함께 하는 '평등 예배'가 드려졌다.
북장로회 선교부는 1904년 가을 곤당골 예배당을 처분하고
미국 교인 컨버즈(J.H. Converse)가 보내 준 헌금을 보태
서울 중앙, 종로 한복판 '절골'(寺洞, 지금의 인사동 137번지)에 있던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개조한 후 1905년 8월 1일부터 예배 드리기 시작했다.
절골이란 동네 이름은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중이 많다 해서 '승동'(僧洞)이라고도 했다.
이곳 양반들은 '僧'자를 싫어해 '承洞'이라 하였다.
“이웃 절골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
1907년 평양에서 온 길선주 목사가 이 교회에서 한 설교를 계기로
이길 승(勝)자를 쓰기 시작해 그때부터 승동(勝洞)교회가 됐다.
백정 출신으로 천민층을 대표하는 박성춘에게
어떤 직위를 부여하느냐가 새로운 문제로 불거졌다.
교인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은 당연히 박성춘을 장로 후보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선교사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교회 분위기에 불만을 품은 일부 양반 교인들은
1908년 가을부터 재동으로 나가 따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같은 이유로 연동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양반 교인들이 합류하자
선교부도 '양반교회' 설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안국동의 안동교회다.
1909년 안동교회가 설립되자 승동교회 초대 장로였던 이여한과
황기연을 비롯한 양반 교인들이 또 그리로 옮겨갔다.
승동교회에는 천민 출신 교인들과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열린 마음'의 양반 교인들만 남았다.
그렇게 정리된 후, 박성춘은 1911년 12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백정교회 이후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신앙철학을 지킨 역대 목회자들도
교회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주 요인이다.
김익두(9대·1935∼1938년 담임) 목사와 뒤를 이은 오건용(10대)·이덕흥(11대) 목사는
지금도 전설같은 인물이다. 황해도 안악 태생인 김익두 목사는 원래 불량배 출신이었다.
부흥사가 돼 이 교회를 이끈 인물이다. 그는 일제때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맞서다 강제로 물러났다.
6·25전쟁때새벽기도회를 하던 중 퇴각하던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오건용·이덕흥 목사는 맹인들을 위한 신앙공간이 없던 무렵 맹인 선교에 치중해
대부분의 맹인 신자들이 이 교회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항일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자 3·1운동의 본산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교회는1900년대 초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예배를 보면서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다.
청년운동의 주축인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를 태동시켰고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1919년  연희전문대생 김원벽을 주축으로 한 전국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지하실(지금의 기도실)에 모여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문을 나눠 갖고
3월1일 거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조계사 뒤쪽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문은
거사 전날인 2월28일 새벽부터 전국에 전달됐다.
이 가운데 1500여장이 승동교회에 모였던 학생대표와 신자들을 통해 서울 시내 각처로 배포됐다.
학생 대표들은 3·1운동 나흘 뒤인 5일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다시 일으켰다.
현장에서 일경이 휘두른 칼에 찔려 체포된 김원벽은 3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결국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3·1운동 직후 당시 승동교회 담임이었던 차상진 목사가 주도한 이른바
‘십이인등의 장서(十二人等의 長書)’ 사건도 유명한 일화이다.
차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12명이 연서해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장서를
종로 보신각 앞에서 발표한 뒤 총독부에 제출한 사건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승동교회는 지난 1993년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됐다.

1908년 박승봉, 유성준 등을 중심으로 기호학교(지금의 중앙 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이듬해인 1909년에 김창제의 집에서 안동교회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신앙과 교육에서 찾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안동교회는 설립되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 가운데 안동교회는 수많은 인재를 육성, 배출하였다.
일제하에서 한글을 지키다가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전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한글학자 이윤재 선생은 안동교회의 장로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선대로부터 안동교회에다녔다.
1909년 승동교회의 이여한 황기연, 연동의 박승봉 유성준 등이 모여 안국동 김창제의 사랑채에서
첫 기도회를 가지니 곧 안동교회의 출발이다.
초대목사는 한국사람 한석진목사이다.
그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일찍이 독립협회 관서지방 회장을 지냈으며
평양 널다리골교회 조사로 있을 때 마펫선교사가 월급을 주자
"조선인이 조선인에게 전도하는데 왜 서 양인이 월급을 주느냐"며
이를 거절한 일화를 지닌 인물이다.
안동교회는 평신도의 면면도 만만찮았다.
강계 부사를 지낸 한필상장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고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 윤치소장로,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과 그의 동생 유성준장로, 그 일가이며
현 안동교회 당회장 유경재목사의 조부 유창겸장로등 이 창설교인.
이주완장로 같은 이는 언제나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다녀 청풍서래 선생으로 통했다.
박준우는 밤예배 때는 반드시 상노가 등을 켜고 모시고 나와

방석을 깔아드려야 좌정했다고 한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세우는 길은 기독교뿐이다."

초대장로 박승봉은 그렇게 주장했다.그는 순조의 외가 의 자손이다.

그는 오로지 교회 설립에 주력했다.
그의 집 계동 135번지는 3·1운동 민족지도자의 모의처였다.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 재 등과 평생 친구였으며 김성수 등과 협력하여
중앙학교 전신인 기호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동양화가 이당 김은호화백도 안동교회 집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