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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합리주의의 유교적 해석 시론

맑은샘77 2007. 10. 3. 00:22

합리주의의 유교적 해석 시론

임 종 진 (경 북 대)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유교의 현대적 해석

-유교적 합리주의

(1) 현대 한국 사회와 유교

(2) 유교적 합리주의의 토대

-유교의 전통 이념

가. 현실의 중시

나. 인간 존중의 정신

다. 도덕성의 강조

라. 공동체 의식의 강조

마. 경제의 윤리성 강조

바. 교육의 중시

사. 인간과 자연의 조화

(3) 유교적 합리주의(합리적 유교)-합리주의의 재해석

3.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합리주의(합리성)는 근대 이후 산업사회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이 경우 합리주의는 특히 객관성, 과학성, 논리성을 그 자신의 가족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결여한 사태의 전개에 대해서는 비합리주의(혹은 불합리, 부조리)라는 명칭이 붙게 된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서양은 이러한 합리주의를 기초로하여 과학 기술 및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정치 사회적으로는 상공계급이 주도하는 시민사회의 명성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된 사회적 역량을 바탕으로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동양은 서양에 의해서 철저하고도 모욕적인 파국의 비극을 맛보았다. 서양에 의한 동양사회의 전면적인 해체 작업에서 가장 효파적으로 작용한 힘은 바로 이러한 합리주의의 이념을 토대로 한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이었다. 따라서 동양사회가 서양의 합리주의(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동양사회는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의한 것이든 패배의식과 자기비하에 따른 스스로의 선택이든 간에 공식적으로는 그 자신의 고유한 합리주의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말을 보다 넓게 해석한다면, 동양사회는 그들 사회의 전통적인 사유체계(가치체계)롤 표면적으로는 포기했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서양은 합리적(민주적, 주체적, 과학적, 진보적)사회이고 동양은 비합리적(전제적,노예적, 미신적, 보수적)사회라는 도식적 설명이 별 저항없이 수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서구적 합리주의는 인간과 사회 및 세계의 분석과 해체(대립)라는 측면에서는 일정한 효용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나, 종합과 구성(조화)이라는 측면에서는 적절한 역할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이념의 궁극적 목표는 진·선·미의 실현이다. 이념으로서의 합리주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소박하게 말한다면 합리주의라는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는 좋은 사회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 나타나는 서구적 합리주의 사회의 실상은 그렇지를 못하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따라서 짜임새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인 방향으로 인간을 이끌어 가는 측면이 많은 것이 서구적 합리주의를 기초로 성립된 현대 산업사회의 매카니즘이다. 이러한 상항에서 현대 산업사회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기존의 서구적 합리주의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제까지 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서구적 합리주의의 가치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은 본 논문의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에 여기서는 유교 이념을 기초로 하는 합리주의(유교적 합리주의, 합리적 유교)의 모색을 1차적 목표로 한다. 이것은 유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 작업으로도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합리주의의 확장된 지평을 확보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의미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서구적 합리주의와 관련된 논의에도 간접적인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한다.

2. 유교의 현대적 해석-유교적 합리주의

(1) 현대 한국사회와 유교

유교와 합리주의. 우리는 아직도 두 단어의 배열이 조화를 이룬다기 보다는 대비라는 느낌을 우선 갖게 된다. 그 정도로 유교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부정적인 유산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신채호는 유교의 개혁되어야 할 폐단으로서 속된 유교인(俗儒)들이 부귀를 추구하고 명예를 낚는데 젖은 탐욕, 선현의 정신적인 실질을 버리고 형식적인 허식만 모방하는 허구성, 小節에 구애되어 大同을 못보는 편협성, 사대주의와 보수적 완고성 등을 지적하였다. 현상윤은 <朝鮮 儒學史(1949)>에서 유교의 죄로서 사대주의적 모화사상, 당쟁의 빈번, 가족주의적 온정주의의 폐, 계급적 서얼차대 및 남존여비, 崇文賤武로 인한 文弱의 폐, 형식과 이름을 중시하는 尙名主義, 지나친 복고사상, 산업능력의 저하 등 8개의 죄목을 것론하였으며 근년에도 어느 학자는 한국인의 행동 특성 중에서 유교와 관련있는 10개의 특성들을 지적하면서, 그 중에서 긍정적인 것은 두 가지 뿐이라고 하였다. 이렇둣 유교는 한국사회의 실질적 근대화를 가로막는 죄인으로 낙인 찍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한국사회와 문화의 저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유교와 관런된 이러한 상반된 현상의 노출은 다른 무엇보다도 유교가 전통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상체계였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한말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근대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민족적 사활이 걸린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역사적 비극의 책임 추궁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유교 비판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수긍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교이념이 전면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현대 한국사회의 '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통사회의 현실적 도덕 규범 및 정치 체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것은 유교가 당시 사회의 현실적 요구를 어느 정도 적절히 수용하여 합리적 조정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교는 사회 변동에 이론적, 현실적 대응이 가능할 때는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를 유지시킬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만다. 현대사회에서는, 유교의 이념 중에서 사회에 긍정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직접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거나 재해석 과정을 거쳐서 받아 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과감히 정리해서 역사적 유물로 만드는 지혜가 요청된다(溫古而知新).

(2) 유교적 합리주의의 토대-유교의 전통 이념

여기서는 유교의 전통이념 가운데 유교적 합리주의의 모색과 관련을 가질수 있다고 판단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 현실의 중시

우리가 유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무엇보다도 유교의 창시자인 孔子가 어떠한 시대상황 속에서 유교의 이념을 주창하였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유교는 춘추시대 말기의 총체적(정치·경제·도덕)혼란 시기에 인간의 비인간화, 사회정의의 실종이라는 사회적 위기 현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孔子의 시대적 소임의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구체적인 현실의 상황을 그 이념의 기반으로 삼고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기에 유교는 정치철학적 성격이 강하다. 아니 본질적으로 정치철학이다. 이 점이 유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주목해야 할 유교의 기본적 특징이다. 현실의 상항을 중시하는 유교의 관점으로부터 다음 두가지의 특징이 도출된다. 첫째는 변화의 중시이다. 그러나 變化(改革)는 不變(繼承)을 전제로 해서만이 가능하며 불변은 변화를 수용할 때 그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이 <易>의 기본 사상이며, 이 (中庸)의 時中之道(일정한 상항 속에서 최선의 적합성을 지양하는 태도)이다. 孟子의 革命論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는 調和와 相補性의 강조이다. 현실은 일면적인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것이다. 따라서 일면적인 형식 논리에 의해서는 현실의 실상을 포착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모순대립 관계까지도 조화시키고자 하는 상황 논리(관계 논리)에 의해지만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역)에서의 음양 관계는 이러한 사고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점은 또한 변화의 중시라는 측면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나. 인간 존중의 정신

유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거론되는 것이 인간존중의 정신(人本主義)이다. 孔子의 사상에서 '仁'을 그 대표적인 정신으로 내세우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이다. 특히 孔子와 그의 제자 사이의 한 문답은 그러한 孔子의 인간과 삶에 대한 합리직인 이해의 태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季路가 귀신 섬김에 대해서 묻자, 孔子는 "사람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 - 하였다. "죽음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하자, ? 孔子는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 하였다.

유교가 정치철학, 윤리학으로서의 기능이 두드러지는 이유도 현실의 인간 문제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유교에 대한 이해는 이 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예컨데 유교의 天 사상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형이상학적, 선험적으로 근거지우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의 궁극적인 이상인 '天人合一'의 명제도 '인간 존재의 最上의 실현'이라는 측면으로 이해 하여야 한다.

유교의 인간 존중 정신은 맹자의 性善說이나 聖人論과 같은 인간성의 性善的 平等性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른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유교는 강력한 신분적 계급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유교에 있어서 상하 질서 관계의 성립은 기본적으로 자연적 질서(자연적 정서)에 의거한 상하 관계(예컨대 敬老孝親)에서 비롯되었으나, 이것이 사회 질서 관계로 확대되면서 특히 현실적 이해 관계에 따라서 상하 주종적 신분 질서 관계로 정착되었다. 그리나 孟子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리한 주종적 신분 질서는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고 조건적인 것이다. 예컨대 상하 주종적 신분 관계의 대표적 경우인 君臣의 관계를 보더라도 이것은 기본적으로 '義'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의에 어긋날 때는 그 관계의 단절은 물른이고 나아가서는 혁명도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맹자는 공자와는 또 다른 시대 상황을 기준으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였으므로 오히려 '時中之道'를 잘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교가 공식적인 통치이념으로 수용되면서 기존의 지배 게충에 의해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하려는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러한 측면이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왜곡은 여기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여지며, "이리하여 제도화된 유교는 결국 유교의 생명과 근본 정신인 자연주의적 인도주의와 진보주의적인 혁신적 요소를 상실하고 보수주의의 전형으로 낙인찍혀 새로운 세대로부터 배반당하는 역사의 심판일 받게 된 것이다." 유교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거론되는 신분 계급 제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정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인류 역사의 보편적 형식이지, 유교의 내면적 정신을 온전히 실현한 유교적 제도라고는 볼 수 없다. 비록 유교의 이념이 그러한 측면을 조장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유교의 이념적 생명성이 그것으로 인하여 줄어들었다면, 그것은 이제 反유교적인 형식으로 규정하여 유교에서 배제시켜야만 할 것이다. 굳이 계급 사회라는 말을 쓴다면 유교는 "도덕적 계급사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교의 인간 존중 정신은 인간성에 있어서 神聖性을 주장하는 데서 그 극치를 이룬다. <中庸>에서 인간 본연의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인 '性'은 곧 '誠'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聖'에로 이어진다. 또한 맹자도 이상적인 인간 존재의 구현단계를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聖'과 '神'을 그 극점에 두고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현실의 삶과 연결시키는 유교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일상의 삶(日用動靜語默之間) 속에서 구도적인 자세를 갖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 의식에 참여할 때 바른 자세,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유교는 이러한 태도, 마음가짐을 바로 나날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宗敎性과 世俗性을 구별하지 않는 가운데 최선의 인간적인 삶을 지향하는 태도이다. 요컨대 유교는 외면적·형식적·이론적으로는 비종교적이지만, 내면적·실질적·실천적으로는 종교적인 가르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 도덕성의 강조

우리는 유교 도덕의 폐단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 도덕의 본질에 대한 것 보다는 외면적으로 드러난 형식이나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 많다. 유교에서 도덕성은 수동적 타율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 자율적으로, 바꾸어 말해서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성을 인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도덕의 주체성을 망각할 때, 유교는 역사의 '짐'으로 남게 된다.

유교는 특히 정치와 도덕성을 필연적인 상관 관계로 규정한다. 정치 지도자의 도덕성은 정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도덕적 타락은 곧 정치 권력의 정당성의 상실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그 어떤 사람 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유교는 권력이나 악법에 의해서 지행되는 부당하고 억합적인 폭력 통치(覇道政治)를 배격하고, 양심과 도덕에 따르는 '正治'(王道政治)를 옹호한다.

라. 공동체 의식의 강조

유교의 또 다른 특징은 공동체 의식의 강조, 혹은 공동 사회의 중시이다. 특히 유교는 기본적으로 효제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 공동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가족중심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족 이기주의(문벌 이기주의)로 흐르고, 이에 따라 가족 구성원의 의타심을 조장하고 독립심을 저해하였으며, 나아가서 올바른 사회의식의 형성을 가로막아 독립된 개인을 기초로 성립되는 근대 시민사회로의 이행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비판 받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주의와 관련되는 유교이념의 본래적 의미를 살펴 본다면 이러한 부정적 현상은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의 실천이다. 유교에서 가족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인간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무엇보다도 정서적 사랑(仁)을 기초로 하여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있는, 그리고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 가족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유교의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있게 된다. 유교의 가족주의는 오히려 사회 윤리의 기초, 인류애의 바탕이 될 때만이 그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맹자는 "(부모를 포함한)친척에게 친히 하고서 백성에게 인자하게 하고, 백성에게 인자하게 하고서 사물을 사랑한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내 父兄을 공경하여 그 마음을 남의 父兄에게까지 미치며. 내 어린이를 사랑하여 그 마음을 남의 어린이에게까지 미친다."라고 말한 것이다. 유교에서 가족 공동체 의식의 요체가 사랑(仁愛)이라면, 사회 공동체 의식의 요체는 믿음과 의리(信義)이다. 그러나 신의는 사랑이 밑받침될 때만이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이 사회 관계의 기초가 될 때, 사회의 모든 공동체는 유기적인 인관성 속에서 상호 발전이라는 건전한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잘못된 공동체 의식 또는 공동체 의식의 결여는 특히 '利(利益)'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 유교의 입장이다. '利'를 중요시하는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은 물론이고 하부 공동체 상호간의 이해 관계 대립으로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위협받게 된다(上下交征利而國危矣). <대학>에 나오는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이상은 공동체 정신의 궁극적 실현 단계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깃은 상호 연관적인 것으로 보아야지, 이것이 저것보다 가치 서열상 우선시 되고, 따라서 이것을 먼저 마친 후에 저것을 실행해야한다는 식의 순차적 해석은 이게 현실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다만 논리적인 측면에서의 실현 순서로 해석해야 한다.

마. 경제의 윤리성 강조

유교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기 때문에 경제적, 물질적 이익의 추구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이 있다. 실지로 유교는 물질적 이익의 추구가 사회 구성원 상호 간의 과도한 경쟁을 유발하고, 나아가 이익의 독과점 현상을 초래하여 인간 관계의 조화를 깨뜨리고 사회적 위기를 조성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점이 유교의 상공계급에 대한 평가와 함께 산업화 및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개인의 자유 경쟁을 바탕으로 한 부의 축적이 옹호될 때 사회 전체의 경제력이 증대될터인데, 위와 같은 논리는 이것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의 경제관을 살펴본다면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정이 요구된다. 유교는 경제력을 중요시하며 부의 축적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도덕성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질 것을 강력히 요청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앞에서 지적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의 잘못된 축적과 그 결과 파생되는 폐단에 대한 경고를 부 자체에 대한 평가로 혼동하는데서 유교에 대한 오해가 생겨난다. 유교의 경제관은 기본적으로 국가 경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유교 경제관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는 국부의 중대와 이를 통한 民生 安定을 경제의 목표로 삼는다. 둘째는 분배의 형평성을 중시한다. 특히 토지의 사적인 과점을 억제한다. 세째는 重農主義的 경제관이다. 이에 따라 상공업은 보조 산업에 머물게 된다. 네째는 국가 재정 운용의 효율성을 강조한다. 다섯째, 지도층의 경제적 청렴성을 강조한다.

바. 교육의 중시

유교 이념의 또 다른 특징은 교육의 중시이다. 유교의 이상이 도덕적 인간의 육성을 통한 도덕적 사획의 실현이라 할 때, 그것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정치와 교육이라 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敎育的 政治가 되어야 하며. 교육은 政治的 교육이 되어야한다. 여기서는 유교 교육론의 특징만 간략히 살펴보겠다.

첫째, 보편 교육의 정신 둘째. 평생 교육의 정신. 세째. 각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교육. 즉 피교육자 중심의 교육. 네째, 인간성의 신뢰를 바탕으로하는 인격 함향의 교육(君子敎育). 다섯째, 爲己之學. 교육으로 인한 긍정적 결과가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 따라서 교육의 수준과 사회적 책임은 비례 관계에 놓이게 되며 이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명예와 이익을 강조하는 功利的 敎育과 좋은 대비가 된다.

사. 인간과 자연의 조화

유교의 궁극적인 이상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이다. 이것이 '天人合一' 또는 '太平天下' 라는 이념으로 나타난다. 유교에서 자연은 물리적 세계(nature)와 원리적 세계(天理)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의 일부이자 이를 바르게 유지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은 이러한 자연을 파괴할 가능성도 동시에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본래의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수도)을 잠시도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자이다. 이와 같은 운명을 깨닫고(知天命), 그러나 삶의 자유로움(從心所欲不踰矩)을 잃지 않고, 나아가 이를 즐기는 경지(樂夫天命)에 다다르는 것이 유교의 이상이다. 이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한 균형잡힌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세는 자연을 단순히 도구적 수단으로만 파악하는 현대인의 관점을 변화시키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교적 합리주의(합리적 유교)-합리주의의 재해석

합리주의는 존재, 인식, 실천의 모든 원리를 理性(ratio)에로 귀속시키기 때문에, 합리주의를 논할 때는 무엇보다도 민저 이성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이성을 근대 이후 서양에서는 특히 과학적 수학적, 따라서 추상적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성의 주된 기능은 사유이고, 사유의 본질은 논리성에 있다는 주장의 예정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성 해석이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문명의 이념적 기초가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합리주의 재해석 작업은 이성의 재해석에서 시작된다.

분명히 '이성'이라는 말은 서양철학 용어의 번역을 위해서 안출된 조어이지안, 이제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를 통하여 보다 폭넓은 의미를 가진 개념으로 정립하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성은 '理'와 '性'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리의 원래 의미는 玉이 본래 부터 갖고 있는 무늬의 결에 따라 玉을 가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물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규칙성, 원리성이라는 뜻이 파생되어 나왔으며, 송대에 이르러서는 우주 자연의 최고 본체이자 인륜 도덕의 최고 준칙으로까지 해석되었다. 즉 리는 자연과 인간을 관통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점에서 자연과 인간은 근원적인 동일성(理一)올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리의 의미를 수용하고자 한다. 즉, 리를 '인간의 이성'으로만 해석하는데서 벗어나서 인간과 사회 및 자연으로서의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진리)로 파악하고자 하는것이다. 이러한 리의 해석은 'logos'의 포괄적인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인간만의 관점'올 주장하는 기존의 합리주의의 '독단의 선잠' 에서 깨어나서 모든 것에 대해서 가능한 한 본래 그대로의 참모습(가치)을 보려는 변화된 시각올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결국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더이상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않으며, 오히려 화해와 조화를 지향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전회는 단순히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자각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연을 소외 시키지 않는, 自然性과 人間性의 調和, 呼應, 結合을 지향하는 노력이 '合理主義' 이다.

性은 특히 인간의 리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서양의 이성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이성이 사유와 그 사유의 논리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유교의 성(心性)은 도덕적 側面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한다는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근본적인 요인을 덕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에게 있어서 성은 가치론적 의미가 가장 강조되며, 이러한 관정은 은연중 자연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가치성을 가진 자연으로 사람들에게 이해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는 '도덕적 主知主義'라고 규정할 수 있다.

자연을 인간과 상호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목표와도 연계되는 사항이다. 앞에서 모든 이념의 궁극적 목표는 진·선·미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교적 합리주의는 '좋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좋은 사회'를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제 유교적 합리주의를 간단히 표현해 본다면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가치를 조화롭게 실현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유교적 사유 및 행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의거해서 유교적 합리주의의 지향점올 녜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인격성과 주체성을 새로이 고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출발점으로 하여, 사회 제도,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하여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데서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될 때에만 인간의 존엄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둘째는 개인과 공동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다. 인류는 역사적 체험올 통하여 개인의 이익만을 강조하거나 공동체 전체의이익만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 사회를 황폐화시키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폐단의 시정에는 대단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서 궁극적으로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정의로운 조화(中庸)을 이루도록 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정신적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도록 한다. 셋째, 도덕 정치의 실현. 정치는 사회 조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있어서 도덕성의 상실, 타락은 단순히 정치 자체에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도덕성 타락을 선도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정치가 도덕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질 때, 그 사회는 최소한 公的인측면에서의 도덕성은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현대 사회는 특히 정치와 각 부문의 연계성이 어느 때 보다 긴밀하기 때문에 이 점을 더욱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정치의 도덕성이 곧 사회의 도덕성을 결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정치가 사회교육. 국민교육적 기능올 갖고 있음을 다시 상기한다. 네째는 인간과 사연의 조화를 강조한다. 근대 이후 인류는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과학적 지식과 기술에 의지하여 자연을 인간 자신의 의도대로만 혹사하였다. 그 결과 자연환경은 파괴되고, 마침내는 인류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정도의 환경 오염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연을 고려하지 않는 경제 성장에도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자연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주인의 특권만을 강조하였지 그 의무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각이 없었기에 현재의 고조되는 환경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인간 존재 역시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 가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아, 자연올 단순히 물리적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지향하여야만 하는 시점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맺는 말

합리주의는 형식적 합리성(이론적 정합성, 이념성)과 실질적 합리성(현실적 적합성, 현실성)이 조화를 이를 때만 현실 사회에서 그 기능을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다. 이러한 조화가 깨어질 때 합리주의의 역설, 즉 합리주의의 불합리성이 노정될 수 밖에 없다.

유교가 한자 문화권의 핵심적인 사회 유지 이념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일정한 정도의 합리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시대 상항의 변화에 조화롭게 대처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역사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며, 그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할 수 있는 가치 조차도 드러내지 못하고 만다.

현재 우리 사회를 기준으로 할 때, 유교는 좀 낡고 오래된 그리고 비워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 거기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고, 거기에서 살던 습관이 조금은 남아 있는 한옥에 비유할 수 있다. 그곳은 조금만 손질한다면 여전히 살기에 별 불편이 없고. 오히려 우리가 잊고 있던 또 다른 삶의 흥취를 맛보게 해 줄 수 있다.

유교는 끊임없는 자기 혁신(維新, 日日新又日新. 自强不息)을 필요로한다. 그것이 유교의 근본정신이고. 그것을 통해 유교는 언제나 새로운 사회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새로운 사회를 이끄는 주요한 동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타당성을 입중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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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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