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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원주의 시대에서 죽음에 대한 신학적 접근

맑은샘77 2006. 9. 15. 15:54

다원주의 시대에서 죽음에 대한 신학적 접근

박 노권

I. 들어가는 말

목회자로서 오랫동안 교회에서 봉사하며 또한 신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험 속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고, 그 결과로 죽음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감정적인 혼란을 경험하는 것을 보면서 이에 대한 신학적인 정립을 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오늘날 한국에서 천만으로 추산되는 기독교인들이 죽음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고 그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생을 향한 인간의 본성과 죽음 앞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불안, 공포,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방어 본능으로 인해, 죽음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생의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죽음의 문제를 기피하고 생각하기 조차 싫어한다는 일반적인 이유이다.

둘째로, 기독교 자체 안에 다양한 죽음 이해가 있어 왔음에도 이에 대한 정립이 되어있지 않아 혼란을 경험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죽음 이해가 나타나는데, 구약에서만도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되어질 수 있고, 신약에서도 예수와 바울, 그리고 요한 등에서 다양한 입장이 나타난다. 더욱이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서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아 원래의 성서적 전통과는 다른 영육이 철저히 분리되는 이원론적인 죽음이해가 크게 자리잡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없으므로 혼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원주의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인식된 죽음이해와 일반 세속문화에서 주어지는 죽음에 대한 여러 이해 사이에서 어떻게 이를 조화시킬지 알지 못하고 분명한 죽음이해에 대한 혼란을 겪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심리학의 영향으로 집단적인 신앙보다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더 고려하는 가운데서 과연 전통적인 죽음이해가 이런 다원주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본 논문은 위에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시도함으로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돕고자 한다. 죽음을 자신있게 맞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은 현실에서도 더욱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II. 성서에 나타난 다양한 죽음이해

죽음은 인간이라면 피할수 없는 생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 죽음이란 정말로 모든 것의 끝일까? 아니면, 오히려 이것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며, 우리의 삶을 좀 더 진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이해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많은 종교들에게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세계내 존재로서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그 죽음은 무(無)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 하여 인간의 허무성을 진술했다. 그러나 많은 종교들은 이 죽음의 허무성을 극복하고자 죽음의 본질을 탐구해 보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하여 왔다. 또 한편 현대 심리학에서는 죽음 그 본질에 대한 질문보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인 죽음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냐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이해가 만나지는 현실 속에서, 먼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이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기독교에서의 죽음 이해는 그 우선되는 기반이 성서이므로 성서에서 말하는 죽음이해를 먼저 분석해 본다. 그러나 성서적 죽음 이해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구약 안에서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나타나고, 이것은 또한 신약에 나타나는 여러 모양의 죽음 이해와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약성서에서의 죽음 이해

초기 구약시대에는 비록 죽음이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창2:17, 3:19), 대체로 죽음의 문제를 피조물의 정해진 운명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죽음은 각 사람에게 닥치는 문제이며 또한 인류의 공통된 숙명인 동시에 온 세상이 가야할 길이다(왕상 2:2, 삼하14:4).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 졌으며(창3:19,20), 인생은 한갓 그림자요 하나의 숨결, 허무일 따름(욥14:1-12)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나는 온 세상의 길을 떠난다"(수23:14), "아브라함이 백발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만족하게 산 다음에 죽었으며, 자기 조상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있었다(창25:8)" 등에서 보듯 죽음을 어떠한 특별한 해석이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즉, 죽음은 특별한 경우--일찍 찾아오거나 질병등으로 인한 비참한 죽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본래적으로 악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구약 초기에는 사후의 삶이나 개인적 생명이 계속된다는 단계의 인식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의 짧음과 죽음 앞에 허망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면서 스올(sheol, 음부) 사상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사람이 죽으면 가게 되는 곳으로, 구약에서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상이 되고 있다. 이곳은 "전적으로 힘이 없고, 약하게 되고, 도움의 손길이 없는 그림자 같은 상태"(사14:10),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는 곳"(전9:10), "다시 되돌아 올라오지 못하는 곳"(욥7:9), "하나님도 찬양할 수 없는 곳"(시6:5, 30:9)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면 영육합일체로서의 인간의 생명체는 곧 생기를 잃게 되고 산 자의 땅에서 누리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올 개념의 대두와 함께, 이제는 하나님의 힘이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관여하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신약성서에서 나타나는 것과 달리, 개인을 몸과 혼과 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사람을 지칭하는 히브리 언어 '네페쉬' (nephesh)는 전체적인 존재를 언급한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는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단지 살아있던 생명체가 죽어서 스올로 간다고 단순히 생각하였다. 또 한편으로, 구약성경은 의로운 자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선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고(사45:17,단7:14, 12:2), 기대되어지는 영광스런 경험(민23:10, 시116:14)이지만, 악인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형벌로 이끄는 것이라고(사35:10,렘20:11,단12:2) 말하고 있다.

부활 사상은 모세 5경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으며, 이런 이유로 예수 당시 사두개인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거부되었다. 그러나, 부활의 개념들은 고통과 억압의 기간동안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한 계획을 펼치셨을 때, 여러 시인들과 예언자들의 글 안에서 발전했다(단12:2,시16:10,사26:19). 구약성경의 부활에 관한 이런 부분들을 바리새인들은 크게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부활 문제에 대해 종종 논쟁을 하곤 했다(마12:18-27). 그러나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 죽음에 대한 압도적인 견해는 생명의 창조주와 유지자로서 여호와에 대한 신뢰였다. 욥의 죽음 후의 생명에 대한 신앙의 확신은 유대문학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19:25-27).

2. 신약성경에서의 죽음 이해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보다 심화되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약성경에서도 죽음의 원인은 죄라고 하지만, 구약과 달리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은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1)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 이해

예수의 삶과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물론 편집자적인 관점은 있었겠지만) 마태, 마가, 누가에게서는 죽음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을 찾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 많은 초기 자료를 사용했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수는 죽음을 그의 가르침에서 중심적 주제로 하지 않았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데 장애물이 된다고도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몇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먼저 예수는 인간의 죽음이 반드시 인간의 개인적인 죄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실로암 성전이 무너질 때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눅13:4),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면서 그 역시 그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잠시 자는 것이라고 말했다(요11:4).

그리고 예수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게 된다고 믿었다.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마8:11). 또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 했고, 악인이 고통받는 곳을 '하데스'라고 했다. 그리고 부활을 부정하던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일곱 번 결혼한 여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 상태가 틀려진다(마22:23-33)고 말하면서 부활사상을 옹호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성서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핵심적인 사상이다.

2) 바울의 죽음 이해

바울은 아담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으며(롬5:12, 고전15:21), 그 이래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게'(고전15:22) 되었고, 따라서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롬5:14)고 본다. 이처럼 죽음은 죄의 열매요, 그 결과요, 또한 그 대가이다. 따라서 바울은 죽음의 불가피성은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악의 상태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믿는 자는 죽음을 넘어서 영생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고전15:17,데전4:13-15). 이것은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죽음 이해이다. 죽음에 대한 바울의 아래와 같은 말은 기독교인의 희망을 잘 보여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리고 영육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하던 구약에서와는 달리, 바울에게서 죽음은 육체를 버리는 것 그리고 일시적인 순례자의 텐트를 거두는 것(고후5:1) 그리고 그곳에서 영은 떠나는 것(딤후4:6)으로서 해석되기도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서 바울이 영혼의 불멸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부활체와 영체를 가르쳤는데, 후에 사람들이 헬라의 영혼 불멸 사상과 혼돈하여 영육 분리처럼 주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영육의 분리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3) 요한복음에서의 죽음 이해

요한복음을 통해 나타나는 기독교인들의 죽음이해는 믿음에서 얻어지는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도 바울처럼 예수의 재림과 그에 이어지는 신앙인들의 몸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는 죽음 다음에 얻어지는 삶보다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죽음의 문제에 접근을 하였다. 왜냐하면 요한을 비롯한 제3세대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이 상당 기간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죽은 다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영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은 신앙 안에서 이미 극복되었으며 지속하는 생명은 현존하는 실재인 것이다(요11:25-26). 이처럼, 요한은 죽음의 심각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 기독교인의 현세의 삶이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다.

III. 기독교적 죽음 이해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태도를 중요시 하는 오늘날에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는 이전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의학의 발달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새로운 경험과 이해의 측면을 다변화시켰고, 특히 오늘날에는 '죽음 그 자체'보다는 '두려움과 소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보다 많이 이야기 한다. 임상목회교육(Clinical Pastoral Education)에서나 호스피스 운동, 그밖의 죽음에 대한 많은 연구나 보고서들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수 있을까라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제 죽음은 단지 종교나 신학의 문제이기보다는 심리학이나 의료적인 면으로도 많이 접근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죽음 이해가 기독교 역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고찰해보고,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영과 육의 관계를 한 번 더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전통적인 죽음 이해

전통적인 기독교의 죽음이해를 대표적인 세 학자--어거스틴, 칼빈, 쉴라이에르마허--의 글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학자는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 의존하므로, 만일 하나님이 숨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먼지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죽음과 죄와의 관계를 논할 때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먼저, 어거스틴은 바울이 가졌던 죽음이해 즉 아담의 죄에 대한 댓가로서의 벌이며 또한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서의 죽음이해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을 분명히 하는데, 그는 "첫번째 죽음"을 받아들이고 "두번째 죽음"을 두려워하라고 한다. 첫 번째 죽음은 육의 죽음이지만 두 번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탄식할 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서방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고, 전통적인 기독교 죽음이해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쉴라이에르마허와는 달리, 부패의 자연적 과정을 인간의 본질안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펠라기안들과 논쟁을 했는데, 비록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아담은 죽었을 것이라는 이들의 주장과 달리, 어거스틴은 인간이 죽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없었다고 말하며 본래 "영혼은 불멸로 창조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mortale("죽을 수"있는 존재)과 moriturus("죽음에 종속된" 존재)를 구분한다. 아담의 몸은 비록 죽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죽도록 운명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불멸의 운명으로 만들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칼빈도 "아담은 그가 그렇게 원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힘을 갖고 있었다"라고 비슷한 주장을 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죽음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한가지 다른 점은 죽음의 순간에 있는 개인의 심판에 대한 중세적인 견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불멸의 영혼을 가진 인간의 개별적인 운명보다도, 집단으로서 하나님의 역사안에서 순례자로서 맞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사람들은 "본인 자신의 죽음"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개인 영혼의 죽음은 "극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상 마지막에 "하늘의 예루살렘"의 육체적 부활이라는 공동체적 비젼대신에, 죽어가는 개인의 침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각 개인들은 영원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자신들의 나쁜 행실과 좋은 행실에 대한 최후의 응보를 직면하게 되면서 죽음의 순간은 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침상은 "악마가 영혼을 얻기 위해 벌이는 최후의 필사적인 싸움터"로 선과 악의 힘사이의 궁극적인 대결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개인에 대한 관심이 "인류의 집단적인 운명"에 대한 생각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세 후기의 개인적 관심에 영향을 받은 칼빈은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죽음의 순간은 매우 중요함을 말한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칼빈 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 중 하나로, 이제까지와는 달리 죽음에 대한 좀더 자연적인 견해 즉 "원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가 아니라, 우리 유한한 인간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적극적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이 더 성장하기 위하여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간 진화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본다. 이와 같이 그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주장과는 반대로, 죽음은 죽음 이후에 덧붙여진 "댓가"나 "상"으로서의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원한 삶은 현 존재의 보다 깊은 차원에 대해 경험되어진 종교적 의식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다음 세상 사이를 구별하고 다음 세상에서 피난처를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우리가 죽음을 정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저너머"가 아니라 "이 유한의 한 가운데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쉴라이에르마허는 죽음과 죄를 연결시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시대에 맞게 의미있는 방법으로 믿음의 범주를 다시 생각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칼빈이 하듯 정죄에 대한 두려움이나 벌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또한 어거스틴이 하듯 두 요소(영과 육)의 비자연적인 분리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비록 희박한 방법이기는 할지라도 죄성과 연결시킨다. 즉 두려움은 "보다 높은 의식으로부터 분리된 육체"에 의해 지배되는 의식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는 칼빈이나 어거스틴과 동의한다. 그는 "우리가 구속에 종속되는 것은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이다"라고 말한다.

이 세학자들 안에서, 죽음을 도덕적 종교적 문제로 보던 시각에서부터 점차 삶의 부분으로서 죽음을 보는 시각으로 가는 흐름을 보게 된다. 그래서 질키는 쉴라이에르마허 이후 죽음은 두 인류의 조상에 의한 "원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유한성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모습으로서 해석되어져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쉴라이에르마허때까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담의 타락 교리를 죽음과 악의 원인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부정확한 견해로 보고 이를 버린 것과 함께,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그 죽음이 갖고 있는 깊은 의미조차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의 현대신학자들은 죽음이 죄로 인한 벌이라든가 천국에 가는 문으로가 아니라, 존재의 필연적인 모습이라는 현대의 견해를 가지고 죽음을 설명하려고 노력해왔다. 즉, 책임이나 벌 그리고 도덕성 같은 개념이 점점 인기가 없어지면서, 신학자들은 이런 개념들을 죽음과 연결시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에 신학은 점차 죽음의 자연적 성격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특히 프로이드가 도덕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이후, 사람들은 죽음과의 관계에서 책임, 의무, 죄, 죄책과 같은 말들을 점점 더 피하고자 해왔다.

2. 현대 심리학과 의학의 영향으로 인한 죽음 이해

현대 의학이 생기기 이전에는, 종교와 의학 그리고 인간의 도덕성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질병과 건강을 "초자연적인 힘과 악한 인간의 의도의 산물"이라고 간주했다. 즉, 그들은 질병을 육체적 차원보다는 그것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눈을 가지고 보았으며, 그들의 불행으로부터 그들 자신과 세계에 대해 알기를 기대했다. 예를 들어 고대근동문화를 보면, 질병은 사람과 신 또는 사람과 환경과의 기본적인 부조화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고대 유대인들과 크리스챤들도 질병을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신의 심판과 관련시켰다. 그러나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현대의학적 모델이 굳건하게 세워진 것은 19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1800년대 후반에 파스퇴르(Louis Pasteur), 리스터(Joseph Lister), 코흐(Robert Koch) 등 여러 과학자들은 전염병의 세균을 하나 하나 분리시키는데 성공했고, 세균학 실험실 안에서 천연두, 콜레라, 흑사병, 장티프스, 결핵 등의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의학은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경험적인 실험을 통해서 화학이나 물리같은 엄밀한 과학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어휘들로 죽음을 철저하게 설명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써 의미, 신비나 도덕적 명령의 질문들은 하지 않게 되었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한참 젊을 때의 사람을 갑자기 데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런 죽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의 섭리를 믿을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설명이나 도덕적인 의미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했고, 의사들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의학의 문화는 죽음을 대체적으로 비인격적이며 기술적인 문제로 보아 죽음이 통제되고 지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더 나아가 죽음을 기술의 실패로서 보는 죽음의 이미지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죽음은 정복되고 극복되어져야 할 적이며, 기술을 사용하여 제거해야할 악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하여 궁극적으로 죽음은 순수한 과학적, 가치중립(value-free)의 경험으로 환원되었고, 이런 영향으로 오늘날 사람들은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가 죽는다는 믿음은 시대에 뒤지고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는 것으로보며, 죽음과 죄 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잘 연결시키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정죄적인 견해가 사라지면서, 기독교 전통의 풍부했던 죽음의 영적·도덕적 의미가 사라지고 결국 심리학이나 의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도덕주의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특히, 심리학은 현대인에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도록 영향을 주었는데, 돈 브라우닝은 이 심리학이 현대인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묘사한다. 좋은 예로 퀴블러로스의 죽음에 이르는 다섯 단계에 대한 묘사는 병원의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생각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이론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죽음을 아름다운 사건, 삶에 있어서 또 다른 하나의 만족시키는 경험, 그리고 축복이며 의미있고 즐거운 마지막 종점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퀴블러로스는 죽음은 태어남처럼 인간 발달과정의 큰 부분이며, 또한 인간 존재의 큰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죽음을 슬픈 것, 두려운 것, 병적인 것, 무서운 것이나 파괴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죽음은 "잠시 환하게 빛나다가 끝없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유성(流星)을 보는 것처럼, 몸의 기능이 평화롭게 마치는 것"으로 보야하며, 따라서 죽음은 "정복되어야 할 적이 아니고, 기대되어지는 것이며, 삶의 여행길의 우호적인 동반자"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너의 고통은 분노와 좌절을 삼켜버린 감정일 수 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들을 버리면 너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이때 퀴블러로스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표현된 감정을 판단하거나, 상담자 자신의 가치나 관점을 강요하는 것을 철저히 금한다. 각 개인은 스스로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적절한 죽음"을 이루어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될 때 죽어가는 사람은 진실한 수용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된 수용은 그 의미가 결코 명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감정이 없는 마지막 단계라고 그녀는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전통적 죽음이해가 갖는 종교적 의미나 도덕적 구성 요소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신 거의 전적으로 기술적, 육체적, 그리고 심리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개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고 개인적인 행복을 최대화시켜야 함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며, 죽음의 도덕적 의미는 간과하는 것이다. 현대심리학과 의학은 우리가 암과 "싸우거나" 수용의 단계에 도달해야한다고 가르치며, 죽음에 다가갈 때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단지 유한성의 하나이며 외로운 개인의 소멸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세계에 관계해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질문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순수하게 자연스러운 사건이 아니고, 우리 삶의 가장 긴장된 사건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의학적 모델에서 질병은 어떤 인간의 행동이나 의도보다는 자연적인 원인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또한 도덕적 견해가 항상 같이 함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무리 의학이 질병의 "어떻게"에 대해 잘 설명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왜, 내가?" "내가 이런 일을 당할만한 어떤 일을 했는가?" "이것이 왜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 더욱이 현대후기의 질병과 죽음 형태에 있어서, 원인은 종종 알기 어렵고 복잡하다. 그래서, 호프만은 죽음의 '폭력'은 항상 '비인격적이고 비합리적'인데,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직면할 수 있는 도덕적 종교적 근거들을 우리가 오늘날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라고 지적을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적절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죽음을 준비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데, 이런 문제에 답을 주기에는 현대의학이나 심리학은 스스로 한계가 있음을 말할 수 밖에 없다.

3. 오늘날 바람직한 기독교적 죽음이해

틸리히는 "중세시대에는 모든 방, 거리,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삶의 마지막에 대한 상징으로 가득찼었지만, 계몽주의 이후로 죽음과 죄와 지옥은 공적 의식에서부터 없어졌다"라고 말하며 오늘날 종교가 의미를 제공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퀴블러로스 학파처럼 종교가 붕괴되어야 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쇠약해가는 상징을 다시 진지하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상징에 있어서처럼, 틸리히는 죽음, 죄 그리고 용서의 문제도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즉, 현대인도 여전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기독교 전통에서의 죽음에 대한 종교적 유산을 현대의 해석들(심리학과 의학에서의 현대문화적 이해들)과 대화시켜야 한다고 한다. 만일 죽음의 도덕적 차원을 적절하게 진술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다면, 이전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견해의 붕괴로 비워진 자리에 개인 이기주의와 같은 파괴적인 도덕주의가 채위지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것이다.

틸리히의 언급처럼, 오늘날에도 죄의 결과로서 죽음을 보는 기독교의 전통적 이해는 여전히 심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죽음은 단지 심리학적이거나 의학적인 죽음 이해로 설명할 수 없는, 죄와 죄책의 결과로서 우리는 경험하기 때문이다. 쉴라이에르마허 이후 죽음을 자연적이고 존재의 우주적인 부분으로 보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으나, 더나아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존재의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두려움과 투쟁하였는데, 이것은 신경증도 아니고 죄책과 관련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이나 고통을 생각하게 될 때 갖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유한한 것의 자연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단지 살다가 죽고 마는 생물학적인 피조물이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에 대해 저항을 하게 되는가? 이러한 반응의 밑바닥에는 무언가 더 심오한 것 즉 자연법인 "흙은 흙으로"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본다. 이것이 "죄책감"이고 하나님의 '진노"이며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죽음의 찌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며, 이 두 번째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적이 아니며, 부패, 쇠퇴, 유한성 자체는 생명에 통합되는 것이며, 이것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 인간이 시작과 끝이 있는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생각은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칼 바르트는 피조물의 한계성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의 성품이지 타락의 결과로 나타난 형벌의 모습이 아니란 점을 주장한다.

'죽어감'이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때에 그렇게 결정되었고, 또 그 창조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죽어감이란 옳기도 하고 또 선하기도 한 것이다. 시간성 내의 인간 존재란 유한한 것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 자체로는 심판이 아니다. 죽음이란 그 자체의 성격상으로, 또 본질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심판인 것은 단지 나타난 현상의 결과(de facto)로서만 그럴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를 반드시 꼭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것은 나타나는 결과로서만 두려울 뿐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죽어간다는 한계성은 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오히려 문제는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관계의 단절, 즉 관계적이면서도 영적인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와 관계의 단절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바르트도 죽어간다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더나아가 죽음이란 한 인간의 영적인 단절 내지는 무의미를 뜻하며, 하나님과의 단절 및 심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는 단지 육체와 혼이 아니라 또한 영적 존재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질문은 그 자체의 한계성을 지닌 현대 심리학이나 의학의 모델을 넘어서,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 사상에서는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말이고, 죽음으로써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소멸되고 말며, 또한 죽음이란 우리 삶과 관계 없는 것으로 우리 삶의 마지막에서 문득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인데, 기독교에서는 죽음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말도 아니고 죽음으로 우리 삶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또한 죽음이란 우리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이미 우리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원주의 상황에서 다른 죽음이해들과 대화하면서, 분명히 갖어야할 기독교의 전통적인 영적 죽음이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처럼 죽어갈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과 삶을 같이 나눌 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에게만 매달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영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매운 맛을 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4. 영혼과 육체의 분리 문제

죽음의 순간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신체는 무덤으로 들어가 다시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어떠한 모양으로든 계속 존재하여 간다는 것은 수많은 토속 신앙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을 벗어나 지복과 평화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생각은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이는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영혼과 신체의 분리를 죽음으로 이해할 때에, 죽음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큰 신학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오시리라던 예수의 재림이 지연될 때, 몸을 떠난 영혼의 여정이 어찌될 것인가가 중세 내내 수많은 신자들과 신학자들의 큰 관심사였다. 우선 영혼의 존재 및 불멸의 양태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개개인의 영혼은 언제 생겨나 어떻게 사람 안에 내주하다가 죽음 이후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여기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 같은 희랍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은 교부들은 '영혼의 선재설'을 주장하기도 했고, 또 죽은 후에 영혼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런가하면, 이레네우스 같은 교부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은 불가지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육이원론적 인간관은 원래 히브리 전통과 성서 전통과는 다른 것이다. 히브리적·성서적 전통에서 볼때는, 인간 그 자체안에는 어떤 신성한 본질도 갖고있지 않다. 즉, 인간의 영혼 그 자체는 육체와 구별되어 불멸성을 지닌 실체라고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몸을 지닌 혼(bodily soul)이며, 동시에 혼을 지닌 몸(besouled body)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네페쉬(nephesh)는 신약성경의 푸슈케(Psche)와 같이 몸을 지닌 인간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 헬라적 영육이원론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영혼이 아니다. 바울 및 닛사의 그레고리 같은 이들도 영혼과 육체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거나 따로 존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카취는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에서 영혼은 육체에 비해 가치론적으로 우월하며 본질적으로 신적이라고 보았던 고대 교부신학자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 루터, 칼빈 등 정통신학자들의 인간이해는 성서적·히브리적 인간생명 이해의 헬라철학화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인해서가 아니라, 본래부터 불멸적인 영혼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본래적 죽음 이해에 혼란을 가져왔고,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혼선을 주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영과 육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는 영혼 개념이 전통적 의미에서 육체와 구별되는 실체로 이해되지 않고 인간의 인격이란 의미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심리학자들은 영혼이란 말대신에 '싸이키'(Psyche)란 말을 사용하면서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을 피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드는 싸이키의 상을 영혼 내적인 힘들의 투쟁장으로 보았다. 즉 이드, 자아, 초자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심리구조의 모델을 가지고 어떤 증세나 행동방식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시도했다. 말하자면 외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히스테리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의 여러 현상들을 이러한 모델로써 설명했던 것이다.

융에게 있어 싸이키는 육신과 영혼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위한 표현이다. 의식적 내용과 무의식적 내용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융은 자기(self)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데, 이 '자기'는 의식될 수 없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자기'는 인간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의 현현이라고 본다. 이런 '자기'는 만다라 등의 상징 속에 있는 원형으로 경험되며, 이 '자기'와의 만남은 내적인 초월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육신과 구별되는 실체로서의 영혼이라는 전통적인 영혼 개념 대신에 인격이나 주관과 비슷하게 인간의 중심, 즉 관찰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과 신비를 지시해 주는 한계 개념으로서의 영혼에 대하여 심리학에서는 논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입어, 이원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영혼 개념을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고, 자아, 자기, 주관 혹은 실존의 개념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학적 접근의 설명은 경험에 대한 관찰에서 나왔다는 그 자체의 한계성 때문에, 비록 현대인의 영육이해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영혼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인간이 생물학적 죽음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시작이요 나아가 이 땅의 유한한 삶에서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에로 이행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의학적·심리학적 죽음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며, 이때 기독교의 신앙은 헬라적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영혼불멸설이 아니고, 영육합일체로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 생명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 지고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변화한다는 신앙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영혼의 불멸신앙이라 말한다면 기독교(히브리·성서)전통과 헬라 전통은 접촉점을 가질 수 있지만, 본래 헬라적 의미에서의 영혼실체의 존재론적 불멸설이라면 그것은 성서적인 기독교의 신앙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죽음에 대한 실천적인 신학적 접근 방안

오늘날 죽음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할까 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이다. 사실 큰 시대적 변환의 때마다 사람들이 느끼던 공포나 불안은 일종의 특이한 타입이 있었다. 예를 들면, 중세의 말기에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죄책'과 '정죄'에 대한 불안으로 떨었다. 즉 이생에서의 죄와 그로 인한 지옥의 형벌에 대한 공포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공허감'과 '무의미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영적인 고통, 정신적 공백 상태 속에서 현대인들이 분열된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당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아픔을 당하는 그 내용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각기 다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음을 예측케 한다. 그렇다면 개인 개인이 각기 다르게 경험하는 아픔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목회적으로 죽음에 접근을 할 수 있겠는가?

현대 병원의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돌봄의 문제를 제일 처음으로 제기한 퀴블러로스의 접근은 앞서 언급했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좋은 법을 시사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죽음을 혐오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는 인간의 죽음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죽음이 자기에게 결코 다가올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면서도, 논리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 자체를 혐오하고 있으며, 또한 수많은 최신식 의료기구들을 통해서 미래의 어느날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듯한 환상을 갖으면서 우리 삶에 필연적인 죽음을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분석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타인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 앞에서 충격, 혐오, 분노, 비탄, 우울 등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망각하고 부정하며 거부하려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국은 마지막 단계로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이런 심리학적 접근은 오늘날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신학이 이성과 합리성 중심이었다면, 심리학은 감정적 공명 같은 심리적인 정서를 중요시 한다는 특징이 있다. 오늘날 죽음에 고생하는 이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에 이성과 논리도 중요하지만, 감정과 공명이 필요함을 우리는 현실에서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의 접근은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할 부분이라고 본다.

현실적으로, 목회자는 죽음이 임박함에 따라 여러 가지 반응이 일어남을 알게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은 오랜 투병 끝에 오는 해방과도 같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죽어가는 사람은 임종이 지연되는 데 대하여 고통스러움을 경험하며 이것이 지속되지 않고 쉽게 끝나기를 갈구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이것과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다양한 상황 가운데서 목회자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깔려있는 감정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면밀하게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심각한 실존적 질문 앞에서, 적당한 때에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공감 그 자체가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담의 기본 전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처럼, 우리 자신도 상대방이 경험하고 있는 고독과 두려움과 아픔을 들어주고, 같이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나를 생각한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면 더 이상의 효과적인 대화는 힘들어 지는 것이다.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할지라도 죽음만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옆에 같이 앉아 있어 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로를 받게되는 것이다. 이때 비록 환자가 죽음 앞에서 충격을 받고 이를 부정하거나 분노하게 될 때에도, 이를 억압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임을 이해하고 솔직히 같이 나눌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교회에 잘 나오던 신자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할지라도, 이 순간이야말로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야지, "그렇게 하면 어떻합니까?"식으로 일방적인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어째서 내가 하필 이 몹쓸 병에 걸렸느냐?"고 원망할 때, 그 투정을 들어주면서 예수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셨던 것처럼 받아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고통과 고독에 있는 자에게는 목회자가 같이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공감이 없이 내 자신의 죽음관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죽어가는 자에게나 곁에 있는 유가족 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이와같이, 일반 목회에 있어서 처럼 죽음 앞에서도 목회자는 상대편의 입장에서 들어주는 일("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 롬12:15), 부드럽고 무조건적인 수용("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눅6:36), 내적인 일치와 감정의 소유("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5),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증거하는 일("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 마5:4)과 솔직함과 정직의 자세가 필요하다.

진지한 대화는 비록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목회자는 적절한 위로를 주기 위하여 항상 경청하여야 한다. 어떤 순간에는 말을 아끼면서 인간적으로 가깝게 있어주는 예민성이 필요하다. 이런한 경우에는 논리적인 변증법이나 난해한 수사가 필요없다.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과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할 때이다. 장황한 설교보다 성서에서 인용한 몇마디의 적절한 말, 또는 이미 마음속에서 싹이 튼 믿음을 붙들도록 도와주는 정직한 기도를 죽음을 앞둔 자는 진지하게 들으려고 한다.

둘째로, 목회자는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으로 도와야한다. 임상목회교육(CPE)에서나 심리학에서는 단지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이해를 갖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인생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질문을 피하지 말고, 유한성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역시 너무 강요하게 되는 경우에는 부작용이 일어나고 죽음 앞에서 더욱 힘들어 하게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 목회자가 비록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이해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방은 대화중에 목회자의 생각을 느끼게 된다. 고통을 나누는 목회자의 자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기회가 될 때 좀더 진지한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같이 나눌 수 있으며, 그의 생각을 신앙 안에서 바꾸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옥과 천국, 영육합일체로서의 죽음 또는 영과 육의 분리, 죽음이 삶의 마지막 등의 죽음관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을 경우, 사소한 견해로 논쟁하는 것보다, 오히려 죽음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인생을 뛰어넘는 더 큰 존재인 하나님께 자신을 맡김으로 위로를 받게 해야한다. 예를 들어, 죽는 순간 영이 육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소박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우리의 죽음은 영육의 죽음이요 오직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가져야한다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성경에도 죽음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기 때문에 나의 견해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 보다 내담자를 이해하고 그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힐트너의 주장 즉 기존의 신학적 언어를 현장에서 실행하여보고, 그곳에서 새로운 신학적 명제를 도출하고 그런 실용적인 신학을 통하여 이론적인 신학을 도출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공감할만 하다. 우리는 기존의 신론이나 기독론을 새롭게 현장에서 실용적인 면에서 검토하고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 즉, 환자나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보다 의미있고, 보다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는 신학적 명제의 발견과 해석, 그리고 적용과 재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에게 성서나 기독교전통에서 어떤 하나님 상을 찾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떠한 죽음 이해를 가지고 대하는 것이 그에게 적합할까? 하는 것을 우리는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신앙안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신자도 있겠지만,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마지막 순간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우울해 할 때에는 옆에 같이 있어주며, 손을 잡고 기도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시편에 나오는 고통의 순간들(시30, 23등)을 읽어주며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울 수 있음을 인정하며, 그럼에도 하나님안에서 희망이 있음을 얘기해 줄 수 있다. 목회자가 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있으면서 신앙안에서 죽음이 가져오는 두려움(상실감이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등), 고통, 고독 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목회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회개가 되었든 두려움에 떠는 울부짖음이 되었든)을 들어주는 가운데, 목회자는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얘기하며, 공포와 절망을 넘어선 상태에서 죽음에 임할 수 있도록 환자를 도와주어야 한다. 이때 목회자 자신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 새로운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함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셋째로, 죽음 앞에서 목회자의 사명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의 목자로서 목회자는 죽음과 관련된 여타 직종과는 다른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죽음을 지연시킬수 있는 뛰어난 의료기술이 있지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속수무책이며, 이것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변호사도 법적 권리 문제나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 세금 문제나 재산 분배의 문제에 관해서는 필요한 것을 자문해줄 수 있으나, 생과 사로 분리되는 사별의 내면적인 아픔에 대해서는 할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장의사도 사후의 시신을 처리하는 데 대해 물질적이거나 객관적인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오직 목회자가 대답해 줄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당사자들과 가족들이 목회자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목회자는 이에 대해 자신있게 기독교 전통안에서의 바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책상에서 배운 죽음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사변이나 이론이 삶의 현장에서 정작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절망하고, 죽음의 문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임종을 앞둔 침상에서 피상적으로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단순히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다는 이유나 또는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기독교신앙을 전하는 것을 피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된다. 성령께서 그 나름대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심을 믿으면서 분명하게 또한 상황에 맞게 증거해야한다. 만약 목회자가 이 책임을 하지 못한다면 누가 목회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것은 목회자의 사명이고 특권이다.

죽음에 임박할 때가 영적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목회자는 경험에서 배운다. 죽음에 임박해서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을 방어하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죽음이란 위험할 정도로 파멸의 힘을 갖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하는 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받아들일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 순간에 목회자는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 때의 기도는 또한 훌륭한 목회적 돌봄이 된다. 임종시의 기도문이 많이 있지만, 성공회의 의식의 마지막 순서에 나오는 기도문을 예로 들어본다.

오 거룩한 성도의 영혼이여, 그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그대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대를 성별하신 성령의 이름으로 간구하노니, 이 세상을 떠나 오늘 그대에게 평화와 안식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천국, 그대의 거처에서 안식할지어다.

IV. 나오면서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할 수 있지만, 자연 현상으로서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세력이요 비극적 현실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가치관이 빠르게 변화해가는 시대 속에서 죽음을 앞둔 이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자신있게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언제, 어디서나 죽음을 외면하고는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물론 목회자들까지도 죽음을 직시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꺼려해 왔다. 교회는 평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얼마나 삶에 있어서 중요한가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목회적 예방 차원이 될 수 있으며, 위기의 순간에 죽음을 생명의 한 과정으로서 자신있게 맞아들이게 하고,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해 보다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신자들이 평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배워온 전통적인 신앙과 상징들을 오늘 시대에 다시 분명하게 재인식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희망으로 그 날을 담담히 대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현실적인 위협이지만, 이미 사망의 찌르는 가시는 꺾이고 오히려 생명에로 삼킨바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된 자는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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