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상담/상담

[스크랩] 12. 일중독에 숨겨진 완전주의와 작별하기

맑은샘77 2006. 5. 11. 17:17
 

일 중독에 숨겨진 완전주의와 작별하기


목사와 사모가 행복하기 위하여 벗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이러한 옷들을 하나씩 벗어버리면서 행복해졌다. 처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완전주의라는 옷이다. 이제 이 완전주의의 정체를 밝히 알고 담대하게 작별을 고하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서서 그의 도움을 구하자. 그렇다면 우리들은 다시 주님의 품 안에서 메누하(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할 때 쉼을 잃어버린다. 완벽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작은 비판에도 견디지 못한다. 완벽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매일 애를 쓴다. 완벽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것보다 주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게 되고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민감하게 된다. 그러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더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완벽한 목사/사모가 되려는 마음부터 내려놓을 때 목회자는 행복해진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빵점이 되려고 한다면 더욱 자유로워 질 것이다. 실상 영성은 우리 자신이 빵점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100점이 되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우리의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있는 가장 무서운 적(敵)은 완전주의이다. 어떻게 들으면 좋은 것 같이 보이는 이 완벽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단순한 행복들을 파괴하는지 모른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 같고 능동적으로 일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일이라는 것에 중독이 되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 속에 숨겨버리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격려 받지 못하고 자라난 역기능의 가정의 자녀들에게 나타난다. 부모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하고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 또한 완벽주의는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한 자기 합리화에서 시작된다. 완벽주의는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하여 더 적극적으로 자기를 가면 속에 가두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운데 들어갈 때만이 온전한 치유가 가능하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은 완벽해지라고 하시지 않고 온전해지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완전주의의 정체를 알고 내려놓으면 그 다음부터 자유, 평안, 쉼이 찾아온다, 이 완전주의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거짓된 가면임을 알 때 우리는 과감하게 이 완전주의를 내려놓을 수가 있다. 하지만 완전주의의 옷을 벗고 자유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지 못할 때가 많다.


나도 완벽주의자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열등감 속에 살아왔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대하여 흉을 본다든지 비판을 하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열등의식과 함께 내 마음 속 깊은 속에 있는 수치감 때문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외모로만 보고 판단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볼 때에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이상한 눈빛을 볼 때마다 나는 더 완벽해지고 그들보다 월등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6학년 때 일이었다. 우리 자매들은 모두 이화여고를 다녔고 나도 이화여중에 들어가려고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항상 전교에서 일등을 하던 나는 학교 선생님들이 경기여중을 가라고 권고를 많이 받았다. 안산초등학교는 알려지지 않는 학교지만 선생님들은 나를 경기여중에 보내 학교의 명예를 높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권고하는 선생님에 대하여 감사하고 또 한편 나 자신에 대하여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목사이신 아버님은 딸들에게 미션스쿨에 가라고 해서 딸들은 순종하였고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이화여중을 들어갔다. 큰 언니는 입학 할 때 전교 2등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나도 당연히 이화여중에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느 날...이화여중 선생 중 한분이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 언니들이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아버님과도 잘 알고 있는 분이라 놀러 오셨던 것이다. 나는 다른 방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를 잠깐 보자고 하였다. 이화여중에 온다니 너무 기쁘다고 하면서 누군지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본 그 선생은 안색이 변하였다. 그러면서 “너는 경기여중에 가야겠다. 우리 학교는 면접이 있는데...”하면서 내가 당연히 면접에서 떨어질 것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받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것은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나의 깊은 상처를 건드렸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면접에 통과를 했고 들어가서 한 학기 후에는 전교에서 일등을 하였다. 나는 공부만 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상벌레가 되었고 공부라는 일 속에 묻혀 살았다. 그것은 공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를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2년 전 나는 완벽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교인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고 존경받는 사모가 되려고 노력하다 그만 쓰러져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래서 6개월을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때 하나님은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셨다. 그 모습은 완전주의라는 누더기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주님에게 울면서 외쳤다. "주님...저의 완전주의 옷을 벗겨주세요. 그리고 천진하고 노래하며 춤추며 살았던 본래의 내 모습을  찾아주세요." 주님은 누더기 같은 더러운 완전주의의 옷을 하나씩 벗겨주셨다. 미래의 걱정도 벗겨주셨다. 마치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베옷을 풀고 자유롭게 걸어 다니게 하신 것처럼 나도 자유롭게 해 주셨다.


주님은 꿈속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보이느냐?" "주님,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나무와 집들은 보이느냐?" "네, 보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만 보이지 않죠?" 주님은 나의 눈을 다시 안수하여 주셨다. 그러자 주님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눈으로 다른 이들의 숨겨진 상처의 아픔까지 보아라"


6개월의 투병가운데 건강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된 목회자관까지 주님은 치유하여 주셨다. 이제 겸손히 무릎을 꿇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게 되었다. 빵점이 되려고 하니까 주님이 백점이 되어 주셨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눈으로 성도들의 숨겨진 상처까지도, 깊은 상처까지도 보게 하여 주셨다. 주님을 보게 되니까 나의 진정한 모습도 보게 되고 다른 이들의 아픔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상처와의 작별을 허락하셨고 이제는 그러한 완전주의, 완벽주의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 다음에 나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 품 안에서 자유와 평안, 쉼이었다.


완전주의자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주님의 치유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주셨고 하나님이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창조적 자기 자아를 발견하게 될 때 완전주의를 치유할 수 이TEk. 하나님이 가치 있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에게 특별하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귀중한 자화상을 회복할 때 완전주의와도 작별할 수가 있다. 사실 완전주의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때 나오는 방어행동이다. 그리고 무시당하고 왕따 당할 때 스스로 만들어 입는 방어적인 옷이다. 그러므로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나아가 자신의 귀한 자존감을 회복할 때 완전주의는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살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완전주의와 작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완벽한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체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완전주의에게 작별을 고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도 완전주의라는 옷을 입고 있다면 건강하게 작별을 할 준비를 하자. 혼자의 힘으로는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완전주의는 더 이상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고 우리의 집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출처 : 아버지와 함께 쓰는 신학이야기
글쓴이 : 윤남옥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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