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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와 세례의 효과에 관한 신학적 쟁점(허호익)

맑은샘77 2019. 7. 30. 11:04

재세례와 세례의 효과에 관한 신학적 쟁점(허호익)

재세례와 세례의 효과에 관한 신학적 쟁점, [신학과 문화] 15(2006.5.20) : 199-230

 

허호익(조직신학)

 

1. 서 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분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28:19)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증 받는 의식으로 행해진 예전이었다. 그리하여 세례는 유대교의 할례를 대신하는 의식으로 수용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개종은 세례를 통해 이루어 졌다. ?사도전승?에 따르면 세례는 3차의 걸친 엄격한 심사와 3년간의 교리 교육 후에 베풀었다고 한다. 세례 예비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금지된 직업과 일의 목록을 정하여 두었으니 세례를 받기 위해 생업을 바꾸는 결단이 요청되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례받기가 너무 쉽다. 형식적인 세례로 인해 세례교인의 진정성과 차별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범죄자로 드러나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극소수겠지만, 가짜 세례증명서가 발급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기독교대학에는 교수가 되기 위해 세례증명서가 요청되는데, 예전에 교회를 다녔고 부모가 교회를 다닌다는 등 여러 이유를 대고 앞으로 세례를 받겠다는 조건으로 세례증명서를 떼 달라고 압력을 넣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는 공문서 위조이며 하나님의 성례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오래 전에 군인교회에서 훈련병들에게 하루 외출하여 영화 한편 보여 주고 설렁탕 한 그릇 사주는 조건으로 세례(침례)받을 군인들을 모집하러 다니는 어느 집사를 만난 적이 있다. 미국 선교사의 의뢰를 받아 세례 받을 사람 당 얼마의 지원금 준다기에 여러 차례 훈련병들을 모아 세례문답교육 후 세례를 주는 것을 보았다. 그 중에는 훈련이 힘드니까 불순한 동기로 세례 받은 훈련병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군대에서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다시 세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재세례를 요청하는 일이 생기고 있다.

카톨릭 교회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이 개신교 교회로 왔을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 먼저 성례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의 리마선언(1982)의 정신에 따라 우리 교단(예장 통합)에서는 카톨릭 교회와 서로 세례와 영세를 인정함으로서 일단락되었지만, 지금도 이를 문제 삼는 이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단으로 정죄된 집단에서 탈퇴하여 온 교인은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새롭게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유력한 교계신문사 기자가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필자에게 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이 글에서 초대교회의 세례예비자의 세례 교육과 엄격한 심사 과정 및 세례의식 절차를 살펴보고 재세례 논쟁과 관련하여 제기된 세례의 효과에 대한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과 재세례파의 견해 즉, 인효론(人效論), 사효론(事效論), 신효론(信效論) 그리고 은효론(恩效論)의 쟁점들을 살펴봄으로서 이단종파에서 받은 세례의 효과에 대한 신학적 답변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2. 노바티안파와 키프리안의 재세례 논쟁과 인효론

 

100년경 시리아 지방의 어느 교회에서 편집한 것으로 알려진 ?열 두 사도들의 가르침?(Didache)에는 세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을 담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살아 있는 물로 세례를 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성찬을 먹거나 마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례와 성찬이 기독교의 주요한 성례로 정착 된 것을 보여준다.

저스틴은 세례를 회개와 하나님 지식의 목욕이므로 그 생명수만이 회개한 죄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영적인 예식이고, 이사야가 예언한 죄 사유에 이르는 유일한 관문이라고 하였다. 오리겐 역시 세례가 죄사함을 받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터툴리안은 세례의 효과는 죄사함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중생 및 성령의 은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세례는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는 단 일회적인 성례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초대교회는 대체로 세례를 세례 이전의 죄를 사함 받는 단일회의 유일한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세례의 효과와 재세례에 관한 논쟁은 3세기 중엽 로마교회의 분열로 말미암아 제기되었다.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 치세 동안의 황제에 대한 분향을 강화함으로서 많은 배교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배교자도 회개하면 사죄 받을 수 있는 지 여부와 거룩한 교회에 배교자가 들어 올 수 있는 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제기 되었으며, 결국 로마교회가 둘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배교자나 분열된 교회에 속하는 자들의 재세례의 여부와 관련하여 세례의 효과에 관한 새로운 신학적 논쟁으로 제기되었다.

251년 데시우스 황제가 죽자 박해 기간동안 로마교회의 파비안 감독이 순교하였으므로 로마 교회는 새로운 감독을 선출하게 되었다. 노바티안과 코르넬리우스가 경합을 벌였으나 코르넬리우스가 차기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코르넬리우스는 우선 박해 기간동안 흩어진 교우들을 모아 교회를 재건해야할 과제가 중차대하였다. 그래서 박해 기간동안 배교한 자들일지라도 참회를 하는 자들은 용서하고 교회가 용납하여야 한다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로마교회의 저명한 장로였던 노바티안은 거룩하고 순수한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세례 때 죄를 용서받은 뒤 다시 중죄를 지은 사람은 거룩한 교회에 들어 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노바티안은 로마교회에 대해 배교자들을 교회에 허입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들에 대한 용서는 그것을 베풀 수 있는 하나님만의 몫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하였다. 노바티안과 그의 추종자들은 처음부터 교회가 사죄의 권세를 지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배교자들을 용서하는 것은 교회의 권세의 영역 너머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로마교회는 배교자 처리 문제로 온건파와 엄격파의 갈등이 증폭되었고 마침내 노바티안을 비롯한 엄격파들이 로마 교회에서 따로 떨어져 나갔고, 그 추종자들이 노바티안을 대립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로마 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박해시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참회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한 로마의 감독 코르넬리우스(251-253)251년 로마교회회의 열어 로마교회에서 불열해 나간 노바티안파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박해기간 동안 피신해 있다가 박해가 끝난 251년 초 카르타고로 돌아온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 역시 로마감독 코르넬리우스와 입장을 같이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의 분열을 통탄히 여기고 배교도 비거룩한 것이지만 배교자의 용서를 용납하지 못하는 노바티안파의 불관용은 더 비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 일치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로마교회에서 분열해서 교회 밖으로 나간 노바티안파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저 유명한 명제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키프리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교회를 분열시켜 나간 열교자(裂敎者)들에 의해 베풀어진 세례는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교회에서 분열된 교회가 구원이 없듯이, 하나의 세례를 분열시킨 자들의 세례도 효과가 없다고 하였다.

 

하나의 세례 외에 다른 세례가 있을 수 없는데도 그들은 세례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생명의 샘을 고갈시켜 버렸는데도 생명과 구원을 주는 물의 은총을 약속합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씻을 수 없고 오히려 더럽혀 지기만합니다.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적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식을 낳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에게 자식을 낳아줍니다.”

 

키프리안은 교회로부터 떠난 이단이나 분파들에 의해 집례 된 세례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그는 그런 세례를 더럽고 신성모독적인 모욕이라고 묘사한다. 그들의 세례는 죄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축적하는 것이고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노바티안파는 키프리안의 원리를 그대로 키프리안에게 적용해서 배교자를 끌어들여 불순해진 공교회(catholics)의 성례도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배교자에게 받은 세례나 배교자를 받아들인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무효이므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이 각각 상대의 세례의 정당성과 효과를 부정하고 재세례를 주장하자 255년 초 마그뉴스(Magnus)는 칼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에게, 만일 이단으로 정죄된 노바티안파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자가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될 때 그에게 새로 세례를 베풀어야하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255년 칼르타고에서 감독회의를 열어 노바틴안파의 세례는 유효하지 않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라 교회의 이단자들과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서품 받지 않은 감독들의 세례, 성찬례, 순교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을 재확인 하였다.

코르넬리우스의 후임자인 로마 감독 스테판(d. 257)은 칼르타고 교회의 결정은 성례의 혼란을 야기 시킨다고 생각한 키프리안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세례의 효과는 집례자의 신앙과 과 덕행에 달려 있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은 그대로 도나투스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스테반은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였다. 그는 정확한 삼위일체 정식으로 행해진 세례는 올바른 세례이고,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례의 유효성은 세례 집행자의 신앙과 덕행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례 집행자의 정확한 배품과 올바른 지향에 달려 있다 주장하였다. 스테판 감독은 단호한 어조로, “전승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새롭게 해서는 안 된다”(Nihil innovetur nisi quod traditum est)고 주장하고, 세례 받은 이단자가 교회에 다시 들어오는 데에는 고해하고 안수례만이 필요할 뿐 재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원칙을 세웠고 후에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어쨌든 배교자나 이단종파의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칼르타고 교회와 로마교회의 입장이 일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논쟁

 

50년 정도 지나서 같은 논쟁이 재발하였다. 도나투스(d. ca. 355) 역시 배교한 감독에게서 서품은 받은 감독은 감독이 될 수 있는 가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311년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카이실리안(Caecilian)을 선출한 것을 도나투스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과정에서 분출되었다. 카이실리안은 303년부터 시작된 황제 디오클레티안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성서 사본을 넘겨준 감독에게서 감독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도나투스는 가시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은 오염을 전할 수 있고, 거룩하지 않은 사제로부터 계승되는 것은 모두 부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도나투스가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 카이실리안은 이에 반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분쟁에 개입하여 로마 감독이 이를 중재하도록 명령했다. 로마 감독 밀키아데스(Milchiades, d. 314)의 주재로 로마의 라테란 궁에 소집된 교회회의는 313102일 배교한 감독에 의해 서품을 받았다 할지라도 감독으로서 선출되는 대에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결론과 함께 카이실리안을 복귀를 결정하였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키프리안과 칼르타고 교회는 이단이나 분파에 속한 집례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으나, 로마교회의 스테반과 밀키아데스는 배교한 감독에 의한 서품일지라도 정당한 절차에 의해 베풀어 진 것이라면 그 자체로서 효과가 있다고 결의하였다. 전자는 세례의 주관적 효과론을 받아들여 재세례를 요구했고 후자는 세례의 객관적 효과론은 수용하여 재세례를 요구하지 않음으로 성례의 혼란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모순된 결정이 내포한 문제를 새롭게 조정한 이가 어거스틴이다. 그는 세례의 집행의 정당성과 세례를 통해 주어진 은총의 유효성을 구분하였다. 먼저 세례의 정당성에 관해 ?요한복음 주석?에서 베드로나 바울이나 심지어 유다가 세례를 주어도 그리스도가 세례를 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통해 세례의 정당성이 집례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어서 믿는 자들은 단 한번 수행된 세례를 통하여 이전뿐 아니라 이후에 지은 어떤 죄라도 용서 받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수여되는 세례의 정당성은 사제의 인격의 순수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므로 정통 관례에 따라 정당하게 시행된 성례는 타당하며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배교자뿐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같은 분열자들의 세례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라면 그 정당한 세례라고 하였다. 이는 보편교회에 받은 세례를 무효화시키고 재세례를 주장한 도나투스파나 도나투스파에서 받은 세례를 무효화시키고 보편교회에서 재세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모두 배격함으로서 재세례에 의한 성례의 혼란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정당한 절차에 따라 시행된 세례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세례론?(c. 400)에서 이단과 분파의 세례일지라도 정당성은 있으므로 세례는 반복될 수 없지만, 오직 세례를 받은 자가 단일한 참된 교회로 돌아올 때만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스스로 분리되었지만 세례를 잃어버리지는 않은 이단과 분파들에서...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는, 비록 그의 죄가 그 신성모독적인 죄악으로 인해 용서되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개심하여 교회의 교제와 통일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돌아올 때,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 화해와 평화 안에서, 그가 분파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에게 유익을 줄 수 없었던 그 성례가 이제 [교회의] 통일성 안에서 그의 죄의 사면을 위하여 그에게 유익을 주기 시작하는 일이 그에게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를 통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참 교회와의 일치와 사랑의 교통안에 있을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 유다의 세례가 정당하듯이 도나투스파에 의한 세례는 정당하지만 그 효과는 보편교회에 속하여 있을 경우에만 유효하다는 새로운 논리를 확립하였다. 도나투스파들은 보편적'(catholic)이지 못하기 때문에 참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그들은 그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세계의 다른 교회들과는 친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일치론?(c. 400)에서는 거룩한 교회에는 배교자가 들어올 수 없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을 반박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한 일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도나투스파에서 받은 세례가 정당하지만 그 효과는 보편교회와의 일치 안에서만 유효하므로 도나투스파가 보편교회로 돌아올 경우 그들의 세례가 비로소 유효성을 지니게 된다고 하였다. 교회도 하나고 성령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므로 이러한 단일성과 사랑의 연대 안에 들어 올 때 도나투스파 교회 안에서 받은 세례는 정당하면서 동시에 유효한 성례의 지위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단이나 분파의 세례 그 자체는 객관적 정당성을 지니지만 그 주관적 효과는 정통교회로 복귀할 때에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키프리안의 주관적 효과론과 밀키아데스의 객관적 효과론의 교묘한 조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4. 중세 카톨릭 교회의 사효론

 

어거스틴의 조화론에도 불구하고 카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세례의 객관적 효과를 더 강조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악한 사제가 집전한 미사는 선한 사제가 집전한 미사보다 효과가 적은 것이 아니다.”는 그레고리의 말이 자유 인용되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그레고리 대제(ca 540-604)가 객관적 세례 효과를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레고리 이후에도 이러한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세그니의 브루노(Bruno of Segni, d. 1121)세례는 그것을 베푸는 사람의 신앙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베푸는가에 상관없이 선하다는 견해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서는 평신도 심지어는 신앙이 없는 사람에 의한 세례까지 행해졌다고 한다.

성례의 효과는 객관적으로 집례 행위 그 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집례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뜻을 지칭하는 인효론(ex opere operantis)이라는 용어는 포이티어의 피터(Peter of Poitiers, c. 1130-1215)의 저작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성례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관해 공식 입장은 교황 인노센트 3(1198-1216)에 의해 선언되었다. 그는 de sacro Altraris myst.에서 비록 행위자의 행위(opus operans or operantis)는 부정한 때가 있지만 그것이 감독교회에서 행해진 세례라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선언하였다. 성례의 효과는 집례자의 자격 즉 행위자의 행위에서’(ex opere operantis)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하여진 행위 자체에서’(ex opere operatums) 나오는 것이므로 집행된 성사(opus operantum)는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이다. 비로소 전자는 세례의 주관적 효과를 주장하는 인효론(人效說)을 그리고 후자는 세례의 객관적 효과를 주장하는 사효론(事效說)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그레고리 대제이후 사효론을 전통으로 지켜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효론과 인효론의 논쟁은 루터와 칼빈이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고 이에 근거하여 신효론 또는 은효론을 제시함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트 공의회(1564)에서는 루터와 칼빈 그리고 재세례파들에 의해 주장된 은효론 또는 신효론을 반대하고 카톨릭교회의 전통에 따라 은총은 신약성서에 의하여 사효적(ex opere operatums)으로 전하여 진다.”는 교리를 확정하였다. 트렌트 공의회는 성례의 수혜자에 의해 효력이 나타난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거부하였다.

 

만일 누구든지 새로운 율법이 지정한 성사들에 따라 수행된 행위를 통해서 은혜가 전달될 수 없으며, 오직 신적인 약속에 대한 믿음만이 은혜를 얻는 데 있어서 유효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5. 루터와 칼빈의 세례 이해

 

루터는 중세교회의 여러 모순 즉 면죄부 판매와 연옥설과 교황권의 남용 등은 고해제도에 근거해 있음을 밝혀 95개 조항을 제시함으로 종교개혁의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중세교회의 근본모순으로 분석한 고해제도는 사실상 세례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중세교회가 세례를 과거의 죄의 소멸로서 죄 사함의 표시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세례 이후의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세례이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고해를 통한 속죄를 교리화 하였고, 그래서 고해는 파선 후의 제2의 널빤지로 통용 되었다. 세례이후의 죄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사제의 사죄권과 고해제도가 세례 이전 죄의 소멸에 관한 세례론을 보완하기 위한 교리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마가복음 16:16)”라는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약속이 세례의 요점이라고 주장한다. 세례는 성찬과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세례는 과거의 죄의 소멸로서 구원의의 표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신적 약속의 표시이기 때문에 이 성례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죄 사함을 수여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구원 전체가 이 약속에 달려 있으며, 이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이 생긴 것이므로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언약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들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이다고 하였다. “이 신적 약속의 진리가 한 번 우리에게 선포되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세례는 세례이전의 죄뿐만 아니라 세례 이후의 죄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을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세례이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고해하는 것은 세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세례의 통한 구원의 약속은 세례 이후의 죄로 인해 파산되는 것이 아님을 아래와 같이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당신은 세례 후 제2의 널빤지라고 생각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며 사실상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를 알 것이며, 죄 때문에 세례의 능력이 파괴되고 그 배가 조각났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유해한 오류인지를 알 것이다. 그 배는 하나로 견고하고 정복할 수 없게 남아 있으며 그것은 결코 조각난 널빤지로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한 번 받을 뿐이지만 신앙으로 끊임없이 세례를 받음으로 항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세례 이해는 전적으로 그의 칭의 교리와 관련되어 있다. 루터는 세례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것 인가에 집중한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전가(imputation)되어 사망과 부활, 즉 충분하고 온전한 칭의가 이루어진다. 루터는 물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물이 과거의 죄를 소멸하는 죄 사함의 표시가 아니라 물과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물이 은혜가 풍성한 생명의 물이 되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루터의 ?소 요리 문답?(1529)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물 자체가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물 안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물은 단순한 물이며 세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그것은 세례가 되며 은혜가 풍성한 생명의 물이며 또 그것은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씻음입니다.”

 

루터는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수용하여 성례에 있어서 말씀의 우선성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성례 없이 신앙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은 성례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 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후에 트렌트 공의회는 성례 없이 신앙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루터의 주장을 정죄하였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세례가 구원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보지 않았다.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면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세례를 그리스도께서 명한 것이므로 세례를 경멸해서는 안 되지만, 세례를 받을 수 없어서 받지 않았을 지라도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루터의 견해라고 한다. 세례에 우선되는 것이 믿음이므로 믿음이 있다면 세례와 상관없이 구원이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칼빈 역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라는 (16:16)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 이라고 하였다. 세례는 이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 주어지는 은혜의 수단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 안에 있는 믿음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셨고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 안에 있는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세례를 그 징표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이 약소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와 표지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세례가 신앙 고백의 표지라 할지라도 그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례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정인 한,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며, 또한 우리의 정결함이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죄의 용서 안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과 더불어 온전히 조화롭게 살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간다는 것도 증거 해야 한다.”

칼빈은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의 말씀 물 자체가 우리를 깨끗하게 씻는 구원의 원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성례에서 이런 은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세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증거 함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돕는다. 따라서 세례는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과 함께 받아야 한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세례가 구원에 대한 지식과 확실성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의 기능은 원인적인(causative) 것이 아니라 계시적(revelatory)이다.

칼빈은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영감을 받아 세례는 단지 과거의 죄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의 약속임을 강조한다. “세례는 단지 과거의 죄만 사함 받기 위한 것이어서 세례 후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또 다른 구원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도행전 2:28절 강해에서 교황주의자들은 세례의 효력을 출생과 이전 생활에 제한시킨다고 비판하였다. 카톨릭 교회의 이런 오류 때문에 임종시까지 세례를 미루어 온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세례를 받든지 간에 우리의 일생동안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세례는 한번 받는 것이며 지나간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세례 이후에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세례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 짐에 눌려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위로라고 하였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세례는 원죄의 소멸을 통해 아담의 원의(原義)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은총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확신 즉, 우리의 모든 죄와 그로 인해 받을 형벌을 사해 주신다는 확신을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세례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로 결단하는 믿음의 표시가 되는 것이다. 세례를 죄 사함의 가시적 공적인 유일회적 표식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시작의 표식으로 보았다.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원리에 따라 세례를 이해했기 때문에 세례는 믿음의 시작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이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는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 받을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세례이후의 죄의 문제를 고해가 아닌 지속적인 믿음의 생활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된 것이다.

 

6. 루터와 칼빈 및 재세례파의 논쟁 : 신효론과 은효론

 

세례의 효과 역시 이러한 칭의론적 세례 이해에 근거해 있다. 인효론과 사효론의 논쟁에서 카톨릭 교회는 사효론이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였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루터에 의해 새롭게 제기되었다. 루터는 만약 베드로와 배신자 유다가 미사를 집전한다면, 베드로의 미사라고 해서 유다의 미사보다 낫지 못할 것이다.”는 그레고리의 말을 방패삼아 카톨릭 교회가 사효성(事效性, opus operantum)과 인효성(人效性, opus operans)을 구별하고 [전자를 수용하여] 악한 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은덕을 입힌다고 카톨릭 교회의 사효론을 비판한다.

 

그들은 미사는 행해지기만 하면 효력이 있다는 사효성(신앙이 없어도:역주)을 지니기 때문에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악하다면 그에게 해가 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와는 아무 상관없이 유익하다는 거짓말 호언장담할 정도로 어리석음에 극치에 이르렀다.”

루터는 축복된 성례전과 형제애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opere operato, 다시 말하면 비록 그것을 집행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성례의 효과가 있는 것이므로 성례는 많이 드릴수록 좋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또 한번 비판한다. 루터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하여 그의 몸을 주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말씀이 효과를 자아낸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성례는 그 자체를 위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도록 제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성례전을 집행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실천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례를 받을 때 신앙이 존재하지 않거나 생기지 않는다면 세례의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초기 루터는 세례의 효과는 집례자의 신앙이나 태도보다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의 태도에 많이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루터가 카톨릭의 인효론이나 사효론을 비판하고 신앙으로 받은 세례만이 효과를 지닌다는 소위 신효론(信效論)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앙으로 받은 세례만이 효과를 지닌다는 소위 신효론(信效論)은 재세례파들의 의해 극단적으로 주장되었다. 스위스에서 쯔빙글리의 제자 콘라드 그레벨(Konrad Grebel)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형제단152310월 미사문제로 공개토론을 가진 이후부터 쯔빙글리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해서 그 후 유아세례 문제로 결별하게 되었다. 이들은 카톨릭 교회 즉, 교황제도하의 불경건한 우상숭배자들에게 받은 세례는 세례의 효과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15251월 재세례를 받음으로서 재세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재세례파들은 기본적으로 참된 교회는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교회론에 근거하여 믿는 자의 세례’(Believer's Baptisim)을 강조하였다. 재세례파 역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라는 (16:16)는 말씀에 근거하여 세례의 효과는 믿음의 고백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세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신앙에 대한 자발적 증거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한 삶과 형제적 교제를 위한 서약의 의미이다.

재세례파인 호프만(Melchior Hoffman)세례는 주님의 가르침과 설교를 받아들일 수 있고, 흡수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나이든 사람과 성숙하고 합리적인 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각적인 믿음의 고백이 불가한 유아세례를 적극 반대하여 저 유명한 유아세례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재세례파는 세례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의 도구라는 객관적 사실보다는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자발적 주관적인 수용을 더 중요시 하였다.

후기의 루터는 세례를 세례 받는 개인의 신앙에 의존시키는 재세례파의 극단적 신효론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오류가 없는 완전한 신앙은 불가능하며 그리고 신앙을 명시적으로 입으로 고백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신앙이라는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를 세례 받는 사람의 신앙의 근거시키는 모든 사람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도 세례를 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재세례파에 대한 루터의 가장 중요한 논증은 세례를 신앙에 의존시킬 때 우리는 충분한 신앙을 가졌다는 확신에 거의 도달할 수 없으며, 그래서 우리 세례의 타당성에 거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를 세례 받는 사람의 신앙의 근거시키는 재세례파의 주장은 일종의 행위의 의에 구원을 근거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참으로 우리는 세례에 신앙을 첨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신앙 위에 두려고 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신앙을 가지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나 세례를 신앙에 의존하게 하는 것 사이에는 전적인 차이가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신앙의 힘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자는 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우상 숭배자이다.”

 

세례 받는 사람의 신앙적 노력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세례가 신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에 신앙이 종속되는 것이다. 세례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약속인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카톨릭 교회에서 받은 세례를 무효화 한다면 천년 이상 지속된 기독교신앙을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이 된다. 이 경우는 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제3항을 위배하는 것이 된다. 재세례는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고 논박하였다.

루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해서 세례를 준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잘 못 될 수 없다."41) 세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집례자가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며(인효론), 집례행위 자체로 세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사효론), 그리고 우리가 세례를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에 세례가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신효론), 세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루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례는 하나님의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이므로 우리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말씀이 물을 따를 때, 비록 신앙이 없어도 세례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내 신앙이 세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기 때문이다. 세례는 그것이 잘못 받아지거나 사용되더라도 타당성을 잃지 않는다.”42)

 

따라서 세례를 세례 주는 사람의 신앙에 근거시키는 인효론(人效論)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세례 받는 사람의 신앙에 근거시키는 신효론(信效論)도 타당치 않으며 세례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손으로 받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이자 하나님의 세례이므로 세례에 있어서 오직 외적 의식은 인간에게 돌리고 내적인 작용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이지 집례자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받는 세례만이 유효하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은 집례자의 의도에 따라 세례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인효론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우리의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우리의 믿음에 근거해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 역시 성례는 집례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 같이 생각된다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를 집례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전제하고 편지와 편지전달자의 비유로 이를 설명하였다. 편지의 필적과 서명만 충분히 인정되어 전한 사람이 누구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그것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세례파가 교황제도 하에 불경건한 우상숭배자들에게 세례를 받았으므로 재세례를 주장하였지만 칼빈은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며(28:19) 누가 집례하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우리에게 세례를 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심지어 하나님을 명시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무지와 신성 모독에 참가하도록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세례를 준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세례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자들이 세례 받은 한 후에도 은혜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확고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죄의 용서를 모든 믿는 자에게 실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세례에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이 약속을 받아들이자.”고 역설한다.

칼빈 역시 카톨릭 교회의 사효론(opus operatum)을 비판하였다. 에스겔 2020절의 강해에서 교황주의자들은 성례들은 치명적인 죄의 장벽이 없는 한 유효하다고 말하지만 거기에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사람이 신앙은 조금도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한다면 그의 몸과 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를 받는다는 주장하지만, 칼빈은 마치 단단한 바위 위에 비가 떨어지면 흘러 내려가 버리듯이 신앙이 없이는 성례에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성례전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한다고 가르쳤지만, 궁극적으로 성례전의 유효한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예정 안에서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칼빈은 아모스 525-26절의 강해를 통해 세례의 효과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거룩하고 변치 않는 증거에 근거해 있음을 재확인 한다.

 

세례는 악마에 의해 집례 된다 하더라도, 그것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 불경건하고 타락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거룩하고 변치 않는 증거이다.”

 

세례의 효력은 그 자체로서 생겨나는 사효적인 것(ex opere operato)도 아니며, 집례자나 수례자의 신앙과 덕행에서 비롯되는 인효적인 것(ex opere operantis)도 아니다. 성례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 예정하신 자들의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성례전을 받게 하실 때에만 그 효력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배경에서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재세례를 주는 것 자체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세례는 그 안에 이 은총의 약속이 무시되었기 때문에 다소 무익한 것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루터와 칼빈이 세례의 효과는 우리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은혜에 근거해 있다는 주장은 세례의 효과가 우리의 신앙 여부에 달려 있다는 재세례파의 신효론(信效論)과 구분하여 은효론(恩效論)이라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와 칼빈이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근거도 세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약속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자의 신앙고백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으로 새 계약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은효론에 근거한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의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고 이 은혜의 약속은 유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1649)은 성례의 효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집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사(意思)에 좌우되지 않고, 성령의 사역과, 그 성례에 관한 말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에는 성례를 집행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명령과 함께, 합당하게 성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루터와 칼빈의 전통에 따라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 역시 인효론이나 사효론과 다르게 은효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7. 결 론

 

세례의 효과에 대한 논의는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어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카톨릭 교회와 은총으로 주어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개혁이후에도 재세례파는 하나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믿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주관적 믿음의 수용보다 객관적 은총의 약속을 강조한 루터와 칼빈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최근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러한 종교 개혁가들의 전통을 물려받아 리마예식서(1982)에서 세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l)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이다.

2) 세례는 중생, 용서 그리고 씻김을 말한다.

3) 세례는 성령의 선물이다.

4)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됨이다.

5)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적으로 보면 제임스 화이트(J. White)가 잘 지적한 것처럼 세례의 다섯 가지 의미 중 하나 내지 둘 정도는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되어 왔다. 세례의 다양한 의미가 죄 사함의 표시로 축소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약속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세례 이전의 죄의 소멸에만 국한 되는 죄사함의 표시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성령의 선물을 받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참여하는 은혜의 약속인 것이다.

세례의 효과도 이 은혜의 약속을 통해 일차적 효과가 나타나고 그 은혜의 약속이 믿어지는 믿음을 통해 그 효과가 드러나는 것이다. 은효론과 신효론의 논쟁은 결국 이 은혜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우리 인간이 주도적인가 하는 것이 쟁점으로 보인다. 세례를 통-087\해 구원의 약속이 은혜로 주어지며 이 은혜가 은혜로 믿어지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효론에 따르면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든 이단종파에서 세례를 받았든, 이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약속으로 굳게 믿고 그 믿음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면 다시 재세례를 받아야 할 신학적 이유는 없게 되는 것이다. ‘세례는 하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교회 일치의 주요한 지침이기 때문이다. (2006.5.8)

국문초록

 

한국교회는 형식적인 세례로 인해 세례교인의 진정성과 차별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사도전승?에 따르면 3차의 걸친 엄격한 심사와 3년간의 교리 교육 후에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세례 예비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금지된 직업과 일의 목록을 정하여 두었으니 세례를 받기 위해 생업을 바꾸는 결단이 요청되었다.

최근에는 이단으로 정죄된 집단에서 탈퇴하여 온 교인은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세례의 효과에 관한 4가지 주장을 살펴 보려고 한다.

첫째는 인효론(人效論)이다. 세례의 효과는 세례를 베푼자의 신앙과 덕행, 행위자의 행위에서’(ex opere operantis)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분열시킨자들의 세례는 효과가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노바티안과 도나투스는 배교자를 수용한 거룩하지 않은 카톨릭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따라서

둘째는 사효론(事效論)이다. 세례는 집례자가 배푸는 것이 아니므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집행된 성사(opus operantum)는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이다. 스테판과 밀키아데스는 세례의 효과는 행하여진 행위 자체에서’(ex opere operatums)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베드로의 세례나 가롯 유다의 세례나 모두 동등하게 정당하다고 주장함으로서 사효론적 입장을 공고히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단이나 분파의 세례 그 자체는 객관적 정당성을 지니지만 그 주관적 효과는 정통교회로 복귀할 때에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키프리안의 주관적 효과론과 밀키아데스의 객관적 효과론의 교묘한 조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신효론(信效論)이다. 초기의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 교회의 사효론을 비판하고 칭의론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받은 세례만이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효론은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에 의해 극단적으로 주장되었으며, 믿음의 고백이 불가능한 유아 세례의 효과여부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넷째로 은효론(恩效論)이다. 후기의 루터는 세례를 세례 받는 사람의 신앙에 근거시키는 신효론(信效論)은 세례를 세례 주는 사람의 신앙에 근거시키는 인효론(人效論)과 마찬가지로 정당치 않으며 세례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은효론에 따르면 카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든 이단종파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 세례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약속으로 굳게 믿고 그 믿음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면 다시 재세례를 받아야 할 신학적 이유는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