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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터키(Turkey)/에페수스(Ephesus)개요, 에베소교회(성모마리아의 교회)

맑은샘77 2018. 11. 7. 16:39

에페수스(Ephesus, 에페소)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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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의 기원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의 전설이 있다. 전승과 호머의 시가 일리아드에 의하면 이곳 에베소와 이즈미르 그리고 흑해 연안에 궁술에 능하고 용기가 출중하였던 여자 전사들의 부족이었던 “아마존 여자 부족”(브라질의 “아마존”과는 관계없음)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꿀벌을 그들의 상징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찍부터 벌을 기르고 꿀을 따는 양봉 기술을 개발하여 얻은 꿀을 팔아 부를 축적하였다.

그래서 아마존 여전사 부족의 족장의 이름도 고대 히타이트 어로 “여왕 벌”을 뜻하는 “아파사스(또는 에페시아)”라고 하였는데, 이 “아파사스”라는 이름으로부터 에페수스(Ephesus)의 도시 이름이 유래되었다. 에베소의 유적들은 셀추크(Selcuk)에서 십 리도 채 못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에페스(Efes, Ephesus)는 기원전부터 번창했던 고대 도시국가였다. 지금은 바다로부터 약 4 Km 정도 내륙에 있지만 당시 에페수스로 불렸던 이곳은 바다 항구도시였는데, 해상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그리스와 로마 양식의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리시마쿠스(Lysimachus) 장군이 피온 산기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고, 로마 시대에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 특히 정치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이곳에는 약 250,000 ~ 300,000명의 인구가 있었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는 그의 정적 옥타비우스(후에 Augustus로 개명)와 전쟁을 하던 중에도 그의 애첩,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서 샤핑을 하면서 머물기도 하였던 곳이다.

에베소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황제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5 대 도시 중 하나였는데, 부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에베소가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은 대지진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흐르고 있었던 헤르무스 강에 토사가 쌓이게 되었고 진흙으로 덮여진 항만에서 모기들이 번식하여 말라리아 병이 확산됨에 따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도시를 버리고 떠나면서 더욱 빨리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 에페수스(Ephesus) 복원도

12세기에 이르러 이곳으로 침략해온 셀추크 터키인들의 공격으로 남아있던 에베소의 기독교인들도 정든 이 도시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지진과 토사로 인하여 아름다운 에베소는 땅속으로 묻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베소는 항구 도시였지만 세월이 흘러서, 해안이었던 곳이 토사로 매립되기도 하고 많은 지진으로 지형이 변하게 되어 지금은 해안으로부터 약 4 Km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게 되었다.

항구대로(Harbor Street)

에베소는 피온 산과 코레수스 산 사이에 정교하게 계획된 도시 계획에 따라 정연하고 아름답게 배치시켜 건설한 전체 길이 9 Km에 달하였던 커다란 도시다.

크레테스 도로옆 상점앞에 깔려있는 모자이크 길

말이 끄는 이륜 전차를 끌고 장군들이 달렸다고 하는 화강암으로 깔린 도로, 모자이크 장식으로 치장한 대리석 길, 정교하게 장식하여 깎아 세워 올린 둥근 기둥들, 재판을 하고 토론도 하였던 광장 아고라가 있다.

  ▲ 아고라(Agora)

대극장 (Great Theatre,야외극장)

유리피데스의 희극이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공연되었다고 하며 3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커다란 야외극장이 있고 “내가 정복하였던 땅은 모두 나의 발밑에 있다.”고 호령하였던 트라얀 황제의 석상, 12,000권의 장서를 소장하여 책을 통하여 지식과 지혜를 공부할 수 있게 하였던 셀수스 도서관 등 화려하고 보석과 같은 유적들이 많다. 

▲ 셀수스(Celsus) 도서관

에베소 유적지로 들어가는 매표소 오른쪽에 당시에 주로 노예나 하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시장이 있었던 곳에 에베소교회가 있다. 원래 이 건축물은 로마시대의 건물로써 하드리안 황제 때에 Museion(특별교육을 위해 세워진 특수학교의 일종)으로 의학과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4 세기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교회로 전환하여 증축하였고, 그때부터는 ‘성모 마리아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 에베소교회(성모마리아의 교회)

이 교회당 건물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세워진 최초의 성모 마리아 교회로 AD 431년 200명의 주교들이 모여 제 3 차 에베소 종교회의(에베소 공의회)를 가졌던 곳이다. 이 종교회의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안(Nestorian)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로 받아들여져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정녀 마리아는 주 예수의 어머니 곧 성모(Theotoskos, Mother of GOD)이시다.”라는 “기독교 교의”가 확정되었다.

▲ 성모마리아의 교회

그 이후로 동정녀 마리아는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로 불리게 되었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 세의 방문으로 성모 마리아 교회와 성모 마리아의 집을 가톨릭 성지로 지정 되었다.

▼▲ 마리아의 집

유적이 즐비한 에페수스는 그 당시 20여만 명이 살고 있는 대도시였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에페수스를 아시아의 로마로, 신의 제2의 도시로 불렀던 것이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도시에 모실 수는 없었기에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낸 집은 에페수스에서 11km나 떨어져 있는 나이팅게일을 뜻하는 불불산 남쪽 기슭에 나이가 아주 많은 올리브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아래 기억자형의 작은 토담집이다. 

▼▲ 요한을 따라온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한 집

동편 에페수스로 들어가는 마그네시안 게이트로부터 가까운 지점에 누가의 묘가 있다. 이오나아식 건축양식에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사방 16m의 길이로 건축된 것인데 지금은 파괴된 묘는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1860년 영국의 고고학자 T J Wood가 발굴된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 성모 마리아의 집 마리아 상

에페수스의 마그네시안 게이트로부터 약 4 지점, 높이 358m의 언덕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다. 그간 기독교에서는 마리아가 살던 곳이 어디였을까 하는 것이 큰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병상에 있던 독일의 캐더린 엠메리히(Catherine Emmerich)라는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써서 신성한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이 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그녀의 책에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배당의 위치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그 덕분에 1891년 이즈미르 폴리갑 교회의 나사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산 속에 폐허로 남아 있던 비잔틴 시대에 지은 작은 교회가 마리아가 살던 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 마리아의 집 우물

요한복음 19장에는 예수로부터 모친 마리아의 앞날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있고, 실제로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 요한을 따라 에페수스로 갔으며, 여러 가지 증거들로 하여 성모 마리아는 이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승천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 마리아의 집에 기원드리며 달아놓은 헝겊 액자  

출처 : 청주장로성가단
글쓴이 : sungwo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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