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위인 김흥섭 위인전집
2014.01.26. 20:43
http://blog.naver.com/6k5wgl/10184438433
김홍섭(1915∼1965)
전라도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판사가 되었다. 그는 일본 니혼대학에 다니다 변호
사 시험에 합격한 뒤, 와세다 대학 문과로 옮겼다. 1941년 귀국하여 변호사. 검사 생활을
하다 1946년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을 마무리진 뒤 검사직을 내놓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 피난지에서 서울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53년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뒤
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되어 극형수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 생각하는 갈대
홍섭은 자다 말고 철썩! 넓적다리를 쳤다. 치고 보니 그 곳뿐 아니라 팔, 다리 어디라 할
것 없이 미칠 듯이 가려웠다. 아직 여섯 살이던 홍섭은 이 바람에 잠이 깨고 말았다.
장마철도 지난 음력 7월경, 1년 가운데 가장 더울 때이다.
낮에는 뙤약볕이 이글거려 벼를 심은 논 가까이 가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벼도 숨을 쉬어요?
이 근처에서 홍섭의 할아버지는 학문이 제일 높기로 알려진 분이었다. 젊었을 적에는 서
당의 훈장을 하셨다고 한다.
벼가 숨을 쉬다니?
논에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어요.
음, 그것은 벼가 자라는 소리다.
홍섭은 또 찰싹! 하며 어깨 뒤쪽을 쳤다. 하지만 손이 닿지를 않아 가려움은 여전했다.
그는 걷어찬 홑이불을 끌어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나 단 10초도 참지 못하고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해가 지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홍섭네 마당으로 마실을 왔다.
어르신네, 진지 잡수셨습니까?
오, 어서들 오게.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밤이 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다. 김매기도 보리 타
작도 끝나 요즘은 비교적 한가한 때였다.
별이 참 많군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1년 중 이 때가 별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을 때일세. 그리고 가을에는 은하수가 우리들
머리 위에 곧장 걸리지.
홍섭으로선 할아버지가 척척 박사로 여겨졌다.
옛날엔 하늘의 별 위치를 쪼개어 이십팔 수라고 불렀네. 북극성과 그 언저리를 삼원
이라 부르고 옥황 상제가 살고 있다고 믿었지. 그래서 그 곳의 별 모양을 모아 전쟁과 나
라의 흥망 등을 점쳤지.
홍섭은 북극성을 찾았다.
또, 사람마다 자기 별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중국 삼국 시대의 제갈 공명은 자기 별의
빛이 희미해지자 제단을 쌓고 수명을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그럼 우리도 저마다 별이 있나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신만이 알고 있네. 마치 자기의 명을 모르는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별똥별이 떨어지는
데 죽는 그 사람만이 그 때 비로소 알지도 모르지.
홍섭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지금 또 콧잔등이 간질거렸다. 얄미운 모기가 하필이면 그런 곳을…….
홍섭은 모기를 어떻게 하면 잡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야, 저것은 내 별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홍섭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집 안마당으로 뛰어들어
갔다.
김홍섭은 1915년 8월 28일 전라 북도 김제군 금산명 원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
재운, 어머니는 강재순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얌전하고 차분하던 홍섭은 외아들이라 부모님은 물론, 고모들의 귀염
도 독차지했다.
아직도 캄캄한 새벽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쇠죽을 쑤고 있었다.
내 별이 떨어졌어.
홍섭은 크게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자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
고 바깥 마당에서 아버지가 따라 들어왔다.
별이 떨어졌다고? 곤하게 자다가 가위에 눌린 모양이로구나.
아니에요. 틀림없는 내 별이야. 자기 별은 자기만이 알고 떨어지면 죽고 만대.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홍섭은 혼자 흐느끼다가 물었다.
쇠죽은 왜 쑤지요? 여름엔 꼴만 주어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홍섭은 벌써 별똥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쇠죽에 콩까지 넣어 가며
대답했다.
머잖아 송아지를 낳게 된단다.
정말?
그 때 대문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직 젊은 사람이 기어이…….
그것은 외삼촌이 오랜 병으로 앓고 있다가 몇 시간 전에 운명했다는 부고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둘렀다. 어머니는 벌써 울음부터 터뜨리고 있었다.
홍섭아, 너도 함께 가자!
아버지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홍섭은 이 외삼촌을 몹시 따랐다.
외삼촌은 그 날로 공동 묘지에 묻혔다. 아직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상여 뒤를 따라가던
홍섭은 졸졸 따라오는 동네 아이들에게 눈을 무섭게 흘기며 쏘아붙였다.
너희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겼니?
홍섭은 일곱 살 때 원평의 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는 봄의 꽃을 좋아했다. 눈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산길에서 할미꽃을 발견했을 때 그는 외쳤다.
정말 놀라운 일이야. 봄이면 이처럼 꽃이 피어나는데 대체 추운 겨울 동안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죽음과 태어남!
홍섭은 며칠 전 태어난 송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젖은 몸을 부
르르 떨며 일어서서 엄마 젖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다시는 살아나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오래 오래 깨는 일 없는 잠을 잔다고…….
그래, 이 꽃을 산소에 가져 가자. 어쩌면 외삼촌도 땅 속에서 기뻐하고 혹시 잠이 깰지
도 모르잖아.
홍섭은 그 꽃이 개나리나 진달래가 아님을 몹시 아쉬워했다.
김제는 역사가 깊은 고장이다. 신라 시대에 벌써 벽골제 가 있었고, 김제에서 고부에 걸
친 만경 평야는 곡창이었다.
홍섭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한편 교회의 주일 학교에도 나갔다. 고모가 기독교
신자로 예배당에 다녔기 때문이다.
고모,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주일 학교는 왜 다녀야 하지?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란다.
어떻게 하느님을 믿지?
그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기도를 배우는 것이란다.
기도는?
홍섭은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이 있었다. 고모는 이런 홍섭에게 귀찮다는 표정도 나타내
지 않고 미소로 대답했다.
사람은 때때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죄를 짓는 일도 있단다. 그럴 때면 죄를 뉘우
치고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
그러면 하느님이 들어줘?
그렇단다.
무슨 일이고?
그래. 하느님은 착한 마음을 가진 착한 사람의 소원은 꼭 들어 주신단다.
홍섭은 또 물으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건성으로 질문을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듣기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홍섭은 의심나는 일에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들으면 반드시 혼자서 열심히 생각했다.
홍섭은 학교에 다니면서 아쉬운 게 꼭 하나 있었다. 집에 시계가 없어 5리나 떨어진 보
통학교에 가려면, 지각을 않기 위해 일찍 집을 떠나야 했다.
시계가 있다면 시간 맞추어 학교에 갈 수 있잖아. 그러면 공부하는 시간도 많아져서 참
편리할텐데…….
아버지, 우리도 시계를 사요.
어느 날, 홍섭은 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농사꾼에게 무슨 시계가 필요하니?
첫닭이 울면 일어나 논밭에 나가고 해가 저물면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아
들의 등교 시간을 맞추는 데 필요한 시계조차 살 수 없는 가난함이 속이 상해 아버지는 필
요 이상으로 무뚝뚝했다.
홍섭아, 좋은 생각이 있다.
고모가 실망하는 홍섭에게 말했다.
교회 종에 맞추면 되지 않니? 교회 종은 새벽 기도나 아침 기도를 알리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울린단다.
홍섭은 고모의 말이 그럴 듯싶어 예배당의 종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당에 갔을 때 종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예배당에서 혼자 살고 계세요?
가족이 없으니까 혼자 살고 있지. 하지만 나는 하느님의 집에 살고 있어 늘 행복하단
다.
홍섭은 허리도 꼬부라진 할아버지가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대답이었다.
홍섭은 그 날 저녁 처음으로 하느님에게 소원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모든 사람이 잠들고 있을 때 종을 치는 할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해요? 저도 그런
종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홍섭이 태어난 1915년은 일본의 식민 정치가 뿌리를 내려 굳어져 가고 있었다. 민적법
이라는 게 정해져 경찰이 맡고 있던 호적 사무를 면사무소나 부청에 신고하게 되었다.
또, 사립 학교령 이란 것을 정하여 조선 아이와 일본 아이의 교육을 차별했다. 조선 아이
의 초등 교육은 보통학교, 저희들 것은 소학교라고 했다. 이듬해에는 중등 교육도 조선 사
람은 고등보통학교, 일본인들은 중학교라고 했다.
홍섭은 이미 열한 살이었다.
홍섭아,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니?
이웃집 전씨네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오늘은 축제일이에요.
그럼 우리 용득이 좀 봐 주렴.
네.
용득이는 세 살쯤 된 아이로 홍섭이를 잘 따랐다. 홍섭은 누나도 동생도 없기 때문에 용
득이를 무척 귀여워 했다. 마치 옛날의 외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업어도 주고 함께 놀아 주
었다.
그런데 참, 상급 학교에는 가게 되었니?
홍섭은 말없이 땅만 보았다. 1학년 때부터 6학년이 되기까지 줄곧 우등을 한 홍섭은 고
등보통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가까운 이리나 전주엔 그런 학교들이 있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서 홍섭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주책 좀 봐! 뻔히 너희 집 사정을 알면서 공연한 소리를 했구나.
용득 어머니는 5전짜리 백동전을 억지로 홍섭 손에 쥐어 주고 들일을 나갔다.
이렇듯 귀여워하던 용득이 그 해 겨울, 병으로 죽었다.
시리도록 싸늘한 별빛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바로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용득 어
머니의 울음소리에 홍섭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가엾은 용득은 광목 헝겊에 꼭꼭 싸매어져 일꾼이 지게에 지고 떠나려는 참이었다. 이
때만 하여도 아이의 주검은 산에 아무렇게나 파묻고 돌무더기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홍섭이도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그런 애총 을 본 일이 있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외삼촌의 상여가 문득 떠올랐다.
홍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밤중에 뒷산에 올라가 별을 쳐다보며 기도했다.
하느님, 불쌍한 용득이를 살려 주세요. 세상 모르고 죄짓지 않은 어린 아이를 왜 데려
가셨나요? 이제는 귀여운 용득이를 영영 볼 수 없나요? 하느님, 부디 용득이를 살려 주세
요.
외삼촌과 아이의 죽음으로 홍섭은 더욱 말 없는 소년이 되어 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영 이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홍섭은 모든 사물을
예사로이 보지 않았다.
홍섭은 보통학교를 졸업하던 날 최고의 영예인 도지사 상 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홍섭이 열여섯 살 때 그의 집은 고향 원평을 떠나 오수로 이사를 갔다. 더 이상 농사를
지어 가며 살 수가 없어, 그 곳 장터에 작은 가게를 하나 내기로 했던 것이다.
호남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마냥 흥청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조선 사람 아닌 일본인 지주들이었다.
1916년 6월, 부산과 군산에 상업회의소 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부산은 그렇다 치고서 군
산이 흥청거린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쌀을 일본으로 마구 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군산항은 쌀과 팥을 일본에 실어 내가느라 북적거렸고 일본 투기꾼들이 들끓었다. 미두
라 하여 지금의 증권 거래처럼 쌀과 팥 따위를 팔고사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도박이
나 비슷하여 잘못 걸려들면 부자라도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기 십상이었다.
또, 이 때만 하여도 조선의 부자들은 땅을 많이 사는게 고작이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다
른 사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총독부도 그와 같은 제한을 조금 누그러
뜨렸다. 이 해 10월, 김성수가 경성 방직회사 를 경영하기 시작한 것도 그 하나의 보기이
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착취는 여전했다. 방법이 교묘해진 것뿐이었다. 예를 들어, 1921년
에는 담배 전매제를 실시했고, 비누·성냥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이 경제권을 모두 잡고 있
었다.
옛날에는 빨래할 때 잿물을 내려 썼고, 성냥 대신 황개비를 만들어 썼지.
그래서 몇몇 뜻 있는 민족주의자는 1922년, 조선 물산 장려회 를 만들어 국산품 애용 운
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홍섭은 아버지의 가게를 도우면서 혼자 독학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홍섭에게
말했다.
아비가 못나서 너에게 고생을 시키는구나. 차라리 일본에 건너가 날품팔이라도 해야 했
었는데…….
그 즈음 총독부는 조선 사람도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고 선심쓰듯 했지만 막상 자본이 없
었다. 일본인들은 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은행의 돈도 끌어 쓸 수 있었지만 조선 사람
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고, 왜놈들의 텃세가 심하다는 말에 그 계획을
중지했단다.
일반 농민들은 돈벌이가 좋다는 일본으로 많이 건너 갔었다. 일본은 군비를 확장하고 있
어 일본인보다 싼 품삯으로 부릴 수 있는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1923년 10월 관
동 대지진 이 일어나자 조선 사람 5천명 이상을 학살하는 흉악한 짓을 벌였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저도 이제는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니.
이 무렵 홍섭은 책을 읽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책을 사 볼 돈이 없어 책을 가진 사람
을 찾아가서 사정하고 빌려 보았다. 그가 읽고서 감동을 느꼈던 것은 링컨의 전기였다.
링컨은 통나무 집에서 태어나 혼자 공부를 하여 마침내 미국 대통령까지 되었구나.
그는 링컨 전기를 몇 번이고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전주로 가서 급사 노릇
을 하며 독학을 했다.
홍섭은 틈나는 대로 독서를 했는데, 링컨 전기를 읽자, 링컨의 일생이 남의 나라, 남의 일
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나도 시골 장터에서 고무신이나 파는 일을 그만두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을
까? 공부를 한다면 무슨 방면으로 나가는 게 좋을까?
소년 시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일이다. 특히 상급 학교에 진학하
여 공부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이런 목표를 정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오수로 이사했을 무렵, 홍섭은 조선 일보 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우리 같은 처지에 신문은 보아 뭘 하겠니?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홍섭의 열성에 그만 지고 말았다.
특히 조선 일보는 1929년, 문맹 퇴치 운동 을 내걸고 있었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
다 하는 표어가 매일처럼 지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이 해 11월엔 광주 학생 운동 이 있었
다.
이 사건의 변호를 위해 활약한 김병로·김용무의 활동이 신문에 났다.
나도 법률 공부를 하자. 저 링컨도 법률 공부를 하여 성공했던 것이 아닌가!
이래서 홍섭은 스무 살 때 전주로 가, 히사나가라는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급사로 일
하게 되었다.
고학 청년이군. 그런데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 내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겠다는 뜻은 무
엇인가?
네, 저는 법률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약한 사람 편에 서서 봉사하고 싶습니
다.
좋아, 그럼 이 곳에서 일하도록 하게.
그런데 선생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홍섭은 사무실 안을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그 사무실에는 책꽂이에 법률책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무엇인가?
저는 급료를 조금 받아도 좋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숙식하며 선생님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히사나가는 홍섭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고학하여 대학까지 나와 변호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것이야 오히려 내가 바라는 일일세. 안심하고 책을 보며 마음껏 공부하게.
홍섭은 일본인에 대해 새로운 인간 발견 을 한 셈이었다. 히사나가는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는 홍섭에게 가끔 격려의 말을 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2. 사명감
홍섭은 히사나가 법률 사무소에서 꼬박 4년을 있었다. 법률 사무소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학교 공부와 또 다른 사회 공부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한 2년쯤 지났을 때였다. 히사나가는 웃는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젊은이는 대개 한 1,2년 지나면 독립해서 나가려고 하네. 왜냐
하면 따로 나가서 사법서사 사무실을 차릴 만큼의 법률 지식은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러나 선생님. 저는 사법서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남을 위해 일하
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하네.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해야 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도 해야
하니까…….
홍섭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히사나가는 껄걸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실망할 것은 없네. 다만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니까.
일본은 1930년대가 되면서 군국주의로 치닫기 시작했다.
1935년이 되면서 일본의 산업체들은 조선으로 건너와 주로 수력 자원이 풍부한 조선 북부
지방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어 1937년에는 중·일 전쟁 이 발발했다. 홍섭은 스물세
살이 되어 있었지만 법률 공부를 하느라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는 히사
나가가 또 말했다.
법이란 글자는 삼수변에 갈 거 자를 쓰고 있듯 아주 딱딱한 학문일세. 그렇지만 내 생
각은 좀 다르지. 법도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
하네.
네.
홍섭은 대답했지만 히사나가 변호사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할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
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를 지난 4년 동안 지켜 보았네. 그리고 자네의 끈기와 성실성에 감탄했지.
자, 자네는 이제 독립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선생님, 그럼 저더러 이 사무실에서 나가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새가 충분히 자랐다면 그 둥지에서 떠나는 법일세. 이것을 줄 테니 자네의 앞
날을 스스로 개척하도록 하게.
히사나가 변호사는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된 두 개의 봉투를 주었다.
큰 봉투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니혼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원서가 들어 있었다. 니혼
대학은 사립 대학으로 히사나가의 모교였다. 와세다 대학과 더불어 자유로운 학풍이 있어
조선인 학생도 차별없이 받아 주고 있었다.
작은 봉투에는 돈 5백원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홍섭은 편지부터 읽었다.
자네는 언젠가 나에게 변호사가 되어 동포를 구하고 싶다고 말했었네. 하지만 지금 조선
에서 쓰고 있는 법률은 일본인이 만든 것이고 일본의 감독 아래 있네. 그런 만큼 변호사가
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일세. 하지만 자네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겨 내리라 믿고서 얼마 되지 않는 돈이나마 격려의 뜻으로 주
네. 그럼 성공을 빌면서…….
홍섭은 너무나 감격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기는커녕 홍섭으로선 엄청난 돈이었다. 5백 원이면 당시 큰 황소를
다섯 마리나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입학 수속을 하는 데는 아직도 시일이 있어 오수에 내려가 유학 준비를 하기로 했다. 오
수는 임실군에 있는 산간의 마을로서 별 특색은 없다. 그러나 주인을 구한 충견 이야기가
있어 알려진 고장이었다.
아버지는 장터에서 여전히 잡화상을 하고 있었다. 주름살도 훨씬 많아졌다. 좀처럼 흥분
하지 않는 홍섭도 이때만은 상기돼 있었다.
아버님, 저는 히사나가 선생의 덕택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그러냐, 참 잘 되었다. 그분은 너에게 정말로 은인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국에 가더라도 아주 왜놈은 되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1938년이 되면서 총독부는 전 국민에 대해 일본어 강
습을 지시했고, 각급 학교의 조선어학과도 아주 없애 버렸다.
홍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전문부 1학년에 등록을 마쳤다. 히사나가 변호사가
준 돈 5백원은 큰 돈이었으나 입학 수속을 마치고 나자 백 원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이 돈으로 하숙도 얻고 어떻게 1학기를 버틸 수 있을까?
그런 홍섭에게 조선인 학생 하나가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몹시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
이었다.
나는 오평기라 하오.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합시다. 그런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홍섭은 얼굴이 붉어졌다. 초면의 오평기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는 홍섭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듯 크게 웃었다.
학비 문제라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고학을 할 수 있는 길이 이 곳에는 얼마든지 있
으니까. 그리고 아주 싼 하숙도 소개해 주겠소.
오평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좀 몸이 고달프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에겐 고학생을 동
정하는 일본적 풍조가 있었다. 홍섭은 오평기와 친해졌다. 그도 변호사를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홍섭과 오평기는 서로 경쟁하다시피 공부했다. 성격은 달랐으나 서로 이끌리는 데가
있었다.
언젠가 홍섭이 물었다.
자넨 변호사가 되면 무엇을 하려나?
뭘 하기는. 일본인들과 싸울 일밖에 더 있겠나?
평기는 이렇듯 직선적이었다. 정의감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들고 싸울 무기는 일본 법률이 아닌가?
그런 것은 걱정할 것 없네. 그들이 망할 날도 머지 않았으니까.
1938년, 조선 총독부는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조선 청년으로 일본
군대에 지원하면 받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중.일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 전투는 비
록 승리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군대와 물자를 쏟아부어도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는 희망
은 없었다.
중국은 4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어. 일본군이 100만의 대군을 동원해도 일부의 대도시와
철도 연변을 차지한 데 불과해. 그래서 병력이 모자라 우리 조선 청년들까지 전장에 끌고
나가려는 것일세.
홍섭도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고개가 뜨덕여졌다.
같은 해 총독부는 국가 총동원법 을 조선에서도 실시한다고 했다. 국가 총동원은 사람은
물론이고 물자까지도 전쟁을 위해 통제하고 배급하며 이용한다는 법이었다.
라디오로는 늘 승리했다고 떠들고 있는데, 어째서 국가 총동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머지 않아 일본 군국주의가 멸망한다는 증거일세.
총독부는 다시 1939년 9월, 국민 징용령 이라는 것을 공포했다. 조선의 노무자를 일본의
광산이나 군수 공장에 강제로 끌로 가기 위한 법이었다. 그리고 1940년에는 식량을 배급하
기 시작했고 일본식 성명을 강요했다. 조선 사람도 일본식의 성을 쓰도록 한 것이다.
한편 홍섭과 평기는 1940년 8월에 있었던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때 함께 합
격한 사람은 일본인 두 사람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었는데 이병린,김용진,김섭,조재천 같은
사람도 있었다.
우선 1차 목표는 달성했네. 곧 귀국하겠나?
평기의 말에 홍섭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인간을 좀더 배우고 싶네.
인간을?
평기는 너무도 뜻밖인 홍섭의 말에 눈이 둥그레졌다. 홍섭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리 법이라 해도 딱딱하거나 메마른 것이 되어선 안 된다고 믿고 있네. 그러자
면 역시 인간을 알아야 하겠어.
자넨 법학도가 아니라 문학도 같네.
1940년 10월, 홍섭은 와세다 대학 문과에 등록했다. 평기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함께
등록했다.
이 학교는 특히 조선인 학생들이 많았다. 홍섭과 평기는 곧잘 학교 근처의 숲이나 전원
을 거닐었다.
홍섭은 이 무렵 조금씩 시를 쓰기 시작했다. 주머니속에는 조그만 수첩을 넣고 다녀며
그때 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적곤 했다. 그것은 종교의 기도문이기도 했고 시이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철학적인 토막글이 되었다.
이게 뭔가?
어느 날 평기는 홍섭의 수첩 쪽지에 가득 찍힌 크고 작은 점들을 보았다.
이것은 겨울 밤하늘을 표시한 거야. 정확히 말해서 어제 밤 아홉 시의 별자리지. 위쪽
의 조금 큰 점이 바로 북극성이라네…….
평기는 그만 입을 딱 벌렸다.
별자리를 보며 점이라도 치겠다는 겐가?
우주의 영원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 가 버린 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어제의
별과 오늘의 별은 항상 그대로가 아닌가. 그러니 얼마나 신비로운가?
이것 지독한 낭만주의자로군.
1941년 봄, 홍섭은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가인 김병로의 사무실에
서 일하게 되었다.
음, 자네가 김홍섭 군인가?
두루마기를 단정히 입은 가인은 유난히도 눈썹이 짙고 얼굴이 야위었는데 눈빛이 날카로
웠다.
가인은 1887년, 전라 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 홍섭에게는 아버지 같은 대선배이다.
가인은 한학을 공부했고, 열일곱 살 때 목포의 일신 학교 에서 처음으로 영어,일어,산수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그 뒤 1907년, 창평의 창흥 학교에 가서 다시 신학문을 배웠다. 창흥 학교는 송진우,김성
수 등도 배웠던 학교로 이름이 있었다. 그 뒤 가인은 일본에 건너가 니혼 대학,메이지 대학
등에서 5년간 법학을 공부했다. 말하자면 홍섭에게는 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인가?
가인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불쑥 찾아온 홍섭의 사람됨을 알아보려는 생각에서였다.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나설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변론해 주어도 생기는 것이란 없다네.
제가 바라는 건 나라 없고 돈 없는 이들을 변론해 주는 일입니다. 제 한몸 편히 지내겠
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선생님 밑에서 일하도록 허락해 주십시
오.
가인이 대답을 않자 홍섭은 말했다.
선생님도 변호사가 될 때 생을 위한 직업도 아니고, 재산을 모으자는 생각도 없었으며,
오로지 일본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구렁텅이에 떨어져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서 결심하셨
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허어……, 마침 점심때이고 하니 우리 함께 나가서 설렁탕이라도 먹세.
가인은 일어서고 보니 보통 사람보다 몸이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
는 가인인지라 총독부의 경찰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수많은 애국 지사를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안창호,여운형 등에 대한
변론을 맡아 일본인 검사와 당당히 맞섰다. 정의부,광복단,김상옥 의사 사건, 3,1운동에 잇
따른 각지의 독립만세 사건, 6,10만세 사건, 광주 학생 운동, 조선 공산당 사건, 간도 공산당
사건 등 그가 손대지 않은 변론이란 거의 없을 정도였다.
홍섭은 점심 식사를 하고 가인과 함께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거기엔 홍섭 또래의 젊
은이가 또 하나 있었다.
가인이 그를 소개해 주었다.
양 군, 이번에 우리 사무실에 있게 된 김홍섭군일세. 그리고 김 군, 이쪽은 양회경 군인
데 자네보다 조금 선배일세.
가인은 설렁탕을 먹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데 사무실로 돌아오자 양회경을 대
뜸 소개하며 말했던 것이다. 홍섭은 너무나 기뻐 꾸뻑 절을 하며 인사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잘 지도해 주십시오.
이 날부터 홍섭은 가인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보수는 거의 없
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그런 일을 맡아 처리했다.
일본 제국은 거의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1940년 8월에는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가
폐간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겐 아침마다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 하는 맹세를 하게 하였고, 1분간의
묵도를 하라고 강요했다.
1941년이 되자 사상범 예방 구금령 이 공포되었고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게 했다.
8월에는 농산물 공출 제도 를 시행했고 중학교 이상의 학생은 근로 보국대 로 동원되어 군
수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세상이 통제 시대로 들어갔으니 우리가 할 일도 없게 되겠군요.
홍섭의 말에 가인은 말했다.
아냐, 할 일이 더 많아질 걸세.
1941년 12월, 일본은 드디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에
는 조선어 학회 사건이 일어나 많은 학자들이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4년 10월에는
학도병 제도 를 만들어 조선인 학생을 전쟁에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인은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면서부터 법률 사무실에도 자주 나오지 않았다. 그는 1936
년 무렵부터 서울 창동에 농장을 마련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돼지와 닭을 치며 살았다.
조선의 민족 지도자는 총독부의 강요로 강연회에 나가서 대일본 제국을 위해 학도병으로
나가야 한다 는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인은 그런 것을 피하고 일본식 성명을 하지 않
기 위해 시골 구석에 틀어박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사무실에 나와 젊은 김홍섭과 양회경을 격려했다.
똑똑한 청년이야.
홍섭은 재판소에 나가 없었고 양회경과 김병로 둘만이 있었다.
네, 그뿐 아니라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문학과 종교 관계 서적을
보이며 읽으라고 권합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 중년 신사가 들어섰다. 가인은 그를 보자 반색을 했다.
오, 낭산. 어서 오게.
낭산 김준연은 동아 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일이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이 마라톤 경기에서 당당히 우승을 거두었을 때 낭산은 체육부 기자 이길용, 사진부
기자 백운선 등을 불러 의논했다.
손기정 선수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네. 그런데 가슴에 왜놈의 일장기 마
크를 달고 있으니 이를 없앨 수 없겠는가?
이것이 일장기 말소 사건 으로, 관계된 사람들은 왜경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다.
가인은 동아 일보와도 관계가 있어 낭산과 친했다.
낭산, 마침 잘 왔네. 자네 딸이 있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그것은 왜 묻나?
내가 중매를 서려고 하네. 아주 똑똑한 청년 법률가 라네. 자네 사위를 삼게나.
허허, 가인의 눈에 든 사람이라면 거절할 수도 없겠는걸.
이리하여 김홍섭은 1944년 7월, 김준연의 셋째 딸 자선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올렸지만 홍섭은 계속 바빴다.
아내는 전곡(김성수의 농장으로, 낭산은 이 농장 관리자로 있었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
고, 홍섭은 서울에서 하숙 생활을 하며 피고인들을 변론하기에 바빴다.
이럴 바에야 뭣 때문에 딸을 시집보냈는지 모르겠어요.
부인이 불만 비슷하게 말하자 낭산은 호탕하게 웃었다.
홍섭은 스님 같은 사위일지 모르지. 하지만 뛰어난 인물이야.
1944년부터 일본 패망까지는 어둡고 답답한 공기가 삼천리 강산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총독부는 최후 발악으로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여 공장에서 일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을 옥
에 가두었다.
김홍섭에게도 작은 수난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재판소의 문을 나서 덕수궁 담을 돌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여보, 여보!
누군가가 불렀다. 돌아보았더니 일본인 순사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나를 불렀소?
너 말고 또 있느냐. 그런데 그 머리가 뭐지? 너는 비국민이냐?
일본인들은 자기네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을 비국민이라 불렀다. 홍섭은 머리를 길
게 기르고 있었는데 순사는 그것을 당장 깎으라고 호령했다.
여보, 머리를 강제로 깎으라는 법이 어디 있소?
뭣이 어쩌고 어째?
그럼 경찰서에 가서 따져 봅시다.
왜인 순사는 홍섭이 변호사라는 것을 알자 태도가 금방 달라졌다. 홍섭은 일본이 패망하
기까지 머리를 절대로 짧게 깎지 않았다.
3. 법관과 사랑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글자 그대로의 해방으로, 우리 국민들은 모두 기쁨의 눈
물을 흘렸고 대한 독립 만세 를 불렀다.
그러나 해방에 뒤이어 극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민족은 벌써 좌,우익으로 갈라져 피비린
내 나는 싸움을 시작했다.
홍섭은 해방되던 해 10월, 서울 지방 검찰청 검사로 임명이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법원
의 판사나 검사로 있던 일본인이 모두 쫓겨감으로써 그런 자리를 메우기 위한 발령이었다.
그러나 홍섭은 검사가 되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법관이 되어 남을
심판하는 것보다 변호사로 남을 돕는 일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홍섭은 법관 참회 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그것을 보면 이 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만든 법 아래 신음하는 동포들……. 그들을 변론하기 위해 법이라는 권력과
싸워야 하는 홍섭은 문득 법이 싫어져 변호사 노릇을 그만두려 했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혼란을 볼 때 법을 아는 사람으로, 그런 법에 등을 돌릴 수도 없었
다. 그래서 검사가 되었던 것이다. 죄인을 호령하고 죄인을 벌 주기 위해 검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검사가 되어 죄 지은 사람을 매일같이 만나며 이렇게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꽃이나 별처럼 순결하지 못할까. 어째서 죄를 짓고 스스로가 파멸에 빠져드
는 것일까?
홍섭의 이런 마음은 판사나 검사로서 있어선 안 될 나약한 마음일지 모른다. 법이란 본
디 차가운 것이고, 법조문 그대로 죄인을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죄인을 동정한다는 것은
벌써 사사로운 감정이 끼여드는 것이다. 법관의 격에 맞지 않는 마음이다.
그가 어렸을 적 읽은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
톰 소여의 모험 을 지은 마크 트웨인은 어느 날 하녀 케티로부터 이런 호소를 받았다.
주인님, 저는 분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제가 시장에서 물건을 잔뜩 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승합마차를 탔지 뭐예요. 그랬더니 승합마차의 어자(마차를 부리는 사람)가 짐이
많은 나의 약점을 이용해서 평소의 두 갑절이나 요금을 달라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득
이 달라는 대로 돈을 주었지만, 지금껏 분해서 가슴이 떨려요!
이야기를 들은 트웨인은 규칙을 지키지 않은 승합마차 어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
다.
마차 번호를 알고 있어요?
케티로부터 마차 번호를 알아낸 트웨인은 곧 재판소에 고소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트
웨인의 고소에 모두 찬성하지는 않았다.
몇 푼의 돈이 아까워 고소를 하다니 대문호답지 않아.
어자가 규정 이상의 요금을 청구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일세. 그런 일을 고발하다니
어른스럽지 못한 짓일세.
그러나 트웨인은 남이 뭐라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재판소에 고소한 것은 법을 지키는
준법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재판 결과는 트웨인의 승소였다. 판결이 내리고서 얼마 있다가 그 어자가 트웨인을 찾아
왔다.
선생님, 제가 규정에 어긋나는 요금을 받은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저
는 면허장이 취소되어 밥줄을 잃게 되었지요. 집에는 어린 자식도 있어 어떻게 살아가
야 할지 막막합니다.
어자의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었다. 트웨인은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을 보
자 동정심이 생겼다.
그것 안 되었네. 내가 경찰에 말하여 면허장을 다시 발급해 주도록 부탁하겠네. 하지만
앞으로는 부정한 짓을 절대로 하면 안 되네. 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이
니까.
법관은 트웨인처럼 사회악을 고발하는 정의감과 더불어 따뜻한 인정을 지녀야 한다. 홍
섭은 자기의 성격이 법관보다는 변호사에 알맞다고 믿고 있었다.
차라리 검사보다는 목사나 스님이 되는 게 사회악을 줄이는 데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
지 않을까. 경찰이나 검사나 판사는 사회악을 뿌리뽑진 못한다. 아무리 벌을 주어도 악
은 없어지는 게 아니잖은가?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우익 정당도, 공산당도 드러내 놓고 활동했다. 먼저 우익 정당으로
한국 민주당이 있었다. 이 정당엔 김성수,송진우,김준연,허정,김병로 등이 가입했다.
공산당은 이보다 앞서 박헌영을 당수로,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이 되자 한반도를 신탁 통치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것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에서 미국,영국,소련 세 나라 외상의 회담 결과 조선이 완전히 독립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5년 동안 신탁 통치한다 는 합의를 발표하여 생긴 일이다.
일제 36년 동안 나라를 잃고 있었는데 다시 5년간 남의 나라 간섭을 받는 신탁 통치를
한다니 말도 안된다.
처음엔 우익과 좌익 모두 신탁 통치를 반대했다. 그런데 국제 공산당의 지시를 받은 공
산당은 별안간,
신탁 통치를 찬성한다!
라고 들고 나와 우익의 반탁 과 좌익의 찬탁 이 서로 갈라져 심한 싸움을 벌였다.
이런 때, 1946년 5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이 발생했다. 김홍섭과 조재천 두 검사
가 이를 조사했다. 이 사건은 공산당이 그들의 공작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지폐를 몰
래 찍어 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발표되자 당시의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특히 좌익 사람들은 미 군정과 검찰
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것은 우리 공산당을 때려 잡기 위해 터무니없는 거짓을 꾸며낸 것이다.
이 당시 선전 잘 하는 공산당 이란 말이 있었다. 신문사나 잡지사에도 공산당원이 있어
김홍섭과 조재천을 민족 반역자로 공격했다. 그리고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가 이 사건을 믿
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출판사로 정음사 를 경영하고 있던 최철해는 전부터 김홍섭을 알았다. 홍섭이 책을 사러
자주 그의 책방에 들렀기 때문이다.
어느 날 홍섭이 책을 사러 오자 최철해는 물었다.
검사님, 하도 세상이 뒤숭숭해서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산당이 정말로
위조 지폐를 찍어 냈습니까?
그러자 김홍섭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홍섭의 말이라 최철해도 그것이 사실임을 믿었다. 홍섭은 절대로 거
짓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판사 사건은 몇 달이나 끌었다. 당시 좌익 세력은 강하여 미 군정천의 고위 관리와 짜
고서 이 사건을 간섭하려 했다. 그러나 홍섭은 어떤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이들을
기소했다. 그런 뒤 그는 사표를 내고, 뚝섬으로 가서 농사를 짓기로 했다.
김 검사, 자네는 이번 사건으로 유명해졌네. 어째서 검사를 그만두려 하는가?
보통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몰랐다. 그는 어떤 명성이나 재산을 모으기 위해 검사가 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악과 맞서서 법대로 처리하려 했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검사직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홍섭은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싫어졌던 것이다. 죄 많은 인간에 비해 자연과
별들은 얼마나 순수한가! 그는 닭과 돼지를 기르면서 책이나 읽고 싶었다.
이 무렵 그에게는 장남 정훈이 태어나 있었다. 홍섭은 밭과 뜰이 딸린 집 한 채를 구했
다.
여보, 봄이 되면 오이도 심고 가지도 심어요.
그럽시다. 호박,토마토, 푸성귀란 푸성귀는 모두 심읍시다. 또 돼지도 기르고…….
돼지는 순종이어야 한대요.
그럼 돼지우리부터 지어야겠군.
며칠도 지나기 전에 홍섭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어 검붉어졌다. 부인 김자선은 남편을 쳐
다보며 웃음지었다.
누가 당신 보고 검사라고 하겠어요?
그럴까 봐 걱정이오. 다시는 법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작정이오.
그러나 시절은 벌써 가을도 지나가고 있어 홍섭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이따금 시
나 수필을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또,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다.
하루는 오평기가 찾아왔다.
허허. 영락없는 농부로군. 누가 자네를 정판사 사건담당 검사라고 생각하겠나?
그 얘긴 그만두세.
아냐, 자네들이 그 때 활약한 덕분에 공산당이 맥을 못추고 있네. 호인들인 군정청도 공
산당의 정체를 알고는 그들을 누르기 시작했다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힘든 노동이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다. 홍섭은 아내에게 말했다.
한겨울 차가운 방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오. 또, 배춧잎을 삶아 끼니를 잇
는 일도 결코 없다고는 할 수 없소.
네, 저는 당신을 따라갈 뿐이에요.
실제로 가난이 그에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1946년 12월, 김병로가 그를 불렀다. 홍섭이 어렵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그를 보자마자
야단을 쳤다.
자네 지금 정신이 있는 겐가? 지금 이 나라가 얼마나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그런데 자네 혼자 마음 편하자고 시골에서 땅이나 팔 작정인가!
홍섭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소년부 지원장으로 발령이 났다. 홍섭이 이 직책을 맡
은 것은 고아원을 돌볼 수 있고, 또 죄를 지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947년이 되어도 국내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미 군정은 입법 의원 을 만들었고, 민정 장
관으로 안재홍을 임명했다. 민족 진영은 신탁 통치를 계속 반대하고 있었다. 5월에는 미소
공동위원회 제2차 회담이 열렸다. 이회담도 결국 깨지고 한반도 문제는 1947년 9월, 유엔에
상정되었다.
이 때부터 미국은 신탁 통치 계획을 버리고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하여 한반도에 독립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다.
홍섭은 소년부 판사로 있으면서 가엾은 아이들을 대할 적마다 가슴 아파했다.
땟국에 절고 누더기 옷에 맨발인 소년이 홍섭 앞에 섰다.
몇 살이지?
여덟 살.
홍섭은 그만 뒷말을 잊었다. 그는 화장실로 아이를 데려가 직접 세수를 시키고 먹을 것
도 주며 조사를 계속했다.
배가 고팠니?
응.
무엇 때문에 여기 왔지?
왕초 아저씨가 여자의 핸드백을 가지고 달아나라고 해서…….
그 왕초는 어디 있지?
몰라요.
홍섭은 또 다시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잡혔다.
이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나쁘다면 어른들의 잘못이 아닐까?
이래서 그는 차라리 판사를 그만두고 고아원에 가서 일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홍섭은 1948년 봄학기부터 중앙대학교에서 법학을 강의했다. 한마디로 그는 죄는 밉지만
그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 는 법철학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홍섭은 어려서부터 두 사람을 위인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에이브라함 링컨 이
었고, 또 한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 였다.
둘 다 홍섭처럼 법을 공부했고, 인류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 사람으로서 홍섭은 그
들을 존경했다. 그런데 간디는 1948년 1월, 자기 동포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슬프다, 오늘 큰 별 하나가 떨어졌구나.
그는 간디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 지도자를 암살하는 사건은 해방 뒤 우리 나라에서도
몇 번 있었다. 맨 먼저 송진우가 암살되고, 이어 여운형,장덕수가 잇따라 암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 민국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리자 공산당은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이 해 10월,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났으나 유엔은 대한 민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정부
로 정식 승인했다.
그리고 1949년 6월에는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건국의 기틀을 다지기도 전 어수선한 소용돌이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
이 닥쳤다.
우리 민족은 이로써 또 한번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 해에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러나 제2대 국회가 문을 연 지 10일도 못
되어 북괴군이 수많은 탱크를 앞세우고 공격해 와서 서울 시민은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
다.
여보, 피난 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소.
하지만 북괴군이 미아리 고개를 벌써 넘어왔다고 하잖아요.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벌써 북괴군이 서울까지 침입한 것이다. 이 때 우리 국군은
탱크 한 대는커녕, 대포도 전투기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북괴군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오
래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여 탱크를 수백대나 몰고 쳐들어온 것이었다.
홍섭은 피난을 가지 않고 전에 살던 집에 가 있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집의 닭장 자리
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친구 오평기가 찾아왔다. 더욱 놀란 것은 팔에 완장까지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네가…….
이럴 수밖에 없었네. 우선 살고 봐야지 어쩌겠나. 이 완장을 차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물론이고 내 가족들까지 죽었을 걸세.
홍섭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북괴군은 서울에 들어오자 우익 인사를 찾아다니며
마구 학살하기 시작했다.
오평기는 며칠 있다가 다시 와서는 말했다.
놈들이 자네를 찾고 있네. 내집이 지금으로선 안전하니 그리로 가세. 어른들과 아주머
니, 아이들은 자네가 없다면 다치지 않을 걸세.
이리하여 홍섭은 평기의 집으로 옮겼다. 그는 그 곳에서 유엔군이 한국을 도와 참전했다
는 사실을 알았다. 북괴군은 전라도 일대를 지나 낙동강과 마산 근처까지 내려갔지만, 그
곳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 더 나가지 못했다.
북괴군은 곧 무너지고 말 걸세.
평기는 비록 완장을 두르고 공산당에 협력하고는 있었지만 진심으로 그들에게 동조한 것
은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어느 날 내무서에 잡혀가 행방 불명이 되고 말았다.
8월 17일의 일로, 홍섭은 다시 뚝섬으로 돌아가 숨어 있었다.
판사였던 그는, 나서서 친구의 행방을 찾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침내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10월 1일, 유엔군과 국군은 드디어 38선을 돌파하였고 물밀듯이 북진했다.
통일도 이제 머지 않았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중공군과 북괴군이 다시 몰려와 유엔군은 서울을 버리고 철수했다. 이 때 서울 시민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으로 피난했다. 1951년 1월의 일로 1,4
후퇴 였다.
홍섭도 가족을 데리고 피난하여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향했다. 한편 중공군은 오산 근처
에서 저지되었다.
부산에 내려간 홍섭은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늘 허전했다.
당신은 죽었소? 어느 곳에서 철사로 손목을 묶인 채 괴뢰군에게 죽임을 당했단 말인가?
친구 오평기에 대한 우정에서 나온 울부짖음이었다. 그는 이런 마음을 시로 썼다.
그대 즐기던 곡조
콧노래 삼아 흥얼거리노라면
떠오르는 그림자
아, 그 모습이로구나.
꿈이 아니기로
오랜 시간 보고 보렸더니
꿈보다 짧은 없어짐이여,
사라진 자국의 허전함이여.
여기는 남녘 자유의 하늘 밑
부러움의 정을 띄우던 곳
알알이 맺힌 한을
다시금 꿈결로 들리오리라.
P! (평기의 머릿글자)
살았노, 죽었노?
P 아! P 아!
판사로서 홍섭의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그는 틈만 나면 바닷가에 나가 친구를
생각하며 우정을 돌이켰다.
바다를 보다가 지치면 그는 곧잘 망원경으로 별들을 보았다.
별들을 보며 홍섭은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천문학자들은 행복할 거야.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하찮은 물질 세계도,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인간 역사도 아니니까.
인간은 왜 싸우는 것일까?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이런 생각으로 늘 시무룩한 홍섭에게 집주인 하종오가 말을 걸었다.
판사님, 외람된 말이나 천주교 성당에 나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홍섭은 어렸을 때 예배당에도 다녔고 기도도 드렸었다.
1951년 가을, 홍섭은 일선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이 해 7월, 개성에서는 정전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쟁은 그 동안에도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위험한 곳에 일부러 갈 필요가 없잖은가?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홍섭은 말했다.
위험할수록 찾아가서 국군 장병을 위문하는 것도 뜻이 있지.
부산에 보기 드문 눈발이 내렸다. 전선 시찰에서 돌아온 뒤 홍섭은 책방을 찾는 것이 일
과가 되었다. 책방 주인도 어느덧 홍섭과 낯이 익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부산도 바닷바람이 있어 꽤 춥군요.
홍섭은 주인과 이런 인사를 나누며 신간 서적들이 꽂혀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책방엔 일
본에서 들여온 책도 있었다.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천문학 사전 이 홍섭의 눈길을 이끌며 놓아 주지 않았
다.
그가 늘 갖고 싶어하던 책이었다.
얼마입니까?
3만 원입니다.
홍섭은 멈칫했다. 3만 원이면 굉장히 큰 돈으로 그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뒤로 홍섭은 매일 그 책방에 갔다. 천문학 사전 은 독자가 많이 찾는 책은 아니지만
혹시 누가 사 갈까봐 염려가 되어 들러 보곤 했던 것이다.
또, 그런 책은 잘 수입이 되지 않아 한 번 놓쳤다 하면 다시 구하기 힘들었다.
방법이 없을까?
홍섭은 며칠 망설이다가 기어이 재판소 경리에게 가불청구를 했다. 그리고 돈 3만원을
받아 쥐자 그 즉시 책방으로 뛰어가서 기어이 천문학 사전을 사고야 말았다.
야, 이제 안심이다.
홍섭은 마음에 든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싱글벙글했다.
사람이 우주의 모습에 어떤 두려움을 느끼고 우러르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종교심이
마음에 싹트고 있는 증거이다.
홍섭은 늘 마음 한 구석이 비어 있는 듯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언젠가 그는 오대산으로 방한암 선사를 찾아갔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의지하는 마음이네.
그 마음은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어느 종교나 같네. 진리를 찾는 걸세.
이 말은 홍섭에게 막연하게 들렸다. 기독교,불교,유교…….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그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홍섭은 일찍이 기독교를 믿고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하느님은 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해 준다고 배웠다. 그것도 물론 진리였다.
방 스님은 홍섭의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빙그레 웃었다.
모든 종교의 진리는 같다고 말한 것은 불교의 자비심일세. 다른 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럼 불교의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개고 제행무상 일세.
홍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체개고는 이 세상의 온갖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벌써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이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괴로움이고, 또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이 밖에도 또 있다.
불교에서 사고팔고 라 하여 앞서의 생,로,병,사 말고도 네 가지를 더 꼽고 있다. 즉 부모
처자와 같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과도 만나야 하는 괴
로움, 원하는 것을 구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심신(몸과 육체)에 의해 비롯되는 모
든 괴롬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제행무상은 무엇인가? 이것은 세상의 것으로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은 없다는 뜻
이다.
알겠나? 인간은 이 괴로움 많은 세상에서 자기만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라네.
그렇기 때문에 몸이 늙고 병들어 죽게 되면 허둥거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네.
불교는 살아 생전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고 덧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죽음마저도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일세.
홍섭은 아직도 그 말이 전부 믿기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불교에 대해 매력은 느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게 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네. 살고 싶다는 욕심, 그밖에 출세하고 싶
다는 욕심, 돈을 모으고 싶다는 욕심, 여러 가지가 있겠지. 그런 욕심을 버리고 인생은
일체개고, 제행무상이라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일세.
방 스님이 말하는 세계가 당장 비어 있는 마음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으나 홍섭은 어느
정도의 만족은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이 무렵 휴전 회담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정치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1952년
8월,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정계는 계속 시
끄러웠다. 바로 이것은 욕망에 의한 싸움이었다.
1953년 3월, 김홍섭은 서울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서울
로 떠나기 전날, 홍섭은 그 동안 세들어 있었던 집주인 하종오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동안 정말 폐가 많았습니다.
폐는 무슨 폐입니까. 어려운 시절, 한 겨레로서 한데 힘을 모았을 뿐이지요.
이윽고 홍섭은 주수 성범 이란 책을 책꽂이에서 발견하고 물었다.
주수 성범은 어떤 책입니까?
네, 예수님을 본받는 말씀을 적은 책이랍니다.
홍섭은 실례한다고 말하고 그 책을 뽑아 책장을 넘기며 한두 구절을 읽었다. 그런 모습
을 미소짓고 바라보던 하종오는 말했다.
김 판사님은 믿음 깊은 신앙 생활을 하실 것 같습니다. 저도 한때는 절도 찾아가 보았
고 이를테면 방황을 한 셈이죠. 지금은 카톨릭에 들어와 있습니다만, 그처럼 믿음을 갖기
전에 믿음을 찾아 방황하는 것도 귀중한 경험이라 생각됩니다.
하하……. 저야 뭐 아직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셈이지요.
홍섭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이튿날 지프차로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현직 판사다. 방한암 선사처럼 이 세상의 일을 훌훌 털어 버리고 절에 들어갈 수도
없지 않은가?
불교에 한없이 끌리는 매력은 있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고민하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법관 생활이 이어졌다. 홍섭은 어느 날 서정원의 권유를 받았다.
김 판사님, 육당을 만나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그분은 불교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계십
니다.
오, 육당. 꼭 만나 뵙고 싶네.
육당 최남선은 1908년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 을 발간했고 해(바다)에게서 소년에게 라는
신체시(새로운 형식의 시)를 썼다. 3,1운동 때에는 독립 선언서 를 기초했다.
그러나 1928년부터 총독부 기관인 조선사 편수회 의 위원이 되면서 친일파라는 공격을 받
았다. 해방이 되고 대한 민국이 세워지자 반민족 행위자 처단법 에 걸려 춘원 이광수와 함
께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일도 있었다.
저는 판사 노릇하는 김홍섭입니다. 불교에 대해 좀더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불교보다 천주교로 개종하도록 하십시오.
육당은 이 때 중풍에 걸려 몸이 불편했다. 그는 홍섭의 손을 덥석 잡아 주며 말했다.
판사로서 당신의 그런 마음이 고맙군요. 많은 사형수와 만나려면 천주교가 가장 좋습니
다.
홍섭은 그 순간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찡한 감격을 느꼈다.
육당과 홍섭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백마디의 말보다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서로를 알 수 있었다.
아, 이분은 숱한 고뇌를 간직한 분이로구나. 그리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 있구나.
홍섭은 육당과 헤어져 관사에 돌아오자 밤늦도록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다.
홍섭은 그 뒤에도 육당을 자주 찾았다. 그리고 육당을 알면 알수록 천주교로 마음이 기
울어졌다.
이 무렵 육당은 누구 못지 않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6,25 전쟁 때 그의 셋째 아
들과 큰딸이 괴뢰군에게 학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육당은 대구,부산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우이동 그의 집에 있던 17만 권의 책이 모두 없어졌던 것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남달리 책을 좋아하는 홍섭은, 학자로 책을 잃은 슬픔이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
을 것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육당은 묵묵히 흩어진 책을 헌책방에서 하나 둘 다시 사 모았고 필생의 저작인
조선 역사 사전 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의 이끌음은 틀림이 없다.
홍섭은 이 때부터 천주교를 연구했다. 그리하여 천주교만이 유일한 정통의 교리와 신앙
을 간직하여 내려온 길이요, 진리고, 생명의 가르침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마귀,세속,육신의 세 가지 원수(삼구)와 교만,인색,색에 빠
지는 일, 분노, 재물을 탐낸,새암,게으름, 이 일곱 가지의 원죄(철종죄)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으므로 누구든 그 수련에 완벽을 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혼 구제의
최저선을 크고 작은 죄의 사이에 두고, 이 선을 넘어 연옥에라도 들 희망을 갖게 함으로
써 평범한 사람들도 구제에 대한 희망과 기회를 갖게 하고 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홍섭은 새로운 기쁨을 맛보았다.
홍섭은 1953년 9월 26일, 온 가족과 함께 명동 성당에서 장금구 신부에 의해 세례를 받았
다.
영세명은 바오로였고 대부는 이홍규 변호사였다.
이 해 8월,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다. 홍섭은 판사로서 또다시 마음의 갈등을 겪어야만 했
다. 그의 재판석 앞에 매일 서는 피고인들은 극한 상황 속에서 찌들고 상처받은 불쌍한 동
족이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인간은 이미 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전쟁이라
는 극한 상황이 죄악 속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손짓한다. 원인은 그런데 있건만 전시일
수록 법은 더욱 엄해지는 모순이 있다.
법을 담당하는 홍섭은 질서와 인정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 피고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 나간 폐허의 서울에서 괴뢰군의 총칼 아래 벌벌 떨어 가
며 먹을 것조차 없었다. 그래서 너무나 배가 고파 남의 집 간장독의 간장을 훔쳐 먹었
다. 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도둑질이라 특수절도죄 로서 법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다.
자, 너는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홍섭에겐 매일이 이런 피고들과의 만남이었다.
여보게, 난 이번 재판을 할 수 없네.
어째서입니까?
사건 기록을 읽어 보았네. 내용인즉 서울에 남아 있던 어떤 아낙네가 쌀 배급을 속여서
더 타 먹었다는 것일세.
그렇지만 그것은 법에 걸리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자 김홍섭은 괴롭다는 얼굴이 되며 말했다.
나도 언젠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 배급을 더 타먹은 일이 있네. 꼭 같은 죄인인 내
가 어찌 그 여인을 재판할 수 있단 말인가.
홍섭으로서 더욱 심각했던 것은 부역자 에 대한 재판이었다. 부역자는 북한 공산군에게
협력한 사람을 말한다. 전부가 다 그렇지는 않았지만 개중에는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도 있었다.
이 피고처럼 총부리를 들이대고 적에게 협력을 강요당했다면 나도 협력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을까?
한 피고는 적을 도와 유엔군에 대해 영어로 선전 방송을 했다는 죄로 기소되었다. 그러
나 그가 스스로 나서서 적을 도왔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젊었고 사회에
나가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유엔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선전을 했는가?
네, 했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옳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오, 그 때도 시켜서 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그러한 일을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 피고가 적을 위해 선전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눈에 보이는 일이었다. 홍섭은 법
에 따라 사형 언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섭은 어느 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를 형무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교도관이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홍섭은 동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번은 고무신을 신고 재판소에 출근한 일도 있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겉모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섭의 이런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쯧쯧, 법관의 품위도 생각해야지. 어떻게 고무신을 신고 법원에 들어설까? 수위라도 저
렇게는 하지 못할 거야.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법관의 품위가 고급 승용차에 외제 신사복, 번쩍거리는 구두에 있다고는 할 수 없지 않
은가. 법관의 품위는 무엇보다도 양심에 있다는 것을 김 판사는 보여 주고 있는 게 아
닐까?
누가 뭐래도 홍섭은 자신이 옳다고 여긴 대로 살았다. 고무신을 신는다 해서 잘 될 재판
이 잘 못 되는 까닭도 없지 않은가.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인가?
규칙입니다.
교도관은 고무신을 신고 있는 홍섭을 판사라고 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사상범입니다. 아무나 만날 수 없습니다.
홍섭은 화가 났다. 아무리 부역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죄값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홍섭은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그럼 전화라도 잠시 빌려 주게. 담당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특별 허가를 받을 테니.
홍섭은 사형수를 만나 보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뒤 감방을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무래도 마음이 울적하여 그는 성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고 마음
의 갈등을 신부에게 털어놓았다.
신부는 홍섭을 위로했다.
하느님께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에 더 큰 뜻을 두고 계십니다. 사람의 법이 눈에 보이
는 사실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지요. 그 나머지 보이지 않는 부분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김 판사께서는 사람의 일, 사람의 법에 따라
판단하시면 됩니다.
세례를 받은 날로부터 꼭 석 달째인 그 해 12월 26일, 홍섭은 법전 잡지에 너를 싫어하
지 않으려 한다. 는 글을 썼다. 너 란 법을 말한다.
또, 그는 1954년 12월 10일 무명 이란 시집을 출판했다. 무명은 불교에서 쓰는 말로, 진
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둠의 세계, 즉 우리 인간의 세계란 뜻이다.
그는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절을 찾았고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종교는 원리만 다를 뿐 진리는 같다고 생각되었다.
홍섭은 같은 해 12월 15일, 수필집 창세기초 도 출간했다.
정치와 사회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속에서도 휴전 회담은 무르익고 있
었다. 홍섭이 서울로 올라가고 3개월 뒤인 1953년 6월, 그 동안 한국 정부가 반대하고 있던
포로 송환 협정 이 유엔군과 북괴군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어 그 해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수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은 끝이 났다.
폐허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가 있었고 홍섭의 장인 낭산도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여당인 자유당에 맞서는 야당 민주당의 간부가 되었다. 홍섭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
다. 그는 여전히 사형수와 만나며 그들과 대화했다.
홍섭이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이
아빠, 아빠!
하며 둘러쌌다. 그는 8남매를 두었다. 홍섭은 법원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아
이들과 함께 놀아 주는 다정한 아버지로 돌아왔다.
이 무렵 판사의 월급은 보잘 것 없었다. 그것으로 열명의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늘 부족
했다. 하지만 홍섭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는 것을 질색이었다. 이따금 누군가 도움의 손
을 뻗쳐오면 화를 냈다.
홍섭의 장인 낭산은 정치가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장인 낭산이
쌀 한 가마를 보내 왔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부인이지만
아버지가 보내 주신 것인데…….
하며 쌀을 받았다. 그 쌀 한 가마가 생활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날 저녁 퇴근한 홍섭은 마루에 놓인 쌀가마를 보았다.
이상하다, 우리가 가마로 쌀을 들여다 먹는 형편은 아닌데…….
그는 곧 얼굴이 창백해지며 부인을 불렀다.
저게 웬 쌀가마요?
아까 아침결에 친정 아버님께서 보내 주신 거예요.
그러나 홍섭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짐꾼을 불러서 바로 돌려 주고 오시오.
부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지게꾼을 불러 쌀가마를 지우고 친정으로 갔다.
한편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 사건이 있었다. 당시의 헌법에 대통령은 두 번밖에 하
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일부에서 이승만 박사를 죽을 때까지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런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표결에 붙였으나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그러
자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수학 방식을 내세우며 부결을 뒤엎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은 커갔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다음해 5
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 잘 나타났다.
이윽고 1956년 1월 30일, 큰 사건이 벌어졌다. 육군 특무부 대장 김창룡 소장이 총에 맞
아 죽었던 것이다.
이윽고 범인이 체포되었다. 주모자는 육군 대령 허태영이었고 하수인은 민간인 송용고와
신초식이었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소.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풀어 주시고 나만 총살해 주십시
오.
군법 회의에서 허태영은 사내답고 씩씩했다. 사람들은 그를 영웅처럼 생각했다.
이승만 박사의 자유당에 사람들은 염증을 느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한강 백사
장에서 연설을 하자 수십만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야당의 후보자 신익희는 전라도
로 내려가다가 기차 안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
이윽고 5월 15일.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시작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대통령에는 이
승만이 다시 당선되었으나,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된 것이다.
신익희 씨만 살았다면 정권은 틀림없이 민주당이 잡았을 걸세.
누가 아니라나. 이번에는 자유당의 선거 부정이 많았다고 하더군.
이 무렵 홍섭은 송용고와 신초식의 재판을 담당하게 되어 그는 법대로 판결했다. 사형이
었다. 그는 법관으로서 오로지 양심과 법이 명하는 대로 재판했다.
1956년 11월, 홍섭은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섭은 허태영을 만나게 되었다.
홍섭은 허태영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사건의 주모자
로선 너무도 담담한 태도였다.
이 사람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이튿날 홍섭은 이미 조사할 것이 없었지만 다시 허태영을 찾아갔다.
허 선생,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태영은 판사가 뜻밖의 질문을 하여 어리둥절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곧 침착을 되찾고 담
담하게 대답했다.
아주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언제 그런 것을 느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없소?
홍섭이 청하자 그는 군인답게 이야기를 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나서 홍섭은 또 물
었다.
그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주었는지를 생각한 일이 있습니까?
네, 그러나 옛날 일이지요.
허태영은 이 때 서른일곱 살이었다. 홍섭보다 몇살 적었으나 그의 의연한 태도에는 어딘
지 기품이 깃들여 있었다.
홍섭은 판사로서 이제까지 많은 사형수를 만나 왔다. 그들은 갖가지 흉악한 죄를 진 사
람들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닥쳐올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울부짖거나 잠도 제대로 자
지 못했다.
그런데 허태영은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유유히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할 필요가 있는게 아닐까? 왜냐 하면 아무
리 굳센 사람이라도 마음의 불안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
허 선생, 믿음을 가져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순간 허태영은 홍섭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난 종교를 믿지 않소. 이제 와서 새삼 종교를 믿겠다는 생각은 없소이다.
말투마저 거칠어졌다. 그러나 홍섭으로선 내심 기대하던 대답이었다.
홍섭은 말머리를 돌렸다.
허 대령은 어째서 상관인 김창룡을 암살했소?
김창룡 소장은 자기 한몸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중상모략했을 뿐 아니라 억울한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기도 했소. 그런 자는 살아 있어야 우리 대한민국에 해가 될 뿐 아니라 군인
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오. 아무리 상관이라도 나는 대한 민국 군인으로서 그런 사람을 용
서할 수 없었던 것이오.
홍섭은 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표
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다른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허 대령은 법정에서 책임은 자기 혼자에게 있다고 계속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소. 내가
재판한 송용고, 신초식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소.
허태영은 다시 평소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홍섭은 이 점을 찔렀다.
허 대령, 당신의 그런 마음은 영혼이 순결함을 말해주는 것이오. 이런 말을 들으신 적이
있소? 티끌은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지니라. 전
도서에 나오는 말씀이오. 며칠 뒤에 다시 한 번 들를 테니 잘 생각해 보시구려.
다시 며칠 뒤 홍섭은 약속대로 허태영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그는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판사님, 영세를 받게 해 주시오.
홍섭은 반가워 허태영의 손을 꽉 잡았다.
결심을 하고 나니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느 때라면 십 년, 수십 년 걸릴 일
도 며칠 동안에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주님 품 안에 들면 더욱 편하게 되지요.
이리하여 허태영은 마태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는 죽기까지 홍섭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1959년, 김홍섭은 전주 지방 법원장에 임명 되었다. 어느 봄날, 홍섭은 교구 본당의 김
신부와 둘이서 신도들이 순교했다는 치명자산 을 찾아갔다.
천주교에서는 순교 정신을 높이 받든다. 피의 세례라고 불리는, 천주에 대한 희생으로써
목숨을 바치는 고귀한 종교심이기 때문이다.
신부는 설명했다.
한 가족이 모두 순교했지요. 전주 남문 밖에서는 누갈다 의 시아버지가 순교했는데, 그
는 사지를 찢겨 죽었고 다시 시체의 목이 잘려 성문에 높이 매달렸다고 합니다.
남편인 유요한과 시동생은 전주 감영 옥 안에서 교수형을 받았지요. 그리고 누갈다의
시어머니와 시숙모, 그리고 사촌 시동생 마태오는 치명산 아래 숲 속에서 참수를 당했습니
다.
홍섭은 온갖 사회악과 매일 만나고 있었다. 또, 이승만 대통령과 김병로 대법원장은 민주
와 독재라는 점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이 저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월에는 전라남도 함평에서 투표
용지를 바꿔치기 했음이 드러났다. 이런 것은 모두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기독교에서도 이
승만의 독재를 공격하고 나섰다.
홍섭도 그런 사회 불의에 대해 분격을 느꼈다. 그러나 종교가 정치 문제에 나선다는 것
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었다.
종교인은 오로지 신앙 생활에만 힘 쓸 것이지 정치에 간섭해선 안 된다. 그것과 마찬가
지로 법관은 준법 정신과 정의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데에 홍섭의 고민은 있었다.
참으로 따를 수 없는 높은 믿음이군요.
홍섭은 누갈다의 일을 돌이키며 오랜 기도를 드렸다. 누갈다는 1782년, 왕족의 후예로 태
어났다. 이름은 이유혜였고 열네 살 때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유종선과 혼인
했다. 유종선도 독실한 신자로, 이들은 혼인만 했지 오누이로 지내기를 굳게 약속했다.
이들이 혼례를 올린 지 5년째 되는 해에 저 신유박해(1801)가 일어났다. 그래서 누갈다의
시아버지가 먼저 잡혀가 남문 밖에서 처참한 형벌을 받았다.
이듬해 봄, 남편 종선과 시동생 문철이 체포되었고, 곧이어 누갈다는 물론 시할머니를 비
롯한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들까지도 모두 잡혀 순교했다.
처형된 것을, 하인들이 몰래 시신을 모아 묻어 주었지요. 바로 이 곳입니다.
홍섭은 다시금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이렇듯 깨끗한 죽음도 있었는데 세상의 꼴은 어떠한가?
1957년 11월, 대법원장 김병로는 임기가 만료되어 물러났다. 그 후임자가 대통령에게 제
청되었는데 이승만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오랫동
안 빈 채로 있었다.
이 무렵인 그 해 10월 14일, 육당 최남선이 세상을 떠났다. 육당은 불교 신자이면서 홍섭
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이끌어 준 사람이다. 육당 역시 1955년,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
례를 받았다.
그 때 수덕사에 있는 김일엽은 육당을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여 세상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종교에 귀의함은 값진 행동이다. 그리고 그가 뒤늦게 불교에서 천
주교로 갔다고 비난해서는 안 되리라. 방황이 길면 길수록 그의 고뇌는 크고 깊었을 테니
까.
홍섭은 이런 마음으로 육당을 추모하는 시 만종 을 썼다.
김 신부는 또 말했다.
그런데 누갈다가 쓴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답니다.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홍섭은 깜짝 놀랐다.
순교 직전에 쓴 것이지요. 본디 누갈다는 멀리 평안도에 유배되기로 결정돼 있었지요.
그러나 유배되는 도중 다시 전주 감옥으로 끌려와 참수 명령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누갈다
는 목이 잘리기 전에 치마를 찢어 친정어머니와 언니에게 몰래 편지를 썼습니다.
홍섭은 눈시울을 붉히며 죽음마저 초월한 믿음을 갖고서 쓴 누갈다의 편지를 읽었다.
……어머님 곁을 떠난 지 4년 동안에 쌓이고 쌓인 말과 숱한 소식을 어찌 다 아뢰오리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이렇게 됨도 또한 주님의 뜻이옵고 천주님께서 어머님께 자식
을 주셨다가 지금 도로 찾아가심이니, 모두가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안배이옵니다.……
스물도 안 된 연약한 여인으로서 얼마나 꿋꿋한 마음인가. 홍섭은 자기 따위는 감히 미
치지도 못한다고 생각되어 고개가 숙여졌다.
홍섭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정성껏 편지를 읽고 나서 말했다.
신부님, 같은 길을 걷는 뒷사람으로서 동정 부부 누갈다와 요한의 묘비를 세우고 싶습니
다. 그리고 가끔 찾아와서 풀이라도 뽑아 주고 싶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과 마찬
가지로 누구나 언제고 만나야 할 죽음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홍섭은 판사로서 감옥에 자주 찾아가 사형수를 만나보고 그들과 고뇌를 함께 하며 참신앙
로 이끄는 데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의 대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을 신앙의 길로 이끈다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자포자기하며 홍섭을 외면하
는 사람도 있었다.
홍섭은 그런 사람일수록 정성과 끈기로서 대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
이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해야 한다.
판사님,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비밀로 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런 비밀도 듣고 보면 부모님에 대한 불효였다든가 아내나 자식에 대한 미안한 느낌 등
이 많았다.
이런 말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구제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
이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같은 사람도 하느님께서 받아 주실까요?
물론이지요. 하느님은 자비롭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지요?
믿으면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갓난애
가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을 의심하는 일이 없는 거나 같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천주교에 입교하거나 개종했다.
홍섭의 일이 이런 신앙 권유로 끝난 것은 아니다. 모처럼 종교를 갖게 된 사람이라도 마
지막까지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떻게 흔들릴지 모른다. 홍섭은 그런 사람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편
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을 격려했다.
짧은 편지라도 글에는 그들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무덤을 찾아가 불우한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믿음은 남이 본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똑같이 변함이 없어야
한다.
홍섭은 어느 날 서재에서 혼자 책을 읽다가 문득 이미 처형된 사람을 생각했다. 그리고
꽃이 있는 법정 이란 시를 썼다. 여기서 말하는 꽃이란 법의 이름 아래 죽어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재판을 하며 많은 피고를 대했다. 재판석 앞에 서면 무슨 연극이나 하는 것처럼 거
짓으로 연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재판장님, 저는 너무도 억울합니다. 저는 절대로 죄가 없습니다. 하며 울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홍섭은 이런 사람들을 재판하며 얼마나 서글펐는지 모른다. 차라리 저 허태영처럼 자기
가 지은 죄를 떳떳하게 인정하고 그 죄값을 달게 받는 사람이 얼마나 씩씩한가.
그러나 한편으론 홍섭은 오히려 그들을 가엾다고 생각했다.
천주이시여, 그들은 인간이기에 약합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오니 용서해 주시기 바
랍니다.
홍섭은 이런 사람들을 재판할 때 오히려 본인보다도 더 피로했다. 그런 때에는 산에 올
랐다. 홍섭은 몹시도 자연을 좋아했다.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그 자연을 연구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과 들, 풀과 꽃, 별과 물의 속삭임을 찾고 그들과 대화를 나
누었다.
산에 오르는 데는 무슨 대단한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지.
다만 소탈한 마음 하나를 가지고 산에 오르면, 언제나 산은 우리의 노고에 대해 아낌없는
대가를 치러 주네. 산이 우리를 반겨 주고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홍섭은 변옥주, 장순용 판사 등 친한 사람과 곧잘 그런 말을 했다.
홍섭은 또 말했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높은 고지를 정복한다는 야심에서가 아닐세. 나로선 호연지기 를
기르거나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지. 야릇한 저 풀냄새, 나무와 나무에서 풍기는 갖가지 향
기, 그리고 바위 하나에 이르기까지 신의 오묘한 손길이 닿은 듯한 모습을 보며 사람의 때
가 묻지 않고 또 어떤 꾸밈도 없는 세계에 들어서고 싶어서일세. 그러면 내 마음도 활짝
열리고 폐 속에 쌓였던 나쁜 공기도 모두 도망쳐 버린다네.
산에 오르면, 적어도 사람이 이룩한 어떤 문명보다도 위대하고 장엄한 기분을 느낄 수 있
었다. 거기에는 죄를 짓고도 어떻게든지 거짓말을 하여 형을 벗어나려는 약삭빠른 사람들
도 없었다.
산에 오르고 자연을 마음껏 숨쉬는 일은 인간 김홍섭의 상처받은 마음을 아물게 해 주고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힘을 다시 불어넣어 주었다.
1958년 5월이 되면서 제4대 민의원 선거가 있었다. 6월에는 대법원장으로 조용순이 임명
되었다. 그리고 10월에는 법관 연임법 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법관의 임명을 정부가 간섭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또 다시 개헌안 파동이 있었다.
홍섭의 고무신은 유명했다.
누구나 처음 본 사람은 그의 고무신 신은 모습을 보고서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그리고 홍섭과 알게 되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사람됨을 알면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이었
다.
소박한 농부와 같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깨끗하고 높은지 경이의 눈마저 뜨게 되는 것이
다.
대체 이런 인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가 산을 자주 올랐음은 이미 말했다. 또한 산에는 절이 있다. 언젠가 홍섭은 수덕사로
김일엽을 찾아갔었다. 김일엽은 시인으로 일본에서 여자 대학을 나왔고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의 주필도 지냈었다.
중년에 절에 들어가 여승이 되어 오로지 수도만 하고 있었다. 홍섭은 인사를 하고나자
옛날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스님께서 쓰신 육당 선생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퍽 관심을 갖고 읽었지요.
그러자 일엽은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공연한 짓을 했다 싶습니다. 그런 일도 세상 일에서 마음을 털어 버리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었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일엽은 그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불교에는 10악 이 있다. 몸과 입, 그리고
마음에 의해 짓는 죄업 이 열 가지 있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서 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죄업이 네 가지로 비중이 큰 셈이다.
첫째로 망어. 이것은 남의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거짓말을 말한다는 것이다. 일엽은 아마
도 육당을 비판한 자기의 글이 망어라 생각되어 부끄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둘째로 기어. 이것은 교묘히 꾸며 대어 겉과 속이 다른 말을 뜻한다. 남을 놀라게 해 주
려고 엉뚱하게 말하는 것도 이런 기어에 속한다.
셋째로 양설. 두 혓바닥이란 뜻인데 여기 저기 다니며 이 말 저 말 하는 것이다. 남을
헐뜯는 말도 여기에 포함된다.
넷째로 악구. 이것은 남의 욕을 하는 것을 뜻한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나쁜 것으로 부처
님께 죄를 짓는 일이며, 그런 짓을 행하면 자기도 그런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홍섭은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아무 장소에서나 말하지 않고, 아무 때나 말하지 않고, 누구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아야겠
구나.
그는 평소의 옷차림 그대로 흰 고무신에 골덴 바지를 입고 잠바를 걸치고서 시골의 버스
를 탔다. 언젠가 강원도에 갔을 때 경찰관의 검문을 받던 생각이 났다.
당신, 뭣 하는 사람이오?
난 판사요.
뭐라고?
경관의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당신 정말 판사요? 신분증 좀 봅시다.
홍섭은 순순히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검문하던 경관이 당황하여 연신 사과의 말
을 했다.
높으신 분일 줄 알아 뵙지 못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직책상 수상쩍은 사람을 심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1960년 1월 26일, 김홍섭은 대법원 판사로 전임되었다. 1960년은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었
던 해이다.
홍섭의 일기를 보면, 그는 4월 20일 한라산에 올랐다. 이것은 전부터 계획된 일로, 그는
산에 올라가 자연과 대화하고 신과 가까이 있고 싶었다.
불의는 아무리 강해도 언젠가는 정의 앞에 무릎 꿇는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이란 사람의
힘으로 거스르지 못한다.
또 그는 그 해 여름 지리산에 올랐다. 홍섭은 이 산을 특히 좋아하여 여러 번 찾았다.
일행과 더불어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그는 혼자 천은사를 찾아 나섰다.
산길로 10리쯤 될 것입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물어, 이제는 곧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절은
나타나지 않고 날은 저물어 갔다. 더욱이 빗방울까지 뿌렸다.
이것 야단났는걸. 천은사를 다녀서 다시 해 지기 전에 돌아가려 했었는데…….
이윽고 산문(절의 문)이 보였다. 그가 천은사를 찾아온 것은 옛날의 친구 오평기 변호사
의 누이동생 오동림이 여승으로 그 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스님은 합장을 하며 그를 맞았다.
그들은 오랜 시간 인생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섭은 그날 밤 암자의 한 방
에서 잠을 자면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모두 괴로움의 바다에서 살아가는 가엾은 나그네이다. 하지만 믿음을 가졌을 때
그것을 이기는 용기 또한 생기는구나.
이 해(1960) 겨울, 홍섭은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 를 출간했다. 모두 25편의 글이 들어 있
는데 무상에서 상생으로 라는 글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다른 종교를 믿다가 천주교
로 개종한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 글이었다.
1961년 9월, 그는 광주 고등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어떤 사람은 지위가 높아진다고 기뻐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기뻐하기 전에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더 생각했다.
그가 법원장이 되자 전부터 잘 아는 남농 허건이 축하하는 그림 병풍을 보내왔다. 당시
남농의 그림은 뛰어난 솜씨로 명성이 높았다. 홍섭도 허 화백의 그림을 좋아했고, 그와 여
러 번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홍섭은 남농의 그림 병풍을 가져온 사람에게 말했다.
허 화백께 그림을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병풍을 가져온 사람은 인사를 하고 그냥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홍섭은 그 사람을 불렀
다.
아니,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네?
병풍을 가지고 돌아가셔야지요.
그 사람은 어리둥절해졌다.
뜻은 고맙게 받았으나, 병풍은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가져 가라는 것이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은 홍섭에게 남농의 그림을
다시 받으라고 권했다.
대체 선물을 왜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
난 사법부의 공직에 있는 몸이네. 또 직무와 관계없는 선물이라 해도 내 양심에 허락되
지 않는 선물은 받지 못하네.
그러나 친구들은 거듭 말했다.
자네가 선물을 끝내 받지 않는다면, 이 지방 사람들은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네.
다르게 해석하다니, 무엇을 말인가?
이 지방에는 이 지방의 풍습이 있다네. 떡을 하게 되면 앞뒷집이 서로 나누어 먹는 그
런 인정 말일세. 만일 자네가 남농의 그림 병풍을 끝내 받지 않는다면, 자네가 이 지방 사
람들을 차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네.
홍섭은 결국, 남농의 선물을 받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인정의 선물로 받는다면 양심에 거
리낌이 없다고 마음을 돌렸다.
그것은 홍섭이 선물을 돌려보낸 지 석 달 뒤의 일이었다.
광주시 남동 천주교회 뜰. 한 중년 남자가 어색한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열심히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는 잡초를 뽑는 일에 몰두해 있어 주위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기울면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서야 그 남자는 허
리를 펴고 한동안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향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바로 홍섭이었다.
며칠 뒤, 광주 고등법원에서 경주호 납북 기도 사건 의 항소심이 열렸다.
이 사건은 배를 탈취하여 북으로 가려던 사건으로 반공법 에 위반되는 중대 사건이었다.
그래서 법원장인 홍섭이 직접 맡아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재판장 홍섭은 주문 을 낭독하여 판결 이유를 설명하고,
피고인은 사형에 처한다! 하고 판결을 내렸다. 누구나 예측했던 일이라 방청석은 물론
피고인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들(3명)은 증오의 눈으로 재판관석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
었다.
그리고 법정 안은 사형이라는 형의 무거움이 가져오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숙함이 감돌
았다.
이윽고 홍섭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그의 말은 뜻밖이기도 했지만 조용했던 연못에 파
문을 일 듯 퍼져 나갔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재판관석에 앉아 있는 나와 피고인석에 서 있는 여러분들 중 어
느 쪽이 죄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불행히도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
이라 단정하는 것이니 부디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피고들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이윽고 피고인들의 소리를 죽인 흐느낌 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방청석 역시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방청자 중에는 남동 천주교회 신자도 있었다. 법
원을 나서면서 그들은 수군거렸다.
그분이 법원장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
그분이라니?
왜 일요일이면 성당 뜰을 청소하기도 하고 잡초도 뽑아 주던 분 말이세!
홍섭은 벌써 오래 전부터 고뇌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상대의 목숨을 뺏는 사형 언도를 해야
한다니!
그는 이 무렵부터 재판관보다도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남몰래 그런 길이 있
는가 모색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그는 1964년 1월 22일, 성프란시스코 주도회 제3회에 가입했다.
홍섭은 이 수도회에 가입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더욱 수도자의 삶으로 끌어올렸다.
주여, 당신의 뜻을 따르는 법을 가르쳐 주시옵고 겸손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
사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
번도 밖에서 점심을 사먹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했다. 이런 생활은
그가 서울 고등법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도(1964) 바뀌지 않았다.
아니, 원장님께서…….
사무실 직원들은 이런 홍섭의 소탈한 모습에 놀랐으나 곧 익숙해졌다.
홍섭은 낡은 담요 천으로 된 외투를 입고 나녔는데 그것은 3년 전 광주 고법으로 발령났
을 때 친구가 사 준 것이었다.
이 사람, 법원장이 외투도 없다면 체면이 서겠나? 내가 자네의 외투 한 벌을 사 줌세.
친구는 그를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홍섭은 막무가내로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남대문 시장은 홍섭의 단골이었다.
이렇게 지나치리만치 검소한 생활로 자신의 안락함을 멀리 하던 그의 몸이 조금씩 허물어
져 갔다.
이따금 심한 어지러움증이 닥쳤다. 그럴 때면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증세가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일은 광주에서도 이미 있었던 일이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
겼다.
빈혈이겠지. 비타민제라도 사먹으면 될 거야.
그러나 그는 비타민을 먹는다는 생각마저 곧 잊고 일에 몰두했다.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어떤 때는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다가 직원의 부축을 받기도 하
였다.
원장님,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좀 쉬도록 하시지요.
아냐, 좀 과로한 모양일세.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
그러나 갈수록 현기증이 심해지고 있음은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출근하여 보니 그의 책상에 값비싼 빈혈 약이 놓여 있었다. 그는 비
서를 불러 물었다.
여보게, 누가 이것을 갖다 놓았나?
글쎄요…….
비서는 홍섭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바른 대로 말할 수도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말끝을 흐렸다.
글쎄라니, 그런 애매한 대답이 어디 있나? 이 방에 드나드는 사람을 자네가 모른다면 누
가 안단 말인가.
비서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당장 가져 가게.
그렇지만 원장님…….
난 도움은 딱 질색일세. 그러니 어서 그 사람에게 돌려 주고 오게.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약병을 들고 나와야만 했다.
직원들은 약값을 모아 이번에는 부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부인도 펄쩍 뛰며 사양했지만
직원 대표는 말했다.
이것은 저희들의 작은 정성입니다. 아무쪼록 원장님께서 받으시도록 사모님께서 잘 말
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홍섭의 병은 빈혈 약으로 나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1964년 6월 5일, 홍섭은 마침내 성모 병원을 찾아갔다. 내과주임 서 박사가 진찰을 하면
서 말했다.
빈혈이 대단하시군요. 우선 몇 가지 검사를 해 봅시다.
6월 18일, 홍섭은 수혈을 받았지만 부작용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해야 했다. 담당의사인
서 박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시 암이 아닐까?
김홍섭에게도 이런 생각은 들었다.
서 박사는 진찰을 끝낸 뒤 다른 병원을 주선해 주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
하여 다른 병원에 의뢰하여 진찰하려는 뜻인 모양이었다.
다음 날, 홍섭은 메디칼 센터에서 진찰을 받았다.
8월 4일, 홍섭은 메디칼 센터에 입원했다.
한 보름 동안 입원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확실한 진단이 나오니까요.
하지만 진찰 결과로 짐작되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의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폐에 이상이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을 잃고 있었다.
이로부터 6개월 동안 홍섭은 외로이 병마와 싸워야 했다. 이미 가족들은 그가 폐암임을
알고 있었다.
김자선 여사는 이 통보를 받았을 때 눈앞이 아찔했으나 가까스로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그럼 언제까지…….
폐암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진행이 빠릅니다. 반 년 정도가 고작이겠지요.
아무도 홍섭에게 폐암이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닥쳐올 일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답답한 가슴을 자기 손으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남은 문제는 나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짓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홍섭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
들었다.
너는 모든 일에 끝을 생각하라.
이따금 홍섭은 이 말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는 이 겨울 동안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
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다. 홍섭은 그 마지막 시간마저 모두 천주께 바쳤다.
1965년 3월 16일.
그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사나웠다. 심한 바람이 불고 봄비에 진눈깨비가 섞여 쏟아졌다.
오후 2시 20분.
김홍섭은 사직동 자신의 집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마치 잠
들 듯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 조용하고 성스러워 누구도 큰 소리로 통곡을 못 했다.
티끌은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님께로 돌아갈지니라.
평소에 즐겨 새기던 성구 그대로 김홍섭은 영원한 천주의 품에 그의 영혼을 위탁했던 것
이다.
그의 영결식은 3월 18일, 자택 바로 앞 사직공원에서 올려졌다. 잠시 뒤 장례 행렬이 길
을 떠났다. 조화 속에 묻힌 김홍섭의 유명(망인의 모습) 아래에는 그보다 먼저 간 10여 명
의 제자들 사진이 함께 걸려 있어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텅 빈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전국 교도소의 수감자들로부터 날아온 편지들이 쌓여, 답
장해 줄 사람이 영원히 떠나고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People > Peop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다리 없이 태어났지만…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0) | 2017.09.13 |
---|---|
[스크랩] [Weekly BIZ] 석유 재벌 존 록펠러, 평생 현재 가치로 145조원 기부 (0) | 2016.07.16 |
[스크랩] 장애, 거기서부터가 희망이었습니다 | 황영택 휠체어성악가 [세바시] (0) | 2016.06.24 |
[스크랩] 57년만에 한국인 된 `임실치즈 아버지` 지정환 신부 (0) | 2016.02.04 |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 남자의 '무릎'-영국 노동당 신임 당수 제레미 코빈... 젊은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 받아 (0) | 2015.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