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학

새해 설교계획 조언과 신년설교

맑은샘77 2016. 1. 6. 00:18

새해 설교계획 조언과 신년설교
2008년 12월 29일 (월) 07:51:26 장운철 기자 kofkings@amennews.com

새해가 다가옵니다. 많은 계획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중에 무엇보다 우선은 설교에 대한 계획일 것입니다. 새로운 한 해의 설교계획과 관련해 원로목회자의 조언을 준비해봤습니다. 오랜 목회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살아있는 권고의 말씀이라 봅니다. 또한 신년 설교 3편을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미약하게라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편집자 주>


1. 새해 설교 계획
윤남중(1970~1994년 새순교회 담임목사, 현 원로목사)

한 해의 설교 계획은 30, 40대 젊은 목회자들에게 쓰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는 꿈도 있고 계획도 있고 설교를 만들어 내는 정열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나이에 40여 년을 설교해 온 사람은, 이제는 눈도 쉽게 피곤해지며 사고도 둔해지고 글을 쓰면 어깨가 아프고 컴퓨터를 치면 눈이 아련해지는 게 말하자면 몸의 모든 부품이 낡아버렸다. 그래서 안일하게 생각한다면 지난 날 정력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했던 설교를 한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묵은 김칫독에서 김치를 꺼내먹듯, 그리고 곶감을 하나씩 빼먹듯 빼먹어도 앞으로 40년을 설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늙어가는 목회자, 소위 원로목사의 함정이다. 사람이 늙으면 메시지도 퇴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몸은 늙어도 메시지는 오히려 풍성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신년 설교를 계획함에 있어 필자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필자의 특별한 경우, 이를 테면 몸이 아프다거나 너무 피곤하다거나 전혀 시간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거나 연속강해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준비와 선교전달은 어렵다. 목회 자체도 어렵지만 설교는 더더욱 어렵다. 목회생활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설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렵다는 말은 책임 있는 설교를 하자니까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쉽게 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쉽게 하는 비결을 물으니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하면 된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원고도 필요 없고 다만 기도하기만 하면 성령님께서 영감을 주시는데, 그것을 그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쉽게 하는 방법은 ‘3년 주기’로 하면 된다고 한다. ‘3년 주기’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신자들의 기억은 3년이 지나면 3년 전 설교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3년 전에 했던 설교를 다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만 3년이 지나면 교회를 옮기면 된다고 한다. 주님은 그들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실 것은 분명하다. 또 어떤 목회자들은 설교를 하면 할수록 숙련공처럼 숙달이 되어 그 방면에 통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40여 년이 되었는데도 도사가 못되었다. 필자가 신학교 시절 김양선 목사님에게 “어떻게 그 많은 기독교 사료(史料)를 수집했습니까?”라고 묻는 말에, “나는 중학교 때부터 수집했는데 여러분도 한 가지 일에 10년을 집중하면 그 방면에 도통할 수 있다”고 대답하시는 말씀에 공감했다. 그러나 필자는 설교를 40여년 했는데 도통하지 못한 것은 역시 설교란 영혼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1년 앞을 내다보고 설교계획을 세우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의 할 점은, 필자의 신년 설교계획은 다른 목회자들에게 단순히 설교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필자가 작성한 설교 형태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런 도움을 여기서 바란다면 그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설교의 참 맛을 모르는 사람이고, 설교의 사명을 잊은 사람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남이 만든 설교 요약이나 설교 전문에 의존한다. 그들은 영광스런 설교자의 기쁨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필자가 제시하는 방향들은 설교자들의 독창적인 설교 구성을 권장하는 데 있다.

그것은 창조적이고, 구체적이며, 그 형태는 매주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모든 설교자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의 설교 패턴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필자의 신년설교계획의 내용은 필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였지만, 그러나 추상적인 것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만 밝혀두고자 한다. 설교 내용을 무엇으로 하든지 개교회 목회자들은 연중설교를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하며 그 계획을 작성할 때에는 시간, 계절, 교회력, 그리고 교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계획은 연구를 위한 것이지 설교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① 풍부한 자료공급원에 의존하라
우리의 자료공급원은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이다. 설교자들이 당하는 유혹은 설교의 주제를 기존 설교집에서 찾느냐 성경에서 찾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집을 설교의 보고로 아는데, 이것은 목회자의 영적 발전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것이다.

설교준비는 첫째, 주제가 먼저냐 성경본문이 먼저냐 하는 것이 분명히 정해져야 한다. 물론 성경본문이 먼저이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주제를 선택한 후 성경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그 이유는 시대적 상황이나 교회사정, 회중들의 요구에 따라 주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것이 성경중심의 설교가 아닌 방향으로 끌고 가는 함정이라는 사실이다.

목회자가 평소에 성경을 계속해서 읽는다면 그 안에서 주제가 나오고, 시대적 상황도 판단할 수 있고, 교인들의 희노애락 즉 슬픔과 고뇌 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제를 찾아서 성경본문을 억지로 맞추어 설교준비를 하려는 것은 인간 본위로 흐를 위험이 있다.

둘째,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성경에 묻혀 살면서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이 목사들이라는 말이 있다. 설교자에게는 두 개의 탱크가 있는데, 하나는 설교자료 공급원인 성경이고 또 하나는 그 성경을 읽고 얻은 영감을 저장할 수 있는 설교자 자신이다.

△정기적이고 규칙적으로 읽으라
불랙우드가 “설교에는 성경이라는 날줄과 삶이라는 씨줄이 있어야 한다”고 한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 이 두 줄이 합해져야 좋은 옷감이 나오는 것처럼 설교도 성경과 삶의 경험이 하나가 될 때 좋은 설교 구성을 할 수 있다.

△성경본문을 깊이 숙독하라
본문을 적어도 10번 이상 정독하고 또 깊이 묵상해야만 ‘꿀에 꿀송이보다 더 단 맛’이 나오는 법이다. 존 스토트 목사는 설교본문을 아침 5시에서 10시까지 읽는다고 한다. 설교란 자료를 수집해가지고 그것을 모자이크(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텍스트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 묵상하는 데서 주제를 얻은 후 그 주제에 삶의 씨줄을 연결함으로 생명력 있는 설교를 만들어 낸다.

② 연중설교 구상
△상호 연결성이 있게 하라
1년 52주일 아침설교와 주일밤과 수요기도회를 종합적인 안목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상호 연결성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먼저 강해설교를 권하고 싶다. 강해설교는 연속성이 있으며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모든 설교 중 가장 좋은 패턴은 강해설교다.

강해식 설교는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방법이요, 아주 선명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첫째로, 강해설교는 설교자 자신도 큰 유익을 얻는다. 즉 설교자 자신이 배우게 되며, 심령이 자라나고, 성경에서 얻는 메시지가 그의 피와 살로 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중과 교회 전체에도 무한한 유익을 준다. 회중들이 성경공부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마침내 성경과 친밀해 진다.

강해식 설교를 하는 일은 다른 어떤 방식보다 많은 수고를 요하지만, 설교 방법 중 가장 훌륭한 것이다. 과거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강단은 크리시스톰, 어거스틴, 루터, 칼빈, 찰머즈, 안드류 풀저 및 우수한 현대 강단의 거성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강해식 설교에서 그들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둘째로, 강해식 설교는 회중의 신앙이 체계화되기 때문에 유익하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출타하고 돌아오면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면 재미가 없고 싱겁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필자는 ‘재미있게’ 설교하는 사람은 못된다. 다만 그들의 귀가 강해설교에 훈련되고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강해식 설교는 설교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그 본문과 본문의 골격만은 반드시 남게 된다.

넷째로, 설교자 자신에게는 강해설교 후 한 권의 훌륭한 작품이 남게 되니 유익하다. 얼마 전 출간된 필자의 로마서 강해설교집 <의의 복음>을 두 번이나 읽은 성도가 있다는 말에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끝으로 설교 방식이 어떤 것이든지 우선 청중을 고려해야 한다. 성도들의 요구에 맞추어 그리고 그들의 관심과 고민과 시련 등을 고려해 가면서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생활 속에 적용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그 때(시기)’를 고려하라
‘그 때’라 함은 첫째 주일 아침예배의 설교에 있어서 지역교회 상황이 어떠한가를 고려하라는 말이다. 전도 목표를 세웠다든가, ‘해외선교의 해’로 정했다든가, 예배당이나 교육관 건축을 계획했다면 거기에 맞춰서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예배당 건축계획을 세운 교회는 느헤미야서를 연속강해 할 수도 있다. 요즘과 같이 시한부 종말론의 충격으로 교회가 상처를 받고 있는 교회는 데살로니가서를, 의행득구(依行得救) 사상으로 진통을 겪는 교회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택하여 믿음으로 구원얻음을 강조할 수도 있다. 선교는 사도행전을, 은사문제로 교회가 무질서하면 고린도서를 강해하면 좋다. 하여튼 개교회 사정에 따라 성경을 택하면 된다.

성경 속에는 크고 작은 주제들이 있어서 광범위하게 회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강해설교의 장점이다. 그리고 교회 신자들 중에 목사가 나를 ‘표적’으로 삼고 설교한다는 오해도 피할 수 있다.

△교회력을 참고한 목회계획을 참고하라
한국교회는 1월 첫 주일을 기준하여 모든 계획의 출발점으로 삼지만, 구미교회에서는 교회 절기 혹은 기독교의 해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모든 계획을 가을에 착수한다. 그 계절을 ‘기독교 해의 봄’이라고 한다. 가을에 시작하는 이유는 모든 교인들이 휴가에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느슨했던 심령들이 새롭게 시작할 때가 가을이다. 가을에 시작한 여간 계획은 4분기로 나누든지 아니면 3분기로 나눈다.

③ 신년설교계획

△주일 아침설교
필자는 주일 아침설교를 지금까지 로마서, 마태복음, 빌립보서, 야고보서 등을 연속으로 강해설교 해 왔다. 신년은 에베소서를 택하여 매주일 강설하려고 기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매월 한 주는 가정문제를 다룰 생각이다. 개인상담 중 많은 성도들이 가정에서의 상처가 크기 때문이요, 회중의 3분의 2가 여성도들이며, 전체는 가정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에베소서를 강해하려는 이유는 하나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획이나(엡 1:10), 당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우세해지고 유대인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대등하고 하나임을 강조했다.

독일은 통일되었지만 동서독이 예상 밖의 진통을 겪고 있다. 그 후유증을 틈타 국수주의 과격분자들이 데모를 일삼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는 남북의 통일을 앞두고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가 이를 대비해야 독일이나 다른 통일국가의 진통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관계와 행동 방식에서 하나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에베소서를 택한 것이다. 어린 다윗이 사울왕의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나아가지 않았던 것처럼 누구든지 체계의 속박을 받을 필요는 없다.

△주일 저녁설교
부목사가 없는 교회는 주일 찬양예배처럼 소홀히 하기 쉬운 시간은 없다. 한국교회는 주일 저녁설교를 찬양예배라 해서 성경공부나 주제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구미 교회에서는 주일 저녁예배를 주로 성도들 간의 친교 중심의 모임을 갖는다. 교파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이 주일 오후 3시에 맡아 하는데, 새해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에 대해 가르치도록 방향을 정해서 같은 소리, 같은 깃발을 들고 나갈 수 있게 하려고 한다. 바울 서신의 패턴은 언제나 전반부에서는 교리면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반드시 생활 즉 도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주일 아침설교와 주일 저녁 동역자들의 설교는 후반부처럼 바른 삶을 가르치도록 계획하고 있다.

△수요기도회 설교
한국교회의 대다수 설교자들이 수요 혹은 삼일기도회는 성경공부로 대치해 왔다. 이 경우는 주일 아침 설교를 제목설교로 한 경우이다. 주일 아침예배 때 강해설교를 하는 우리 교회와 같은 데서는 두 번 다 성경 본문을 중심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목사가 성경공부할 부분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한 후 분반해서 그것을 토의하고 정리하고자 한다. 그 후 그룹 리더는 각자의 기도제목을 알아본 후 한마디 기도를 하게 한 후, 다시 전체로 모일 때 리더가 자기 그룹에서 어떻게 관찰, 해석, 적용한 것을 복 하도록 하는 기도회를 갖고자 한다. 필자의 교회에서 ‘차 한잔선교회’의 귀납적 성경발견 학습법에 훈련이 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시도해 볼 만하다. 소외된 사회에서 교회 공동체의식과 말씀을 통한 교제와 공동의 기도제목으로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함께 나누는 말씀의 만찬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시간에 우리 교회에서 협력하는 35명의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읽고, 그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기도 한다.

능력 있는 목회자로 인정받으려면 날마다 자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획을 잘 세워서 자신의 시간관리와 영력을 잘 유지해야 하며 항상 겸손하게 주님을 위지해야 한다. 그래야 힘들여 세운 계획도 계속 능력있게 유지할 수 있다.

(윤남중, “새해설교계획 : 주 안에서 하나됨을 위하여”, <그말씀>, 1992년 12월호, pp.95-101)


2. 제목: 주님께 생명을 내건 자들
본문: 에스겔 3:16-21, 사도행전 4:1-4, 13-21, 마태복음 4:12-25

선지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이다. 그가 패역한 세대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듣기에 거북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듣고 깨우치게 되면 선지자는 생명을 보존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 피 값을 선지자의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한다(겔 3:20).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하는 전령은 생명을 다해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전령에게 언제나 좋은 환경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례요한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전령은 아골 골짝까지도 가야 할 때가 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이다. 바로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다(마4:23-25). 사도 베드로와 요한, 그들은 온갖 위협 가운데서도 박해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하게 말하면서 복음을 증거했다(행 4:19). 이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령으로 부르셨다.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대신 패역한 이스라엘을 깨우쳐야 했다. 이 일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일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누가 힘든 일을 좋다고 하겠는가? 누가 스스로 미움 받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에스겔에게는 분명히 마음에 담아야 하는 두 가지 말씀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네 생명(영혼)을 보존하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에스겔에게 맡기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말씀이다. 의인도 악인도 모두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이다. 모두 깨우쳐야 할 대상이다. 모두 구원시켜야 할 대상이다.

이 일은 에스겔이 생명을 걸고 해야 할 일이다. 찬송가 가사에 나온 대로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야만 하는 일이다. 괴로워도 가야하고, 죽음이 있다 해도 가야만 한다. 멸시와 천대가 있다 해도 가야 한다. 그렇다고 그 길에서 내가 영광 받은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 부름 받았기에 가야만 한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세례 요한, 회개하라고 천국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던 그가 마침내 헤롯에 의해 잡혔다. 생명을 내건 하나님의 전령의 최후이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주변의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이때로부터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주 무대가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는 것이다. 비로소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광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일성을 터뜨리셨다. 그렇다. 에스겔의 외침도 패역한 세대들을 향한 회개의 복음이요, 세례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도 패역한 세대를 향한 회개의 복음이요, 예수님의 일성 역시 회개하라는 복음이다.

구약의 선지자로부터 신약의 선지자까지 아니 예수님까지도 모두 패역한 세대들에게 회개하라는 말씀을 전하셨다. 이 말씀은 결코 순탄한 환경 속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건 외침이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제자들을 택하셨다.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 주님 좇기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이것이 곧 주님께 생명을 내거는 제자의 삶이다.

지금까지는 그물과 배에 그리고 가족들에게 생명을 걸고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예수님께 생명을 걸고 살아야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부름 받았음이 분명하다면, 내 생명을 어디에 걸고 살아야 하겠는가? 아직도 그물과 배와 가족들에게 생명을 걸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부르신 주님께 내 생명을 거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분은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시다.

이러한 사랑과 은혜에 감격한 사도들은 복음을 들고 패역한 세대들을 깨우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를 전했다.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끝내 부활의 도를 전하는 사도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 생겼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만 약 5천 명이나 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였다. 감옥에 갇힌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모두가 놀랐다.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병 나은 사람들이 사도들과 함께 있었고, 이미 표적 나타난 것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핍박자들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 맡은 자들과 사도개인들은 사도들을 불러 위협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 생명을 건 사도들의 모습이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었다.

새해 첫 주일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첫 주일에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버릴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한 해 믿음의 순례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생명까지 맡긴 채 믿음의 순례를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령들이다. 이제 주님을 증거하는 평화의 사도이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령의 삶은 좋은 환경이든지 좋지 않은 환경이든지 간에 주님께 생명을 건 삶이다.

(<2001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자료>, 대한기독교서회, 2000년, pp.106-109)


3. 제목: 하나님께 기뻐 찬양하며 감사하라

본문: 예레미야 31:7-14, 에베소서 1:3-14, 요한복음 1:10-18

① 석의적 접근
구약의 말씀(예레미야 31:7-14): 이스라엘의 유랑은 두려움과 실망과 자포자기로 인해 진력을 느끼게 한다. 모든 가능성의 목소리들은 희미해진 채 가치를 잃고 말았다. 예레미야 31장과 신약 성경에서와 우리 시대 속에서의 유랑의 배경은 침묵 속에서 희망 없는 것으로 밀착되어 있다. 세 가지 장면 모두에서 복음은 귀에 그슬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던지고 있다.

내용의 첫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은 유랑 생활과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운 구원을 근거한 새로운 생활로 초대한다. 이스라엘은 소리내어 기뻐 노래하며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8-9절에서 노래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로 시작하는 말은 전적으로 지금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초대하는 말이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을 변형시키는 행동적인 동사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신다. - “나는 인도하며 모으리니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10-14절에서 모든 나라에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나라에 선포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깊은 구원의 섭리에 굴복할 것이다. 그들은 값싼 노동의 제공에서 풀려나고 볼모에서 해방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상실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유랑하고 방황하는 모든 양들을 가치 있게 보는 믿음직스러운 목자가 될 것이다. 열방들은 대담한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멈추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랑의 두려움을 깨뜨린다.

서신서의 말씀(에베소서 1:3-14): 바울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그의 편지들을 시작한다. 1-3장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표현으로 일관되어 있다. 에베소서 1:3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에 대한 찬양하는 찬가의 분위기로 시작한다. 헬라어로 ‘복’이라는 단어는 감사나 찬양의 행위와 선물로 주어지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속한 복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선은 가능한 모든 형태를 취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4절에서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선택의 형태가 자세하게 나타난다. 저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라는 말씀이 그 예이다. 설득력 있게 하기 이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에 대한 문자적인 진술은 필요치 않다. 대신 저자는 하나님의 선택은 시작이 필요 없음을 추장한다. 요한복음 1:1에서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오심이 동일시되는 것이 불가능한 그대로 하나님은 인류를 대신하여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잠시 마음에 품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한 사람을 창조하신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을 정성들여 만드심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따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들이다. 인류를 대신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서, 그의 아들을 통한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만나게 되므로 6절에서 감사로 응답하는 것이다. 7-14절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구원, 용서, 지혜, 믿음-에 관하여 설명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상속에 관한 설명으로 절정에 이른다.

복음서의 말씀(요한복음 1:10-18): 제 4복음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서 예수에 관한 초점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성탄절의 아름다운 이야기 너머 아기가 태어난 베들레헴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결심밖에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성탄절 후 두 번째 주일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방영하는 기회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빛’이라든가 ‘영광’이라는 단어는 말씀과 연합된 것이다.

‘본다’라는 단어도 믿음의 인식을 위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성육신의 상황 전에 우리는 말씀이 인간 경험을 조명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빛은 어두움 속에서 계속적으로 빛나고 어두움은 빛나는 빛 속에서는 이해되어지거나 성공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은 출애굽기와 여러 번 관련하여 이해되어진다.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번 사람이 없으되’라는 말씀이다. 히브리성경에서 ‘본다’는 것은 모세 시대의 소명을 의미하거나 신의 영광을 잡기를 갈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등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에 반하여 지금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게 해 주셨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말씀이 성육신하는 것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헬라 동사 ‘거하시매’는 함께 산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방황했던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을 회상한다는 의미가 있다. 예수의 인간되심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모세가 보기 원했던 바로 그 신의 영광을 잡았다. 특별하고 독특하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거하셨던 하나님의 현현을 본 것이다.

② 설교를 위한 조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고 긴 방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감탄하게 된다. 인간을 향한 특별한 구원의 계획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하여 기뻐 찬양하며 감사한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선택한 백성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복음은 귀에 거슬리는 진리를 선포한다. 인류를 향한 영원한 선택에서 그의 아들을 통한 구원으로 만나게 도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뻐 찬양하며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하여 직접 만날 수 있게 해 주심을 찬양하며 감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구원의 섭리는 유랑과 어두움의 밑바닥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유랑은 두려움과 좌절감을 가져다주었으며, 구원에의 희망을 짓밟아 버렸다. 정말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라고 생각될 만큼 저들은 자포자기했었고, 구원에 대한 여망은 다 사라진 채 오직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을 변형시키는 ‘행동’을 일으키신다. ‘인간의 위기가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는 말이 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바로 그때가 ‘할 수 있다’하시는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의 시점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때와 기한이 차매’라는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찬송과 복의 이유가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을 알게 하신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가 영광의 찬미와 복된 감사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예정이요, 그의 기쁘신 뜻이기도 하다. 선택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이다. 또한 선택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한 영원한 선택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직접 우리를 만나 주셨다. 그리고 그의 보내신바 영, 곧 성령을 통하여 보증해 주셨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가 기뻐 찬양하며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정장복, <97 예배와 설교핸드북>, 홍성사, 1996년, pp.132-135)


4. 제목: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본문: 열왕기하 2:19-22, 마태복음 5:13

오늘은 신년주일입니다. 새해 첫 주일예배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엘리사는 구약 유다와 이스라엘, 남북조 시대에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며 활동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많은 그의 기적 사역 중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느 마을의 나쁜 물을 소금을 뿌려 맑게 고치는 기적의 말씀입니다. 성읍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좋지만 물이 좋지 못하여 아이를 유산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게 하고, 물 근원으로 가서 그 곳에 소금을 뿌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맑게 고쳐 놓았으니 다시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왕하 2:19 표준새번역). 놀랍게도 엘리사가 말한 대로 그 곳의 물은 맑아졌습니다.

① 썩은 물을 맑은 물로 만드는 기적이 일어나야 할 시대
물은 생명체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원입니다. 동물, 식물, 그리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머물던 어느 마을의 물이 좋지 않아서 생물이 죽었습니다. 토산이 익기도 전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새번역에서는 “물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세계도 물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수질 오염으로 말미암아 생명체가 죽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도 다른 생명도 다 좋은 물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은 지금 심각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무을 살려내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습니다. 물을 좋게 만드는 환경선교에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수질 오염을 막아야 하고, 수질 오염의 근원부터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은 먹는 물 말고도 다른 물이 있습니다. 다른 물이란 오늘의 문화입니다. 흔히 순수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세상 물을 많이 먹은 사람’이라고 핀잔을 줄 때가 있습니다. 문화의 오염 상태는 물보다 더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살림의 문화갗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죽음의 문화’가 오늘의 심각한 위기입니다. 망국적인 온갖 부정부패, 소름끼치는 극에 달한 강력사건, 마약 , 음주문화, 난폭한 운전문화, 안방까지 파고드는 음란문화 등 현대는 죽음의 문화가 그 그림자를 더 짙게 드리워 가고 있습니다. 퇴폐문화 때문에 인격이 병들고 육체가 망가기조 인생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오늘의 퇴폐문화가 정화되는 길은 없을까요? 신선한 문화로 바꿔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우리가 안고 있습니다.

②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라
엘리사가 요구한 새 그릇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그릇을 말합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새해 시 시간을 새 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 소금은 무엇일까요? 소금은 레위기 2:13에서 소제물에 뿌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상징하였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그렇다면 새 그릇의 소금은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 신선한 약속, 새 약속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야 합니까? 누가 이 새해에 새 약속을 해야 합니까? 우리들입니다. 여러분입니다. 새해라는 한 번 도 살아보지 아니한 시간이라는 그릇에 우리는 하나님의 새 약속을 담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사람들에게 새 그릇의 소금을 요구하였다면,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새해의 새 약속, 새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한 이 새해에 우리는 새 헌신의 약속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 살아갈 계획이 이미 서 있으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직장, 가정, 교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새해라는 새 그릇을 벌써부터 헌 그릇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새해에는 예배헌신, 선교헌신, 말씀헌신, 구제헌신, 봉사헌신, 친교헌신에 있어서 새로운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③ 물의 근원부터 소금을 던지며 뿌려라.
물은 근원부터 깨끗하게 보존되게 해야 합니다. 근원지의 청청 유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엘리사가 그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던지고 뿌린 것은 여호와의 언약(21절)이 신실하게 지켜질 것임을 나타내는 행위였습니다.

즉 “내가 물을 깨끗하게 고쳐 놓으니 다시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왕하 2:19 표준새번역)라는 것이 신실하게 지켜진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물에 소금을 뿌릴 때 소금은 물속에 녹아집니다. 여기 소금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13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이 물 근원에 던져져 뿌려졌을 때 썩은 물이 맑은 물로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소금은 오늘의 성도입니다. 물 근원은 이 세상의 썩어빠진 문화의 근원을 말합니다. 소금인 그리스도인이 물 근원인 세상 문화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녹아서 짠맛을 내야 소금이듯이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녹아지고 파송되어 짠맛을 냄으로써 세상 문화의 퇴폐를 줄여 갈 수 있습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듭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문화에 사람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이 썩은 물, 오염된 물을 만들면 그 오염된 물이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처럼 사람이 퇴폐문화를 만들면 그 문화가 사람을 죽입니다. 영혼과 육체마저 죽입니다. 문화의 퇴폐를 막는 길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부패를 방지해야 합니다. 소금이 뿌려지고 녹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적극적으로 문화의 부패를 막는 길은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좋은 문화를 창출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이 되어 여기에 관심을 갖고 헌신해야 합니다. 새 문화 만들기, 건전한 문화 만들기에 힘을 써야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교우들이 우리 사회의 퇴폐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무엇부터 착수해서 진지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으로 오늘의 문화를 거룩하고 아름다운 문화로 변화케 하는 데 헌신할 것인가?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와 설교자료 2002>,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년, pp.6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