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주기/남성학

중년남자 은퇴 후 -집에 있는 남자, 집에 있을 남자

맑은샘77 2014. 8. 27. 12:22

집에 있는 남자, 집에 있을 남자

[新대한민국 리포트] <6> 문제는 고령화가 아니다

머니투데이 유병률 김은혜 최경민 김종훈 기자 |입력 : 2014.08.27 06:00|조회 : 21085

 

  
 
편집자주|[新대한민국 리포트]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바로 알고, 문제점도 파내고, 새로운 대안도 제시하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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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임종철 디자이너
노인 세 명이 ‘눈탱이’가 시퍼렇게 돼서 응급실에 실려 왔다.
60대 노인: “아침에 나가는 마누라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70대 노인: “아침밥 달라고 한 죄 밖에 없는데…”
80대 노인: “아침에 눈을 떴다고...”

은퇴하고 집에 있는 중장년 남자들의 애환을 빗댄 유머이다. 비록 유머이지만, 은퇴해서 혹은 실직해서 집에 있어 본 남자들은 안다. 아내가 오늘은 어디 외출하는지, 오늘은 과연 내 밥을 차려줄 것인지가 가장 궁금하다는 것을.

그런데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아내와 아이들의 애환 역시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가부장적인 모습만 보이며 밖으로만 돌던 남자가 갑자기 하루 종일 파자마 차림으로 거실을 어슬렁거린다면.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의 설명은 이렇다.

“가족들로부터의 따돌림은 남자 탓이 크다. 여자들이 예전에는 더럽고 치사해도 애 때문에 참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뒤치다꺼리 못하겠다는 거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들 여기 앉아봐’ 훈계하고 잔소리 해오던 아버지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거다. 아이들도 영 거북하다. 이것이 수십 년간 가정을 소홀히 해온 남자들의 성적표이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자들은 사회진출이 늘면서 ‘가족 돌봄’과 ‘생계 부양’이라는 이중역할에 빠르게 적응해왔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밖에 나가 생계 부양을 책임지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남자들은 은퇴나 실직을 하게 되면 역할이 없는 역할이 돼 버린다는 것.

그렇다면 문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고령화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 문제이다. 일 없이 지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서가 아니라, 일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한마디로 성역할에서 진화가 덜 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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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있는 남자1
중소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5년 전 퇴직한 최모(59)씨. 처음 몇 년간 낮에는 집에만 있었다. 동네 사람들 보기 부끄러워 밤이 되어서야 움직였다. 주로 술만 마시러 다녔다. 회사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다.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도 회사 임원 할 때 그대로였다. 지시하고,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

부인 윤모(55)씨는 “남편이 회사 다닐 때는 밤 10시, 11시 이후에나 볼 수 있었다. 남편에 대해 50%도 몰랐던 것이다. 퇴직 하고 나서야 회사라는 매뉴얼이 사라진 남편의 모습을 본 것이다. 내가 아는 남자가 아니었다. 무능하고, 일방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굉장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 집에 있는 남자2
2년 전 조기 퇴직한 이모(49)씨는 집에서 가끔씩 주식투자만 하고 있다. 그는 퇴직 전까지 집에서 왕처럼 군림해왔다. 권위적이었다. 그런데, 퇴직 후 아들(18)과 마주치는 시간이 많아지자 이씨의 잔소리와 훈계도 늘어났다. 급기야 아들이 반발하면서 두 사람은 주먹다짐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들 가족을 상담했던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장은 “차라리 아버지가 아들을 일방적으로 때렸으면 오히려 덜했을 것이다. 부자가 서로 주먹다짐을 하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씻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남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후 “부성애의 결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됐다. 나는 아들을 지배하려고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 집에 있을 남자
모 IT서비스 대기업에 다니는 정모(47) 부장과 아내 김모(44)씨. 맞벌이이고 중학교 2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있다. 정씨는 실적도 좋고 대인관계도 좋아 회사에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요즘 부쩍 가족들한테 소외감을 느낀다. 가끔 평일 일찍 퇴근할 때는 미리 전화해서 "밥솥에 밥 있냐"고 물어봐야 한다. 어련히 늦는 줄 알고 자기들끼리 딱 맞춰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대놓고 불평하진 않지만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주로 주말에 마주치는 아들에게 “같이 등산가자, 영화보자”고도 해봤지만, 짜증만 낸다.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들은 ‘대체 왜 이래?’ 하는 눈치이다. 어렸을 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인가? 주말이면 아내는 딸과 외출하고, 아들은 친구들과 나가 버린다. 그는 항상 소파 맨 끝자리에 홀로 남는다. ‘대체 나는 뭘 잘못한 걸까? 지들 먹여 살리느라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나.’

하지만 아내 김씨의 말은 다르다. “남편은 가부장적 사고가 몸에 배인 남자다. 자기는 밖에서 일하는 게 역할이고 나는 밖에서도 집에서도 일하는 게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걸레질을 하면 소파 위에서 슬그머니 발만 올리고 그릇은 절대 치우는 법이 없다. 그렇게 15년, 아이들 문제로 의논하고 싶어도 남편은 없었다. 주말이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면서 아이들한테 잔소리만 한다. 가족들이 왜 자기를 외면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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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남자다
전문가들은 ‘지들 먹여 살리느라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라는 남자들의 마인드가 바로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숙기 원장은 “남자들은 집에 돈이 있든 없든 밖에 나가 돈을 버는 것만이 최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역할이 끝나면 무시당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회가 바뀌면서 여자는 바깥일 집안일 이중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오로지 바깥일만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 집에 있는 남자들의 불행의 시작도 정체된 성역할 때문이라는 것.

물론 남자들의 항변도 일리는 있다. 국내 굴지 S전자에서 10년을 일한 이모(40)씨의 변. “1주일에 6일 근무하고, 하루 빼고 5일은 야근이다. 육아휴직?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하지만 말도 못 꺼낸다. ‘애나 계속보지 왜 나왔어?’ 안 봐도 비디오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돈 많이 벌어야 한다. 회사 오래 다니는 게 목표이다. 그게 가족을 위한 길이다.”

하지만 김숙기 원장은 바로 그 S전자 임원을 지내고 은퇴한 50대 후반의 상담사례를 들려주었다. “은퇴한 지 딱 1년 만에 이혼소송에 들어갔다. 아내는 돈도 있고, 애도 다 컸으니 이제 남편과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남편은 변하지 않더라는 것. 산악회한다고 늘 술 마시고 다녔다. 아이들도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마시라’고 엄마에 동조했다.”

물론 같은 회사를 다녀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남자들도 미리미리 이중역할을 연습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윤자 경희대 아동가족학과교수는 “중국보다 더 가부장적인 유교문화, 일방적인 성역할을 가르쳤던 교육의 결과로 특히 40대 이상의 가부장적 의식은 뿌리 깊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여자인데도 여전히 9시 뉴스의 중요사건은 남자 앵커가 담당한다. 40대까지만 해도 여자는 학교에서 가정 과목을, 남자는 공업 과목을 철저하게 나눠서 배웠다. 한 여성학자는 “수명이 늘어서 40대라면 20대 마인드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40대 남자의 사고방식은 60대에 가깝다. 40년 갭인 셈”이라며 “정부가 중장년 일자리를 대거 만들 수 없다면, 남자들의 성역할이라도 제대로 정립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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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선진국은 남자들 마인드에서 시작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한 평범한 동네에 살고 있는 토드 하데스티씨 가족.(기자는 토드의 양해를 구하고 소개한다) 토드(50)와 그 아내는 모두 잘나가는 회계 법인에 근무했다. 그러다 아이 중 하나가 발달장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10년 전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아빠의 체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안 곳곳과 정원 손질하고, 아이들 방과 후 활동 데려다주고, 저녁을 준비한다. 동네 사람들은 토드를 그냥 전업주부로 의식할 뿐이다. 동네에 집에서 일하는 남자도 많고, 토드처럼 집에서 살림하는 남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다가 잠시 귀국한 한 교포 김모(42)씨는 “미국 추수감사절에는 남자가 터키를 굽지만, 한국 추석 때는 여자가 전을 부친다. 미국에서 손님맞이는 주로 남자들 몫이고, 차고의 공구진열대를 보면 그 집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1년 각국의 성별 가사노동 시간을 집계해 발표했는데, 한국 남자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23개국 가운데 22위, 육아분담 시간은 21위로 최하위권이었다. 대신 야외활동, TV시청 등 개인적인 여가활동 시간은 13위를 차지했다.

한국남자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가부장적 전통이 뿌리 깊은 일본보다도 낮았다. 최근 일본 언론에 따르면, 단카이세대(베이비붐세대) 남성들에게 요리, 다림질, 세제사용법, 부엌정리 방법 등을 가르치는 가사노동학원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송다영 교수는 “스웨덴의 경우 남자 육아휴직 비율은 80%에 달한다. 사회시스템이 한국보다 더 선진적인 것도 있지만, 남자들의 마인드 자체가 한국과는 워낙 다르다”고 말했다.


평균수명 연장, 조기퇴직 바람으로 집에 있는 남자들은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진다. 남자들은 집에 있어야 하는 현실의 불행을 이야기하지만, 그 불행은 고령화 때문만은 아니다. 집에 있는 시간들을 가족과 행복하게 보낼 연습을 젊었을 때부터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들 책임이다. 건전한 성역할을 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자보다 진화가 덜 된 탓이다.

노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연금이 아니라 앞치마일 수도 있다. 노후자금 만큼이나 요리 실력이 노후를 보장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퇴직하고 바뀌겠다면 이미 늦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