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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폐기해야 하고, 헌금은 안 해도 좋은가?

맑은샘77 2014. 8. 18. 19:39

십일조는 폐기해야 하고, 헌금은 안 해도 좋은가?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3)

 

입력 : 2014년 08월 17일 (일) 21:57:05 / 최종편집 : 2014년 08월 17일 (일) 22:07:10 [조회수 : 1727] 임종석seok9448@daum.net

십일조에 관한 논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한동안 <당당뉴스>도 뜨겁게 달궜는데, 이 논란에는 대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인용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23:23)

이 말씀으로 보면 십일조는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십일조 관련 성경구절을 들어, 또는 갖가지의 신학적 근거를 들어 부정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솔직히 특별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논쟁에 끼어들 생각도 없다. 다만 왜 그 같은 논쟁이 그토록 오래, 그리고 뜨겁고 격렬하게 진행되어 사그라질 줄 모르는 것일까 하는 생각만은 하고 있다.

위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신 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었다. 그러니 십일조에 관한 논쟁으로 힘을 소모하기보다, 버려진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회복하는 방안을 되찾는 데에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정말이지 십일조를 칼 같이 해 왔었다. 수입의 액수 끝에 단 1원이라도 붙으면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만원 단위로 더해 했다. 수입이 100만 1원이면 11만원의 십일조를 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은행에서 봉급을 찾아오면 가장 새 돈을 가리는 데에 시간을 썼고, 새 돈이 모자라면 구겨진 돈에 대리미질까지 했다. 그렇게라도 하여 정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음을 쓰는 걸 나쁘다 할 순 없지만, 그런 데보다 좀 더 실질적인 일에 마음과 시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칼 같이’라고 하는 게 결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전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선 나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가 오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각오와 결단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의(義)를 위해서 어떠한 손해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로 사는 것이 크리스천이다.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특권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그것은 희생과 양보와 손해뿐이다. 그런 것들이 일상화 될 때 나는 그리스도의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소금이 되어 녹아진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 것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그래서 기독교가 쇠퇴하는 것은 내가 빛을 내는 대신 어두움을 드리우고, 향기를 내는 대신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소금으로 녹아져 다른 사람의 삶이 맛이 나게 하는 대신 돌이 되어 던져짐으로 이웃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필자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나누기보다 끌어안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하나님께라 할지라도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린다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 참 다행인 것은 십일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성서적이냐 아니냐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욕심 많은 자신이 지속적으로 하는 헌금이 최저선이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아마 헌금을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회당의 유지와 관리에도 적잖은 돈이 필요하고 교역자들에게 생활비도 지급해야 한다. 선교도 해야 하고 구제도 해야 한다. 그러니 교인이라면 당연히 헌금을 해야 한다. 하되 형편에 따라 힘에 맞게 하면 된다. 없으면 못 하는 것이고, 넉넉하면 좀 더하면 된다. 있어도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헌금이다.

싫지만 신앙적 성장을 위해 한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억지로 해도 자기가 원해서라면 그것 역시 좋다. 그러나 남의 눈치가 보여 한다면 아니 하느니만 못하다.

교역자들이여, 헌금을 강요하지 말고 가르쳐라. 가르치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비율만큼만 가르쳐라. 그런데 그러기 보다는 믿음 하나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헌금을 강요하지 않아도 매사에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헌금은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치되 하라 가르치지 말고 그것의 본질을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 너무 빈번하게 너무 강조하여 말하다 보니 강요처럼 되고 마는 교회가 많은 게 문제이지만, 나는 헌금에 관한 설교는 하지 않는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목회자가 있는 것도 문제이다. 그건 자랑거리가 아니라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 직무유기이다.

필자는 자기 교회의 교인들이 장애인시설에 봉사하러 가는 것을 막는 목사도 있음을 본 적이 있다. 봉사를 하려면 교회에서 해야지 왜 밖으로 나도느냐는 것이었고, 봉사를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물질적인 도움도 주게 될 터인데, 그러면 교회에 하는 헌금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을 몸으로 돌보고 물질로 섬기는 것을 막는 목사가 있다니 그러고도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헌금을 통 크게 하고 돈 쓰는 일 또한 교회에서는 손이 커 인기가 대단한데, 밖에 나가면 인색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다. 친족이 돈 때문에 죽어 가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도 있다.

독자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사람의 헌금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라고 한 말씀에 비춰볼 일이다.

위에 든 사람이 통 큰 헌금을 보통의 헌금으로 하고, 교회에서 쓰는 돈도 나누어 교회 밖의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과 나눈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와 교회에 돌을 던지겠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보물을 하늘에 쌓지 않고 쓸데없는 데에 쓰느냐고 꾸중하시겠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헌금에 관한 문제는 또 있다.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해 말하려면 그러기 전에 미리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헌금에는 부자의 두툼한 봉투의 것도 있고 가난한 사람의 천 원짜리 몇 장을 십일조라고 낸 것도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독자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수입이 천만 원인 사람이 드린 백만 원의 십일조가 많은가, 아니면 수입이 백만 원인 사람이 드린 십만 원의 십일조가 많은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니다. 전자는 백만 원의 십일조를 하고도 9백만 원을 쓰게 되지만, 후자는 십일조를 드리고 나면 9십만 원밖에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교회에 모아진 헌금 중에는 생활이 넉넉지 못하여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쓸 것 못 쓰며 어렵게 드린 것도 들어 있고, 폐품을 모아 팔아 가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노인이 드린 동전 몇 닢도 들어 있을 수 있다. 하기야 그런 노인들은 문턱이 높아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와 같은 게 헌금인데, 그런 것을 거대하고 호화로운 건물을 짓는 데에 쏟아붓고, 이런 일 저런 행사에 물 쓰듯 한다. 사례금이 적다며 심기가 불편해진 담임목사의 얼굴을 펴 주는 일에도 쓰고, 능력 있는 성가대 지휘자를 데려오는 데에도 쓴다.

그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헌금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고, 드린 것은 헌금인데 쓰이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교계는 교회건축에 사활을 거는 것 같은 인상이 짙다. 제대로 말하면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의 건축이다. 그런데도 그것도 모자라 성전건축이라며 건축헌금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돌로 지은 건물 성전은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성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 믿는 사람 하나하나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고후6:16)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라는 말씀도 같이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전서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1:16)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거룩해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은혜이다. 믿음 하나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시니 은혜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성전 아닌 교회건물에 매달려 진짜 성전인 자신의 마음 밭을 잡초 우거진 폐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 밭을 의(義)와 인(仁)과 신(信)으로 꽃피워 보라. 그 향기에 벌과 나비가 사방으로부터 모여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