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군포에 위치한 겨자씨선교회 대표 김원균목사. 그는 지난 30년간 소년원 아이들에게 사랑의 섬김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가 섬기는 소년원생은 “무서운 세상 버티다 쓰러진 아이들“이라고 했다.
지난 4월 14일 오후 경기도 의왕 서울소년원.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60여 명 남짓한 원생들은 김원균(63) 목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나간 선배들처럼 너희들도 얼마든지 목사도 대학교수도 될 수 있단다.” 김 목사의 얘기에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듯,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김 목사는 국내에선 소년원 목회를 처음 시작한 목사다. 35년 동안 수만 명의 원생들을 만났다. 김 목사는 16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다섯 식구가 뿔뿔이 흩어졌다. 힘들었던 시절, 친척들도 그를 거두길 꺼려했다. 딸 셋과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큰어머니만이 그를 받아줬다. 친적 중 가장 가난했던 큰어머니께서 내 마음의 모든 걸 채워주셨다. 소년원에 처음 온 건 우연이었지만 와보니 나 어렸을 때 모습을 한 아이들이 빼곡히 있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1978년, 김 목사는 당시 서울 불광동에 있던 서울소년원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찰도 있었다. “교정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왜 기독교 교육을 시키느냐”며 일부 직원들이 반발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꾸준히 일주일에 한두 차례 설교를 했다. 82년 춘천소년원에서 “신앙으로 아이들의 심성이 바뀌어 교육 효과가 좋아졌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전국 소년원에서 김 목사를 불러 교회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소년원 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겨자씨 선교회도 그때 자리를 잡았다. 김 목사는 소년원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사랑과 관심’이라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이 많아서란다.
“여기 아이들의 부모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식을 귀찮아하거나 부끄러워하죠.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해 벌어온 돈을 뺏어 술 사먹는 아버지, 아이 모르게 재혼한 뒤 몰래 이사 가는 어머니 같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평생을 사랑받지 못하고 무서운 경찰관 교도관과 같은 아저씨들 틈에서 버티다 세상을 증오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많죠. 무서운 사람만 보다가 사람 대우해주는 사람은 내가 처음인 아이들도 있어요. 고아원, 양로원을 찾는 봉사자들은 있지만 소년원을 찾는 이는 없습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해도 그게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고 한다. 김 목사를 만나 어엿한 사회인, 선교사가 된 이도 있지만, 다시 범죄를 저지른 뒤 그를 만나는 원생들도 있다. “어릴 때부터 방치돼 한글도 읽지 못하는 아이, 호적도 없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구속받는 걸 견디지 못하죠. 100% 훌륭한 사람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이 일을 합니다.
김 목사는 아이들의 과거를 절대 묻지 않는다. 대신 자기 실수담을 얘기해준다. 아이들이 마음을 열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가질까봐 신상 기록도 참고하지 않는다. 그는 “잘못을 저질러서 온 아이들에겐 과거를 묻는 게 치명적”이라며 “장성한 원생들에게도 과거가 밝혀질 수 있으니 도움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그만큼 ‘과거는 잊고 싶은 대상’이란 거다.
그는 결혼한 지 32년째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 없다. 월세 집만 스물아홉 번 이사했단다. “체력과 돈과 시간이 남는 사람은 죄를 짓게 마련”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차도 렌터카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훌륭하게 성장한 원생들을 볼 때보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파괴하려던 아이들이 변화할 때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저는 정말 행복한 목사에요. 쉽진 않겠지만 힘이 닿는다면 갈 데 없는 아이들이 돈 걱정 없이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기숙형 대안학교를 세우고 싶어요.” 김목사는 2000년 스트레스성 뇌출혈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서울·경기 일대 교인들이 김 목사의 일을 돕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