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진박사/(목회자세미나) 목회와 선교전략
우리 한국 교회도 70년대 후반부터 선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합적인 운동입니다. 이러한 연합적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며 목사님들의 교파를 초월한 교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대비하여 선교하는 교회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중공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은 지금 벌써 21세기를 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연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21세기를 내다보면서 목사님들께서도 이것을 준비하셔야 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미 경제학자들이 예언했듯이 21세기는 세계 경제의 중심권이 미국이나 서구에서 극동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1986년에 독일의 한 아시아 연구소에서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인가?'하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에 미국, 소련, 중공, 한국, 일본등 극동과 일부 서구 국가의 정치, 경제학자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은 21세기 경제의 중심권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한국, 중국 또 싱가폴, 홍콩 등 소위 네 마리 혹은 다섯 마리 용이라고 하는 유교문화권의 아시아 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독일의 학자들은 19세기 독일 철학을 스스로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헤겔, 피히테, 헬더리 등의 철학자들을 위대한 관념론적인 철학자로 존중을 하는데 이 독일의 철학자들의 역사관은 철저히 서양 중심적입니다. 그것은 소위 코모유토피아로 유럽인이 일등국민이고 미국인이 이등국민이며 아시아인이 삼등국민이며 아프리카인이 사등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겔의 역사철학을 보면 아시아 문화 특히 중국의 문화를 서양 문화보다 못한 문화로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 독일 19세기 철학자들의 논리대로라면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을 반전시킨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누구냐 하면 토인비라는 학자입니다. 토인비는 21세기는 아시아 특별히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미나의 결론은 토인비의 예고가 정확했다는 것입니다.
선교와 한국교회의 역할
그러면 이에 대비한 한국교회의 역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금년에 한국이 세계기독교의 이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큼직한 국제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신문을 통해 아시는 대로 금년 8월에 세계 개혁교회 연맹이(WRCA)이라고 하는 국제기구대회가 연세대학교에서 열립니다. 고신측도 여기에 가입해달라는 정식청원서를 받고 김용복 교수외 몇 분의 국제 개혁교회 연맹에 대한 설명을 듣고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 내년 8월 하순경에는 '아세아 선교대회'가 개최됩니다. 이번 7월에 로잔에서 모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년 8월 하순경에 충현교회에서 열리는데 2천명 규모의 아시아 최대의 선교대회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한국교회가 재정의 40%를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연합활동입니다.
이외에도 침례교를 위시한 각 교단별로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기구들이 큼직한 대회를 한국에서 유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한국교회가 이제 더 이상 서울의 교회, 대한민국의 교회로서만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세계적인 교회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선교의 주도국은 어디가 될까요? 저와 많은 세계적인 선교학자들은 그것을 한국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세계복음의 주도국은 영국이었습니다. 19세기는 영국이 소위 해지지 않는 나라로서 전세계에 식민지를 가지면서 참 복음주의의 선교를 전개한 세기이며, 라토렛 교수가 말한대로 위대한 선교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 영국이 정치ㆍ경제면에서 기울어지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주도권을 미국교회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개신교 선교사 8만 5천명 가운데서 6만 5천명 가량이 미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입니다. 세계선교에 있어서 돈이나 물질이나 인원이나 모든 것의 2/3 이상을 지금 미국교회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N.C.C. 계통의 DOM이라는 해외선교분과위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교단들이 많은데 현재 이 N.C.C. 계열 교회들의 선교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복음주의 가운데도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많이 등장해서 현재 6만 7천여명의 1/3이상의 선교사가 이 복음주의 교단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의 반이상이 초교파 선교회에서 파송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사들 중에는 평신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시대가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구체적 예가 현재 미국교회의 일부 신학교나 선교단체가 한국 교회로 돈을 얻으러 오는 실정이고, 사람을 구하러 온다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선교단체의 장들, 총무들이 한국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또한 상당수 신학교 교장들이 한국에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돈도 있고 인적자원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공부하는 열의가 세계적으로 제일 강하고, 목사님들에게 경제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 신학교와 조인트 프로그램을 맺고 있는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신학교에 가보면 교장들이 말하기를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참 부자다."라고 합니다. 미국의 신학교와 공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등록금을 일부 주게 되는데 저희들 교수들이 일부러 등록금을 깍자고 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 돈을 제일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미국에 Summer School에 오면 쇼핑도 많이 하고 카메라도 제일 좋은 것을 차고 다니는데 왜 자꾸 등록금을 깍으려고 합니까? 미국 신학교를 좀 도와주십시오."합니다. 이럴때 저는 대단히 난처해집니다.
사실 제가 공부한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장도 작년에 두세번 한국에 왔다갔습니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가만보면 돈을 구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신학교나 대학교가 미국에 돈 구하러 가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미국에 무엇을 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 한국교회의 위치가 모든 면에서 부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목사님들은 자부심을 가지시고 비록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갈등하고 있지만 이것을 조금만 좋은 방향으로 돌리면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가 21세기의 세계선교나 기독교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세계의 기독교 인구를 50억 인구 가운데서 33.4%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2천년대가 되면 1.2 ~ 1.3%가 떨어지는 32% 가량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회교는 이에 비해 많아져 갑니다.
이것은 아주 좋게 보아서 그런 것이고 심지어 일부 비관적인 세계 신학자들은 21세기가 되면 세계 기독교 인구가 적어도 22%까지 한 10% 이상 감해지리라고도 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한국은 많은 교회가 대교회로 등장하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볼 때 매 2초마다 교회를 하나씩 잃어가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우리 기독교는 퇴각할 것입니다. 특별히 서구 기독교의 퇴각은 심각한 상황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소위 제3세계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더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아울러 서구 기독교는 세속화가 상당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이 선교의 바톤(Baton)이 이제 미국교회에서 아시아로 넘어오게 되었고 아시아 중에서도 우리 한국교회가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실제적인 문제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목사님들 중에 금년 로잔대회를 위시해서 국제대회에 나가시는 목사님들은 좀더 의젓한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런 국제대회에 가실 때 째째하게 돈 청구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런 국제대회에 자기 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아시아 교회는 몇 개에 불과 합니다. 한국, 일본, 대만 정도는 가능합니다. 대만같은 경우 돈은 있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국제대회에 나가서 얘기할 만한 지도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싱가폴, 홍콩 이 정도의 나라 사람들이나 자기 돈으로 호텔비, 회비 등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나라들은 주최즉에서 여비를 주어야 하고 여관비까지 다 담당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목사님들이 21세기를 대비해서 국제적으로 인심을 써야 할 상황입니다.
작년도 아세아 복음주의 신학회가 싱가폴에서 열렸습니다. 그곳의 총무님은 대만에 계시는 노봉림 박사이십니다. 대회가 다 끝났을 때 그분으로부터 그 나라의 제일 큰 신학교 교장과 제 방에서 이틀 동안 같이 지내고 호텔비도 담당하고 밥값도 담당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 할 수 없이 제가 다 담당했습니다. 그 다음 공항에서 헤어질 때 그 교장은 공항에 갈 차비도 없었습니다.
아시아,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선교지의 교회에 가서 그곳의 지도자를 만나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이젠 상당히 대우를 해줍니다. "우리에게 선교사를 파송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의 재정이나 교과서를 지원해 주십시오." 하는데 다 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남아 교회들은 미국교회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미, 반서구 감정이 강해서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남의 나라를 침략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우호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교회의 국제화가 대단히 시급합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총회 간부급들도 국제적인 무대에서 일할 수 있는, 대화할 수 있는 인물들이 보내져야 합니다. 더 이상 정치화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떤 써클을 지도한다고 해서 총회장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야말로 신앙고백대로 이제는 거룩한 공회(Catholic Church), 세계적 공회를 믿으며 국제화에 부응하는 자세를 가지시고 앞으로의 21세기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개념
독일의 '케제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21세기 신학의 주제는 선교이며 모든 신학이 선교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듯이 선교가 우리 미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문제는 선교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양극화가 대단히 심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에서 '선교'의 개념은 가장 좁은 의미로 '복음을 듣지 못한 다른 문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선교의 의미는 타문화권에의 전도입니다. 즉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 혹은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의 원주민들을 상대로 전도하는 그것을 가리킵니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의 선교의 개념은 성도와 교회가 전도를 위해 하는 모든 봉사활동까지를 의미합니다. 이 폭넓은 '선교'의 개념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제 1남 전도회가 제 1남선교회로 혹은 여전도회가 여선교회로 되기도 하고 또 과거의 경찰전도, 군대전도 하는 것이 이제는 경찰 선교와 군대 선교로 용어가 바뀌어 졌습니다.
요사이는 남선교회가 일진보해서 평신도회로 일부 바꾸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벌써 앞을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세대는 목회자 중심이 아닌 평신도 시대가 될 것인데 이에 부응하는 처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선교 개념으로 인해 종종 일부 교회 청년회나 학생회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19세기의 케케묵은 선교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교는 민주정의, 사회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할 때는 대단히 난처합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기독교회는 복음주의와 진보, 자유주의로 갈라져 있는데, 이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선교의 개념의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이 둘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타협점이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 한 주를 고백하는데 이렇게 신학사상에 있어 타협점을 못찾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양자를 절충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영국의 죤 스토트는 W.C.C. 선교대회도 참석하고 복음주의 선교대회에도 참석합니다.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캐나다 뱅쿠버의 제6차 W.C.C. 대회에서는 W.C.C.도 영혼을 전도하는 이 선교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복음주의 쪽에서도 사회정의, 민주화 투쟁을 외면했었지만, 현재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생각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의 'Kingdom of God' (신국)의 개념해석에서 Utopia의 실현에 있어 사회정의도 선교라는 차원으로 차츰 바뀌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W.C.C.의 25인 중앙집행위원회의 선교에 대한 정의는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가 아니고 아직까지는 사회정의, 심지어 혁명을 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는 약간의 과격한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해방 신학의 경우 누가복음 4장에 나타나 있는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씀이 대부분 그것의 주제가 됩니다. 곧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라,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라, 정치적으로 억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주라는 내용입니다. 민주화, 사회정의의 실현 등도 선교라고 하는 진보적인 선교개념입니다.
복음주의와 진보주의에서 선교에 대한 개념의 차이는 영문표기에서도 두드러집니다. 복음주의 선교학에서는 선교라는 용어를 쓸 때 Missions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의 선교활동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를 모집하고, 선교지를 결정하고 훈련을 시키고 모금을 하고 선교사 파송을 위해 기도하고 파송 후 사후관리를 하는 이 모든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교라는 단어를 쓸 때 단수가 아닌 복수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W.C.C.는 공식적으로 이 선교라는 단어에서 S자를 떼어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1912년 이후 장구한 세월동안 세계 최장의 선교 잡지로 유명한 「Th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국제선교회지)」의 명칭에서 S자를 떼어버리고 1969년도 제4차 웁살라 대회이후 Mission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갈드라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는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선교개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미시오 데이, 즉 하나님의 선교는 단수입니다. 북구 신학자로 에큐메니칼의 중진급 인사인 그는 우리의 국제선교회지의 선교용어에서 S자를 뗀 것은 잘못되었고 역시 선교는 '미시오 데이'가 아니라 '미시오 데스 데이(Missio des Dei)' 즉 하나님의 선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사람들이 W.C.C. 안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하더라도 수용되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1980년도에 복음주의와 W.C.C.의 선교대회가 비슷한 시기에 열렸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6월에 태국의 파타야에서 선교학자와 선교에 종사하는 세계지도자들이 모여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가?'하는 소위 '세계복음화'라는 주제 하에 선교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거기에서는 가령 태국의 불교신자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전략도 다루었었습니다.
그후 3, 4개월 뒤인 1980년도 10월에 애딘버러에서 미국의 U.S Center for World Mission이라는 선교기구를 창설한 랄프 윈터라는 사람이 주도한 국제적인 선교대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 대회에 가서 일주일 가량 참여하고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는 것처럼 그곳에서도 각 종교별로 선교전략을 논하였습니다. 아직도 세계에는 만 육천 오백국의 사람들이 기독교가 뭔지를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이 Ethnic-Group, 기독교를 전혀 듣지 못했던 인종 단위의 사람들을 찾아내는 workshop을 했습니다. 이러한 Unreached ethnic Group, 복음을 듣지 못한 인종그룹에 대해서는 우리 선교에서도 종종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또 5월 마지막주쯤 모인 멜버른대회, 이것은 W.C.C. 선교 및 전도분과 위원회가 주최했는데 이 대회는 'Biking of God' '당신의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주제였습니다.
이 선교대회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보가 날라왔는데 그때 우리나라는 광주사태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그 전보 내용은 "불행한 사태를 빨리 해결하시고 민주화를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교대회는 엘살바도르나 한국 등 소위 독재국가에게 정치적 불안정을 벗어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라는 전보를 모두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의 '당신의 나라에 임하옵소서.'라는 주제는 이 지상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으로 가난한 자는 배부르게 되고 억눌린 자는 해방이 되는 '해방'이 주제가 되는 선교로서 제가 보기는 가난한 자가 주제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의 세계기독교회는 세계 선교에 대한 개념에 대해 한쪽에서는 전도, 다른 한쪽에서는 특혜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잘 먹이고 잘 살게 하느냐의 인간화 문제, 해방문제로 서로 양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기독교회에서 실제적인 연합운동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우선 사상적인 대립이 완화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양자간 절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진보주의적 선교개념은 결국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목회자분들 중에는 민중신학을 지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저에게 언론의 자유를 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해방신학, 민중 신학은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데오로기는 쉽게 말하면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어떤 이념, 즉 철학이나 사상, 즉 전체를 위한 철학이나 사상이 아닌 어떤 특정계층을 위한 사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칼 막스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합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좌경사상이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왜 이데올로기화해 버렸는가 하는 점을 살펴봅시다. 독일의 선교학자들은 선교신학을 이데올로기화시키고 말았습니다. 해방신학에서의 주제는 앞서 멜버른대회에서 나타났듯이 가난한 자를 어떻게 먹이느냐 하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 심령을 떼어버리고 육체가 가난한 자가 결국 복이 있고 그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에서는 그 주제가 민중입니다. 물론 김지하씨가 사용한 민중의 개념에는 많은 혼란이 있지만 하여튼 특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일부 정치가와 재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중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중산층을 제외한 하류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 개념이 다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신앙적인 영적인 가치 기준이 아니라 사회ㆍ경제적인 면에서의 소외계층들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가난하기 때문에 무조건 구원받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변질되고 있는 선교의 개념
구약 시편에는 '땅의 백성'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의 백성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닌, 일단은 하나님을 가난한 중에도 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나타나는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가난함인데 이것을 너무나 사회ㆍ경제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선교의 개념이 이데올로기화 되었다고 봅니다.
이 말대로 한다면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돈 많은 장로님들, 목사님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얼마 이하의 돈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되며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또 얼마 이상을 가진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인데 사회, 경제적으로 어떻게 그 선을 그을 수 있겠습니까?
신ㆍ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가난한 가운데서 신앙이 더 생깁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고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교만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경제성장으로 인해 영적인 교만에 빠지고 있습니다. 이런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구약의 신명기 8장 12절에서 14절에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면 또 네 우양이 번성하여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 세대나 몇 세대가 지나가게 되면 경제적인 면이나 사회, 신분적인 면에서 복을 받아서 신분이 상승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구원 받을 때 우리는 다 가난했고 못 살았고 사회적 지위도 낮았습니다. 목사님들 중에 양반 출신도 많지만 우리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에 개신교는 밑에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이 개신교에서는 서구나 한국이나 예외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막스 웨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막스 웨버의 이론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을 형성해서 자본가가 된다는 이 자본주의는 청교도적인 칼비니즘 루터교에서 나왔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예수로 인해 우리가 출세를 했는데 출세한 다음에는 신앙을 발로 차버린 서구 기독교를 우리가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부자가 되고 좀 성장하게 되면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가난한 가운데 참 신앙심이 나타나고 기도가 나타납니다.
목사님들도 목사님들을 비판하는 신도가 한명도 없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설교도 잘하시고 목회도 잘하시고 심방도 잘하시고 다 위대합니다 하는 식으로 목사님을 존경하는 교인들만 있으면 교만해져서 목에 힘을 주게 됩니다.
신학교 학장인 저는 목에 힘을 못줍니다. 목에 힘줬다가는 당장 학생들에 의해 부러지고 맙니다. 요사이 우스갯 소리에 3대 멍청이 계급으로 총장, 학장, 중소기업 사장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 3대 멍청이 계급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수들이 서로 장을 하겠다고 했는데 요사이는 아무도 안하려고 합니다. 때를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장이라고 제가 목에 힘줬다가는 벌써 망했습니다. 목에 힘이 없기 때문에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하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솔직히 저는 하나님이 제발 이 장이라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중심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100명, 500명 교인 가운데서 "아! 우리 목사 틀렸다."하고 약간 톤을 낮춰서 적당하게 "이건 안 좋다."하고 말하는 교인들이 한 두 사람 있는 것은 양념으로 잘 두셔야만 합니다. 결국은 그런 사람들과의 풍랑이 일므로써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너무 편안하면 기도나 영성이 둔화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가난한 자의 그 가난과 신앙이 함께 할 때에 도리어 하나님께서 더 역사하시고 그런 사람을 더욱 돌보시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무조건 그 신앙을 떠나서 사회, 경제의 소외계층이 구원 받는다 하는 식의 논리는 성경을 통해 볼 때 수긍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많은 민중 우상이 생겼습니다. 지도층, 사회 계층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의 죄악을 소위 사회정의의 차원에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다 도둑놈이요 잘못했는가? 그렇게는 볼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잘 사는 기업가도 있을 수 있고 정치가들에게 무슨 정의를 구하겠는가 하는 말도 있지만 정치가들 중에 한 두 사람도 진정 신실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조건 도매금으로 가진 자, 권력자에게는 정의가 없다고 하면 권력자체를 스스로 부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정치제도를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되면 다 부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평하게 사회를 보는 눈을 이렇게 이데올로기 문제가 심각할 때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신학에 있어 문화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는 '빈곤의 문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빈곤의 문화'라는 것에 대해 그는 빈곤계층에는 빈곤을 영속화하는 잘못된 사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빈곤의 환경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 내에서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남미의 빈민층을 루이스가 연구해서 주장한 것인데 그들 빈곤층의 시간개념에는 미래가 없고 현재를 위주로 하여 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근면하지 못하고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람들은 Self-Interest 곧 자기중심적입니다. 이해관계에 있어 자기 가족, 자기 부족, 친척, 혈연 등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할 뿐 공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국가나 혹은 자기의 혈연 공동체를 초월한 대중이익이라는 공익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빈곤이 영속화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제도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제도 예를 들면 정부, 종교등 개인적으로 가치관을 부여하는 모든 기존의 제도를 무조건 부정해버립니다. 경찰제도를 만들어 합리적으로 일을 잘 처리해야 하고, 법관을 세워야 한다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족이나 혈연, 동네의 원로가 경찰관 노릇도 하고 사법관 역할, 정치가 역할도 하는 등 가문이나 부족의 모든 도의적, 예의적, 윤리적인 면에서 어른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합리성이 결여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빈곤을 영속화시키고 있는 빈곤문화를 제거하기 전에는 빈곤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론을 오스카 루이스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사회제도의 모슨 때문에 가난한 자가 생기는 반면에 스스로 타락하고 방탕해서 가난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것을 구분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선교에 있어서 청년들에게 제일 중대한 장애는 이데올로기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합니다. 비록 극소수이지만 심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좌경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이 30만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수치가 70만이 된다면 우리나라는 혁명으로 유도되고 만다고 합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학가의 소위 운동권 학생을 1%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우연히 운동권 학생들이 밤새도록 교육받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장소에 약 20여명 정도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해외선교 보다도 국내전도에 있어서 이런 학생들의 복음화가 시급하므로 그들의 의식구조나 가치관을 목사님들도 아셔야만 합니다. 두 학생이 교대로 한 7시간 정도를 교육하는데 재미있게 합니다. 상스런 욕도 좀 섞어가면서 모든 정치가들에게는 거의 놈자 등의 상스러운 소리가 붙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그것은 철저하게 반정부적이고 둘째는 반미로 미제국주의는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반가치관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7시간씩 이틀밤을 들으면서 제 나름대로 종합, 분석한 것은 결국에 가서는 그들은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반미도 좋고 반정부도 좋습니다. 할 때는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반가치관의 문제,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윤리에 대해서 부모로부터 복종의 윤리를 배웠는데 그것은 봉건주의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선생도 목사도 어른도 다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수들을 매도하는데 교수들은 30년 전의 노란노트를 가지고 와서 그대로 외워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진한 학생들이 들을 때는 교수 전체가 다 그런 것으로 듣습니다. 그 다음 끝에 가서 한마디 하는 것은 물론 기독교 학교이기 때문이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면 다시금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보면 종교 재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기독교를 말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체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 청년들에게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우리 목사님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은 대개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자란 학생들입니다. 이것은 이단문제 못지않게 무서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목사님들이 21세기의 한국 복음화에 있어 젊은 세대를 어떻게 인도하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대한 과제입니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
창세기 12장 1절로 3절까지를 첫 Missionary Text of Old Testament, 구약의 첫 선교 본문이라고 할 만큼 세계성과 국제성을 띠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아브라함을 세계 복음의 도구로써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봉사를 위한 예정(Election of Service)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9장 5절로 6절까지에는 왕같은 제사상이 나오는데 그 제사상의 개념은 선교로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라고 한 것은 우리가 위하여 기도할 이방나라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종교적이거나 외형적인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나 사명적으로 '선교'라는 것이 제사장이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6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를 이방의 빛으로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방의 빛이라는 개념을 사도행전 13장 47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선교로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전도라는 것입니다.
앞서의 이사야 66장을 보면 그곳에는 세가지 중요한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구약 중에서도 특별히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나라에 보내어 이방나라에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를 제 일 이사야, 제 이 이사야로 구분하면서 이사야 40장부터를 Missionary Text, 선교 성경본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는 우주적 선교개념이 담겨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제 일, 이 이사야의 의견은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 2장 2, 3절과 같이 역시 이사야서 초반부에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아온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6장에 담긴 두 번째 중요한 사상은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아온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이방인들 가운데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삼으리라는 것입니다. 즉 지도자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 목사님들! 우리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앞으로의 빠른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지도력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인격입니다. 오늘 제3세계 기독교의 제일 당면한 문제는 좋고 멋진 제사장과 레위인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큼직한 세계선교대회가 모입니다만 우리 목회자들은 그곳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대회에 오시는 지도자들은 다 그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들입니다. 복음주의자들 중에도 지도자로 top class에 있는 분들은 서구에서 식민지 교육을 받아서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유우머 감각이 있고 또 영어권이기 때문에 회의를 자유자재로 주재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시아지역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돈은 한국교회와 일본이 다 내고 있는데 앞장서서 일하는 것은 인도와 필리핀이 다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돈 한푼 안내고 돈을 오히려 가져가면서도 회장, 총무는 인도와 필리핀에서 다하고 있습니다.
W.C.C. 동북아시아의 신학자들은 상황이 조금 다르리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복음주의 계통은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영어 때문입니다. 필리핀이나 인도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쓰고 영어로 꿈을 꿀 정도로 영어권에 속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영어가 체질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은 우리가 다 내고 사회나 진행은 그쪽이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국제적인 리더쉽을 개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가 지도자의 비판기준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는 기독교가 주로 하류층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신학교육을 받았다 해도 자질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하류적인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그 점에 대하서 전성천 박사님의 '한국 교회의 분열'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과거에 하류계층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교회집단적인 정치윤리에 있어서 깨끗하지 못했고 갈등, 분열 등을 계속해왔다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이론에 대해 우리는 자기반성의 입장에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고 봅니다.
태국이나 인도, 인도네시아 등 일부 동남아 지역의 지도자 문제는 조금 신중을 기해야 됩니다. 실제적으로 선교하시는 교회 목사님들, 피선교지의 지도자를 불러다가 교육을 시키실 때 100% 믿고 성공한다고 자부하시면 안됩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경우 제가 보기에는 1/3이상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패를 각오하고라도 지도자를 기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를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선교의 중요한 이슈입니다.
다음, 선교에 있어서 두 번째 큰 문제는 교회가 선교를 하지 않고 대부분 미국이나 한국에서 증가 추세에 있는 선교단체가 선교를 담당하고 있다는 검입니다. 초교파 선교단체가 연합운동을 고취하는 것은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은 일단은 교회가 선교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사님들의 선교에 대한 책임의식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 로마서를 어떤 사람은 '교리'와 '선교'의 서신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즉 로마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선교비는 지원하지 않았지만 스페인까지 보냈다고 롬 15장 22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당회장은 해외선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교인들에게 존경 받는 목회자는 예산이 좀 모자라더라도, 내가 선교부의 집행 임원이 되지 못하고, 신학교의 이사가 되지 못하고, 농어촌 전도부의 간부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외적으로 무조건 얼마씩 내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어려운데 다른 데 지불할 수 있습니까 하는 목사님 보다는 우리 가지가 좀 약한 것 같아도 밖으로 가지를 많이 낼려고 하는 그 목사님을 존중하고 그런 교회가 오히려 헌금이 모자라지 않고 교인들이 더욱 열심히 내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런 교회의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존경받고 오히려 그 교회가 내적으로 안정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 목사님들은 개(個)교회주의를 극복합시다. 이것은 교회관의 문제입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교회관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를 겪고 있다고 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세계적 교회로 발돋움하시려고 한다면 목사님들부터 교회관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내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차원에서 심부름 역할을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목회를 오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 목회고 내 일터이며 나는 이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선교에 있어서의 교회의 역할과 선교 단체와의 관계
오늘 한국 교회에는 교회와 선교 사이에서 갈등이 좀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결국 우리 교회가 외형적으로 선교를 안하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예를 한가지 들겠습니다. 제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있을 때입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는 초교파 아세아선교회와 아프리카선교회가 매달 한번씩 아침 조찬기도회로 모입니다. 그것은 다 초교파입니다. 저는 거기서 강의도 하고 선교 자문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세아 선교회 여성 선교단체 합동으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열심히 일하시는 집사님 한분이 도망을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목사님이 이 모임에 오셨는데 만일 자기가 이 선교단체에 가입해서 회비내고 한 것을 알면 큰일이 나니까 도망을 가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목사님께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목사님은 선교를 안하고 나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런 선교단체에 가입해서 선교에 대한 정보나 강의도 듣고 또 선교에 오랫동안 참여해 왔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선교단체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의 선교단체는 1800개 가량입니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100여개 이상은 됩니다.
왜 목사님, 당회장 몰래 선교단체에 가입해서 매달 한번씩 모이고 선교회비를 내야 합니까?
저희 고신 교단의 경우 남전도회와 전국장로회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도회는 돈이 많아서 인도네시아에 두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이렇게 경제력과 시간 여유는 있는데 각 교회 목사님들이 하지 않으니까 이 역할이 선교회로 많이 유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립적으로 경계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교회를 통해서 하자 하는 식으로 폭을 넓히시면 이 문제는 다 해결될 것입니다.
제가 또 한가지 예화를 들겠습니다. 도시 교회 목사님들이 고민을 하시는 이유의 하나는 농촌 출신의 집사님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가난한 모교회에 보내야 하는지 자기 출석교회에 내야 하는지 고심하는 것 때문입니다. 농촌교회 목사님은 집사님 월급 받는 것이 괜찮으니 모교회를 생각해 달라고 편지를 자꾸 보냅니다. 이런 것을 상담하는 교인들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수원에 있는 어느 후배 목사님은 "그런 고민있는 집사님들은 일단 저에게 오시오 하고 그 교회 이름과 주소도 다 가져오시오. 그리고 일단 십일조를 바치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 이상을 그곳에 보내주겠습니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감리교도 좋고 기장도 좋고 합동도 좋고 이단종파만 빼놓고는 다 해줄 테니까 다 십일조를 하십시오." 그러니까 그 집사님들이 자기 교회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십일조헌금 등을 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도 개척한지 만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집사님들 하는 그 이상으로 보태서 지원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고신파 중에서 서울 출신입니다. 그랬더니 충청도 감리교의 목사님한테서 정말 감사하다고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교파를 초월해서 상부상조하는 것이 피차에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한국에 선교회가 많이 생긴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신다면 교회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목사님들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대외활동, 선교활동, 교육활동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Para-church가 생겨났습니다.
교회를 가장 중시한 개혁주의 선교학자 헨리 보오트는 "선교회는 비정상이다. 그러나 이 비정상적 상황은 교회가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축복된 비정상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도 축복된 비정상화가 없어야 되는데 이 현상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목사님들은 이러한 선교단체를 대립적 차원이 아닌 적극적 차원에서 잘 수용하시면서 선교는 교회를 통해서 하고 선교단체는 또한 교회에 종노릇하며 교회가 못하는 역할을 보충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상부상조를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전략
한국 교회의 선교전략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타종교에 대한 것입니다. 160여국 중에 서양을 포함시켜서 선교사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나라는 60개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은 교회가 있는 나라들입니다. 실제로 선교사를 보내야 할 나라에는 못 보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이유는 종교적 장벽 때문입니다.
비기독교 국가 특히 중동의 회교국가에는 서양의 기독교가 전혀 선교비를 못쓰고 있습니다. 관광객조차 성경을 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막대한 돈을 미국, 런던, 유럽 등지로 회교사원을 짓는데 투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도 런던에 불교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회교의 호메이니는 이란의 실권자가 되기 전에는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말아라 할 정도로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란에 들어와서 실권을 잡은 다음에는 무려 2만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회교를 반대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소수인종을 특별히 많이 죽였고 많은 기독교 선교사나 신자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팔레비가 한 이상으로 사바크라는 비밀경찰을 이용하여 철저하게 감시하는 비밀정치를 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엘 사아르 대통령은 회교를 국교로 만들 정도로 자기 종교를 강화하고 기독교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 특히 북한에 교회가 열렸다고 하는 것이 현재 한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N.C.C. 계통은 북한의 공인교회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그곳의 공인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공인교회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공이나 상하이에서 나타나는 종교자유 이것은 자유세계를 향한 호랑이의 미소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학생들은 호랑이가 미소 짓는 것만 보지 이빨은 보지 않고 호랑이는 우리 친구다 하고 접근합니다. 그러나 선교문제에 있어서는 아직도 이빨있는 호랑이입니다.
W.C.C.에서 인권을 주장하시는데 진정한 인권을 다루셔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30만명의 사람들이 회교권과 공산권 세계에서 매년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죽거나 감옥에 가는 등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W.C.C.는 신앙상의 인권문제를 다룰 때 자유세계의 인권에 대해서는 신랄한데 공산권과 회교권의 인권문제는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선교의 문이 다 열렸다고 보시면 안됩니다. 종교의 자유가 정말로 있다면 북한의 봉수교회가 십자가를 붙여야 하고, 신앙의 진위의 기준인 자발성과 충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가지가 외형적으로 나타날 때 그 나라와 그 사회에 종교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전도의 자유가 종교의 최고 자유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때 다른 자유는 따라서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보지 않고 무조건 교회가 있으므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은 속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아시아 선교를 위해 기도하실 것은 경제적 빈곤에 대한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선교는 85%가 목사 선교사이고 15%가 평신도 선교사인데 평신도 선교사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영적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자원도 가졌습니다. 복음주의 계통의 아시아 신학자의 2 / 3가 한국교회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낼 것이 아니라 후진 아시아국, 아프리카의 학생들을 받아서 우리가 기르고 우리 신학을 가르쳐서 해외로 다시 보내는 선교의 전략을 가져야 합니다.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주도국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좀더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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