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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가운(gown)은 성경적인가?

맑은샘77 2013. 7. 6. 16:02

목사의 가운(gown)은 성경적인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신자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예배 시에 입는 목사의 가운일 것입니다.

지난 2008년 11월 17일 한일장신대학(예장통합)에서 열린 '2008 추계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사님들께서도<예배자 가운 착용 여부 문제>에 대하여 질문이 나올 정도입니다.

여기에서는 예배 시에 목사님이 가운을 입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견해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가운의 정의(定義)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이 겉에 입는 예복(禮服).

2. 가운의 유래에 대한 견해(見解)

1)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복장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이다.

2) 이교적인 기원을 가졌다는 견해이다.

3) 그리스 로마의 세속적인 의상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이다.

4) 세상의 관료와 법관 또는 학자들의 복장을 모방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3. 제사장 복장에 대한 변천(變遷)

1) 출애굽시대에는 영화롭고 아름다운 복장이었다(출28:1-43). 반포 속옷, 청색 겉옷, 에봇, 띠, 보석 견대, 판결 흉패, 관 등을 색실과 보석으로 꾸며,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다.

2) 시대에 따라 잠방이형, 외투형, 수놓은 긴 옷 형, 터번(turban) 형 등으로 변형하였다.

3) 포로 기 이후 성전중심의 종교생활이 힘들게 되고, 회당의 보편화에 따라 그 필요성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4) 예수님 당시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제사장 예복은 신약교회 태동이후부터 일체의 언급이 없었다.

4. 목사 가운의 유래(由來)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15)는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더 나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역자의 의복이 단순한 흰색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클레멘트와 터툴리안(AD 160-225)은 염색한 옷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2) AD 330년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감독과 사제와 집사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로마의 공식적인 의상이 사제와 집사의 복장으로 서서히 채택되기 시작하였다.

3) AD 428년 교황 셀레스티누스(Celestinus)는 꼬울(Gaul)의 주교들이 평신도의 옷과 다른 의복을 입은 것에 대하여 질책을 하였다.

4) 4세기 후반부터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결백과 무죄를 상징하는 흰색의상(white garment)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5) 5세기 이후 감독들은 자주색 옷을 입었다. 그러나 아직은 성직자의 복장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6) 6-7세기가 되면서, 점차 성직자 복장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신비하고 상징적인 의미가 첨가되었다.

7) 9-12세기에는 당시 다른 전문직 의상인 학위복과 수도원복을 비롯하여 사계절에 필요한 의상들로 발전하였다.

8)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의 전통적인 예복을 버리거나 크게 간소화하였다. 일반적으로 천주교의 사제 예복은 거부하는 대신, 학자들의 검은색 가운을 채택하여 착용하였다.

9) 현대에 이르러 평상복을 입는 교단, 교회도 있고, 다양한 유형의 예복을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 교단, 교회가 있다.

5. 가운을 찬성하는 주장(主張)과 그에 대한 반론(反論)

<찬성. 1> 목사의 가운은 제사장의 복장을 계승한 것이다.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는 것처럼 목사도 예배를 집례하니 제사장처럼 가운을 입는 것은 성경적이다.

<반론. 1> 제사장 직분을 행할 제사장 제도가 없어졌다.

제사장의 복장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 제사장은 레위지파인 아론의 직계만이 할 수 있었다(출28:1;민3:3;히7:11).

놀라운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제사장 복장을 착용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도 제사장 복장을 착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더구나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으므로(마27:51;막15:38;눅23:45) 제사장 직분을 행할 제사장 제도가 없어지고, 그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벧전2:9).

그런데도 목사가 가운을 입고 아론의 직계만이 할 수 있는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8)

<찬성. 2) 목사는 영적 지도자로 구별됨이 합당하다.

목사에게 목사 됨의 권위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가운을 입는 것이 합당하다.

<반론. 2> 목사 가운이 무슨 영적 권위의 상징인양 여기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들로 인정받고 싶어 옷술을 크게 만든 옷을 입었다(마23:5). 지도자는 재덕이 겸전한 자이지(출18:21) 외형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마23:10). 그리고 사도시대의 지도자인 예수님의 제자 누구도 복장으로 구별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명령으로 두 벌 옷도 가지지 않았다(마10;10).

지도자는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침에 있다고 성경에 밝히고 있다(눅20:21).

따라서 가운을 입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리고, 가운을 통하여 목사와 신자가 계층적인 이원화로 분리될 소지가 많다.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참으로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눅20:21)

<찬성. 3> 가운을 입으면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인다.

평상복을 입으면 양복의 색깔, 모양, 넥타이의 색깔 모양 등으로 인하여 목사를 보고 설교를 듣는 신자의 시선과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다. 그런데 가운을 입으면 이 모든 것이 가려져 집중할 수 있다.

<반론. 3> 옷을 가리워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게 하는 자체가 잘못이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목사의 가운을 유심히 살펴보면 옷 색깔의 다양함과 화려함. 앞섶에 그려진 무늬와 기호의 다양함, 영대(목에 둘러 무릎까지 내려오게 한 좁은 띠)의 다양한 색깔과 기호와 무늬 등이 양복보다 더 요란하다.

더욱 문제는 목사의 가운이 점차 더 화려해지는 추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양복과 넥타이에서 오는 저항감 보다 더 설교에 집중할 수 없다. 이에 대응하여 단순한 가운을 입으면 된다고 하면 양복도 단순한 양복을 입으면 된다.

경건과 거룩은 꾸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모든 행실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에 밝히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찬성. 4> 성찬식에는 가운을 입어야 한다.

설교 시에는 양복을 입더라도 성찬예식에는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이 경건함과 거룩함을 주어 바람직하다.

특히 설교는 매 주 듣지만 성찬식은 교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매 주 하지 못하기에 구별함이 좋다.

<반론. 4> 설교와 성찬예식을 차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신자의 은혜의 방편은 크게 나누어 말씀, 기도, 성찬인데, 말씀에도 경건함과 거룩함의 요구된다. 그리고 매 주 듣는 설교라고 덜 경건하고 오랜만에 하는 성찬이라고 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은 예배의 본질에서 어긋난 생각이다.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성찬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여러 곳에서 가운에 대한 제기된 의문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운의 색깔이 흰색, 검은색, 보라색, 초록색 등 다양한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어떤 가운은 단순하고, 어떤 가운은 화려한데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영대(좁은 띠)를 목에 두른 것과 두르지 않는 의미와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옷이나 영대에 새겨진 무늬나 기호가 각각 다른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등등 참으로 다양합니다.

위 의문의 해답은 성경이 아니라 천주교의 예전(禮典) 예식(禮式)에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기독교에서는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