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학

설교의 위기

맑은샘77 2013. 7. 6. 15:42

설교의 위기

C.Reid의 설교학 위기는 피폐해져가는 현대의 설교의 위기를 참으로 적절히 진단하고 설교와 현대 커뮤니케이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방법의 제시로 목회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작은 책자이지만 부피만 작지 내용은 결코 작지 않는 소중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설교의 현 주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오늘의 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 재음미하도록 하는 중요한 책이다 C.Reid의 설교학 위기는 오늘날 “강단이 텅 비어 있다”고 하는 시각에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

책의 앞 부분에 나오는 “혼자 기분 좋은 농부”라는 비유를 보면서 현대의 성도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로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목회자들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설교학의 공부나 방법론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좋은 비유였다.

C.Reid의 설교학 위기 제1권에서는 오늘날 설교를 너무나 영력이 없고 무관하며 지루하고 잘못 전달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매스컴의 발달과 교통의 발달로 우리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설교가 복음을 전하는 유일한 매개체라는 시대는 끝났다는 징조가 여기저기에서 많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이 책은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1.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유를 사용하는 경향이 설교자들에 게 있다.

2.오늘날의 설교는 대개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3.대부분의 설교가 듣는 사람의 형편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4.요즘의 설교가 과감하게 복음적이지 못하고 힘이 없다는 것이다.

5.상호 전달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6.오늘날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7.이제까지 설교가 너무 강조되어 왔다.

교회가 새 시대에 있어서 복음전닭의 적절한 수단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설교의 부정적인 부분만 기록한 듯하다.


Ⅱ설교를 변호함 이장에서는 설교를 정의하고 목적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빈약한 설교의 원인을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대답 중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메세지를 준비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얼마전 국민학교 교사로부터 묘한 말을 들었다. 교시들도 행정 문서를 정리하다 진작 학생들를 가르치기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도 노회다, 경조사 심방이다, 모임이다, 등으로 진작 설교 준비는 소홀한 같다는 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Ⅲ새로운 상황 이 장에서는 우리는 현재 컴퓨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상황이 주워졌으므로 새롭게 상황에 맞게 배경이나 예화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64년에 설교에 쓰면서 한 설교를 쓰면서 한 설교자가 자기의 설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1차 대전 때 있었던 예화까지 거슬러 올라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일방적인 메세지 전달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발달되어야 한다.

맥루한이나 스나이더 같은 사상가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람“에 내포된 새로운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우리는 “한꺼번에 모든 감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2.우리는 획일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지양하고 현대인과의 의사 상호 소통 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3.현대인은 말을 듣는다거나 논리적으로 제의한다거나 교리를 서술해 주는 것보다 아주 실제적인 체험을 통하여 훨씬 많이 배운다.

4.현대인들은 우리의 활동과 행위가 상호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그들이 생 각하기에 이 둘이 모순되지 않을 때 쉽게 신뢰한다.

5.“새로운 사람”은 자신이 수동적 방관자로써 만의 자리를 가진 구조 속에서 아주 성급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사람들은 자기 고유의 은사를 알아주기 원하며 그들의 지도자의 은사 처 럼 존중되기를 바란다.

성인들은 성인 자격을 축소 당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대우하면 인종차별의 모욕 정도로 생각을 한다.

Ⅳ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이 장에서는 저자가 데플로이어와 라르젠의 저서에 기초를 두고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을 일곱 단계로 정의하였다

1.전달은 전달자가 자기 메세지를 전할 때 일어난다. 이 것은 첫 단계요 필연적인 것이다.

2.접촉은 듣는 사람이 메세지를 들었을 때 드디어 발생된다.어떤 사람이 우리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가 어떤 식으로든 자기가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아니하는 한 우리는 접촉이 성립되었는지의 여부를 실제로 알 수 없다.

3.피드백은 듣는 사람이 처음 전달자에게 정보를 반영해 보이는 것에 따라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4.이해는 전달자가 전하는 메세지로써 의미하는 바를 듣는 사람 편에서 정말 잘 이해할 대 이루어진다.

5.받아들임 “어떤 사람은 전달자가 의도하는 메세지를 듣고 이해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완전히 거부해버릴수도 있다.

6.내면화 “비록 귀를 기울이고 들은 사람이 그 메세지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7.행위“요즈음의 연구가들은 전달자와 듣는 사람이 공통된 이해를 가지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하는“데까지 도달하지 않는 한 커뮤니케이션은 불안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C.Reid는 현대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을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강단의 일방적인 선포의 설교의 한계와 무기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커뮤니케이션의 본성에 대하여 세련된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인은 커뮤니케이션

이나 피드백이 발생할 때 타인에 대한 적대감만 생길 뿐 조그만 변화도 상상할 수 없다고 설교의 일곱 단계를 도표를 그려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표도 정례화 된 것이 아니요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다.

Ⅴ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설교 이장에서는 현대의 강단이 많은 것을 외치고 있으나 실제로 결과는 빈약하다. 다이나믹한 양방 과정으로써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설교 이론에 중요한 암시를 제공한다. 보통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설교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거기서 설교자는 최소한의 피드백만 받아들인다. 그 설교을 듣는 사람들은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하거나 자기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의 역할은 순수히 수동적인 역할이다.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설교는 대화로 보충되지 않는 한 불안전하다고 하겠다.

기독교인들의 커뮤니케이션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요 가슴과 가슴의 만남이며 자아와 자아의 만남이다.즉 대화적인 만남이다. 설교는 거의 이러한 만남을 이러지 못한다. 목사라는 사람은 설교단의 높은 자리에 있어서 따로 구별되어 있어면서 대중들과의 대화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이해하고 보면 설교가 주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의존되고 있는 한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고립된 설교는 복음을 전달하는데 부적당한 수단이다.

교회 생활에서 설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설교는 고립된 사건으로서 아니라 개인적인 접촉과 소그룹 관계 공동의 경험과 공동 연구 시청각 교육과 세계를 위한 봉사의 공동 참여 등를 포함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되어져야 한다.

Ⅵ설교를 넘어서 이장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 현대 설교의 무기력을 인정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설교를 지향해야 함을 논하고 있다 기존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소집단을 통해 드라마,음악, 공동체 자체의 참여 예배든 다양한 형태를 시도하고 있다

C.Reid의 설교학 위기는 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 현대 우리 강단이 하루 빨리 수용해야 할 긴박한 문제이다.평신도와의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때 우리의 강단은 생수가 흐르고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2) COMMUNICATION의 입장에서 한국의 설교사역

설교란 선택받은 설교자가 다수의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방편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회중의 상태에 맞게 수준에 맞게 주인의 뜻을 잘 전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설교 사역은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시작하고 끝을 맺어 왔다.

특히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존의 방법은 모든 상황이 바뀐 현대에 사회에서 회중들로 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서로가 가슴을 열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방법적인 방법으로 독백처럼 외치다가 끝을 맺고 있다.

혹자는 마치 설교 시간은 조는 시간 공상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한국의 강단도 커뮤니케이션의 의식이 없이는 설교가 그 자리를 지키기는 힘이 들것이다.

한국의 강단도 외로이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될 것인가?

오늘의 설교는 끝내 폐물화 될 것인가?

한국의 설교사역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의 설교 사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어킬 방법은 없는가?

지금까지 설교는 독백처럼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질문이나 이해도를 생각할 틈도 없이 언어 위주로 일관하여 왔다.평신도는 이제 듣고 있는데도 치쳐버렸다. 혹자의 말처럼 “홍수는 났어도 참으로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것처럼” 설교의 외침은 많으나 참 생수를 구경할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본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 C.Reid의 설교학 위기라는 책을 기초로 몇 가지를 한국 설교사 역자들에게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언어위주의 설교 형태에서 예수님이 하신것처럼 실물 설교나 시청각 설교를 통하여 커뮤니케이션과 피드백을 살려야 하겠다.

둘째:너무나 자주 행해지는 설교는 설교자을 지치게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앵무새처럼 외치다가 끝을 맺는다 설교의 횟수를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

셋째:대 그룹의 설교보다 연령 멸 직업별 소 그룹을 형성하여 설교의 전문성르 살릴 것이다.

넷째:한국의 설교 사역은 지금까지 설교와 삶과의 연결이 아쉬웠다. 설교자가 말씀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삶속에서 평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쳐야 할것이다.

다섯째:다양한 절기나 예배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준비되지 않는 설교가 반복되느니 찬양이나 묵상 등으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21C 설교사역의 문제는 다양한 회중들의 삶과 가치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와 환경을 이해하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