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설교학

모범적인 설교-펌

맑은샘77 2013. 7. 6. 15:04

모범적인 설교-펌

구속사적 설교방식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보통 모범적 설교방식을 든다. 구속사적 방법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신학자들은 역사적 본문에 나오는 인간을 모범으로 사용하는 설교방법에 항거했다. 소위 모범적 설교방식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경고적 모범으로 사용했고, 그에 따른 적용은 ‘그 사람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기록된 이야기에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했으면 그를 본받을 만한 모범으로 사용하고 그 적용은 ‘그 사람처럼 행하라’는 것이다. 같은 방법은 심리적 차원에도 해당된다. 그 때 적용은 ‘그 사람이 경험하는 심리적 문제는 우리의 신앙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범적 방식으로 성경을 접근하면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온당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 됨은 분명하다. 그 예로써 필자의 설교집 창세기 12장의 설교(아브라함의 거짓말)와 요한복음 20장 설교(도마의 불신앙)의 서론 부분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에 따라 필자가 자주 받게된 질문은 구속사적 방법으로 설교하고자 하면 그 설교에 예를 사용하지 못함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와 같이 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성경에는 느헤미야가 솔로몬 왕을 예로 들어서 그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일을 경고적 모범으로 사용했다(느 13:260. 또 야고보는 라랍을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2:25). 같은 서신에는 의인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사실의 예로써 엘리야가 제시되고 있다(5:17)

이처럼 설교에서 모범의 기능에대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모범의 기능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예시적 행동

하나님은 자주 어떤 일을 예를 통해 행하시곤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행동으로 분이 어떤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또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밝힌다. 이러한 예시적 행동은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행동이 ‘예’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런 방식으로 행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그 예시적 행동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하고 예외적인 행동으로써 백성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려는 데에 있다. 백성은 그런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되는 것이다.

필자의 설교집에는 이같은 하나님의 예시적 행동에 대한 설교 몇 편이 들어 있다. 레위기 10장에서 제사장 두 명이 불법적으로 하나님의 장막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죽임을 당한 사건이 기록되었다. 그 후에도 제사장이나 제사장 아닌 사람까지도 불법적으로 성막에 들어간 일이 있다. 그들은 실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위기 10장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런 일을 당신이 어떻게 보시는지를 충분히 밝히셨다.

사도행전 13장의 설교도 이러한 예시적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성령님의 교회에게 직접 선교사를 보내라고 명하신 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신약 교회는 그 사건을 통하여 선교사를 보내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예시적 행위를 많이 기록한다.

2. 인간적 모범

문제는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인간의 행위가 우리에게 적극적이거나 부정적인 모범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미 성경에 모범적 사용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모범적 적용은 어떤 의미로는 가능하다. 그 배경에서 성경에 묘사된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죄의 유혹을 느끼고 죄에 빠지기도 하고 죄와 싸워야 했으며, 구원을 필요로 했고 믿어야 하며 또 소망이나 절망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이런 여러 요소들은 바로 우리 안에도 있다.

창세기 12장의 이야기에는 아브라함이 무서워져서 거짓을 행하려고 한일이 나타난다. 여기서 일반적인 진리가 나오고 있고 오늘날에도 같은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 설교에서 설교자는 그런 잘못을 지적할 수 있고 교인들에게 경고를 줄 수도 있다. 또 첫 번째 거짓말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죄의 길로 계속 나아가게 했던 일도 일반적인 규칙인데 설교에서는 이 점도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은 우리가 거짓말을 본문의 핵심으로 사용하고 그것으로 모범적 설교를 만드는 경우에 생겨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거짓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만이 본문은 올바로 이해 되어진다. 또 본문에서 핵심적인 것은 설교에서도 핵심적이어야 한다. 때문에 창세기 12장에 대한 설교는 아브라함의 거짓을 언급해야 하고 적용할 수 있지만 그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한 설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라합의 경우에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볼 수 있다. 믿음은 단지 여호와가 신이라고 말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는 것도 포함한다. 그래서 여호수아 2장에 대한 설교에서 그 사실이 언급될 수 있다. 하지만 여호수아 2장에 대한 설교는 단지 라합의 거짓말이나 믿음의 성격에 대한 설교가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본문에서 중심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였다(스 1:2-5). 여호수아가 정탐꾼 두 명을 여리고로 보냈을 때 하나님의 그 약속에 대한 확신을 보았다. 그것은 정탐꾼들의 보고의 내용이다(수 2:24). 이 사이에나오는 라합의 믿음에 대한 언급은 이관점에 서부터 설명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여리고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었고 라합에게는 이미 믿음을 주셨던 것이다(2:11). 라합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참된 믿음으로서 정탐군들을 도우고 구원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이방인 속에서도 참된 믿음을 생기게 하실 수 있다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강조한다. 여호수아 2장의 이야기는 말하자면 동심원(同心圓)셋으로 구성된 것이다. 하나님이 여리고에 두려움과 라합에게 믿음을 이루시는데 그것이 가장 중심원이다. 하나님은 그 믿음으로 정탐군을 구하시는데 그것이 중간원이다. 또 그를 통해 그 분은 이스라엘의 힘을 돋우시는데 그것은 다른 두 가지를 다 품는 바깥원이다.

성경의 역사적 본문이 부분적으로 모범적 기능을 가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윤리적 요소를 설교의 핵심으로 삼고자 할 때는 다른 본문을 택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거짓말이 잘못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면 제 9계명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좋고 그 예로써 아브라함을 사용할 수 있다. 또 믿음이 행동을 포함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야고보서 2장을 본문으로 택하고 라합을 단지 예로써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12장에 대해서 설교할 때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본문에서는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에서도 중심이되지는 못한다. 또 여호수아 2장에대해 설교하고자 하면 라합의 믿음이 한 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핵심이 될 수는 없다. 핵심은 하나님이 라합의 믿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실에 있다.

성경에 인간적 행동의 예는 많이 나오지만 그 인간적 행동이 설교에서 무슨 위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본문인 것이다.

3. 성경 밖의 예화

필자의 설교집을 읽으면 성경 밖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사실이 눈에 뛸 것이다. 그러면 필자의 생각에는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출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설교는 인간의 말이나 설교자의 생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에서 설명하고그들의 생활에 적용하는 하나님의 종이다. 예화가 설교에 사용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유익하냐는 점으로부터 답해져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성경 밖의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금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왜 필자가 일반적으로 그런 예화들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이유들을 답할 수 있다.

첫째로는 이런 예화를 위한 여분의 자리가 자주 없다는 점이다. 어떤 성경본문에 대해 설교하려면 그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야 하는데, 또 다시 다른 역사를 조립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이야기 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 말씀과 신약의 서신서들도 특별한 역사적 상황속에서 말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문의 말씀을 잘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그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역사적 상황을 알면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 9장 말씀은 의미 깊은 것이 될 것이며, 노예 상태에 대한 에배소서 6장의 말씀도 그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할 때 의미깊은 것이 될 것이다. 본문의 역사를 설명하는 설교자는 오늘 상황으로 옮겨 오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설교에서 이야기를 권하고 싶다. 보통 청중은 본문에 기록된 이야기와 그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 하나님이 당시에 어떻게 행하셨느냐에 대한 긴장과 놀라움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하면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찬양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기 원하시는데, 그렇다면 설교자가 설교 속에서도 그 이야기의 현장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 좋겠다.

잘 알려진 사람들에대한 이야기를 설교에서 사용하는 것에 주의해야 할 두 번째의 이유는, 그런 이야기로 인해 성경의 메시지가 제한되거나 변경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본문과 오늘날 회중 사이에 다른 어떤 이야기가 들어갈 때 그 예화는 여과기의 역할을 하는 수가 있다. 적용이 성경본문에서 청중들에게 직접 이르지 못하고 대신에 어떤 예화들을 통과해서 청중들에게 이른다. 그 결과로 본문의 메시지는 부분적으로 여과기의 영향을 받는다. 속은 이런 예화들은 성경본문의 의미와 영향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와 그것의 적용을 듣게 된다. 왜 그들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예화를 거의 사용치 않는 세 번째 이유는, 그런 이야기들이 자주 주의를 딴 곳으로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이 들어야 할 것은 자기 생활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설교 후에 기억하는 것이 단지 이야기일 뿐이라면 불행스럽다. 설교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고 그것이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화를 통하여 일으키는 것은 성경 자체는 재미없는 것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한다는 인상이다.

오히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모으도록 만들어야 한다. 예화 대신에 본문의 메시지 자체를 회중 속에 조성시키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설교자는 성경말씀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어떤 사람의 생활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청중들의 생활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설명할 이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오늘 청중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성경본문이 적용되도록 하는 것은 어떤 훌륭한 예화보다 유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