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여! 나는 체질에 안 맞아서! 라고 말하면서 민감한 부분은 교인들에게들에게 맞추기 원하는 또한 자신은 열정적으로기도하지 못하면서 교인 목회자. 들에게 기도안한다고 다그치는 목회자.이렇게 기도하려 들지않고, 변화하려 아않들지 않는 목회자는한 트럭을 싣고와도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전도사 한 사람만도못하다.
새벽 기도 시간에 목회자가 뜨겁게 부르짖고 울부짖는 모습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기도 소리 들려주기 보다는 은은한 음악 소리로 자신의 기도를 치부인양 숨기려 하는 목회자가 있다. 혹시 당신은 그런 목회자가 아닌지요? 왜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을 스스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것 처럼, 당신도 양들에게 살아있는 생생한 기도 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데, 왜 모범을 보이기를 싫어 합니까? 그러면서 교인들에게는 열정적으로, 뜨겁게 에례미야처럼 기도하라고 할 수 있나요?
성도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기 원하는가? 살아있는 교회를 원하는가?
그러면 기도하라, 말씀을 기다리라, 그리고 준비하고 원고에 의지하지 말라. 원고에 의지하고 원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당신도 죽어있는 성도, 죽어있는 교회에서 벗어 날수 없다. 원고를 작성하여 반드시 완전히 소화하라. 그리고 새술에 취한듯, 불을 뿜듯이 설교하라. 그러면 반드시 죽어가던 영혼이 살아 날 것이다. 이런 기쁨을 맛보는 목회자가 되라.
살아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은가? 그러면 설교시에 성도와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성도의 영적, 육적인 병의 상태를 진단하라! 성도들에게서 내 설교를 통해 나타나는 반응을 살펴라! 그리고 준비된 설교지만 상태에 따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수시로 변화를 주라!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을 살펴가면서 말이다. 눈을 맞추면서 설교를 할때, 성도는 어린 아이가 된다.그리고 설교자로부터 사랑을 느낄것이다. 눈맞추는 설교를 통해, 살아있음을 발견할 것이고, 감화를 받을 것이고,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눈을 떼는 순간, 그 성도의 마음도 당신을 떠나간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은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했을때,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아! 예! 기도는 당연히 많이 하고 있지요. 항상 하잖아요?
그러나 당신의 기도는 흉내내는 기도인가, 부르짖는 기도인가, 아니면 부르짖고 응답받는 기도, 즉 하늘의 것을 끌어내리는 기도인가? 한번 생각해 보라.왜냐하면 목회자의 기도는 절대로 첫째도 아니요, 둘째도 아니요, 세번째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목회자가 체험이 없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처럼체험만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본것을, 당한것을 증거해야지, 보지도 않고, 당해 보지도 않은 것을 어찌 증거하랴! 그러기에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라. 당신은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도전하라. 부르짖고 하늘의 것을 끌어내리는 능력있는 기도자, 능력있는 목회자가 되기위해서...
당신의 설교는 신선한가?
요즈음은 컴퓨터가 발달해서 그런지 목회자들이 통신상에 올라온 남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다가 설교를 한다. 또 설교 준비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단체도 생겼다고 한다. 1년에 얼마의 돈을 내면 매달 명설교라고 해서 몇편, 기타 설교 몇편해서 보내준다고 한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게으른 목회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정말 이렇게 설교를 준비한다면 그 설교 당연히 신선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글을 읽는 당신은 설교 준비를 어떻게 하는가! 그런 사람들처럼 싸구려 목회를 하는가? 아니면 창조적으로 준비하는 값이 비싼 목회를 하고 있는가? 이것을 알라! 하늘이 낸 목회자는 절대 모방, 도용, 편리성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기에 그는 항상 앞서가는 목회자이다. 그는 창조적인 목회자이다. 그의 설교는 마르지 않는 신기한 샘물이다. 고로 그는 신에 감동되고, 신에 붙들린바 되어 신령한 목회를 이끌어가는 창조적인 목회자이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신선하다. 왜냐하면 썩은 샘물을 퍼온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샘물을 길어왔기 때문이다. 당신도 이와같이 값싼 목회인생이 되지말고, 값이 비싼 목회인생이 되어 하늘의 신령한 샘물을 길어나르는 창조적인 목회인생이 되라.
당신은 사모의 역할을 알고 있습니까?
요즈음은 여권 신장의 시대라고해서 사모도 매우 활발하게 교회 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그 사역이라는 범위가 지나쳐서 항상 성도들간에는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월권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비단 목회자의 세계,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본인이 군 생활할 때,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장교들 관사(주택)에 가면 부인들 사이에서도 남편의 계급을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인들은 남편들보다 한수 위의 계급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목회 하시는 목회자들의 사모님들이 바로 이런 모습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일이다. 목회는 목회자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실때도 목회자를 세우시는 것이다. 고로 사모는 그 지아비, 자신의 남편을 위해서만 존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신 사모란 위치는 목사 위에서 군림하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지아비 한 사람만을 섬기라는 것이다. 사모가 자신의 남편 한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고, 가정의 머리로 여기지 않고 꼬리로 여기는데, 그 가정 천국같이 화평할이 만무하다. 그 교회 역시 천국의 모델로서 평안을 줄리 만무하다. 항상 잡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교인들은 등을 돌릴 것이다. 당신의 아내가, 사모
요 18장에서 예수님은 한 마리의 잃은 양에대해 강조하시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한 마리의 양과, 아흔 아홉 마리의 양중 어느쪽을 더 소중히 여기는가?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모순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으면서도 아주 담대한 것을 볼 수 있다. 분명 한 영혼이 시험들어 등을 돌리고 나오지 않아도 전화 한번, 심방 한번 하지 않는 목회자가 부지기수다. 더욱이,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은 찾아 볼 수도 없다. 물론 모든 목회자가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요즈음 신문 지상에 보면, "뒷문을 막아라"라는 슬로건으로 교회 성장에 관해 세미나를 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그래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런곳에 몰린다. 무슨 더 좋은 비결이 있나하고... 있기는 정말 있다. 그러나 있는 것을 배우면 무얼하나. 현실에 돌아와서 자신의 상처받은 양한 마리를 찾아오지도 못하는데... 문제는 배운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데, 엉뚱한 곳에가서 찾고 있다.
잠언 27:23절에 보면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말씀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엇 때문에 바쁜지는 몰라도 아흔 아홉 마리의 양떼와 물질의 바벨탑, 명예의 바벨탑, 정욕의 바벨탑에는 관심을 두어도 한 마리의 양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러면서 열심히 "뒷문을 막아라"는 강의를 들으면 무얼하는가? 당신의 마음이 양떼에 가 있지 않은데... 이제부터라도 아흔 아홉 마리의 양떼(數)보다 한 마리의 양에게 관심을 가지라! 그리고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라!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품으라! 그러면 성장할 것이다. 그가 전도의 알을 잉태할 것이다.그리고 당신의 둥지에서 하나씩 낳아서 당신의 마음을 즐겁게 할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꿈같은 교회로 가꾸고, 꿈같은 목회를 만드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많은 목회자들이 강단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주일날 이것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본 교회는 부교역자들에게 맡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집사가 왈, "왜 목회자들이 주일성수하라고 하면서 당신들은 지키지 못합니까?"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바로 강단 교류로 인한 주일 출타를 꼬집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교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목회자들이 강단 교류를 하고서 사례비를 받아 오는데, 그것은 교회를 대표해서 일한 것이 아닙니까?" 결국 그 교인의 얘기인즉, 주일날 당신의 강단을 내어놓고, 출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왜 사례비를 받아 오느냐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그것 받지 않아도 살수 있는데..." 그리고 그것을 받았으면 재정부를 통해 교회에 내어 놓아야지 왜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남이야 어떻든 본인은 배우는 입장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는 주일 날, 타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면, 그것은 본 교회를 대표해서 파송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받은 사례의 대가는 당연히 교회에 소속 되어야 한다. 목회자 생계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가 전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목회자가 교회를 대표하는 일에 있어서 이익이 되는 문제라면 교회가 아닌, 자신이 챙길려고 한다면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모순된 논리이다. 교회가 목회자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만큼, 목회자도 교회를 위해 희생 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님의 것에까지 눈을 돌리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할 것이다. 그 목회자의 십일조만큼도 안되는 적은 것을 받고도 생명걸고 헌신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은 모르는가 보다.
이것을 알라! "배부르고 눈이 먼 목회자에게는 절대로 진리의 영이 거할 수 없다는 것을..." "투명한 목회자, 청렴한 목회자, 생명을 두려워 하지 않는 목회자를 이 시대가 찾고 있다는 것을..."
각 교회 마다 교육 부서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위임된 교육 전도사들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도사에게 위임을 하였으면서도 완전히 위임하지 못하고, 의심반, 불신반 병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오직 담임목사 한 사람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당신들의 행동으로). 한 예로 교육 부서에서 매 예배시 마다 헌금이 나온다. 그리고 이 헌금은 각 부서의 지도자의 책임하에 자체적으로 운영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특별한 이유없이 당회, 아니면 교회에 올렸다가 다시 그것을 타서 사용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교육 부서는 지도자부터 위축된다. 과감하게 운영할 수 없고, 꼭 써야될 일인데도 사사건건 보고를 해야하고, 허락을 받아 운영해야 한다. 물론 질서상 그런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교육 전도사를 못 믿겠다는 발상과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이 여기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헌금 문제이다. 교육 부서에서 나온 헌금도 반드시 대 예배에 올려 오직 목사 당신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사가 기도하면 한되고, 전도사가 하는 기도는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는 인정하나, 나타나는 현상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이기주의적인 생각이다. 오직 축복권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이고,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을 통한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폭이 좁고 옹졸하니까, 목회도 대범하게 하질 못한다. 우리는 카톨릭을 비난할 자격도 없다. 어느덧 우리 기독교는 카톨릭화 되어가고 있다. 목회자는 독선과 아집과 이중적인 신앙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목회도 건강하게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자신의 밑에 있는 양과 부교역자를 믿지 못하고, 불신하면서 그 입으로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 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하계 수련회 기간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교회들이 들로 산으로 강으로 수련회를 다녀온 줄 안다. 그런데 목회자 중에는 기도하지 않고, 확신으로 가득찬 믿음이 없어 수련회 행사때 마다 근심, 걱정, 불안으로 초조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수련회 계획 수립때부터 "물가으로 잡지 말라", "위험한데로 가지 말라" 하면서 초장부터 흐려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막상 수련회를 떠나는 사람을 두고 재수 없는 이야기로 훈계를 한다든지, 불신으로 꽉찬 소리, 볼멘 소리로 훈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막상 떠나는 일행이 위축되어 기분은 팍 상하고, 오히려 사고 안 날것도 사고를 유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 그럴까? 본인이 볼때는 이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신과 의심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다면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은 할 수도 없고,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교육 부서에 있는 학생들, 그러니까 자녀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것은 가정에서부터 자녀들과 대화의 담, 사상의 담이 막혀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교회에도 그대로 전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교역자가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에 대해 "아 우리 학생들은 절대로 나쁜 아이들 없고, 나쁜짓 하는 아이들도 없습니다"라고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드려도 그것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학생들 중에 혹시라도 남녀가 몇 명 교회에 있는 것을 보면 난리가난다. 꼭 뭔일 나기를 바라는 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해야 가지 않는다. 이것은 말로만 학생들을 사랑했지, 실지론 그들을 마음에 품어 보지도 못하고(잠 27:23), 그들을 위해 기도한번 하지 못하고, 그들을 위한 진정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 번째는 그들을 지도하는 전도사를 못 믿겠다는 것이다. 막상 당신이 좋아서 데려오고, 위임까지 시켜 놓았으면서 못믿겠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존경하는 목회자님들,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반드시 잘못된 구습을 벗어 버리고 변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앞에 항상 신선하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교인들은 식상해서 당신곁을 떠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설교자인가?
여러 유형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의무형, 나홀로형? 이라고 할까?
재미도 없고, 은혜도 안되는 설교, 교인들의 반응이 분명 썰렁하게 다가오는데도 자신 혼자만 즐거운 듯,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한듯한 착각으로 설교하고 있는 설교자가 있다. 한 마디로 정말 따분한 설교를 하면서도 교인들이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교인들이 듣든지 말든지, 은혜가 있건 말건, 떠들거나 말거나 오직 자신은 설교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설교하는 목회자... 참으로 불행한 목회자이다.
두 번째는 비슷하겠으나, 교인들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는 설교자가 있다.
알아듣지도 못할 비유(즉 서양의 사건을 통한 비유, 문화 정서가 맞지 않는 비유)를 하고, 알아 듣지도 못할 말(히브리어, 헬라어등을 들이대가면서 하는 설교)을 하고, 혹은 자신은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들이대가면서 설교를 한다. 직접 자신이 체험한 비유를 들라! 아니면 우리 정서에 맞는 비유를 들라! 구태의연하게 비유 백과 사전을 같다 들이대지 말라.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비유, 자신의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비유를 하는 것은 죽은 설교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국어책을 읽어가듯이 자신이 준비한 원고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떠듬 떠듬 읽어가듯이 설교
를 하는 목회자가 있다.
이렇게 읽어나가다가 만약 글자 한 줄이라도 노치면 난리난다. 앞 뒤 말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 잃어버린 줄을 찾느라 정신없이 진땀을 빼게 된다. 그러니 교인들의 상태를 살피고, 눈을 맞추어 간다는 것은 그에게는 오직 꿈일 뿐이다. 이런 것을 통털어서 한 마디로 "목회자의 복지부동"이라 한다.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렇게 썩어빠진 사고방식으로 구태의연한 설교를 한단 말인가? 절대로 변화하지 않으려하고, 교인들이 떨어지고, 죽어가고, 상처받아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교회 소문이 어떻든 자신과는 상관없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지 못할바에는 다른 사람에게 내어 놓기라도 해야 되는데, 자신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열심있는 남도 하지 못하게 하는 풍토. 이런 풍토 하루 빨리 고쳐져야 한다. "자신이 아니면, 꼭 내가 해야만해"라는 "병". 이것이 우리네 병이다.
네 번째는 참 설교자상이다.
철저한 준비와 기도속에 성령이 충만하여 강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항상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면서 강단에 올라선다. 왜? 하나님이 강하니 설교자도 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이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슴졸이는 목회자도 있다. 이렇게 준비하여 설교를 하면서 아픈 성도는 없는지, 내 설교에 은혜는 받고 있는지, 반응은 어떤지, 저들이 무슨 고민이 있고, 무슨 병이 있는지를 찬찬이 따뜻한 눈빛으로 맞추어가면서 설교를 하는 목회자, 또는 설교를 하나의 영적 유아식으로 생각하여 아주 맛있게, 소화가 잘되게, 체하지 않게, 잘 넘어가게, 누구든지 잘 먹을수 있게 적절하게 배합하여 떠 먹여주는 목회자가 있다. 이런 설교자는 절대 교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원고에 의지하지 않는다. 눈과 눈을 맞추면서, 그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아주 강하고 담대하게 불을 뿜듯이 설교를 하는 것이다. 갈급한 심령에게 아주 적절한 처방을 가지고 불과 같은 성령으로 그들의 가슴을 향해 강하게 선포할 때, 가히 치료의 광선은 그 입술을 타고, 바늘 침을 통해 내리 쪼이면서 상한 심령을 치료할 것이다(말4:2).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하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방법대로 했더니 교인들이 은혜를 받더라. 그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라. 전도하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가서 한 마리씩 고기를 낚아 오더라. 헌금 이야기 입 뻥긋도 하지 않았는데, 저들이 감동받아 주머니를 털어놓더라. 한국 교회의 정체는 교인들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수준낮은 목회자들 때문이다. 갈급한 심령에게 시원한 생수 한 그릇 떠다 주지 못하는 목회자, 그들의 가려운곳, 아픈곳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는 목회자, 자리에 연연해 있고, 먹을것에 연연해 있는 목회자, 목회가 직업이라 생각하는 목회자,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자식 때문에"라면서 둘러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는 진정 나그네처럼 전대 하나 두르지 않고, 달랑 노자돈 몇푼만을 가진채 목회에 뛰어든 사람을 찾는다. 목마른 자에게 시원한 생수를 떠다줄 수 있는 사람, 자신들과 아품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목회자를 찾는다. 왜 이런 이야기가 꿈과 같게만 들려지는 것일까? 어서 이런 이야기가 당연한 이야기로 들려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두서없이 써 내려간 이런 글이 참으로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도 이와같이 하늘의 방법대로 하면, 이런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철저한 대변인,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철저한 나팔수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더러운 것을 가미하려 들지 말라. 꿈같은 목회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오늘부터 꿈같은 설교를 들려주어 저들로 하여금 요셉과 같이 커다란 꿈을 꾸게 하라. 그리하여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당신의 목장은 늘 푸를 것이다. 제발 이 세상에 머무르려 하지 말고, 철저한 나그네 정신으로 무장하라! 아직도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목회자가 넘처나는 세상이다.
한 해 각 교단을 통해 배출되어지는 목회자가 어림잡아 몇 천명은 될 것이다. 그래서 인지 어느 교단에서는 교단 출신 목회자들도 다 수용을 못하는 실정이라 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목회자로서 안수 받고 곧곧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수의 가짜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국민일보 혹은 교단지 광고를 보면, "급매 요망, 아파트 밀집지역, 건물 상가 00평, 매가 0천만원, 성구일체 무료 제공"라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물론 이런 목회자들중에는 피치 못할 이유로 이전하거나 매매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 개척하는 것과, 매매하여 이전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분명 물어보면, 개척할 때 충분한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뜻대로 생활비도 못건지고, 부흥이 안되면 또 이전할 생각을 꿈꾸면서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이전할때도 빈손으로 가는가? 아니다. 교인 머리수 까지 세어서 가는 삯군 목회자도 있다. 목회자들끼리 서로 암암리에 넘기고 가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서야 교인들은 알았단다. 자! 이렇다보면 이런 목회자에게는 사실 자신의 뜻은 하나도 없다. 오직 무슨 일이든지 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다. 철저한 믿음의 확실한 신령한 목회자 같다. 그러나 그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다. 장사꾼일 따름이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 팔아서 교인들과 교회를 날조해 등처먹는 삯군 목회자들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또 정신 못차리고 지금도 허황된 꿈을 꾸면서 "롯"과 같이 참을성없이 기도도 안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 신학생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교회 개척 하는 것이 무슨 슈퍼마켓 차리고, 카센터 차리는 것인 줄 아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팔아치우고 있다. 일단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함부로 팔면 안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러는가? 현대판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자들이다. 앞으로 개척하고, 선교하고, 목사가 되려는 자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제발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운 분이신 줄 알아야 한다. 겁을 상실한 사람처럼 날뛰지 말라! 목회는 절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으라. 그는 롯과 같이 자신의 팔을 벌려 땅을 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팔은 한계가 있고 짧음을 알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넓으신 팔로 그어주실때까지 기도하고 인내하며 침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너무도 성격 급한 사람만 있어서인지 그런 목회자를 보기 드문 세상이 되었다. 왜 이런 신령한 방법들을 일반 책에서, 혹은 세미나에서, 혹은 다른 교회에서, 찾으려 하는가? 진리는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도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당신이 겸손하게, 인내하며 무릎꿇고 당신의 것을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찾게 해 주시는 것이다. 바로 당신에게 있는 것을 찾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욕심으로 인해 눈이 멀어 볼것도 못 보는 어리석은 목회자가 되지 말고, 진정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께 목매고 신령한 것을 받아 누리면서 목회하는 하늘의 목회자,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롯과 같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마음 품어 괜하게 자신의 명 단축하지 말라! 진정으로 당신이 보기드문 목회자가 된다면 하나님은 정말 천만대군을 만난 듯이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목장을 늘 푸르게 하실 것이다. 물붓듯이 부어주시는 역사가 오직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다.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모래알같이....
입으로 전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문서로 전도하는 시대도 끝났다!!! 이렇게 말하면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필자가 무조건 전도를 부정하는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뿐이다. 필자는 전도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입으로, 혹은 문서로 하는 전도도 확실한 실천적인 믿음이 있는 신앙인에게서는 얼마든지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전도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하기보다,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방법을 아직도 사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과거 불과 10여년전에만해도 이런 전도방법은 먹혀 들어갔다. 전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이 있건 없건, 준비가 되었건 안되었건, 그래도 나가 전도하면 전도지 한 장이라도 받아주는 인심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느 단체에서 여론조사를 했더란다. 그런데 일반 시민 100명을 무작위로 물어보았더니, 약 57% 이상이 지금의 전도방식에 매우 부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불신자를 떠나서 믿는 나부터도 절대 반대이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인들이 지도자들부터 시작해서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하나님 나라와는 동떨어진 나홀로 신앙으로 불신자들을 다 버려놨다. 그들에게서는 기독인들이 신선한 대상도 아니요, 선망의 대상도 아니요, 존경의 대상도 아니다. 아에 눈에 가시오, 귀찮은 존재인 것이다. 기독인이요, 예수 믿고, 어느 교회 다닌다하면,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젓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잘못 심기운 나 자신의 이미지를 그깐 전도지 한 장으로 해결할려고 했단 말인가? 말 한마디에 순순히 나올 줄 알았는가?
믿음도 없고, 부정과 불신으로 가득찬 말, 의심으로 가득찬 말은 어느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신앙인이 아닐 수 없다. 고전 4 :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말보다는 행실이 앞서야 한다. 우리 한국 교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말은 잘하는데, 행함이 없다는 것이다. 10년, 20년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 하면 무엇하나? 10년, 20년 목회를 하면 무엇하나? 전하는 자나 듣는자나 두쪽다 행함이 뒤따르지 못하는 것은 뻔한 사실인데, 누굴 원망한단 말인가? 말보다 행함에서 앞서가는 자에게 진정 하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이 앞서는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삶에서, 행함에서 언행일치하는 삶, 언행일치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구원이다, 믿음이다, 성경에 있는 것은 잘 모른다 할지라도, 가짜가 아닌 진짜를 가려낼 줄은 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를 바래는 마음도 같다. 능력있는 목회자는 소리가 요란하지 않다. 능력있는 목회자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항상 하나의 모습이신데,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목회자는 왜 그렇지 못할까?
그것은 목회자가 행함보다는 말이 앞서기 때문이다. 아니 아에 구원이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곡해해서, 행함을 무시하는 목회자도
있다. 이런 사람은 혹시 행함에 자신없어 이 말씀으로 스스로 자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믿음이 우선이고, 구원도 오직 믿음이다. 그러나 행함이란 쏘스가 반드시 함께 뒤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행함이 빠진, 무시된 믿음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그는 항상 하나이신 하나님을 닮아 하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하나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의 투명한 삶속에서 진정 하나님의 능력은 함께 할 것이다. 목회자는 내 삶을 완전히 보여줄수 있는 당당하고, 자신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을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삶으로 보여주고, 교인들은 나가서 불신자인 이웃에게 보여줄 때, 진정한 전도의 폭발력은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당당한 삶가운데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과연 무소유 목회자는 될 수 없는 것일까?
대부분의 교회를 보면 교회가 작다고 해서, 교인이 몇 안된다고 해서 목회자 자신이 재정을 관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요즈음 교회를 보면 어떤 교회는 부자가 대를 이어 세습하는 교회도 있다. 또 개척이랍시고 모이지 않으니까 가족이 인심성으로 나가주면서 함께 가족 목회를 하는 곳도 있다. 그런데 특이한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 은혜가 떠나갔다는 것이다.
둘째, 전도가 안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진정한 부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교회에는 유독 은혜받고, 전도잘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딱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교회 목회자이다. 우수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앞에 세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문제점이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만 착각속에 살기 때문에 은혜받고, 전도잘하고, 유명한 부흥사라고 한 것이다. 이렇듯이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건물이며, 재정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인양 착각하면서 개척하고, 건축하고, 목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명심하라. 나그네 정신을 버리고 영원히 안주할려고 하는 목회자에게 인간들은 모여들지 몰라도, 성도들은 모여들지 않는다는 것을... 내돈들여 개척했다고 내것인가? 교인들의 헌금은 작은것이니까 하나님것이고, 개척한 것은 큰 돈이니까 내것인가? 내가 담임으로, 혹은 당회장으로 있다고 해서, 아니 부친한테서 물려받았다고 해서 내것인가? 그러면 이런 목회자들은 신령한 말씀인 성경을 보면서 과연 무얼 가르칠까?
요즈음도 신학생들을 보면 안타깝고 한심한 구석이 많이 보인다. 교단이 작다고 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해 떤다. 졸업하고 갈곳이 없다고 단정하고 미리 걱정하다 덜컥 개척을 한다. 그것도 몇천씩 자기 돈 들여서... 학교 다니면서 등록금 낼 돈은 없다고들 하던 사람들이 개척을 한다면서 몇천씩은 어디서 났는지 참으로 궁금한점이 너무 많다. 목회할 사람들이라면서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가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만 보이니 어찌 한심하고 답답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내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고, 불안한 미래를 위해 걱정, 근심이 한 시간이라면, 기도는 고작 몇십분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신학생때부터 무소유에 대해 철저히 피부로 느끼면서 확실하게 배워야 하는데, 이것을 덜된 상태에서 개척이랍시고 목회하면서 배우려한다. 그러니 그런 목회자 밑에서 신앙생활해야 할 교인들은 얼마나 불쌍하고, 답답할까? 순진한 교인들이 무슨죄인가? 교인들을 데리고 연습하고 실습하는 것이지 진정한 목회가 아니다. 그러니 그런 목회자들에게서는 철저한 무소유가 나올수 없다. 오직 교회도 내것, 교회돈도 내것,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예산을 세워도 필요한 만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돈에다가 필요를 어거지로 때려맞추는 것이다. 행사를 해도 절절맨다. 그놈에 돈돈돈 하면서 말이다. 돈만 보면 환장을 한다. 사례비도 부족해서 자질구레한 잡비까지 모든 것을 교회 공금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질때까지 끌고 가지 말고, 떨어지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 진노하시고, 오래 참으시다가 한번에 매를 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항상 변화하려는 목회자는 교회와, 재정과, 교인앞에서 언제나 하나의 모습인 관리자이다. 모든 목회자들이 주인에서 관리자로 돌아오는 날 진정 한국 교회의 개혁은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 경영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교회안을 들여다보면 세속화가 너무 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경영적인 측면을 들고자 한다. 엄밀히 말해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 즉 신령한 하늘의 방법을 도입해야 하는데, 완전히 말씀 따로, 경영 따로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에 보면 역대 많은 선지자, 왕, 제사장들이 모든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 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것이 싹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교회 부교역자를 대우하는 측면도 그렇다. 담임 목회자는 주인, 부교역자는 하인이다. 그래서 대우부터 틀리다. 축복권도 틀리다. 헌금에 대해, 성도에 대해 담임 목회자는 축복권이 있고, 능력이 나타나도, 부교역자가 하면 축복권도 없고, 절대로 능력이 안나타
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연히 사례비도 틀리다. 담임 목회자가 예를 들어 150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실상은 약 350만원은 받는 것이다. 왜일까? 거기에는 사례비외에 할동비, 도서비, 차량유지비, 각종 세금, 공과금, 보험, 각종 잡비, 거기다가 성미라고 해서 쌀까지 준다. 그러면 부교역자는 어떤가? 약 30에서부터 70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 30∼50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도 똑같이 목회자가 내야 할 것들을 다 내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이다. 30∼50을 같고 살건, 350을 같고 살건 어찌댔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서글픈 사연은 담임 목회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교회라는 종교단체를 이끌어나가는 회장이며, 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깐 사례비 몇푼을 줄라치면 꽤나 뻐긴다. 그리고 큰 소리친다. 사례비 보지 말고 더욱 열심히 하라는 주문이다. 전도사때는 다 그렇게 하는 것이란다. 물론 믿음이 있고, 신앙이 확고한 전도사나 부교역자들이야 일찌감치 그런 것을 알고 이겨내기 때문에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지 모든 부교역자들이 다 그렇게 믿음좋고, 신앙좋던가? 아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막 노동판에서 부업을 한다. 택시 운전도 한다. 장사도 한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다니고, 딸린 자식들하고 먹고 살아가야 하겠기에 그들은 오늘도 교회라는 회사에 목을 매지 않고, 세상에 목을 매며 발버둥치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서 교회에서 신앙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목을 맨다는 소리를 못듣는것일까? 이유는 그 교회에는 이미 하나님이 안 계시고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계신 교회에 미련을 가지고 목을 맬 사람 누가 있겠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한참 공부하는 부교역자들에게 필자가 생각하건데, 이런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위해서 등록금 전액, 도서비(10만원), 담임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서 활동비(20만원) 정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당신이 회장, 아니 사장의 자리에서 목회자의 자리로 돌아오면 이런 것은 가능한 것이다. 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가는 동역자이지 누가 주인이고 하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의 교회 부교역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목을 매고 충성을 하려들것이다. 그리고 떠나갔던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약 1:15절 말씀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 목회자들을 보면 성경 66권은 다 읽어도 이 말씀은 안 읽는 모양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목회자는 당연히, 반드시 영적인 사람,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목회를 한답시는 분들을 볼라치면, 정말 영적인 지도자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해서 필자가 연구를 해 보았다. 그랬더니,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들의 시야를 밝혀줄 영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지도자라고 하는 그들의 눈이 왜 멀었을까? 이것 또한 궁금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요즈음 교계에는 어디를 가나 한가지 유행병이 있다. 바로 교회 건축하는 유행이다. 또 좀더 큰 장소로 옮기는 병이다. 즉, 목회자들이 너무 외형적인 것을 치중하고, 그런 곳에 욕심을 너무 내고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선 목회자 자신의 정체, 두 번째는 그로 인한 교회 성장의 침체에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목회를 하면서 자신들이 뜻하고 원하는 대로 부흥이 안될 때, 목회자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곧 소명 없는 자의 말로요, 욕심을 잉태한 자의 말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외형적인 것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또 그러다 보니 과도한 욕심을 갖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이것이 화를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교회침체 문제는 목회자 자신에게 있는데, 소명 없는 자에게 그런 깨달음이 보여질리 만무하다. 그래서 요즈음 들리는 소식을 접하노라면, 어느 교회가 교회를 멋있게 지어놓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갈등이 있다는 등, 교회가 빚 더미에 올라앉았다는 등, 목회자가 빚 갚기 위해 머리가 다 빠졌다는 등, 정말 한심한 이야기만 들린다.
교회를 지어도 욕심 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지어지는 교회는 절대로 빚을 얻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나 욕심들이 많으면, 반드시 은행을 통해서 빚을 얻지 않으면 안돼는 줄 알고, 또 교회 지을 때, 세상 빚 얻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인간적인 생각이다. 또한 교회를 지으면서 편법으로 건축하려는 얄팍한 생각들이 많이 보인다. 어린이집을 같이 끼워 짓는 것도 그렇다. 왜 그렇게 하는지 아는가? 어린이집을 같이 끼워서 지으면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엄청난 돈을 융자받는다. 그러니 지을 때 건축비 도움 받아 좋고, 그곳에서 선교원 해서 좋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곳은 반드시 성장 안 된다. 하나님이 떠나신다. 교회의 본질을 잃게 된다. 즉, 장기적으로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필자의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런 교회 정말 많다. 어느 교회는 교회를 커다랗게 지어 놓았는데, 매주 고작 교인 수십 명이 앉아 썰렁하게 예배 드린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얼마나 더 악화가 되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작금, 목회자들의 상태가 한 마디로 총체적인 부도다! 욕심을 잉태하니 당연히 죄를 낳는다.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하면서 사망을 낳고 있다.
정신 차려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외형적으로 멋있는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욕심이 잉태한 목회자에게는 절대로 성령님이 거하실 수 없다! 진정한 교회를 바라는가? 진정한 부흥을 바라는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보기 원하는가? 그러면 욕심을 버려라! 반드시 버려야지 만 살 수 있다. 괜히 필요 없는 욕심 부려 순박한 교인들 힘들게 하지 말고, 당신의 생각을 조금만 바꾸라! 조금만 양보하라!
2천년전 말구유를 통해 이 땅에 오시었던 예수님은 오늘 남루하고, 냄새나지만, 은혜가 넘치고, 성령이 넘치는 외양간 같은 교회를 찾고 계신다! 오늘 예수님은 비록 외양간 같지만 성령이 살아있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를 찾고 계신다. 또한 영적으로 안목이 시원하게 탁 트인 목회자를 찾고 계신다. 정말 욕심 없고, 성령 충만하여 쓸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 것이다. 오늘 당신이 바로 이 시대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는 한가지 병이 있는데, 두 얼굴의 신앙이다.
즉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천사고 의인이다. 정말이지 거기는 아무 문제가 없고 온유해 보이고 화평해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가식이고, 위선이라는 것이 그들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이유인즉, 기성 목회자들이 강조한 것이 오로지 한가지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존 목회자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정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 그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었고, 그래도 이만큼 한국 교회 성장에 큰 일익의 역할을 한 것은 지대한 사실이다.
허나 그들이 강조한 면은 하나같이 기복적인 것이었고, 지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요즈음 "참 교육", "참 교육"하면서 교육계에서도 난리법석이다. 그 참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자신들이 너무 주입식으로, 이론적으로만 교육을 해 왔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참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이론 없는 실천이 있을 수 없고, 실천 없는 이론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 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론, 즉 지식(말씀)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즉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몸소 삶을 통해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론과 실천이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교회들을 둘러 보라! 어느 한곳을 둘러보아도 이런 참 신앙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다.
물론 한국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런 추세이고,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다는 말씀이다. 행함이 없고, 실천이 부재 된 상태인데, 어찌 그들에게서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한다고 어떤 사고뭉치들은 필자 같은 사람을 두고 "행함만을 강조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인은 결단코 행함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기에 지식적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 지식적인 신앙으로는 온전하게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건, 사물을 보건 천편일률적으로 육신 적인 안목, 즉 썩어빠진 눈으로 보고, 썩어빠진 귀로 들으려하고, 또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에게 오는 축복을 알아볼 수도 없는 것이고,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할 능력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교회에 있는 중생하지 못한 목사나 전도사들에게는 "목사님" "전도사님"하면서 갖은 아양을 다 떨어가며 지극히 떠받드는 것처럼 한다. 그러나 대문 밖을 나서 보라! 혹시라도 다른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면 그렇지 못하다. 상대방이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항상 자기 교회 목회자들을 대하던 그 마음의 상태가 그대로 비춰지는 것이다 (자기 교회에서 겉으로는 "목사님, 전도사님"했지만, 실제로 마음으로 무시했던 상태가 밖에 나와서 자신도 모르게 비춰진다는 뜻). 이것은 비단 교인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목회자에게 이런 병이 더 많다는 것이다. "전도사"에게 대우하고,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시원찮고 능력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각 사람마다 있는 은사, 능력, 달란트 등을 계발할 줄 알아야 하고, 볼 줄 아는 안목이 목회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각양의 은사를 받은 지체들이 모여 서로 시기함이나 질투함이 없고 전인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교회이다. 각양 하나님께 받은 것을 서로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국 교회에 다시 제2도약은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항상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전도사에게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오겠느냐?"라는 생각으로 폐쇄되어있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보는 시각은 하나님께서 축복과 능력과 지혜를 주실 때, 반드시 직임을 보고, 지위를 통해서만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내면을 통해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안 계시고 떠나가신지 오래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내가보는 성경은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말씀은 전혀 없다(본인 성경은 개역 한글 성경으로 대한 성서 공회에서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보는 성경과 그분들이 보는 성경이 분명 틀린가 보다.
그러지 않고 같은 성경을 보는데, 어찌 한쪽에서는 허튼 소리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자신이 맡고 있는 중고등부 헌금을 전도사가 자체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안 받으시고, 반드시 대 예배에 올려서 담임목사가, 혹은 당회장인 목사가 거룩하게 기도해야 지만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로서 기적 같은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전도사는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가치조차 없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가 없고, 어디까지나 목사가 설교를 해야 지만 은혜가 된다고 생각한다. 전도사가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하면 이단시 되고, 목사가 해야 지만 진정한 능력과 이적이 역사 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사역하고 있는 전도사들이 좀 속된 말로 "잘 나간다 생각되면 가차없이 짜르려 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목회자들이 발붙히고 있는 한 한국 교회는 가망이 없다. 자신이 온전하게 중생하지 못하니까, 사람을 볼 줄도 모르고, 사람을 키울 줄 도 모른다. 그저 무조건 자신보다 잘하면, 볼 줄 모르니까 쫓아내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성경은 말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서로 시기하며 키재기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각양 은사, 달란트가 있는 대로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신 하나님처럼,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활용하고, 키워주어서 전인적인 교회, 성령이 살아 숨쉬는 교회를 만들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기죽이고, 자라는 ?을 자르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감시하고, 판단하며,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아름답게 조화되도록 다듬어준다는 뜻이다.
들의 꽃들을 보라! 당신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었는가? 들판을 보면, 각양 형형색색의 꽃들이 서로 키는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며 향기도 다르지만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것을...우리는 이런 추한 모습을 반드시 씻어내야 한다. 그래서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우리 교인들을 진정한 삶이 살아있는 교인들로 변화시켜야 한다.
당신 자신이 하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가 되는 모습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당당하고 자신 있게 하나의 모습만을 보여주어야 하고, 또 보여줄 수 있도록 자신을 처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과 교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모습인 한가지 모습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식상해 하고, 교회를 미워하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한가지 모습은 볼 수 없고, 두어가지, 아니 수십 가지의 가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교인들이 목회자인 당신에게서 은혜를 못 받고, 당신을 보면서 식상해 하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서 그들에게 진정 하나님처럼 한가지 모습을 보여 주라! 교인들은 한 가지 모습을 원한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이 되면 교인들은 식상해 하고, 떠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이적과 역사는 한가지 모습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절대로 두어가지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21세기를 향해 나가는 목회자 당신들에게 오늘 하나의 모습만이 있기를 바란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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