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지망생들이여, 부디 성공하지 맙시다"
"목사의 가장 큰 미덕은 성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들이여, 목사 지망생들이여, 제발 성공하지 맙시다."
최창남 목사는 빛된교회(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441-25)를 목회하고 있다. 예배당이 50평도 안되고 교인도 100명을 넘지 못한다. 그의 말처럼 빛된교회는 성공한 교회가 아니고, 목회의 성공사례로 꼽는 곳은 없다(지금까지 기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러니까 최 목사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그럴듯한 수사로 변명하는 걸까.
그는 교계 행사 때 가끔 교세가 큰 교회 목회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으면 불편하다고 한다. 죄다 예배당 크기, 교인 수 얘기뿐이니까. 그는 진짜 목회는 교회를 크게 짓거나,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생명 살리는 일에 교회 안과 밖이 구분이 없다고도 했다. 그럼 그가 사는 방식은 생명을 살리는 일일까.
어쨌든 그는 바쁘다. 교회일은 부목사가 많은 부분 알아서 하기에 교회일 때문에 이리저리 뛰지 않는 것 같다. 대신 청소년 문화쉼터를 만들고, 혼자 사는 할머니들 생활 챙기고, 가난한 가정 집 수리해준다고 하루의 태반은 목회자실을 비운다. 최근에는 '몰래 산타'라는 행사를 한다고 분주했다.
기획은 교회가, 일은 후원자들이
사람들은 그가 뭔 일을 벌이면 곧잘 호응한다. 몰래 산타 행사도 그를 아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거뜬하게 치렀다. 몰래 산타는 안양에 사는 가난한 아이(5~8살) 140명에게 자원봉사자 60명이 산타가 되어 선물을 주는 행사다. 아이들이 원하는 선물을 신청 받아 나눠 주는데 1600만 원이 들었다. 물론 모두 모금한 돈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물론 1년에 4번 아이들이 신청한 선물을 들고 방문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라는 소박한 선물이 그를 더 행복하게 한다. "지구본 사주세요.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가 보고 싶은 때, 어디 사는지 확인하려고요." "친구들이 쓰는 다이어리, 나도 쓰고 싶어요." "TV에 나온 로봇, 인형이요."
그는 "이런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낯이 간지럽다"며 한 마디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면, 일은 자원봉사자들이 해요. 이웃들도 자원봉사자로 나서지만,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소식을 듣고 와요. 그들은 필요한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봉사해요. 또 이런 일을 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배우는 게 많은데, 칭찬을 듣는 게 송구스럽네요."
교회 밖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그를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신뢰했고, 그는 그만큼 일을 편하게 한다. 13년간의 목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신뢰하는 관계가 되기까지 그가 이웃들에게 쏟은 진심어린 헌신이 컸다.
그는 92년에 안양에서 빛된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4년 뒤 빚진자들의집을 시작했다. 처음엔 공부방을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학원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청소년문화쉼터 달팽이'를 만들었다. 가난하면 배움에서 뒤처지는 것만은 아니니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달팽이가 무늬만 '문화'쉼터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문화쉼터에서 한 달에 한 번은 여행하고, 한 달에 세 번은 공연을 관람해요. 한 주에 세 번은 문화프로그램에 참여하구요. 모든 쉼터는 문화쉼터여야 해요. 공연을 보고 자신이 사람들과 함께 공연물을 만들면, 남을 배려하고 자기 문제를 공유하는 폭이 넓어져요. 다른 아이들과 관계를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내면도 치유하지요. 하여튼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도록 돕는 게 문화쉼터가 바라는 바고, 또 실현하는 일이지요."
상당수 프로그램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지만, 한 사람당 100만 가까이 경비가 드는 '문화유산답사 자전거여행'의 경우는 엄격한 기준을 갖고 대상을 선발한다. 몰래 산타나 집수리, 독거노인 돕기 대상자에 대해서도 일일이 방문 조사를 거쳤다. 물론 신청한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돕기로 결정한 이후에는 '제대로' 돕는다. 20명의 독거노인도 쌀과 옷, 난방비 등 기본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지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이 한 주에 한 번 이상 전화하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방문해 친구가 된다. 사랑의집수리 운동도 50가정을 엄선했고, 수리하는 데 예산 4000만 원을 책정했다.
"가난한 예수를 닮고 싶었어요"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자 그는 부천 소사에서 보낸 유년 시설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오자, 어머니가 소원을 물었단다. "설탕 한 숟갈." 어머니는 설탕 한 봉지를 주셨고, 이 꼬마는 일주일 동안 찍어먹고, 물에 타먹고, 심지어 밥에도 비벼먹었다. 어머니가 준 설탕 한 봉지는 지금 생각해도 가장 큰 선물이란다. 이런 기억 때문에 그는 아이들에게 '떠올리면 행복한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몰래 산타를 기획했다.
그의 유년 시절 기억 하나 더. 그가 사는 곳 근처에 미군부대가 있었고, 부대 옆에는 양색시들이 살았다. 한 해에도 수십 번씩 양색시들이 갓 태어난 아이를 버리는 것을 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는 때로는 강가에서 사과박스에 실려 떠내려가는 살아있는 아이와도 마주쳤다고 말했다. 그가 사는 곳에서는 모세가 경험한 행운이 없었다.
"그때는 그런 일에 담긴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몰랐지요. 그런데 나중에 그런 기억 때문에 괴롭더라고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학대에 갔지요."
왜 하필 신학대일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에게 익숙한 문화니까요." 그는 서울에서 기독교계 고등학교를 다녔고, 노래를 좋아해 교회 찬양단에서도 활동했다. 그의 간단한 대답에서 뜨거운 신앙도 고뇌하는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 청년 최창남은 순수하고 보수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래서 급진적이었다. 대학 때 예수처럼 사는 것을 고민하다가 예수는 가난했다는 생각이 들어 재건대에 들어가 넝마주이 생활을 했다. 졸업한 뒤에는 서울 시흥동에 새봄교회를 개척했다. 달동네에서 야학, 무료진료소, 탁아소를 운영하는 교회는 금방 사람들 이목을 끌었다. "그랬더니 해방신학의 선두주자가 되어 있었어요. 보수적인 신학대를 나온 29살짜리 전도사가 해방신학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의 말을 들으며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한 장면이 떠올랐다. 소방차가 떨어뜨린 빨간 깃발을 주워 돌려주려고 소방차를 따라가는 채플린. 뒤에는 대공황 시절 시위하는 노동자의 행렬이 따라온다. 이제 그는 시위의 주동자가 되었다. 최 목사가 꼭 그랬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기에 나도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마음으로 시작한 새봄교회는 어느새 허병섭 목사의 동월교회, 이해학 목사의 주민교회와 함께 민중교회의 상징적인 교회로 떠올랐다.
교회에 불을 지르고 싶던 시절
그가 자주 만나는 양동 걸인들은 무슨 큰 사건이 터지면 꼭 범죄자로 지목받았다. 당국도 그들이 범죄자들이 아닌 줄 알았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희생을 제물로 편한 길을 택했다. 끌려가는 그들을 보면서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마침 당시 양동의 멋있게 지은 교회는 몸을 파는 아가씨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일이 있었다. 술에 취했다는 게 이유다.
"교회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고단하게 살다가 예수님 품에 안기고 싶어 교회에 오겠다는데, 술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건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지요. 확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어요."
부끄러움과 교회를 향한 분노,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갈수록 커졌다. 그리고 2년 만에 교회를 나와 노동운동 판에 뛰어 들었다. 그는 농약공장에서 일하며 틈틈이 '노동의 새벽', '모두들 여기 모여 있구나', '노동해방가' 등 노동가요를 작곡했다(그때는 김용수라는 가명을 썼다). 문익환 목사의 시에 곡을 붙인 '고마운 사람아'는 유일한 기독교 노래다. 이 노래들은 운동권에서 고전이 되었다. 안양에 정착한 86년 이후에도 안양민요연구회와 안양독서회, 우리그림, 안양문화예술운동연합, 한국민족음악인협회 등의 결성에 참여했다.
"변심한 목사처럼 되는 게 두렵습니다"
90년대 초 그는 기로에 섰다. 노동운동은 자신과 같은 종교인이 없어도 노동자들끼리 잘 조직되었다. 오히려 빠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득이 되는 시대가 왔다. 때마침 정치권에서도 오라고 손짓했다. 같이 운동하는 몇몇은 정치권에서 이미 자리 잡았다.
결국 그는 유명해지지 않는 길을 택했다. 목회를 해도 교회 크기를 키우는 일에는 경계했다. 그가 알려지면서 제법 큰 교회에서 '러브콜'을 보냈지만 사양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니까. 그리고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했지만 지금은 변심한 아무개 목사처럼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최 목사의 지금 모습에서 청년 시절 교회와 세상을 향한 분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는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 넓어졌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하는 일이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흔히 하는 일이다.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아니 따진다. "그런 일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깨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그들을 기쁘게 하고, 먹는 문제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일 뿐이지요. 그들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사실 나와 교회가 그들을 돕는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에요.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이, 우리 마음이 자꾸 기뻐지니까. 우린 멈출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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