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상담/자살 - 살자

[스크랩]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와 윤리적 입장

맑은샘77 2013. 4. 26. 14:50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와 윤리적 입장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와 윤리적 입장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와 윤리적 입장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와 윤리적 입장

 

 

 

 

 

 

 

 

 

 

 

 

 

 

 

 

 

 

 

 

종교에 따라서 자살에 관한 태도는 상이하다. 이슬람교에서는 자살은 죄이지만 순교나 적을 향한 공격으로 자살하는 것은 죄로 보지 않는다. 유태교에서는 자살 동기가 허용될 수 있는 경우나 정신장애로 인한 것은 허용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베다 시대에는 자살을 종교적인 희생 의식으로 보았으며 우하니샤드 시대에는 죄악으로 간주하였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허용하지 않으나 승려들의 분신자살은 자신을 태움으로서 열반에 이으려는 의식으로 최고의 정신적 가치로 인정하였다. 유교에서는 천수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 하여 자살이 인정되지 않지만 살신성인을 주장하여 참된 자아 실현을 위해 자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인격은 하나의 인격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 1:27, 2:7) 라고 하는 데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자살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성서에서는 자살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자살을 직접 금하거나 종용한 적이 없다. 때로는 공동선과 조국이나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기기도 하였다. 성경에는 자살이라는 말 자체는 언급되지는 않으나 자살행위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 6차례나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가 자살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그러한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록 외에 그 어떤 부연적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살에 대한 허용이나 묵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살에 대한 관한 기록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자살이 억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아히도벨과 유다의 경우에서 보듯 자살이 중대한 죄의 결과로 나타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1) 성경에 나타난 자살 사례

가. 아비멜렉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의 아들로서 이복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이 되었으나 요담의 비판으로 세겜이 반기를 들자 도륙하고 데베스를 쳐부수다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자 병기든 소년에게 명하여 자신의 자살을 돕게 하여 일어난 내용이다.

 

나. 삼손

 

사사기 16장에 나오는 삼손은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로 태어나 나실인으로서 여호와의 시넹 감동되어 사사가 되었으나 블레셋 여인을 취하고 후에 드릴라에게 유혹되어 힘을 잃고 블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을 뽑히고 옥에 갇혀 지내다가 축제일에 집을 무너뜨려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택하였다. 그러나 권성주는 이 삼손의 죽음을 자살로 보지 않는다. 삼손은 자기 생명을 끊는데 그 행위의 초점과 목적을 두지 않았고 대적들을 소멸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견해이다. 결국 그것은 적군을 무찌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용사의 장렬한 전사와도 같고 자식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드는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 사울과 병기 든 자

 

사무엘상 31장에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대 블레셋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적군의 승리가 확실하게 되는 상황에서 할례 없는 이방인의 손에 모욕을 당하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기 칼을 취하여 자살했다. 이튿날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의 목을 쳐서 승전 기념물로 취하고 그 시체는 성벽에 못 박았다. 후에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성벽에서 시체를 내리고 화장을 하게 되었다. 문둥이로 죽은 웃시야 왕이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고 불명예스런 매장을 당한 것처럼 사울은 화장이란 불명예스런 인생 퇴진을 한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범죄한 일생과 참혹한 최후라는 관점에서 사울의 죽음을 다룰 뿐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라. 아히도벨

 

사무엘하 17장에 등장하는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을 배반하여 왕위 찬탈의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압살롬에게 모반 모략을 제공했던 장본인이었다. 후에 후새의 역모략에 몰려서 자신의 모략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히도벨은 나귀를 타고 귀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 시므리

 

열왕기상 16장에 나오는 시므리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엘라 왕이 폭정을 가하자 쿠데타를 일으킨다. 엘라 왕이 술에 취해 대신들과 흥청거릴때 시므리가 그를 쳐 죽였다. 시무리가 집권한 지 7일 만에 백성들이 시므리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어서 오므리를 등극시키고 시무리가 머물던 왕도를 포위하였다. 다급해진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죽었다. 성경은 시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행하고 범죄함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바. 가롯유다

 

신약의 기록에는 자살을 한 사람이 한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가롯 유다의 기록이다. 유다는 무죄한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에 판 후에 죄를 뉘우치고 은 30을 반환한 뒤 성전에서 나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범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스승을 팔아 받았던 돈을 반환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으로 영혼이 괴로움에 빠지고 그는 자살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사도행전 1 18절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라고 처참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배반한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도 탐욕과 배신이라는 죄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가져왔는가하는 시각에서 기록되었을 뿐 자살 자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성서 자체에서 자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살은 커다란 죄이다. 자살하는 자는 무조건 지옥에 간다”라고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자살을 금지하고 자살에 대한 이해가 자살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초기부터 로마인들의 자살에 관한 수용적 태도에 강하게 반대하여 자살을 금지하였다. 초대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견지해온 자살에 관한 태도는 분명하고도 비타협적인 거부이다.

 

2) 자살에 관한 신학적 입장

어거스틴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지 않는 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제 6계명을 범하는 살인 행위라 하였고 모든 경우의 자살을 거부하였으며 교회는 거듭되는 회의를 통해 자살을 죄로 정하고 금지하였다. <본훼퍼>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궁극적인 판단에서 자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살의 결단이 스스로의 정당화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권리와 함께 생명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고 자살을 신앙의 결여로 이해하고 자살을 죄로 보았다.

 

그러나 본훼퍼 자신도 자살에 희생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는데 예를 들면 고칠수 없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노인이 다른 가족을 위해 목숨을 끊는 경우,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하여 자결하는 행위, 심지어는 명예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서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에도 희생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자살에 대한 본훼퍼의 결론은 희생적 자살이 윤리적으로는 긍정될 수 있지만 자기 희생적인 동기가 강한 경우에도 생명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해야 할 것을 권하면서 신앙의 결여라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죄라고 결론짓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에 있어서 예외적인 경우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생명의 시종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간의 결정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자살은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연법과 사랑이라는 측면에서도 자살은 시인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정의에도 반대 된다고 보았다. 더구나 자살은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죄라고 이해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위탁받은 것이며 인간은 이 생명에 대한 청지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오히려 때로는 무조건적으로 생명의 연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정의나 자유의 연고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시인된다면 자살에 대한 용서도 긍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용서라는 은총의 조명 밑에서도 자살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살하는 예외가 있는데 바르트는 삼손의 죽음을 그렇게 보았다. 자살의 가능성이 세 가지 토대에서 제시될 수 있는데 첫째로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주권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육체적인 생명의 연장만이 최고의 선은 아닌 고로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하여 자살이 선이 될 수 있으면 셋째로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있다면 그러한 봉사를 위하여 생명을 스스로 포기함이 긍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며 자살은 모두 죄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예외와 긍정을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자살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순교의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3)자살에 관한 윤리적 입장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하며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이 고귀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마땅히 보전되어야 할 고귀한 것이며 영원토록 지탱되어야 한다. 생명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성상 생명으로서 그의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생명을 파괴할 권리도 없고 생명이 있는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생명을 보호하시며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귀하게 여기길 원하신다.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으로 여겨 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존엄하게 여기는 자세는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생각하는 기본토대가 되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책임감 있는 삶으로 부르심이다. 자살은 자기가 부여받은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취하는 모든 행위는 살인을 금하는 십계명을 범하는 일이다. 남을 죽이는 일만이 살인이 아니라 스스로 취하여 생명을 끊는 자살도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다.

 

특히 자살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의 첫째 조건인 자기 사랑조차 포기하는 매우 죄악된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파기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책임적인 부분들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신성한 것이고 존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생명을 경외하여야 한다. 이 말은 생명을 우상화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 쓰라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인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그 생명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사나 죽으나 그를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생명은 단 일회적인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고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들을 쏟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천상의 축복
글쓴이 : 프라테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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