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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정신질환, 구멍뚫린 보건정책] "정신질환자가 무슨 직장 생활?" 무조건 무능력자로 취급

맑은샘77 2012. 9. 26. 22:43

[늘어나는 정신질환, 구멍뚫린 보건정책] "정신질환자가 무슨 직장 생활?" 무조건 무능력자로 취급

<4·끝> 아파도 일할 수 있다
지능과 무관해도 '편견' 환자라는 사실 알려지면 회사 동료들조차 기피
취업 막는 법규도 문제… 일부 병원선 호전 환자를 공장·식당 등에 취업 추천
한국일보 | 임소형기자 | 입력 2012.09.26 20:43

오후 5시 30분까지 꼬박 하루 8시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식용유 공장에서 기름을 용기에 넣고 포장하는 일을 하는 50대 남성 이모씨. 남들과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삶이지만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사실 업무가 몰릴 땐 주말에도 쉴 수가 없고, 오랜 시간 고된 노동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오기도 한다. 하지만 20대 후반 갑작스럽게 생긴 우울증과 조현병(정신분열병) 때문에 젊은 시절 내내 병원을 오가며 변변한 일자리 없이 연명했던 이씨는 자신의 힘으로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 병원에서 직업 훈련, 수도권의 한 정신병원에서 정신질환 환자들이 취업에 필요한 직업재활훈련을 받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노후를 위해 1억 모으기가 목표"라는 이씨는 "난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정신 질환을 앓는 주변 환우들 중에는 일을 하고 싶어하고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여전히 가족에 의지해 지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정신 질환자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다.

슬슬 피하는 동료들

이씨가 식용유 회사에 몸담은 지는 10년이 넘었다. 이제 일 잘 한다는 소리도 듣고 짝 찾아 결혼도 했다. 이렇게 자리 잡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발병 초기 젊을 땐 특히 힘들었다. 병원 다니며 치료를 잘 받아 증상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일할 수 있었지만, 정신 질환 병력을 이유로 받아주는 일터가 없었다. 홀어머니는 점점 나이가 드셨고, 형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가족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한계에 부딪혔다.

다행히 동네 한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건들 정리하며 손님 응대하고 계산하는 업무였고, 성실하게 근무했다. 일하면서 치료도 규칙적으로 받아 증상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이씨를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식용유 회사로 옮긴 뒤에도 한동안 동료들이 자신과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정신 질환자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10여 년을 마음 고생 한 이씨는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직장 생활이 가능한 데도 일하는 걸 포기하는 환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굳이 안 밝히면 환자 몰라봐

이씨가 식용유 회사에 입사하는 데는 사실 그가 치료 받고 있는 용인정신병원의 도움이 컸다. 병원이 증상이 호전돼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환자들을 보호자의 동의를 받고 식당이나 공장 등 지역 사회의 여러 일터에 소개해주는 다리 역할을 해준 것이다. 처음에는 정신 질환자 직원에 대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고용주들도 점차 그들의 성실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은희 용인정신병원 사회복지사는 "병원 근처 지역사회 일터 10여 곳과 연계해 퇴직 등 결원이 생기면 우리 의료진이 환자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취업을 돕고 있다"며 "현재 병원의 도움으로 취업해 있는 환자는 118명"이라고 밝혔다.

증상이 크게 호전된 환자들은 병원 도움 없이 마트 시식 코너나 주차 요원 등 지역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일자리를 찾기도 한다. 이 사회복지사는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를 잘 받고 굳이 먼저 밝히지 않으면 정신 질환자란 사실을 주변에서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환자의 취업까지 신경 써주는 병원은 극히 드물다. 황태연 용인정신병원 지역정신보건부장은 "2000년대부터 정신 질환자도 장애인에 포함되면서 장애인고용촉진법에 따라 정신 질환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임금을 받는 등 근로여건이 나아졌지만, 정신 질환자의 업무능력에 대해선 여전히 편견이 많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정신 질환자는 지능이 떨어질 거라는 편견이 많다. 실제로 단순 노동 등 근로 수준이 낮은 직종에 취업이 아직 한정돼 있다.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우영섭 교수는 "일부 조현병 환자가 만성화하면 지적 장애가 생기기도 하지만, 치료를 받으며 자기 사업을 운영하는 환자도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정신 질환은 지능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지적장애? NO!

전문가들은 정신 질환자는 일을 못한다는 편견을 법이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수의사법과 축산법은 각각 정신 질환자가 수의사와 수정사가 될 수 없다고 면허 취득을 제한하고 있다. 건설기계관리법에는 정신 미약자는 건설 기계 조종사가 되지 못하도록, 유선 및 도선 사업법에는 정신 이상자에게 배를 빌려주거나 운송을 맡기지 못하도록 돼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정신병이 있는 경우 아예 근로를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해 놓았다.

전문의의 진단이나 검사 없이 단지 정신과 질환이 있거나 과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업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신이상자, 정신 미약자 같은 모호한 용어도 병의 유형이나 증상의 정도와 관계 없이 정신질환이 있으면 모두 무능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낸다"고 지적했다.

간질처럼 발작하며 정신을 잃어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병은 취업 자격을 규제하는 나라가 많지만, 단순히 정신 질환 진단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면허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경우는 외국엔 없다는 게 전문의들의 견해다. 우 교수는 "정신과 진단의 목적은 정신적 문제 때문에 환자가 뭘 못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걸 가리려는 게 아니라 먼저 어떤 도움을 줄지 정하기 위함이라는 게 국제정신질환진단기준(DSM)의 기본원칙"이라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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