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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이었는데…” ‘주폭 마누라’의 한숨

맑은샘77 2012. 9. 22. 16:19

“만병통치약이었는데…” ‘주폭 마누라’의 한숨

한겨레 | 입력 2012.09.22 14:20
    [한겨레][토요판] 가족 / 아내의 알코올중독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속 여주인공 멕 라이언은 "그저 술이 좋아 마실 뿐"이라고 말합니다. 실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 알코올 중독자였지만요. 한국에서도 멕 라이언처럼 가족들 몰래 혼자 술을 마시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네요. '키친드렁커'란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죠. 몰래 마신 탓에 알코올 중독(알코올 의존증)이 깊어질 때까지 가족들은 모르기 십상이죠. 영화 속 남편은 아내 손을 이끌고 병원에 갑니다. 알코올 중독은 치료가 필요한 병, 가족들의 따뜻한 지지가 필요합니다.

    눈을 뜨니 한낮이다.

    남편도 딸도 나갔는지 집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보니 발치에 빈 소주병 2개가 놓여 있다. '아! 또 마셨구나.' 한주영(가명·43)씨는 고개를 떨궜다. 한씨는 찬찬히 전날 밤 일을 복기했다. 일을 마치고 들어와 티브이(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주인공들이 신나게 술을 마시던 장면에서 망설이다가 '딱 한 잔만' 하겠다며 냉장고에서 술을 꺼냈다는 게 떠올랐다. 한데 술병은 2개다. 언제 이렇게 마셨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혹시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닐까?' 불안해서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왼쪽 머리가 콕콕 찌르는 듯 쑤셔왔다. 일하러 갈 시간에 늦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지만 만사가 귀찮아졌다. 한씨는 도로 누워 버렸다.

    한씨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10년 전부터였다. 남편 사업이 연거푸 실패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였다. 그의 남편은 말 그대로 '한량'이었다. 부잣집에서 여유있게 자란 남편은 직장생활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까짓, 월급쟁이가 벌면 얼마나 벌겠느냐"며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댔다. 사업을 시작할 때 한씨와 의논하는 법도 없었다.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나서는 게 아니"라며 모든 걸 독단적으로 결정하곤 했다. 사업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큰소리 뻥뻥 치던 남편은 뒷수습은 나몰라라 했다. 가게 정리며 빚쟁이 상대까지, 온갖 뒤처리는 한씨 몫이었다. 살던 집까지 팔아 빚잔치에 탁탁 털어넣었다. 도와주겠노라던 시가에서도 "더는 못 하겠다"며 등을 돌렸다. 먹고살려니 별수 있나. 전업주부인 한씨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변하지 않은 건, 남편의 씀씀이뿐이었다. 남편은 "사업하는 사람은 옷을 잘 입고 다녀야 돈도 따라붙는 법"이라며 옛날 하던 대로 살았다. 꾹꾹 참고 있다가 어쩌다 싫은 소리라도 한마디 하면 남편은 버럭 화를 내며 되지도 않을 말만 했다. "당신도 그렇게 쓰고 살면 되잖아?" 남편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밥 먹었냐"는 의례적인 말을 빼면, 남편과는 대화도 잘 하지 않는다. "사는 재미가 없다."

    한량 남편에 팍팍한 살림
    불면증이 생겼다 술을 마셨다
    오늘 또 내일, 한병 또 두병…
    남편에게 시비 걸고 싸우고
    딸 앞에선 늘 죄인
    '누가 나 좀 말려줘요'
    결국 클리닉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살려고" 술을 마셨다. 밤마다 일에 시달려 몸은 피곤한데도 정신은 말똥말똥해져 잠이 오질 않았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잠을 자야 다음날 또 일을 할 것 아닌가." 푹 잠들기 위해 홀짝홀짝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한잔 들어가면 손끝까지 녹신녹신해지는 게 기분도 좋아지고 잠도 잘 오는 것 같았다. "만병통치약도 이런 만병통치약이 없었다." 되레 술을 안 마시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잠도 더 안 오는 것 같았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소주 반 병이었던 주량은 두 병까지 늘었다. 한씨는 "집안일을 하다가도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씨에게 술은 이제 약효를 잃고 독이 됐다. 술을 마시고 나면 단잠은커녕 되레 다음날 더 피곤해서 일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입맛도 없다. 술을 마신 날엔 거의 밥에 손도 대지 않기 일쑤. 속쓰림, 손떨림, 두통 증상도 생겼다. 한씨가 이보다 더 염려하는 건 "술에 취해서 내가 어떤 일을 할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못한다는 것이다. 평소 온순하던 한씨는 술을 마시면 종종 난폭해진다. 남편에게 쌓아두었던 분노가 술만 마시면 터져나와서일까. 술에 취한 그는 남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알아듣기 힘든 말로 시비를 건다고 했다. "어디 여자가 할 일이 없어 술을 마시느냐"며 남편이 화라도 내는 날엔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 쓰러질 때까지 밤새 싸움이 이어지곤 한다. 한씨는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날엔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하나뿐인 딸 앞에선 늘 죄인이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또 마신다. "술을 안 마시면 당장 가슴에서 열불이 올라와 미칠 것만 같아서"다. 그의 몸은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딱 한 잔만'이 '한 잔 더'가 되고 "한 병 더'가 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없다. "제발 사람처럼 살아야겠다." 석달 전 한씨가 알코올중독 클리닉의 문을 두드린 이유다.

    한씨처럼 알코올중독(혹은 의존증)으로 고민하는 여성은 나날이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진료비 지급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여성 알코올성 정신장애 환자는 2006년 1만1221명에서 2010년 1만4097명으로 늘었다. 특히 인구 10만명당 진료 환자를 보면 20대까지 비슷하던 남녀 비율이 50대 이상에선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 알코올중독 클리닉을 함께 운영하는 향남한의원의 배주동 원장은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 등을 더 크게 느끼는 여성들이 대개 남성들보다 스스로 알코올중독임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알코올중독은 본인의 의지만으로 치료하기 힘들어 가족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질병인데,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알코올중독 문제를 겪는 여성들이 이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정애 기자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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