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주기/청소년

갈곳 없어 찾아간 가출팸서 대장 오빠 “할 일이 있는데…”

맑은샘77 2012. 9. 22. 17:05

갈곳 없어 찾아간 가출팸서 대장 오빠 “할 일이 있는데…”

등록 : 2012.09.21 08:20 수정 : 2012.09.21 08:46

 

[또다른 성범죄, 청소년 성매매]
거리의 아이들이 운다 ③ 탈출

마지막 울타리라 여긴 그곳
“네가 안하면 우리모두 굶어”
모텔 보내며 ‘조건만남’ 시켜

혜리(가명·14)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참자. 몇 분만 누워 있으면 끝나….’

늦여름의 한낮이었다. 상대는 40대 아저씨였다. 아빠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쿰쿰한 곰팡이 냄새와 방향제 냄새가 뒤섞인 어두운 모텔방에서 1시간30분이 영원처럼 늘어졌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혜리는 재빨리 옷을 챙겨 입었다. 몸이 욱신욱신 아팠다. ‘이런 짓 해야 하나? 돈이 뭔데….’ 스스로 한심했다. 절로 구역질이 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봄, 날마다 몸싸움을 벌이는 엄마·아빠가 싫어 혜리는 집을 나왔다. 돈이 없으니 찜질방마저 갈 수 없었다. 혼자 노숙할 수도 없었다. 혜리는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와 서울 동대문 쇼핑상가를 찾았다. 그곳을 지나는 다른 중학생들에게 몇천원씩 ‘삥’ 뜯은 돈으로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웠다. 돈이 생기면 폭식을 했다.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아파트 단지에 5시간 동안 전단지를 100여장 붙이고 혜리가 받은 돈은 하루 5000원이었다. 끼니 때우기도 어려웠다. 집 나온 여중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난 8월, 할 수 없이 돌아갔던 집에서 혜리는 다시 뛰쳐나왔다. 이번엔 피시방부터 들렀다. 지난봄 가출을 통해 혜리는 ‘거리의 생존법’ 몇가지를 알게 됐다. ‘가출팸’(가출해 함께 지내는 청소년 무리)을 찾아야 한다고, 거리의 친구들이 말해주었다. 가출팸에만 들어가면 언니·오빠들이 보살펴준다고 했다.

어차피 혜리는 어른들을 믿지 않았다. “모든 어른들은 그저 내 뒤통수만 쳤다”고 혜리는 말했다. 청소년 쉼터의 어른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았다. 차라리 또래끼리 서로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에 더 솔깃했다.

‘가출 일행 구해요.’ 혜리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 원주에 모여 있다는 가출팸의 한 오빠가 쪽지를 보냈다. “이상한 일 안 시키니까 안심하고 와.” 왠지 믿음이 갔다. 혜리는 버스를 타고 원주로 떠났다.

남녀 10대 6명이 모인 가출팸이었다. 한데 붙어 다니며 모텔을 전전하고 있었다. 가출팸마다 대장이 있다. 원주 가출팸의 대장은 혁재(가명·19) 오빠였다. “우리가 일하는 게 있는데,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 마.” 혁재가 혜리에게 말했다. 그저 먹여주고 재워줄 거라 기대했던 혜리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5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장은 혜리를 노려봤다. “생각하지 말고 바로 말해. 네가 안 하면 우리 (밥도) 못 먹고 잘 데도 없으니까.” 가출팸이 모인 모텔에서 나가면 당장 갈 데가 없었다. 공짜밥을 먹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혜리는 대장이 지시한 곳으로 남자를 만나러 갔다. 지난달 28일 혜리는 난생처음 ‘조건만남’을 하게 됐다.

그날 이후 대장은 시도 때도 없이 혜리에게 지시했다. 알고 보니 가출팸의 다른 10대 언니 3명은 이미 조건만남을 하고 있었다. 가출팸의 언니·오빠들은 해가 밝으면 모텔을 나와 피시방에 갔다. 언니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오빠들은 ‘일자리’를 구했다. 오빠들이 여자인 척 꾸며 ‘조건만남’ 대화방을 만들면, 금세 아저씨들이 몰려들었다.

대개 1시간30분에 15만원쯤으로 매겨졌다. 가격만 흥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빠들은 대화방 건너편의 아저씨들과 ‘조건’을 흥정했다. ‘이건 된다, 저건 안 된다’는 대화가 오갔다. 오빠들과 상대 아저씨들 사이에 오간 조건이 무엇인지 소녀들은 모텔방에 들어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혜리는 힘들다고 했다. 대장 오빠는 도리어 화를 냈다. “너만 힘든 거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 힘든 건 생각 안 해봤어?”

그래도 혜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어른들보다 가출팸 오빠들이 차라리 신뢰가 갔어요. 믿을 어른이 없으니까 가출팸 구한 거예요.” 거리의 언니·오빠들과 또다시 헤어질까봐 소녀들은 두렵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울타리를 갈구하는 소녀들은 조건만남을 인내하며 거리 생활을 이어간다.

혜리의 가출 친구인 아영(가명·14)은 조건만남을 계속 피해왔다. “아빠 생각하면 조건만남까지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대신 ‘키알’(키스알바)을 몇 차례 구한 일은 있다. 채팅방을 열고 ‘16녀(16살 여자) 키알 구함’이라고 올리면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키알은 ‘터치’만 하는 거니까….”

그러나 거리의 소녀들이 두려워해야 할 일은 반강제의 성매매만이 아니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