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홍 의사 - 역경의 열매 신앙 간증 모음 2008/02/07
출처 = http://blog.naver.com/karamos/80048015430
윤주홍 의사 (역경의 열매)[국민일보]1994-11-16
1.좋은 곳 가자” 친구 따라 간 천막교회
◎6·25후 폐허 속 폐부찌르는 설교에 감동/대학 첫 겨울 그리스도 영접 목사 꿈 키워
윤주홍 의사 |
『때앵, 때앵』.
대학시절 난 충남 서산 고향집 앞 오동나무에 매달린 빈 산소통을 치며 새벽예배를 알렸다. 우리집 대청은 언제부터인지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나와 큰형수, 여동생 이렇게 셋이 시작한 새벽예배가 동네 젊은이들의 새벽예배장소로 변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좋은데라니』 |
『따라만 와바』
친구를 따라 간 곳은 전쟁통에 폐허가 된 공터 한 구석에 천막으로 세워진 개척교회였다. 많은 사람속을 헤집고 다시 나오기 힘들어 그냥 앉아 설교를 들었다. 청년을 위한 집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부모님이 논 밭 팔아서 공부시키는데 여러분은 하얀 와이셔츠와 나팔바지를 입고 술 담배를 즐겨해서 되겠습니까. 지금 시가지를 둘러 보십시오. 아직도 포연냄새가 사라지지 않은 허물어진 이 도시를 누가 재건하겠습니까. 바로 여러분 어깨에 달렸습니다』
정신이 번쩍났다. 난 그때까지 학과공부보다 자유로움을 즐기며 살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마음속으로 나를 데려온 친구를 원망했다.
『저 녀석, 좋은데 데려온다더니 언제 내 얘기를 목사님께 다했는지 모르겠어. 모두 내 이야기잖아』
그러나 교회란 곳은 다녀서 해로운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벌써부터 다음 주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절대순종 속에 살다가 처음으로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황량해진 환경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과 인연을 맺은 셈이다. 그해 겨울 세례를 받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방학때면 고향집에 내려가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성도들에게 짧은 지식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 주민들의 반대도 적지 않았다.
어느날 자신의 딸이 교회가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한 아저씨는 분뇨를 가지고와 예배 보는 우리에게 뿌리기까지 했다. 교회 나가는 딸에게 그는 『내일 교회 가려면 목화송이를 다 까놓아라』하고 말했다.
넓은 마당에 수북히 쌓여있는 목화송이를 어떻게 밤새 다 깐단 말인가. 목화송이는 열매가 단단해 까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여학생은 주일예배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새워 다음날 아침까지 목화송이를 깠다.
그러나 마당 가득히 햐얘야 할 목화솜이 빨갛게 물들어 온마당을 덮고 있었다. 여학생은 손끝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단단한 목화송이를 열심히 깐 것이었다. 여학생의 부친은 빨갛게 물든 목화송이를 보고 마음의 감동을 받아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대학 YMCA 종교부장을 맡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목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설교 잘하는 목사, 어린이를 위한 책을 출간하는 목사, 심방 잘 하는 목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1957년 서울신대 3학년 편입학 시험에 합격한 나는 신체검사일을 앞두고 있었다. <화곡성결교회 장로·의사>
2. 결핵걸려 신학대 편입 좌절
◎목사 꿈 접고 건설단 입대 새벽 산상기도/백일지난 어느 날 성령체험 눈물의 회개
1957년 서울신학대학 편입학시험 최종합격자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교무과장을 찾아갔다.
『제가 떨어질 이유가 없는데요』
『엑스선 촬영 결과 폐에 직경 3㎝ 크기의 결핵이 생겼습니다』
의사가 된후 알았지만 폐결핵3기 정도였던 같았다. 대학입학 때도 멀쩡했던 폐가 4년만에 왜 이 지경이 됐다는 말인가.
『병이 있다면 온전한 사역을 못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을 머금고 목회자의 꿈을 포기했다.
서울 문래동에 있는 형님댁에서 잠시 머물렀다. 어느날 옆집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찬송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창립예배 드린지 1주일된 문래동성결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성결교회 총회 본부 소속 청년회전국연합회 간사로 일하며 문래동성결교회 전도사와 함께 교회개척에 동역했다.
그런 와중 60년에 아내 진순희권사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내 나이 29세였고 아내는 27세였다. 그후 다른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61년 5·16혁명이 일어났다. 군대 미필자에 대한 당국의 지시가 떨어졌다. 군대미필자는 건설단에 보내 1년동안 일하면 일등병 제대증을 부여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62년 4월 강원도 정선골로 파견돼 내려갔다. 정선아리랑고개를 넘어 8백고지 위에서 준 군대생활인 건설단생활이 시작됐다. 몸도 약했고 체구도 작았던 나는 하루하루의 노동이 힘겨워 삶에 회의를 느꼈다.
결국 태백산맥 위 8백고지 위에서 하나님께 물어보기로 했다. 철조망 밑으로 기어나가 바위위에 올라가 앉았다. 4월이었지만 새벽바람이 살을 에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목사시켜달라고 했더니 폐에 구멍을 뚫어 놓고 강원도 철도건설하는데 저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해 주실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새벽마다 기도하기를 1백일이 넘은 어느날 새벽이었다. 벌써 한여름이었다. 그날도 새벽 미명 속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때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내가 목마르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름 모를 새만 지저귀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목마르다』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신앙적 교만에 빠져 있었던가를 깨달았다. 기도가 이루어지려면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동안 신앙적 교만에 빠져 나 자신을 위한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을 알게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순간 지난일 중 모든 잘못을 회개하는 기도를 하게 됐다. 5살 때 참외서리한 것까지 눈물로 회개했다.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고 평생의 믿음으로 삼고 있다.
대대장이 나를 불렀다. 건설단 본부 명령이니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대대장은 건설단 법규가 바뀌어 3개월이상 일한 사람 중에 신체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사람은 귀향 조치한다는 것이었고 내가 첫대상자가 된것이다.
석달 열흘만에 고향에 내려간 고향, 충남 서산 인지면에 세워진 인지성결교회에서 지난날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렸다.
3.온전한 회개의 참뜻 뒤늦게 깨달아/
◎“친구들과 닭서릴”5년후 주인에 용서빌어/제대하고 직장구하려다가 의대편입 응시
대학2학년 때였다.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온 나는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웬일로 큰절을 다 하니』
『제가 예수믿고 구원받았어도 부모님께 잘못한 것이 많은 것같아요. 용서해 주세요』
부친은 부모자녀사이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흐믓해 하셨다.
『아버님, 제게 양복을 한벌 해주신다고 생각하고 그 만큼의 돈을 좀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옷을 해입지 않아도 책망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5년전 동네친구들과 두 노인이 살고 있는 아랫마을 오두막집의 닭을 서리했고 당시 닭 4마리의 값이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용서를 구하고 빚을 갚아야 겠다고 말했다.
기억을 더듬어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오두막집은 그대로 있었고 허름한 닭장도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할아버지 계세요』
문을 열고 나온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버선발로 뛰어나온 할아버지에게 나는 사연을 얘기하며 『닭 4마리값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돈을 받아주세요』라고 전했다.
동네사람들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장은 『이장생활 5년동안 우리마을에 닭털 하나 없어진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가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마을풍습은 아이들의 서리는 도둑질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끝까지 돈을 받지않아 교회에 헌금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전한 회개를 했을 때 하나님과의 영적인 주파수가 맞아 수직적인 기도가 상달된다고 믿는다.
십자가에서 목말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태백산 팔백고지에서 그 목마름의 의미를 깨달았던 나는 그후 하나님께 조르는 기도는 하지 않았다. 단지 성령의 느낌대로 행할 뿐이며 그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한다.
1964년, 제대한 나는 서울 문래동 형님댁에 머물며 새 일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날 길을 지나다 우연히 우석병원 앞에 발길이 멈춰졌다. 학교 게시판의 학사편입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입학원서를 사서 교무과에 제출했다.
5명을 뽑는데 1백80명이 응시했다.
시험날이었다. 영어시험이 끝나고 전공시험시간이 됐다. 시험관은 칠판에 「개구리 심장에 대해 약술하시오」라고 썼다.
난감했다. 그동안 시골에서 수많은 개구리를 보았지만 개구리의 심장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때까지 많은 개구리를 봤지만 개구리 심장은 보지 못한 것처럼 신앙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시험지를 눈앞에 두고 『주여, 주여』를 한숨 쉬듯 내뱉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의사 시키려고 여기까지 보내셨으나 제가 실력이 없어 그냥 갑니다』라고 기도한 후 수험번호와 이름만 쓰고 나가야지 하며 연필을 들었다.
35번 윤주홍이라고 쓰고 나니 내 손은 이미 할렐루야 아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시험지에 계속 써내려 갔다.
『저는 두 자녀의 아버지이며 31세의 기독인입니다. 사람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60세까지라면 저는 지난 반평생을 나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나머지 인생을 남을 위해 살고 싶어 의대에 지원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노폐물로 가득찬 정맥적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 산소와 자양분으로 가득찬 동맥과 같은 생활을 하겠습니다. 동맥이 가는 곳이 재생과 치유가 있고 산소가 공급되듯이 그런 동맥적인 삶이 되길 바랍니다. 훌륭한 의사보다 좋은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벌써 시험지 3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가고 제일 마지막으로 시험지를 제출하고 수험실을 빠져나왔다
4.성령의 힘으로 치른 시험 “합격영광”/
◎만학의 어려움딛고 무사히 졸업 인술 첫발/낙도 진료길 태풍치는 바다빠져 “구사일생”
그해 2월,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학교 게시판 앞에 섰다. 5명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오 주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도장을 찍은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시험지를 채점한 교학처장이 5명의 합격자와 함께 내 시험답안을 총장에게 보였다.
『총장님 결재하시기 전에 이 시험지 좀 보세요. 참으로 특이해서요』
당시 독실한 기독인이었던 총장은 시험답안을 읽으며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즉시 교수회의를 열었고 의논 끝에 나를 합격시키기로 한 것이다.
31세의 나이에 의과대학 1학년이 돼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보다 7∼8살이 많은 나이였다. 암기해야 할 것이 많은데 나이가 많아서인지 잘 외워지지 않았다. 해부학시간이었다. 인체의 뼈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아 고민 끝에 다리뼈 하나를 가방에 몰래 집어 넣고 하숙집으로 가져와 공부했다.
그런데 늦은밤까지 공부하다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하숙집 아줌마는 『늙은학생 공부하느라 고생이구려 식사좀 하시오』라며 들어왔다가 책상위에 올려진 다리뼈를 보고 밥상을 엎어버렸고 나는 다음날로 쫓겨나 친구집에서 기거했던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또 자정이 넘으면 53구의 시체가 있는 시체실에 숨어 들어가 공부하며 수업을 따라갔다.
나는 항상 의과대학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참뜻을 잊지말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68년 졸업, 경찰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시작했다. 또 공부하는 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과 서울 미아리에 가정을 꾸렸다.
경찰병원 내에서 간호사들과 의사 몇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장소가 마땅치 않아 해부학실을 치우고 그곳에서 예배드렸고 나중에 전도사님을 청빙해 하나의 믿음의 모임이 형성됐다.
우리는 돈을 모아 치료비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병원비를 내주기도 했고 병실에 책꽂이를 만들어 신앙서적을 넣어주는 일을 했다.
이무렵 여름휴가철을 이용해 충남 서산 앞바다에 있는 섬을 순회하며 무료진료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섬을 바라보며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외롭고 어떤 도움이든 필요하리라 생각해 왔다. 그래서 결심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71년부터 시작한 섬 순회진료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행해지고 있다.
72년 여름이었다. 4명의 의료진이 배를 타고 충남 서산 앞바다에 떠있었는데 태풍이 온다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우리는 안흥만에 잠시 대피하기로 했다. 3명이 배에서 내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내리는 순간 모자가 바람에 날려 벗겨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모자를 잡다가 발을 헛디뎌 항구에 빠지고 말았고 거대한 파도는 나를 삼켜 버렸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는 발버둥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시절을 기억하면서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자꾸만 내려갔다. 어린시절 논 주변에 가뭄을 대비해 일시적으로 물을 모아 두는 곳이 있었다. 깊이는 어른 키를 넘었다. 그 주변에선 이런 종종 광경이 벌어졌다. 구덩이 맨밑바닥으로 다이빙을 해서 가장 오래 있다가 올라오는 사람은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이다. 그 놀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환호소리를 듣기 위해 자꾸자꾸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가슴이 답답해 왔다. 이젠 올라가야 해. 그런데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숨이 답답하다, 답답하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토담집 냄새가 비릿하게 코끝을 찔렀고 한축기가 느껴졌다.
『아 돌아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옆에서 기도하고 있던 전도사님이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바다에 빠졌을때 사람들은 긴 장대로 배밑을 뒤졌다. 함께간 간호사들은 울부짖고 선원들도 우왕좌왕했다. 그런데 저 멀리 집채만한 파도가 항구에 있는 몇개의 배를 부수고 바닷속을 깊게 훑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런 후 멀리 배 닻줄에 빨래같은 것이 걸려 있는 것을 사람들은 발견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물에 빠지자 어린시절의 기억에 잠기게 하셨다. 만일 내가 놀라서 허우적거렸다면 파도에 먼 바다로 휩쓸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5.낙도 진료하며 “복음의 투망질”/
◎3∼4년뒤 외도 전주민 60명 기독교화 “열매”/서울선 보육원 무료진료… 「자장면 보은」 뭉클
그동안 간월도 외도 흑도 초도 원산도 황도 안면도 등 10여개의 섬을 순회진료했다. 대개 10일 정도 머물며 의료봉사했다. 그러다가 복음을 전파하는데는 몇몇섬을 집중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아 외도 간월도 황도를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대부분 의료진은 의사 한명, 간호사 두명, 전도사님 한분과 그외 동역자들과 함께 했다.
70년대 당시 외도의 주민은 60여명이었다. 먼저 그들을 진료하며 복음의 투망질을 했다. 교회를 이해하도록 도왔고 집집마다 성경, 찬송을 나눠주었다. 3∼4년 정도 되자 섬사람들은 육지에서 온 의사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의술뿐 아니라 복음까지 받아들여 전주민이 기독인이 됐다. 식사기도를 함께하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며 치료하니 복음의 싹이 튼 것이다.
위궤양을 앓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병원에서 약봉지를 볼 때마다 그 아주머니 생각이 나 서울에 와서도 약을 소포로 부쳐주었다. 위궤양이 치료된 그녀는 내가 그 섬에 가면 직접 딴 소라 해삼 전복등을 한상 차려주며 『대통령이 와도 이 보다는 더 잘 차리지 못할 겁니다』라며 주름진 손으로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70년대는 TV가 대중화되지 않아 진료외에도 신앙영화를 상영했다. 문화보급과 신앙교육을 함께할 속셈이었다.
충분한 문화혜택을 못누리는 섬아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격년제로 섬주민들을 서울에 초청하고 있다. 부모자녀가 함께 하는 서울 나들이는 그들의 얼굴을 환하게 하고도 남게 했다. 남한산성, 서울일주, 88올림픽경기장구경, 청와대, 천안 독립기념관, 임진각, 통일전망대, 땅굴등을 관광했다.
난 늘 가슴속에 담고 있는 생각이 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또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행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이런 생각은 순간 순간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실천하는데 큰 용기를 준다.
또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란 성경말씀을 내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다. 내가 가정의학을 전공한 의사가 돼 많은 부류의 환자를 대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도의 투망질을 넓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74년 어느날, 버스를 타고 봉천동일대를 지나가게 됐다. 길가는 논과 냇가가 줄을 잇고 있었고 가로주변에 벌집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대로 버스에서 내렸다. 봉천동에 병원을 세우게 된 것도 성령의 이끌림이었다.
『여기서 개업해야 겠다』
그날로 개업장소를 알아봤고 세를 얻어 병원문을 열었다.
어느날이었다. 마당에 핀 목련향기가 좋구나라고 생각하며 손을 씻고 원장실 소파에 앉는데 웬 철가방을 들고 나타난 소년이 자장면 한그릇을 진료대 위에 두고 후다닥 뛰어 나갔다. 쫓아나가 그 아이를 불렀다.
『…』
그 아이는 얼굴을 파묻고 눈물만 흘렸다. 그 아이는 상록보육원아이였다. 내가 상록원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때는 73년부터이다. 봉천동으로 이사오기 전 흑석동에서 개업을 했었다. 그때 관악구 남현동 상록보육원아이들을 무료진료해주기 시작했고 지금도 아이들은 아프면 봉천동까지 온다.
『제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밤중에 갑자기 배가 아파 약을 먹어도 소용없어 보모가 저를 업고 선생님 병원으로 왔었어요』
그때야 기억이 났다. 그 아이는 맹장이었다. 수술받은 아이는 금방 건강해졌었다.
『그때 저는 나중에 크면 꼭 은혜를 갚아야지 생각했고 열심히 일했어요』
그 소년은 고등학교 졸업 후 중국집에 취직했다고 했다. 첫월급을 받고 미아리 길음동에서 자장면 한그릇을 들고 버스를 타고 봉천동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보상은 내 생애 처음이었고 가장 값지게 여겨졌다. 소년과 나는 함께 울며 「보은의 자장면」을 먹었다
6.달동네 왕진료 「보람」이 대가”/
◎새벽 노상강도 “신세진 사람이네” 줄행랑/미국입양 보육원 소녀 청진기 선물 “격려”
봉천동에 병원을 개업한지 벌써 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지만 기억 속에 떠오르는 몇몇 사건들이 있다.
『원장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려고 해요. 도와주세요』
하루는 한 소녀가 헐레벌떡 병원 문을 뛰어 들어왔다. 소녀를 쫓아간 곳은 산길을 지나 허허벌판에 지어진 움집이었다. 진료하기도 어려운 아주 작은 방이었다.
할아버지는 영양실조에 천식까지 겹쳐 숨소리가 매우 거칠었다. 주사 한대를 놓고 링게르를 놓아 주었다. 링게르를 다 맞자 할아버지는 편안히 주무셨다. 링게르가 다 들어 갈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비를 받을 생각도 않았지만 왕진을 청했던 사람들은 진료비를 줄 생각도 안하는 것은 물론 잘가라는 인사 한마디를 안한다. 나는 속으로 『없다고 예의까지 없어서 쓰나. 무정한 사람들 같으니. 이곳을 떠날까』라고 중얼거리며 섭섭해했다. 그집을 나온 시간은 새벽3시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네가 언제부터 의사냐』라는 음성이 들렸다. 또 『떠나다니 여기 보내주신 이가 누군데 맘대로 떠나느냐』라는 음성이 들렸다. 맞았다. 나를 의사시킨 이도 하나님이시고 이곳에 보내신 이도 하나님인데 내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난 아무소리 못하고 산을 타고 내려왔다. 온 사방이 컴컴한데 물체가 눈앞에 나타나 섬뜩했다. 복면을 한 두사람 중 한 사람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댔다.
『소리지르면 죽인다. 있는 것 다 내놔』 이 웬일인가 진료비도 못받고 내려온 내게 무슨 돈이 있다고.
『가방속에 청진기, 의료기구들이 있고 호주머니에 돈이 조금 들었으니 가져 가시오』
두사람은 서로 마주 보더니 속삭였다.
『저 아랫마을, 의사 윤주홍이야』 『엊그제 우리 아들 신세진 사람이네』 그들은 얼른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예수 믿으세요』라고 냅다 소리친 후 줄행랑을 쳐서 병원으로 왔다. 집에 온 나는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날 만약 내가 진료비를 받았다면 진료비는 도둑이 가져갔을 것이고 못받은 진료비는 하나님이 받아 주신 셈이다. 잊을 수 없는 「노인의 왕진료」였다.
한번은 미국에서 소포가 왔다. 내게 맹장수술을 받았던 상록보육원의 한 소녀가 미국으로 입양가 청진기를 선물로 보낸 것이다. 이런식으로 난 늘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아이가 2년동안 우리병원에 기거하며 생활한 일이 있다. 이 아이는 진달래를 한아름 꺾어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는데 하루는 말도 없이 없어졌다.
간호사들이 장난으로 『밀린 병원비 내야지』라고 한 말을 진담으로 알고 도망가버린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는데 며칠 뒤 산꼭대기 마을에 왕진을 다녀오던 길에 배추꼬랑이를 씹어 먹고 있던 그 아이를 발견했다.
도망가는 아이를 쫓아가보니 종이로 만든 것 같은 집에 어린아이 세명이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방의 구들은 내려앉고 물기가 차 눅눅했다. 또 부엌이란 곳에 솥 하나만 있는데 밥을 안해 먹은지 오래됐는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어디 계시니』
『몰라요』
아이들만 남겨두고 가출한지 꽤 됐던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당분간 잘 지낼 수 있도록 방을 고쳐주고 연탄을 사주었다.
어느 겨울 진눈깨비가 퍼붓는 날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죽어요』라며 달려온 아이를 쫓아가니 방에 있어야 할 환자가 마당에 누워 있었다. 생선궤짝위에 눈보라를 막기위해 밀가루 포대를 씌워 놓았다. 주인이 새집에서 사람 죽으면 안된다고 쫓아냈다는 것이다. 행려병자 시체를 거둔 것이 한두번은 아니었지만 그때 장례를 지내며 많이 울었다.
7.달동네 장학회 설립 “희망의 새싹”/
◎주민 자발참여 3억모금… 자긍심 한껏 높혀/사회봉사 작은 노력 「서울시민대상」 첫 수상
83년부터 서울시 산하 아동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해마다 관악구 어린이 글짓기대회와 그림그리기 대회를 열고 있다.
크레파스 색깔만큼 갖가지 색의 꽃들이 피는 봄에는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들이 모이고 가을에는 단풍을 한장 한장 모으는 듯 마음을 뽑아 글을 쓰는 어린이들이 관악 각처에서 모여든다. 맑고 천진한 새싹들의 속삭이는 미래와의 대화이다.
여기서 뽑힌 그림은 일본 규슈에서 열린 「93아세아 청소년미술전람회에서 18명이나 입상해 국제적인 수준에 올라있다. 또 글짓기 대회에서 뽑힌 글들은 벌써 10년째 「꿈나무들의 합창」이란 책으로 묶여 나오고 있다.
난 유년시절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었다. 국민학교 선생님이 장래희망이기도 했던 난 봉천동에서 진료를 하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은 그치지 않았다.
어린이 환자들은 나를 「뽀뽀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자, 뭐 잊은거 없니』
진료를 다 한 내게 아이들이 뺨에 뽀뽀를 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환자에게 다 할 수는 없지만 진료 후 환자와 함께 질병의 쾌유를 간구한다. 『어젠 당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건강이 좀 어떻습니까』라고 묻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 주십니다』라고 전도를 한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자랑할 것이 없는데 89년 제1회 서울시민대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상금 1천만원은 고향 충남 서산군 인지중학교 장학기금으로 기부했다. 학교에선 이를 계기로 인보장학회를 조성했다.
지역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크리스천 한사람 한사람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저 사람이 기독교인이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선교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지역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줄곧 생각해 오던 것이 하나 있었다.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는 가난하고 없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자기체면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다. 있는 사람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해방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지역 주민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방법은 없을까』
「달동네의식」을 밝은 「양지의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88년부터 구상을 해오다 92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관악구청장과 함께 「관악장학회」를 결성했다. 나는 주민들에게 장학금을 설명했다.
『옛날에는 있는 사람들이 모여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지만 이젠 없는 사람들이 1주일에 1천원을 모아 장학회를 설립할 수 있습니다. 이 장학금으로 있는 사람의 자녀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그동안 움츠리고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나를 돕던 사람의 자녀까지 가르칠 수 있다고요?』
호응은 놀라웠다. 1만2천여명의 참여로 3억3천여만원이 조성돼 관악장학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장학회는 1년에 2차례 대학생 4명, 중고등학생 33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앞으로 소망은 이 장학회가 각 동네 비행청소년, 출소한 청소년등 가난해서 돌보기 힘든 청소년들을 수양시키고 이를 위해 가나안농군학교와 같은 수양기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기술학교에서 기술가르치고 취직시켜 어엿한 사회인으로 제몫을 다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이다.
지식도 사회에 환원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운것을 봉사로 환원해야 한다. 앞으로 장학회 산하에 고아원 양로원 등을 만들어 사회봉사란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 산교육이 아니겠는가. 원대한 꿈이며 소망이다.
8.좌절된 목회꿈 인술통해 이뤄”/
◎봉사하는 삶 부축해준 아내 내조에 감사/길잃은 한마리 양 찾는 각오로 선교 최선
봉사활동을 한다고 가정에 많은 관심 기울이지 못했지만 1남3녀의 자녀들은 부끄럽지 않게 잘자라 주었다. 세딸은 돌아가며 내 섬 진료에 동행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특별히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는데 교회 각 기관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미술전시회를 하고 있는 큰딸 옥경이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체장애아선교 기관에서 봉사하고 있다. 둘째딸 은경이는 한남대 강사, 셋째딸 영희는 서울신대 사회사업학과 2년생, 막내아들 권희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또한 자녀들을 양육하며 학과공부 때문에 잔소리하거나 벌을 준 일은 없지만 꼭 지키는 가정의 규칙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귀가시간이다. 밤10시를 어길 경우 토끼뜀으로 벌을 주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또한 그동안 아내의 내조 없이는 이 일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난 늘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잊지 않고 산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며 지극히 작은자에게 한 것이 그리스도께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의사니까 아프고 병든자들이 나에게 주어진 작은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의사가 되게 하신 주님의 뜻을 잊지 않고 살겠다.
지난날 폐결핵으로 신학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그 병은 언제부터인지 치료돼 버렸다. 의과대 시절 몸이 약해 어려움을 겪은 일은 한번도 없었고 폐결핵은 언제 치료됐는지 모르게 치료됐다.
말랐던 내 체격은 조금씩 살이 찌기 시작해 지금은 건강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얼마전부터 경기도 가평군 태봉리 한 마을을 농한기를 맞춰 일년에 두차례 방문하고 있다. 또 3년전부터 서울신대에서 「생활과 건강」이란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목회자들도 인간의 영혼문제와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체의 신비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전국 신학대학에서 해부학 생물학 병리학을 가르치는 곳은 유일할 것이다. 간단하고 상식적인 내용으로 슬라이드를 통해 가르치고 있다.
나는 심방을 열심히 하고 설교를 잘하며 글을 잘 쓰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다. 당시 목회자가 되는 꿈은 좌절됐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사란 직분을 통해 내 소망을 다 이루어 주셨다. 장로지만 심방할 수 있고 설교하지 않지만 간증을 하며 현재 수필을 쓰고 있어 문학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택한자는 장중에 넣어 쓰신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택하기전에 인간이 아무리 선교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소용없다. 나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기 위한 선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지난날 『내가 목마르다』라는 음성을 들려 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나의 욕심을 위해 살때 그리스도께선 목말라하시며 끝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의 온전한 회개를 기다리신 주님. 제가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인도하여 주소서」
<화곡성결교회 장로·의사>
<정리=이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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