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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걸친 순애보- 칼 야스퍼스

맑은샘77 2011. 6. 29. 18:31

평생에 걸친 순애보- 칼 야스퍼스|

 
1883년 독일에서 태어난 카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는 하이데거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철학자로 꼽힌다. 그는 주저인 『철학Philosophie』3부작을 펴내면서 실존철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독일 올덴부르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장이었고, 외삼촌은 두 차례 주지사를 지냈다. 유복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야스퍼스는 어릴 때부터 몸이 매우 약했다. 자주 질병에 시달렸던 탓에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고 한다. 이 때 어린 야스퍼스가 좋아했던 학자는 스피노자였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을 계승하는 철학자로 유명한 야스퍼스는 원래 의학을 전공했다. 베를린 대학, 괴팅겐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거치며 의학공부를 계속해온 야스퍼스는 1913년, 『일반 정신병리학』이라는 저서로 정신병리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야스퍼스는 의학 분야에서 눈부신 명성을 쌓고 있었지만, 항상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정신병리학에 관한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하던 1910년 경, 막스 베버와 후설을 만난 경험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야스퍼스는 후설과 친교를 나누며 그의 저서를 읽게 된다.

이후 그는 루카치, 블로흐, 하이데거 등 여러 철학자들과 친교를 넓혀갔고, 스스로도 철학자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1922년, 야스퍼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는데, 이때 그가 몸담은 분야는 의학이 아닌 철학이었다.


야스퍼스가 의학에 매진하던 시절, 그는 에른스트 마이어(Ernst Walter Mater, 독일의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마이어는 그의 누이인 거트루트(Gertrud Mayer)를 야스퍼스에게 소개했다. 야스퍼스는 거트루트의 지적인 매력에 빠져들었고, 1910년에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결혼은 독일인인 야스퍼스에게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1930년대 나치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내 거트루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야스퍼스는 유태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동분자로 간주되었다.

사방에서 야스퍼스에게 이혼을 권고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야스퍼스는 대학교수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당시 나치는 유태인 색출을 위해 가정을 급습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야스퍼스는 안락사를 염두에 두기까지 했다. 생사가 걸린 위기상황에서 자신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면, 부디 아내와 함께 묻어달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야스퍼스는 아내가 수모를 겪으며 살아야 했던 독일 땅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야스퍼스에게 최고대우를 약속했지만, 그는 스위스의 바젤대학을 선택했다. 한때 ‘독일의 정신적 지주’로 이름 높았던 야스퍼스가 스위스로 떠나자 당연히 언론의 맹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유태인인 아내가 겪은 수모, 그로 인해 남편으로서 느낀 괴로움은 야스퍼스의 결심을 단단히 굳혔던 것 같다.

고난 속에서도 아내를 포기하지 않았던 야스퍼스는 아내의 90번째 생일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자신의 모든 명성을 버리고, 죽음을 불사해가면서까지 아내의 생명을 보호하려 했던 야스퍼스. 그는 마침내 아내의 탄생을 축하하는 꽃다발 속에서 눈 감은 것이다. 이토록 드라마틱한 죽음을 또 찾을 수 있을까. 아내의 생을 축하하는 꽃다발은 마치 평생 아내를 보호했던 그의 생애에 대한 찬사처럼 느껴진다.
참고문헌 -『현대 철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