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인가, 쇼인가! - A. W. 토저 마이티 시리즈
예배강단에서 ‘쇼’를 중단하라!!
예배드리러 왔는가? 쇼 보러 왔는가?
순결한 예배가 쇼 기획 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다.
계산된 멘트, 감정을 조장하는 찬양, 입맛에 달콤한 설교…
껍데기 예배는 가라, 예배가 변질되면 모든 것이 망한다.
이 시대의 선지자 A.W. 토저의 애끓는 예배회복의 절규!!
▒ 예/배/인/가/쇼/인/가
기독교는 허영의 종교가 되고 말았는가!
복음주의적 교회는 ‘허영의 시장’(vanity fair)으로 변해버렸다. 경건의 강(江)은 없고 여기저기 작은 경건의 웅덩이들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웅덩이 안에는 대부분 벌레가 꿈틀거리고, 가장자리에는 두꺼비들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강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올바른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는 허영의 소리를 향해 열려 있다. 기독교는 허영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높아지기 위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교회강단이 쇼무대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의 교회는 예루살렘보다는 할리우드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정도로 세상의 정신 및 세상적인 방법들과 맞닿아 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성인(聖人)들보다는 오늘날의 연예계 스타들을 모범으로 삼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혀 합당하지 않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대중음악이 참기독교의 순결한 위엄과 반짝이는 순수성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복음주의적 교회가 쇼맨십으로 물들고 있다.
나는 교회에서 쇼맨(showman),
즉 흥행사 흉내를 내는 사람을 즉시 알아볼 수 있다. 한 젊은이가 학교나 야외의 집회에서 하듯이 교회 강단 위로 펄쩍 뛰어올라와 찬양집회를 인도한다. 그는 TV에 나오는 엠시(MC)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는 엠시가 하는 방법을 배워서 똑같이 흉내 낸다. 그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치면서 “자, 여러분, 이제 아무개 형제와 아무개 자매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찬양을 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친다.
그는 이런 가증스러운 것을 세상에서 교회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나는 하나님께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않다. 그에게서 천국의 몰약(沒藥)이나 침향(沈香)이나 계피(桂皮)의 향기는 맡을 수 없다.
그의 관심은 온통 TV와 영화뿐이다. 세속성은 우리의 삶의 방식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교회는 영적 분위기가 아닌 세상적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성도들’을 배출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공한 사업가, 연예계 및 체육계의 스타들을 본받으려고 애쓴다. 우리는 현대 광고업자들의 방법을 빌려서 우리의 신앙적 활동들을 전개하려고 한다. 우리의 가정은 극장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잘못된 것들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복음주의적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부르주아의 종교가 되고 있다. 많은 부자들, 상류 계급, 유명한 정치인들, 사회적 명사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들이 고급 승용차를 끌고 교회로 나오면 그것을 보고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우리의 교회 지도자들은 아마도 이런 든든한 교회 후원자들 대다수가 회심의 증거인 도덕적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교회를 세운 거룩한 교부(敎父)들 같았으면 이런 변화를 요구했을 것이며, 그들이 그런 변화를 보일 때라야 그것을 회심의 증거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머리말
1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
그 본래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1장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하라 /13
2장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다 /30
2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라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3장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59
4장 영혼의 눈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68
5장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하라 /77
6장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 /88
7장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라 /95
8장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하라 /98
9장 참된 예배의 부흥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하라 /116
10장 나를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120
3부 사이비 예배를 중단하라
‘종교적 쇼’에는 악취가 난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종교적 쇼는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
11장 쇼비즈니스 연예오락이 예배를 타락시키고 있다 /129
12장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인기를 숭배하는 작태를 그쳐라 /155
13장 껍데기 예배는 가라 /163
14장 인간에게 아첨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하라 /173
15장 재미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83
16장 할리우드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배우라 /206
이 책은 예배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예배가 무엇이고, 어떤 예배가 참예배인지 사이비 예배인지 명료하고 비판적인 어조로 쓰고 있다. 우리 삶 전체가 예배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예배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기독교인다운 삶 전체를 문제 삼고 있다. 제목을 통해 다분히 문제 제기를 의도하는데 실제 내용에서는 그뿐 아니라 예배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한 심정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리고 미국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안목은 그의 사후 4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저자는 참예배가 아닌 것은 '쇼'(연예오락)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이비 예배와 구별되는 참예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듯 말한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고 예배를 위해 거듭났다. 그리고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고, 삶 속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게 있다면 참예배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럼, 저자가 말하는 참예배자의 요건은 무엇인가.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관조의 훈련을 거듭하면,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하나님께 집중하기 시작할 때 영적인 것들은 우리의 내적인 눈앞에서 구체화될 것이다.'불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탈 때까지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과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하나님을 좋아하고, 그분에게 기울어지고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그분을 소유하고 싶어진다.'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숭모해야 한다.'하나님을 숭모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참된 예배의 부흥을 주시는 성령을 간구해야 한다.'성령님이 만들어주시는 부흥이 일어날 때 예배의 열기가 고조된다.'나를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매료되고 감탄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찬송이다.'종교적 연예오락을 중단해야 한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종교적 연예오락이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그리스도 대신 인기를 숭배하는 작태를 그쳐야 한다.'인기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시대, 그리스도보다 인기를 더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껍데기 예배를 버려야 한다.'종교적 소도구와 음향이나 영상 기기들에 매이지 말고 성령님의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에게 아첨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성령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깨끗하고 거룩하고 순수하며 육체를 낮추는 방법이다.'재미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현대 교회는 '재미'를 종교의 상징으로 만들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할리우드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배워야 한다.'교회는 세상적인 정신, 방법들과 맞닿아 있지만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도록 부름 받았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와 예배를 위한 소도구와 장치들의 발전, 그리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행사들……. 예배의 형식이 세련되어지고 화려해질수록 그 속에 예배의 본질을 흐리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성령과 십자가만을 붙드는 삶, 그것이 참예배라는 것, 그리고 참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매순간 긴장하고 도전 받는 일이라는 것, 이 책은 이 두 가지를 명료하게 각인시켜준다. 동시에 '쇼'가 아닌 '예배'를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맞서야 할 명분과 용기를 일깨워준다.
파괴된 예배에 대한 선지자의 목소리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주님을 다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p94)
저자의 책은 처음이었다. 몇 번인가 다른 작가들의 글에서 인용되거나 했던 것으로 이 작가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 이외에 저자의 글이나 생애를 접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근한 이름이었으나 실상은 모르는 이였다. 그리고 이 특이한 제목의 책을 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예배에 대해서 토저가 설교했던 여러 편의 설교들 가운데 엄선한 내용을 모와서 편집한 것이다. 각각의 다른 대상을 두고 수회에 걸쳐 설교된 여러 설교를 순서에 맞도록 편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한편의 설교에 하나님의 예배를 향한 기대와 인간을 향한 기대, 그리고 그분이 바라시는 예배에 대해서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편 한편의 설교도 설교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고, 그 설교들을 모와 놓은 책 전체도 위의 주제들 안에서 조화롭게 편집되어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인생의 목적과 예배의 연관을 밝히며,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 당연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고, 2부에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세세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징들에 대해서 바라봄, 체험, 교제, 사모, 숭모, 간구, 찬양 이라는 예배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제시함으로 바른 예배의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었고. 3부에서는 사이비 예배가 어떤 것이고 그것들의 폐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중단해야 하는 것에 대한 준엄한 책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편 한편의 글도 완결성을 갖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 역시 대단히 명료하게 편집되었기에 마치 토저 스스로가 이 책들을 편집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은 처음부터 달랐다. 책을 읽을 대상을 고려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설교하는 듯 하다 느낌이었다. 어느 곳에도 독자의 마음의 상할 것에 대한 고려, 독자가 불편해야 할 것이라는 고려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오직 하나님의 기대에만 관심을 갖는 설교가였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었다. 어느 한편의 글도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적용과 결단을 촉구하는 글 없이 끝나지 않았고, 쉽게 내뱉어진 소리가 없었다. 글을 읽는 동안 그가 설교하는 강단 아래서 앉아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듯 했다. 살아있었고, 강력했다.
현대 교회의 문제라고 여겼던 예배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읽으며 이제야 겨우 생각하게 된 내용들에 대해서 50년 전에 이미 고민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왔다. 예배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소비자 중심이라는 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예견과 그것의 병폐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것에 대해 이제야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대책에 대해서 50년 전에 말했던 선각자가 있었음에 대해서 놀랐고, 그가 말하는 그 대책들이 꼭 우리에게, 꼭 우리 교회의 예배에 필요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보게 된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주일 예배 외에 삶의 예배가, 평일 날들의 예배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예배일 수 없다”라든가.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찾으신다. 하지만 예배하는 일꾼을 찾으신다. 라고 말하는 것이라든가.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시간이다. 그분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등의 불같은 논리 앞에서 많이 느끼고 많이 흥분했고, 함께 호흡이 빨라졌다. 간만에 책을 읽으며 흥분해 봤다.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우리네 예배가 달라지기를 한국 교회의 쇼가 멈춰지고, 살아서 역사하는 영이 있는 예배들이 교회를 채울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해 본다.
난 경쾌한 찬양을 좋아한다. 경쾌한 찬양이 나오면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언젠가 설교에서 들었던 '다윗은 속옷이 다 드러나보일찌라도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렇게 남들이 '저건 오바다~~'라고 비판할지라도 그런 비판은 도리어 나의 열정적인 찬양에 대한 미래상금(?)이라 생각하고 전혀 게이치 않고 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언제나 양심을 찔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찬양을 편애(?)한다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찬양이 나오면 난 빨리지나가길 바란다. 또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어설픈 나의 몸으로 찬양을 함으로써 아까와 같은 비판을 들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아이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다. 어쩜 내 본심은 그걸 노랬을찌도 모른다.
이 책을 보며 (특히 강력히 경고를 하고 있는 '3부 사이비예배를 중단하라') 난 나의 찬양의 동기 중의 하나가 '연예오락'과 '재미(오락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설마~설마~하며 애써 외면하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양심'은 있었기에 심기에 불편하게 만들었나 보다.
솔직히 이책은 다른 신앙서적과는 달리 그리 달갑지 않았다. 달콤한 희망이나 성공, 사랑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고, 잘못된 것, 안 좋은 것만 지적한다. 어느 정도 동의를 하면서도 '그건 오바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고, '그래도 나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진정 반성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난 안다. 읽기에 다소 꾹! 꾹! 찌르는 맛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진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상처에 고름이 나면 그 부위를 도려내어 다른 부위로 퍼지는 것을 막듯 이 시대의 심각한 예배 실태를 바로잡아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예배자가 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 것이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책을 보며 우리에게 잘못된 예배의 요소가 있다면 바로잡자!!
비록 상처를 도려내는 부분에선 아프고 시리고, 때로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후에 올 더 큰 '기쁨'을 생각하자!! 이기적이지 않은 순결한 하나님께 그리는 기쁨의 예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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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저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예배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떠한 형식과 외적인 도구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진정으로 연합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 쉽게 생각해 보자. 예배禮拜는 예를 갖춰 ‘절’한다는 의미이다. 절을 하는 행위는 바닥에 엎드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 경외감, 철저한 순복과 인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란 하나님을 떠올리기만 해도 다리에 힘을 빼고, 고개를 숙여 그분에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마음과 행위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의 예배를 둘러보자. 혹 예배시간에 무릎을 꿇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아니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말해 “쪽팔리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을 향한 감탄 보다 타인의 눈총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더욱 큰 것이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분만을 높이러 온 자리에 하나님은 저 낮은 곳에 서 계시며 다른 이들에 대한 의식은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진 않은가! 많은 사람들은 찬양 시간에 진행자의 독촉에 못 이겨 ‘자의반 타의반’ 손을 올려 함께 찬양에 동참한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율동은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일 뿐이다. 심지어 말씀을 듣고 나서의 반응은 ‘저번에 그 교회 목사 말씀이 더 낫 것 같네’ 라는 싸늘한 평가. 내 감정과 구미에 맞지 않는 예배는 ‘드리지’ 않고 단순히 ‘관람’을 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 아니던가!
눈과 귀를 자극하는 예배의 형식은 늘어간다. 신디와 드럼, 전자악기가 찬양을 리더하고 각종 홍보물, 소개 자료는 최첨단 영상기기를 통해 보인다. 무슨 특별한 이벤트라도 있을 경우 소위 스타 목사, 스타 강사, 스타 찬양 사역자를 초청해 이목심(耳目心) 세 가지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강력한 전략이 취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대의 기호와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적 코드에 어필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러한 문화적 프로그램들이 교회내의 주요 형식으로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가사를 보여 주지 않으면 서양의 로큰롤과 다를 바 없는 음악을 배경으로 무대에서 댄스 공연이 벌어지고 멋진 공연을 선보인 소수의 퍼포머들에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갈채가 돌아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크리스천들의 문화 속에서 낯선 이방인들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시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씁쓸한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예배들이 본질은 잃은 채 껍데기만 화려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변화’와 ‘변질’ 사이의 그 아스라한 경계를 오가며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기독교는 토저의 말처럼 ‘세례 받은 속물 집단’에 불과한 것일까?
예수 ‘향기 나는’ 참 예배의 회복을 소망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다. 수많은 예배에 관련된 책들은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한다. 이 책 또한 그렇게 기록한다. 인간의 궁극적 존재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수많은 예배가 우리의 삶 속에 넘쳐나고 있으며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이것은 혹시나 '쇼가 아닐까' '거짓된 가식'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이 책의 내용에 나온 것처럼 우리의 예배는, 아니 우리의 삶은 예배가 아니라 쇼이고 가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일날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월요일에 예배드리는 삶이 아니라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얼마나 우리의 삶이 잘못된 것인지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바로 삶의 예배라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정규예배시간에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것이 아니라면 그 예배는 소용이 없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인 것이다. 본인은 언제나 예배를 드리면서 강조하는 것은 회개와 성령의 임재이다. 이것은 예배의 필수 요소이고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소개하고 있다. 실로 우리는 죄인이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갈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기에 행운아이다. 여기 하나의 행운이 더 있는데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에는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해 그리고 모든 영혼을 다해 예배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시대의 예배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종교적 쇼에 지나지 않는 예배를 드릴 때가 너무나 많다. 그것은 재미를 강조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따분함에 빠지지 않기 위한 예배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비단 미국의 교회들에만 비추어지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도 일어나는 모습이라고 본다. 예배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절대 예배가 쇼나 연예오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간의 교제에서의 재미난 부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재미가 필요치 않다. 아니, 그것보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 넘쳐야 할 줄로 믿는다. 한국교회는 무너져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종교개혁들의 모티브는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직접 언급된 내용도 잇고 없는 내용도 있지만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평소에 발견하지 못한 많은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그들이 수많은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책망을 듣게 됨을 보게 된다. 인간이 보기에 많은 예배가 이루어지고 엄청난 예물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착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악한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들에게 속지 않으신다. 당시 그들의 문제는 그러한 수많은 예배와 재물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하는 예배행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고 있다. 예배는 수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새벽예배가 있는 한국교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하기 때문에 형식화된 예배, 인간 중심의 예배가 성횡하고 있을 수 있는 문제가 생길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염려를 A. W.토저 목사는 이미 미국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들에 대해 경고하셨던 것이다. 그 내용이 이 책 '예배인가 쇼인가! 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출간된 것을 하나님을 믿는 한 성도로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았다. 그 이유는 내 자신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예배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나이지만 그러한 의식의 반복으로 달콤하고 감격스러운 예배의 정신을 잃어버렸으며 사모하는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는 삶의 예배를 상실한 것이 문제였다.
도저 목사는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그것이 예배 자가 해야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영적질병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보았다. 즉 우리의 삶이 살아있는 영적 예배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드린 주일예배는 안 드린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실로 그의 지적은 성경적이다. 우리는 공적인 예배만 중시하지 삶의 예배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무신경하다. 이러한 신자들의 삶을 보는 그는 참으로 가슴아파한다. 또 하나의 그의 가슴을 찢는 것은 예배가 너무나 인간중심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육적 쾌감과 종교적 분위기와 느낌이 주인공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쇼를 중지하라고 한다. 왜 세상의 타락한 문화를 기독교에 가져왔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예배에서 종교적 분위기와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 세상의 방법을 끌어들인 것이다. 거기에 과연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실런지 의심스럽다. 또한 찬송가를 복음성가로 대체시켜 찬송의 타락을 가져왔다고 그는 보았다. 복음성가의 문제는 멜로디를 인간의 감정에 자극시키는 것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며 가사역시 지극히 인간중심인 것이다. 이러한 예배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올바를지 그는 걱정스러워하며 당장 그러한 행위를 중지해야된다라고 외치고 있다.
언제인가 삼일교회의 전병욱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자신이 하였던 기도 제목을 말씀하신걸. 들은 적이 있다. 그는 'C. S.루이스의 지성과 A. W.토저의 뜨거운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하였다. 그 당시 그 기도 제목의 의미를 잘 몰랐었는데 이 책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을 통해 그 기도 제목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토저 목사는 그만큼 하나님만을 원하였던 뜨거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 한권의 책만으로도 그의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신앙적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A. W. 토저의 통렬한 비판, 날카로운 지적.
모두 맞는 말이다.
이 땅에서 살면서 참된 예배를 드려보지 못 했다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 했다면
결국 하늘나라 천국에 올라가더라도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형식에 맞춰서 드리는 예배, 시간 때문에 드리는 예배에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예배'라는 이름 아래 껍데기뿐인 예배를 드리기를
멈추지 못 하고 있다.
진리와 성령을 따라 드리는 예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예배드리러 왔지만 자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주님 앞에 드릴 수
없게 만드는 예배에 우리는 지쳐만 간다.
TV 가요프로에서 나오는 듯하다 온갖 음향기기의 소리에 맞춰 큰 소리로 찬양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여전히 느끼지 못 하고 예배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만나 보지도 못 하고 교회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우리.
이젠 모든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진정으로 예배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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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된 예배를 갈망하고, 이제껏 드렸던 예배에서 아무것도 또 그저 그런 것뿐인 예배에 지쳐있는 당신을 위한 책입니다.
다만 너무 비판적으로, 비관적인 시각에서 쓰여있고문체와 내용이 조금 어렵게 번역되어 있어다소 읽는 데 시간이 걸리며 이해하는 데 주의를 요하는 책입니다.
책 내용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주일 예배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 사람은 다음날 월요일도, 화요일도, 결국 일주일 내내 예배드리지 못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는 부분인데 -지금 책을 두고 와서 정확한 인용은 못 했습니다- 위의 말은 맞는 이야기 이지만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서 다음과 같이 바꿨으면 합니다. 물론 이건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주일 예배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를 믿는 믿음의 많은 성도들과 함께 진정한 예배를 드려 본 사람만이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즉,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일주일 전체를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을 보지도 못하고, 경험도 못해보고, 맛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참된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주일 예배에 와서 참된 예배를 맛 본 자만이 계속해서 그러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중요하고, 또한 모여 함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혼자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라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예배. 구주 예수를 머리로 모신 예배를 드려본 사람만이 혼자서도, 둘이서도, 그 어디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꼼꼼하게 생각해 보면서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책 내용에 성경 구절이 거의 포함이 안 되어 있으므로 옆에 성경책을 놓고 해당되는 부분을 찾아 읽으시면 더 많은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오래전부터 A. W. 토저 라는 분에 대해서 많이 궁금했었다. 많은 분들이 좋은 신앙서적이라 추천하는 책에는 반드시 토저의 책이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꼭 한번은 만나봐야하는 저자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던 차에 목사님께서 사임하시면서 내게 이 책을 선물해주셔서 아주 감사하며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선물해주신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목사님께서 이책을 통해서 내게 가르쳐주시고 싶은 것은 무엇인줄 알겠는데 이 책의 내용을 조모조목 따져가며 반박을 하는 책을 쓰면 이 책의 두 배의 분량의 책을 쓸 수는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토저, 이분의 하나님에 대한 충정은 알고도 남겠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나의 영적 수용성을 잃어버리고 내 현재 상태에 만족할 바에는 나는 차라리 이 자리를 떠나 길을 걸어가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119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가는 편을 택하겠다.’는 책의 말미의 조금은 섬뜩한 그분의 말이 없었더라도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분의 하나님에 대한 선지자적 열정은 절절히 남아 흐르고 있었다.
또한 예배에 대한 그분의 기본적인 생각, 예를 들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 성령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참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 등은 백번을 말해도 틀림이 없는 예배의 본질이다. 하지만 예배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본질과 형식 사이에서 논점을 잡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예배형식에 대해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난도질을 하는 그분의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다. 틀린다면 왜 틀리는지 정도는 얘기해줘야 어른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분의 주장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나도 예배시간에 복음성가가 주류를 이루는 것에 대해 많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함량이 모자란 복음성가도 있다는 데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내 마음에 ‘왠지’ 공허하게 느껴진다고(92P) 복음 성가는 ‘왜곡되고 약해진 신앙’이 희생된 결과이고(122P) 훌륭한 찬송가의 설자리를 뺏어버렸다는 그분의 주장에는 뭔가 충분한 이유가 결여되어 보인다. 교회에 가면 나는 슬퍼진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는 예배 중에 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양육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112P)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대와 다른 세대의 사람들의 예배에서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 사람들이 모조리 하나님을 경외해야하는 생각이 없고,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느끼지 못한 성스러움의 정체가 뭔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 성스러움이라는 것이 자신이 느끼지 못했을 때 그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고 판단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믿고 있는지, 그 성스러움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문화선교와 기독교적 행사에 대해 한마디로 ‘종교적 쇼’다 라고 단언하며 덧붙이는 그의 얘기는 가슴이 서늘할 만큼 섬뜩하다 그들은 다만 세상의 나이트클럽에 마음 놓고 갈 수 없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활용한느 것뿐이다…….(135P)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자는 광풍이 현대 교회를 휩쓸고 있다. 놀랍게도 모든 종교적 활동 중 상당 부분의 배후에 이런 광풍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신자들과 교회는 헌금을 내는 교인들을 붙잡으려고 경쟁한다(174P).
토저 정도의 독자를 확보한 저술가라면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에 대한 사려 깊은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밤새워가며 한 영혼이라도 구해보려고, 어떻게 하면 쉽게 복음을 이해시킬지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는 각처의 기독문화선교사들이 이 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지 한 번만 생각했다면 이런 글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졸지에 나이트클럽을 못가서 환장하고 헌금 내는 교인들이나 불러 모르려고 골몰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기독문화 선교사들을 진정 예배속 하나님의 임재하심, 성령 체험도 모르는 그런 무지 랭이 속물들로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토저가 주장하는 대로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에 물을 타고 쓰디 쓴 그분의 진리를 캡슐형태로 만들어 영적으로 둔감하고 무지한 자들에게 나눠주며 그 수준을 맞추기 위해 모든 설교 수준을 낮추고 청중의 수를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천박한 예화를 하고 농담을 한다고 한다면 토저 그 자신은 예수의 진리를 처음 접할 때부터 그 쓰디 쓴 진리를 옳다구나 하며 ‘원샷’을 했었는지, 예배당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그 복음의 무게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균일한 수준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진정 믿고 있는지, 자신이 천박한 예화, 낮은 수준의 설교라 폄하한 그 설교자 중에는 자신보다 더 큰 영성과 성령 충만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낮은 인간의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예배당에 처음 발을 내딛은 초신자의 눈을 맞추며 복음을 간증하느라 애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이런 분이 과연 동성애 문제나 타종교인 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우리나라의 사학 법 개정에 관한 문제와 같은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을지 궁금하다
‘이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듣는 이분에게서 십자가 깃발아래 가는 곳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살육하고 폐허로 만든 십자군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크리스천이 다른 종교인과 다른 것 한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현실인식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현재의 기독교의 경향이 사람들에게 천국 지향적인 사고를 심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을 세속화하여 타락한 인간들의 육신적 가치관을 중시한다는 것(215P)은 진정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현기독교의 큰문제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비판을 한다 해도 은혜의 범주를 벗어나 아무나 잘못한 놈 맞아라. 하는 식으로 돌을 던지는 비판은 '이시대의 선지자'라 하는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다.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독약을 먹이면 병은 죽겠지만 환자도 죽는다. A. W 토저, 이분이 진정 병든 이 시대를 치료하기 원하는 ‘이시대의 선지자’ 역할을 다하려면 이 시대의 병에 대해 다시 한 번 명확한 규정을 했으면 좋겠다. 애먼 하나님의 자녀들마저 그의 펜에 상처입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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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인가, 쇼인가!’를 읽고 (A.W.토저/이용복/규장)
저자의 책은 처음이었다. 몇 번인가 다른 작가들의 글에서 인용되거나 했던 것으로 이 작가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 이외에 저자의 글이나 생애를 접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친근한 이름이었으나 실상은 모르는 이였다. 그리고 이 특이한 제목의 책을 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예배에 대해서 토저가 설교했던 여러 편의 설교들 가운데 엄선한 내용을 모와서 편집한 것이다. 각각의 다른 대상을 두고 수회에 걸쳐 설교된 여러 설교를 순서에 맞도록 편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한편의 설교에 하나님의 예배를 향한 기대와 인간을 향한 기대, 그리고 그분이 바라시는 예배에 대해서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편 한편의 설교도 설교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고, 그 설교들을 모와 놓은 책 전체도 위의 주제들 안에서 조화롭게 편집되어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인생의 목적과 예배의 연관을 밝히며,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 당연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고, 2부에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세세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징들에 대해서 바라봄, 체험, 교제, 사모, 숭모, 간구, 찬양 이라는 예배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제시함으로 바른 예배의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었고. 3부에서는 사이비 예배가 어떤 것이고 그것들의 폐해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중단해야 하는 것에 대한 준엄한 책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편 한편의 글도 완결성을 갖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 역시 대단히 명료하게 편집되었기에 마치 토저 스스로가 이 책들을 편집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은 처음부터 달랐다. 책을 읽을 대상을 고려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설교하는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곳에도 독자의 마음의 상할 것에 대한 고려, 독자가 불편해야 할 것이라는 고려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오직 하나님의 기대에만 관심을 갖는 설교가였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었다. 어느 한편의 글도 대충 넘어갈 수 없는 적용과 결단을 촉구하는 글 없이 끝나지 않았고, 쉽게 내뱉어진 소리가 없었다. 글을 읽는 동안 그가 설교하는 강단 아래서 앉아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듯 했다. 살아있었고, 강력했다. 현대 교회의 문제라고 여겼던 예배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읽으며 이제야 겨우 생각하게 된 내용들에 대해서 50년 전에 이미 고민했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왔다. 예배가 하나님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소비자 중심이라는 철학이 교회 안에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예견과 그것의 병폐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것에 대해 이제야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대책에 대해서 50년 전에 말했던 선각자가 있었음에 대해서 놀랐고, 그가 말하는 그 대책들이 꼭 우리에게, 꼭 우리 교회의 예배에 필요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보게 된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주일 예배 외에 삶의 예배가, 평일 날들의 예배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예배일 수 없다”라든가.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찾으신다. 하지만 예배하는 일꾼을 찾으신다”라고 말하는 것이라든가.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온전한 시간이다. 그분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등의 불같은 논리 앞에서 많이 느끼고 많이 흥분했고, 함께 호흡이 빨라졌다. 간만에 책을 읽으며 흥분해 봤다.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우리네 예배가 달라지기를 한국 교회의 쇼가 멈춰지고, 살아서 역사하는 영이 있는 예배들이 교회를 채울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해 본다.
그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는 주님을 다 찾지 않는다.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오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라. 텔레비전을 꺼라. 그 대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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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예언자로 말하여지는 토저 목사님의 설교집이다. 예배를 주제로한 설교를 모아 제작된 책이다. 토저목사를 예언자로 언급한 사람들은 토저 목사님이 삶을 통해 보여준 믿음의 신실성을 보고 붙여준 말이였다. 토저목사는 듣든지 아니듣든지, 귀를 닫듣지 열든지 목회하는 교회를 향해 옳다고 인정하는 부분을 선포했다.
예배인가? 쇼인가? 제목에서 이미 목사님의 의중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경험하는 한 부분을 정확히 표현한 제목이다. 즉 예배에 감격은 잃어버려도 인위적인 기쁨은 한 껏 맛보는 건조한 예배를 끝내야 된다는 외침이다.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구원의 기쁨은 개인이 아주 조금 느낄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해야하는 예배 현장에 사람을 모이게하여 하나님을 평가하게 만드는 현 시대의 아픔을 지적하고 있다. 토저 목사님은 이런 변질되어진 예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로 바뀌어야 함을 말한다. 이 말에 우리는 공감을 하나 ''어떻게?'' 질문을 던질 때는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토저 목사님은 이 어떻게라는 질문에 세상적이며, 인위적인 모든 것들 제거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촉구한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는 이미 성경에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는 방법을 모조리 보여주시고, 만들게 하셨다.
하나님은 법칙을 만들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이 시대에도 구원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계속하여 진정한 예배를 요구하신다. 여기에 말씀대로 순종하는 방법만이 진정한 예배를 구현할수 있다. 토저 목사님의 진실한 예배에 대한 생각에 수긍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배를 회복하기 원하는 사람은 참으로 귀한 내용을 발견할 것이다. 어떻게 라는 부분에는 이 시대에 진정한 예배를 회복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를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임하는 진정한 예배를 향한 갈망을 갖고 삽시다.
활동 중독증은 기독교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그다지 유익이 되지 못한다. 교회를 둘러보면 절반만 구원 얻은, 절반만 거룩하게 된 육적인 사람들의 무리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그들은 신약성경보자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물건에 대해서, 성령님보다는 연애소설과 연속극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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