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투데이 김진영 기자 / 입력 : 2010.11.03 10:26

 

선교활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선교사가 교회에서 투신 자살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2일 오전 1시 20분께 인천시 서구 심곡동 A교회 5층 옥상에서 박모(47)씨가 떨어져 숨진 것을 인근 아파트 주민 정모(33)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전직 전도사인 박씨는 대만 선교활동을 마치고 3개월 전 귀국한 뒤 특정한 주거지 없이 이 교회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42047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성도의 자살(自殺)행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이 세상을 사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자기 스스로 생산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 분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생명을 부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치 못하는 우둔한 인생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복제’라는 방식으로, 하나님만 아니라 인간 역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교만해진다. 혹은 ‘낙태’라는 방식으로, 인간의 모습을 채 갖추지도 못한 생명체를 짓밟음으로 생명을 가치없게 만들고 있다.

 

요즘은 ‘자살’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감사하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무시하고 있다. 연예인들 유명인사들의 연이은 자살 행위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자살’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되면 몹시도 당황스럽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살기 힘들면 그런 무시무시한 결정을 감행했을까 하는 마음의 깊은 동정심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서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명이 있음을 감사하기보다는 생명이 있음이 괴롭다고 결정짓고 자살을 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것이 아닌 생명을 함부로 오용하는 어리석은 죄를 범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자살을 미화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성도들의 자살이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자살을 어떻게 이해하고 포장하고 있는지, 당사자들에 대한 이해 여부가 어떻든지, 또는 가족들의 극심한 슬픔을 어떻게 위로하려고 하든지 성경에서 자살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매일 죽음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하루하루를 맞이한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요 10:10)고 오셨다.

 

주님의 백성들은 참 생명을 소유한 자들로서 매일매일 풍성한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의 잔치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자살이 만연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몹시도 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육적인 생명도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의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처럼, 육신적인 생명을 괄시하며 자살을 마음에 품는 연약한 자들에게 생명의 존귀성을 알려주는 일 또한 교회가 할 일이다. 이런 일을 감당하려면 우리들 자신부터 생명에 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가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려면, 생명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역으로, 우리가 생명의 귀함을 바르게 인식하려면, 죽음 혹은 자살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 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우리의 범죄로 인해 부여된 죽음의 의미를 살핌으로써, 자살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불신자조차도 생명은 인간 스스로의 작품이 아닌 것을 안다. 만물과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누구도 거역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논리와 학설과 변증으로도 그 사실은 무효화되지 못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넣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것에 생명을 주시려고 계획하셨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을 보여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표본”이라고 경탄한다.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에게 이렇듯 엄청난 존귀함이 주어졌다.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소유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창조주께서 우리 인간에게 그저 평범한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 아님을 마음에 깊이 인식해야 한다.

 

지음을 받은 모든 피조물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숨쉬고 움직이며 나름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피조물 중 분명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드신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만드셨다. 그리고 빚어진 인간에게 생령을 불어 넣으시고 생령이 되게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존재이길 원하셨다.

 

인간은 그저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지성의 빛과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다른 무수한 동물들과 구별된다. 이런 특혜 위에 한가지의 특권이 더 주어졌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본성의 완전한 탁월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혜들 속에서 우리가 창조되었다.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그저 평범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 어떤 피조물들보다 뛰어나고 탁월하게 창조하신 우리의 생명을 날마다 감사하며 소중히 관리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우리의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할 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귀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함부로 망가뜨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행위이다. 

3. 범죄로 인하여 부여된 ‘죽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는 지극히 탁월하며 고결하였다. 그러나 아담이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하나님을 배신하였다. 이 아담의 죄를 ‘원죄’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인간의 시조(the progenitor)와 인간 본성의 근원(the root of human nature)으로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비참한 상태로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은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뿐이다.” 인간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다.

 

이렇듯 아담의 반역, 즉 원죄로 인해서 인류 전체가 저주와 파멸에 넘겨졌다. 영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육신적인 측면에서, 노화가 시작되어 무덤을 향해 살아가게 되었다. 영적, 육적 죽음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라고 설명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범했으며, 그 죄의 결과로 모든 인류에게, 심지어는 죄를 알거나 범하지도 않은 영유아들에게까지, 사망 즉 죽음이 이르렀다.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은 진리이다. 이 구절은 죄에 대한 형벌이 사망임을 단호히 명시한다.

 

죽음은 죄에 대한 처벌로서 주어진 것이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음’에로 정죄함을 받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결코 죽음을 멀리있게 하거나 회피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늘 하루도 죽는 사람들이 있으며, 오늘 죽음을 면한 사람들조차도 죽음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이렇듯 죽음은 하나님의 정죄하심에 의해 온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범죄에 대한 형벌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범한 모든 인류를 사망의 법칙에 굴복토록 하셨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히 9:27)이기에 성도든, 불신자든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이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 육체적 죽음은 형벌로써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롬 8:1-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우리가 죄가 덮어졌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입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대가인 죽음이 더 이상은 우리에게 요구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영생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졌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음으로 전락하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영원한 생명에로 일으키심을 받은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칭의받은 신도의 육체적 죽음은 그의 영혼을 성화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준비로 남아있는 것이요 죄의 형벌로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이 죽음의 경험을 통과하는 것은 훈련과 징계를 위하여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죽음’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리를 훈련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체의 유한함의 고통 속에서 경건을 배우고, 그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복락을 갈망하며 전진토록 훈련하신다. 

4. 성도의 자살(suicide)은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위에서,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며 또한 ‘죽음’이 죄의 형벌로 혹은 훈련과 징계를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음을 생각해 보았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생명’과 ‘죽음’에 관한 주권이 하나님께만 속했음을 알게 된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만들고자(ex:복제)하거나 생명을 멸하고자(ex:낙태, 안락사, 자살)하는 것은 확실한 죄악이다. 이런 이해들 속에서 이제 구체적으로 자살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생각해보자. 

특별히 우리의 관심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도의 자살이다. 자살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날로 증폭되고 있는 자살자에 대하여 성도는 어떤 입장이어야 하는가? 자살을 고찰하는 방향은 여러 각도일 것이다.

 

에밀 덕하임(Emile Durkheim)이 쓴 글에 의하면 자살이란 ‘고민이나 좌절 혹은 고통이나 절망적인 상황을 회피할 수단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 또는 죽음을 더 나은 삶의 차원이나 더 완전한 삶으로 간주하여 궁극적으로 죽음을 지향하는 일체의 행위’라고 한다. 한 마디로 자살은 부여받은 생명을 스스로 단절시키는 범죄 행위를 말한다.

 

필자는 본 글에서 자살에 대한 사회 도덕적 윤리나 혹은 심리학적 접근방식을 살피지 않는다. 다만 성경에 나오는 자살의 경우와 십계명을 통하여, 성도들이 ‘의지적(意志的)’으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의 죄악성 또는 부당성에 관해 살피고자 한다. 

4-1. 자살에 관한 성경의 예(例)들  

성경에서 자살에 관한 몇 가지의 예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아비멜렉, 사울 왕, 아히도벨, 시므리의 자살을 기록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가룟 유다의 자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다섯 사람의 자살 사례를 살펴보자.

①. 아비멜렉(삿 9장): 그는 데베스의 망대에 도망하여 숨은 사람들을 불을 놓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두골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는 여인에 의해 죽었다는 치욕스런 말을 피하고자, 부하에게 칼로 자신을 죽이라고(9:54)하였다.

 

이러한 자살에 대해 성경은,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9:56)라고 결론짓는다. 신성종박사는 아비멜렉의 자살을, “그는 뉘우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의 심판을 피하며 자신의 불명예스러움과 육체적 고통을 단축하기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또 하나의 범죄 곧 살인을 하였다”라고 평가한다.

②. 사울왕의 경우(삼상 31장):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활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었고, 모욕을 당할까봐 자신의 칼을 취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31:4). 

③. 아히도벨(삼하 17장): 그는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편승하여, 다윗을 엄습할 좋은 모략을 베풀었다. 그러나 압살롬이 후새의 모략을 더 낫게 여기므로 그의 모략은 시행되지 못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17:23).

 

이 자살에 대해 신성종은 “아히도벨의 자살은 불의에 가담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며, 다윗의 기도의 승리를 말해준다”고 평가한다. 삼하15:31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④. 시므리(왕상 16장): 시므리는 엘라왕을 모반하여 왕이 되었으나, 그의 모반 소식을 듣고 성을 함락하러 온 오므리에게 패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시므리는 왕궁의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하였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16:19)라고 설명한다.

⑤. 가룟 유다(마 27장):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스스로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음을 뉘우치기는 하였으나(마27:4), 회개치 않은 채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마 27:5).

이러한 다섯 가지의 자살의 유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자살들은 그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회피하려 한 것이었다.

 

자신들에게는 생명을 끊을 권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주인으로 행동한 것이다. 이러한 자살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스스로의 자멸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성도가 의지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성도는 죽을 권리(權利)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살할 권리를 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자살을 명령하시거나 허용하시지 않으신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살은 허용되지 못한다. 따라서 자살은 하나님의 소유를 강탈하는 범죄행위이다. 모든 만물 가운데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조의 문화명령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생명 자체의 시종(始終)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마치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과는 따 먹지 말라고 한 것과 같다. 모든 생물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마음껏 누리며 권한 행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범죄행위이다. 그것이 십계명에서 분명하게 천명되고 있다. 

4-2. 자살에 대한 경고: 십계명의 제 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출 20:13)

하나님은 제 6계명을 통하여 살인이 죄악임을 경고하신다. 우리가 살인을 하면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인은 엄하게 금지된다.

우리는 제 6계명을 읽으면서 타인을 살해하는 것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생명 역시 죽여서는 안 됨을 경고하고자 함이다.

 

계명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도 예외로 간주 될 수 없다. 이 계명은 자살,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제 6계명을 정확히 생략된 부분까지 다 드러내어서 표현하면, “너희는 타인의 생명과 너희 자신의 생명을 죽이지 말찌니라”이다. 하나님은 제 6계명에 모든 인간 생명을 다 포함시키셨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타인을 해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해하는 것, 이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우리 이웃들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대접하며, 그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힘써야 함을 아울러 당부하시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우리의 하나뿐인 육체적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힘써야 함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타인을 죽이는 것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 또한 살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육체 안에 두셨다. 그러므로 자살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에 둔 영혼을 쫓아내는 것이다. 청교도 목사인 토마스 왓슨은 육체를 살해하는 자살은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며, 스스로를 지옥에 던져 넣는 일이라고 했다. 물론 인간 누구도 영혼을 멸할 수 없다.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왓슨 목사가 자살이 자기 영혼을 죽이는 일이라고 말한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주님의 계명을 어긴 죄로 인해 결국 자신의 영혼까지도 망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한다는 측면에서 말씀한 것이다.

 

즉 자살을 한 자들은 스스로 구원을 포기한 것이 되고 만다. 제 6계명에 함축된 우리의 임무는 우리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보존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우리가 자살하려는 생각으로부터 멀어져서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함을 의무지워 준다. 

이로써 제 6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확정짓는 것은 자살은 곧 살인이라는 사실이다. 제 6계명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결코 자살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4-3. 성도의 자살은 죄악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자살이 정당하다고 말해지지 않는다. 생명을 하나님의 허락없이 취하는 것은 제6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고, 엄연한 범죄이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생명을 죽이는 것은 창조섭리에 대한 대적이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정하신 질서는 인간은 한 번 죽어야 하며, 그 후에는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이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 땅의 삶을 종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주권적 역사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의 종말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 주권 침해이다. 자살과 관련하여 성도들의 주된 관심은 자살한 영혼도 천국에 가는가? 라는 문제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혹자는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구원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결은 교회나 교회법 혹은 개인의 의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목사로서 죽은 자 모두가 다 천국에 간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어쩌랴! 공의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에 규정하시기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법을 고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다만 선포할 의무만이 있다.

 

그렇다면 성도라고 하면서 자살 죄를 범한 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서 개혁주의 입장은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일부 윤리학자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회개가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다 도말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살한 행위 하나 가지고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생활 속에서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들은 성도들 마음에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케 하신다. 회개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죄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회개해도 용서받지 않을 엄청난 죄도 없다. 성령 훼방죄는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회개가 없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치 않은 극히 작게 오염된 영혼도 하나님의 비상수단에 의해서 깨끗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낙태로 죽은 영아들 또는 난산으로 혹은 질병으로 죽은 유아들의 구원문제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자살자에 대하여 접근하려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영유아들의 죽음에서 구원문제는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아니다 라고 말하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은 모든 영유아가 다 지옥에 갔다거나 다 천국에 갔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비상적인 역사하심을 따라 구원받도록 역사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살자에 대한 문제는 정상적인 삶 속에서 극도의 압박에 의한 스스로의 선택 결과이다.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본인 스스로가 져야 하는 것이다.

 

사소한 죄를 말할 것 같으면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를 꼽을 수 있다. 그가 온 인류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악한 죄, 예를 들면, 살인죄, 강도죄, 간음죄, 폭행죄를 지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 하나 따 먹은 죄였다. 그것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야만 해결되는 엄청난 것이었다. 회개하나 하지 않았다고 지옥에 보내실 냉혹한 하나님, 무정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선악과 하나 따 먹은 죄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그 후손들 모두에게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더구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인처럼 십자가 죽음을 당하셔야 한 것이다.

 

회개가 없이는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자살한 이는 스스로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둘째 사망에 참여할 자들에 대한 목록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계 21:8). 

5. 결론

자살은 생명의 소유권을 전혀 주장할 수 없는 인간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이며, 범죄임이 분명하다. 아홉가지 계명은 다 지켰으나 한 가지 못 지킨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수준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가지 못 지킨 것이 모두 지키지 못한 것과 같은 것으로 판단한다(약 2:10). 따라서 성도는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죄를 회개하며 날마다 성화의 길을 가야한다.

 

성도들이 자살에 대한 바른 성경적 견해를 분명히 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명이 존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 분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지상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기쁨으로만 일관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기쁨보다 고통의 비중이 더 커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연약한 자의 경우,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죄의 대가로 죽음이 우리 위에 군림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상반되는 것으로서 그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 주셨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은혜는 생명을 가져온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생명을 강화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명을 호위하기 위해 주어졌다. 성도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죽음의 종노릇으로 신음하던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주셨는데, 자살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밟는 죄악이다. 

성도의 자살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성도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현실의 고통과 환난을 벗어나려고 결코 시도해서는 안된다. 현실의 괴로움을 참고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믿음으로 살아내야 한다.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염원하는 성도는 자살을 생각조차 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자발적인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잠시 세상의 환난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자살이 결국은 영원한 환난과 파멸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경건한 삶이란, 죽음과 같이 괴로운 현실 속에서 장차 올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말할 것이다. 지상에서 잠시 누리는 유한한 생명을 인식함으로 천국에서의 영생에 대한 소망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성도에게 죽음은 괴로운 인생을 도피하는 방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도의 죽음은 훈련과 징계로서 우리를 합당한 성도의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도피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소유하고자 힘쓰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크고 작은 풍파로 요동하며 우리를 불안케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대한 사실은, 일단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우리를 비추어 주신다면, 우리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는 물론 온갖 근심들에서 우리가 놓임을 얻고 해방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담대히 하나님께 경건히 의탁하자. 하나님은 이러한 경건한 자에게 위로를 주신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

성도는 고통스런 삶 가운데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묵상함으로 힘을 얻게 된다. 힘들고 고통스런 세상의 삶을 거슬러, 성도의 영광스런 확신이 우리 내부에서 날마다 솟아나도록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죽어있는 영혼(soul)을 살리려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이 일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토록 어두운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는 하나의 사역을 더 추가해야 한다. 영혼(soul)을 담고 있는 그릇인 육신(body)을 죽여가는 이 세대를  바로 인도해야 하는 사역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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