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꿔보겠노라. 혈기왕성한 20대에 이런 포부 품어본 사람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세상을 바꾸겠다며 자기 이름부터 바꿨다. 충남대 선박해양공학과 4학년 박세상(25)씨. 이달 초 법원에서 개명 허가를 받아 할아버지가 지어준 ‘두병(杜炳)’ 대신 ‘세상(世翔)’으로 불리게 됐다.
학점, 토익, 어학연수, 공모전. 대학 4학년이면 누구나 준비하는 ‘스펙’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년 2월 졸업인데 아직 토익 시험은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스펙은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편입하는 수단이지 않냐, 세상을 바꿀 건데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투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7월. 박씨의 ‘세상 바꾸기’는 학교 앞에서 시작됐다. 대전 유성구 충남대 정문에서 왼쪽으로 아파트 단지를 지나 10분쯤 걸어가면 오랜 상권(商圈)이 나온다. 분식점 커피숍 맥주집 당구장이 몰려 있는 충남대의 대학로, 궁동 로데오거리. 여기부터 바꿔보기로 했다.
궁동에 주목한 것은 질투 때문이다. 2006년 입대 전 박씨가 경험 삼아 아르바이트하며 자취한 곳이 서울 홍익대 앞이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제가 전주에서 태어나 대전으로 진학했는데, 홍대 앞 분위기는 경험해보지 못한 거였어요. 거리에서 수시로 공연이 벌어지고,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곳. 지방대생이면 누구나 같은 느낌일 거예요. 부러웠죠.”
그렇다고 서울로 전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교 앞이 홍대 앞처럼 바뀌는 게 차라리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궁동 상권은 2∼3년 전부터 급속히 쇠락하고 있었다. 2007년 개통된 지하철이 비켜갔고 버스 노선도 줄어 유동인구가 감소했다. 이곳이 활기를 찾으려면 돈이 돌아야 하고, 그러려면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불러 모을 사람은 결국 대학생이다. 박씨가 생각해낸 것은 할인 쿠폰이었다.
학교 온라인 게시판에 ‘공모전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란 제목으로 취지를 알렸다. 정소영(23·경영), 김진영(25·임산공학)씨가 같이 해보자며 찾아왔다. 궁동 로데오거리에는 약 700개 업소가 있다. 대학생이 즐겨 찾을 만한 곳은 200여개. 셋은 무작정 업소마다 방문해 쿠폰 발행 계획을 설명했다. 상인들의 답변은 “스폰(후원) 받으러 왔냐?” “총학생회냐?” “돈 벌려고 그러냐?” 중 하나였다.
지난 13일 충남대에서 만난 박씨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웠다. 외모가 아니라 말투가, 말에 담긴 내용이 그랬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그의 입에서 “사업은 ‘사’람을 ‘업’고 가는 일”이란 말이 나왔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 말하라면 항상 사업가라고 했단다. 막연하게 사업은 돈 버는 거라 생각했고, 궁동 살리기도 창업 아이템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상인들을 만나면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믿음을 주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게 사업이란 걸 알았다는 얘기다.
방법을 바꿔 다시 상인들을 찾아갔다. 지난해 7, 8월 두 달간 빵집, 분식점, 치킨집, 안경점, 꽃가게 등에서 주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엔 주로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왜 장사가 안 되는지, 이 거리의 문제가 뭔지, 소비자가 모르는 어려움은 어떤 게 있는지. 두 달 만에 확보한 쿠폰 가맹점은 26곳. 쿠폰 동참 허락을 받기까지 업소 1곳당 최소 7번 이상 방문했다.
세 사람은 상인들 얘기를 듣고 이 거리에는 업소 간 경쟁만 있을 뿐 커뮤니티란 결속력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쿠폰의 콘셉트를 ‘품앗이’로 정했다. 분식점이 커피숍을 선전해주고, 커피숍이 치킨집을 홍보하는 방식이다.
형태는 즉석복권과 닮았다.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으면 쿠폰을 한 장 준다. 쿠폰의 가려진 부분을 긁어내면 ‘○○커피전문점 조각 케이크 공짜’ 등 다른 가맹점 할인 문구가 나온다. 이걸 들고 커피전문점에 가서 커피와 함께 공짜 케이크를 먹고 나면 또 쿠폰을 준다. 긁으면 나오는 건 역시 ‘△△빵집 10% 할인’ 같은 인근 업소 이벤트 안내다.
26개 가맹점과 함께 제작해 지난해 9월 11일 배포하기 시작한 쿠폰 2만장은 10월 말까지 모두 소진됐다. 이 일에 들어간 비용은 가맹점마다 3만∼4만원씩 낸 쿠폰 인쇄비가 전부다. 디자인과 홍보를 박씨 등이 직접 했다. 쿠폰의 위력은 상인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번져갔다. 11월 새로 배포할 때는 가맹점이 39개로, 쿠폰도 3만5000장으로 늘었다.
야간버스와 궁동축제
쿠폰이 호응을 얻으면서 박씨의 ‘사업’은 체계화됐다. 먼저 이름이 생겼다. ‘나는 궁동이다’란 뜻의 ‘아이엠궁(I’m 궁)’. 창업동아리로 시작해 비영리법인으로 등록했다. 3명이던 멤버도 시간이 갈수록 늘었다(지금은 15명이 활동 중이고, 대전의 각 대학 및 단체와 네트워크가 형성돼 프로젝트마다 공동 작업을 한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지난해 11월 시작한 ‘야간버스’. 궁동 로데오거리 주변은 하숙촌이었다. 2008년 학교 뒤편에 350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가 증축되면서 하숙생들이 대거 빠져나가 상권 쇠락이 가속화됐다. 기숙사에서 로데오거리까지 걸어서 20분쯤 걸린다. 아이엠궁은 기숙사 학생들이 이 거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것도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25인승 버스를 갖고 있는 차주와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6시간 운행키로 계약했다. 요금은 500원. 20분 거리를 5분이면 닿게 해주는 버스에 학생들은 환호했다. 지금은 월 5000명가량 이 버스를 이용해 월수입이 약 250만원. 기사 월급과 운영비에 충분한 돈이다. 밤에 손님이 없어 일찍 문 닫는 업소도 사라졌다.
“이벤트 섭외는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꿈으로 섭외했는데 그게 되던데요.” 박씨가 또 어른 같은 말을 했다. 상인과 소비자만 있던 공간, 궁동 로데오거리에 ‘문화’를 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무작정 교내 음악 동아리들을 찾아다녔다. 록그룹, 랩 동아리, 힙합밴드 등 줄잡아 30개 이상 된다.
너희들 1년에 몇 번이나 무대에 서냐, 무대가 별거냐, 우리가 만들자, 좋아하는 음악 하는 건데 길거리면 어떠냐. 이런 설득은 힘주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대가 필요했던 동아리들은 스스로 공연 장비를 준비하고 연습해서 궁동 거리로 나왔다. 지난해 9월부터 10여차례 거리 공연이 열렸고, 그때마다 한바탕 놀이판이 상인들의 매출로 이어졌다.
올 3월부터는 ‘궁 아르테’란 이름의 궁동축제로 확대됐다. 카이스트 목원대 한남대 등 인근 대학 학생들도 각종 공연물을 들고 와 참여했다. 미술 전공 학생들이 작품을 전시해 궁동 거리는 거대한 갤러리가 됐고 그 사이사이에서 록밴드와 풍물패, 마술 공연이 쉼 없이 이어졌다.
“사람 뇌에서 칭찬 받을 때 반응하는 부위와 돈을 받았을 때 반응하는 부위가 같대요.” 이것은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창업한다고 만든 아이엠궁이 그동안 얼마나 매출을 올렸냐고 물었을 때 박씨가 한 말이다. 쿠폰을 유통시키고 버스를 운행하고 각종 공연을 기획하며 아이엠궁이 벌어들인 돈은 없다. 대신 칭찬과 관심은 여러 곳에서 받았다.
지난해 11월 청년 기업가 정신 탐험단(GEW) 주최의 ‘2009 GEW 청년창업 아이디어 콘테스트’와 12월 유성구 주민정책제안 대회, 올 1월 대전시 ‘오만상상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궁동 살리기 프로젝트로 각각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진행 중인 한국과학창의재단 ‘대학창의발명대회’에선 이 프로젝트가 1187건 후보 아이디어 중 60건을 뽑은 본선에 진출했다. 유성구는 지난 5월 눈꽃축제에도 이들을 초청해 축제용 ‘궁 아르테’를 개최토록 했다.
‘아이엠궁’을 사회적 기업으로
학교 앞을 바꿔보자고 시작한 아이엠궁이 요즘 ‘바꾸고’ 있는 곳은 대덕연구개발특구다. 기초과학 및 특수분야 연구단지가 몇 년째 침체돼 있다는 판단에서 대전시, 유성구, 특구본부, 대덕넷(대덕특구 전문 인터넷 신문)이 최근 대덕특구활성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들은 지난달 개최한 첫 포럼에 아이엠궁을 초청했다.
아이엠궁이 진단한 특구의 문제점은 궁동 로데오거리의 1년 전과 똑같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 수많은 연구기관이 같은 공간에 있을 뿐, 시너지 효과를 내는 커뮤니티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젊은이들에게 아이디어나 들어보자고 불렀던 특구 관계자들은 아이엠궁을 특구 활성화 포럼의 상설 멤버로 포함시켰다.
이제 매월 개최되는 포럼을 통해 연구소와 연구소, 연구소와 지역주민, 연구소와 대학의 네트워킹 방법을 조언하게 됐다. 박씨는 “대전의 각 대학 수업과 연구소 업무를 연계하는 방안, 공연 같은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특구 내 소통을 활성화하는 아이디어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2학기부터는 궁동 로데오거리 한켠에 카페를 차려 문화 공간으로 직접 운영할 계획이다. 쿠폰은 휴대전화에 넣어 다니는 모바일 쿠폰으로 전환하기 위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개발 중이다. 현재 비영리법인인 아이엠궁은 사회적 기업으로 발전시키려 한다.
이렇게 해서 궁동 거리가 장차 홍대 앞처럼 바뀔지는 지켜봐야겠다. 대덕특구가 이들의 아이디어로 변모할지도 장담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 아직은 포부일 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바뀐 게 하나는 있다.
아이엠궁 멤버인 경영학과 4학년 공진욱(25)씨는 “2007년 제대 후 2년간 스펙 쌓기에 몰두하다 아이엠궁에 합류했다. 취직하려고 대기업 공모전 준비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이건 내가 주도하는 내 일이다. 난 이미 아이엠궁에 취직했다”고 말한다. 아이엠궁이 적어도 그를 바꿔놓은 건 분명하다.
대전=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