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입니다. 사해 서쪽 유대광야 끝자락에 자리잡은 천해의 요새로서 해발 450m의 낭공불락의 지형으로 알렉산더대왕(B.C 103-76년)이 남쪽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으로 요새화 하였고 그 후 혜록대왕이 B.C 43년경에 이곳을 차지하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B.C 35년에 철벽같은 호화로운 요새를 건축하였습니다. 맛사다는 길이 600m 폭 250m 크기의 정상에 넓은 평지로 사방 성벽으로 쌓고 식량창고, 물저장고, 무기고, 대중목욕탕, 수영장, 별장들 각종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맛사다 조형물로 보는 맛사다 전경
아래에서 맛사다 남서쪽을 올려본 산악지역
마사다 동복쪽 끝 요새지역으로 수문과 헤롯대왕의 여름별장이 있는 부근입니다.
동쪽 주 출입구 앞에 세워진 이스라엘국기. 멀리 사해바다가 보입니다.
남쪽 망대와 궁궐
동쪽 성벽과 사해바다. 건너편 산악지대가 옛 모압지역으로 지금은 요르단 지역입니다.
서남쪽 궁궐터입니다. 남쪽으로 향한 성문이 있었고 남쪽을 경계하던 망대도 잇었던 곳입니다.
비잔틴시대 교회 건물입니다.
현재 마사다 주 통로로 사용하는 성문으로 이전에 뱀문이라고 불리우던 동쪽을 향한 성문입니다. 앞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 동쪽 사해바다입니다
매인 - 물 저장고 입니다.
당시에 사용했던 돌 폭탄입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랬던 곳과 그들이 쌓았던 토성이 마사다 서쪽 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마군대가 주변 산을 파서 토성을 쌓았던 현장
서북쪽 경계를 담당했던 망대가 있던 곳입니다.
서쪽 성문 - 로마군대가 토성을 쌓고 들어왔던 곳입니다.
서쪽 성문에서 내려다 본 토성 - 지금도 걸어서 이곳을 오를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이 방어하며 기거했던 장소
비둘기를 사육했던 비둘기 집들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입니다. 아마 아래와 같이 앉아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님들 서재 - 목사실로 유대 랍비들이 사용했던 서재였다고 합니다.
맛사다 요새에 물을 모으는 지혜...위에서 흘러 내리는 물 한 방울도 허비하지 않고 모아 자체적으로 공급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윗 사진과 아래 현장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편 쪽 물을 모아들였던 곳이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헤롯이 지은 북쪽 화례한 궁궐 건물들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위에 자신을 위해 지은 이 건물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겠습니까?
옆에서 본 모형의 사진입니다.
당시 물이 귀한 이곳에 세워진 목용탕과 찜질방을 소개합니다.
목욕탕과 찜질방(사우나) 입구입니다.
물을 채웠던 탕입니다.
당시 화례함을 보여주는 욕실 바닥입니다. 대리석 기둥과 바닥의 모자이크와 화례함은 아직도 그때를 볼 수 있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건물을 재현해 놓은 모형입니다. 이 놓은 산에 이렇게 호화로운 사우나? 오늘의 찜질방의 원조입니다.
불을 지폈던 화구...오늘날의 보일러 설비가 있는 기계실??? 참으로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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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로마군 보복을 두려워하여, 또 그들의 노에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겁낸 마사인들은 살아서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살할 것을 선택했다. 동시대의 역사가 플라비오 쥬셋페는 살아남은 한사람의 여인이 말한 마사다의 생생한 순간을 이렇ㄱ 전하고 있다. <이렇게 최후에 또한번 아내를 애무하고, 안아주고,눈물과 함께 아이들을 안아주고, 키스하면서 적의 손에 떨어졌을 때 고통을 상기해서 죽음으로 서로를 고무했지만,결국 유일하게 사랑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마음은 일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그들의 재산을 서둘러 소각하고, 그중에서 10사람정도,다른 전원을 죽이는 역할을 뽑았다. 그리고 모두 처자를 안으면서 바닥으로 쓰러졌고, 주조할 것 없이 목을 내놓았다. 이 비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10명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살해한 후 서로 제비를 뽑아서 선택한 1사람에게 남은 9명이 목을 내밀었다. 이 역할을 다한 최후의 한 사람은 쓰러진 시체중에 누군가가 아직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자가 있는가를 확인한후, 왕궁에 불을 놓아 남은 힘을 발휘해 처자쪽에서 칼을 손잡이까지 몸에 찔려 자살하고 끝낸 것이다>
(플라비오 쥬셉페 유대 전기7권)이렇게 하여 유대 반란 최후의 바위를 함락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길을 닦아서 아직 타오르는 성내로 들어갔을 땐,그들을 기다리고 있떤 것은 960명의 유해 뿐이었다.
1963년-65년의 고고학 조사에서는 성요새의 2/3가 발굴되어, 우아한 모양을 한 건조물과 장식이 다시 발견되었다. 사실 마사다는 본래 헤롯 대왕이 B.C. 42년에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피해와서 성요새화한 관이었다. 왕은 이때에 야심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도되어 노예목민들에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장식된 궁전과 농성으로 마련된 바위는 파서 만든 거대한 저수조를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