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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목사가 되면 안되는 6가지 이유”

맑은샘77 2009. 1. 28. 18:02

“이근안, 목사가 되면 안되는 6가지 이유”
이근안 목사 안수는 한국교회의 수치, 이근안은 목사직 사퇴해야…
 
김경호 합정교회 부목사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전직 경감 이근안이 지난 10월 30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일개인의 목사 안수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된 것은 이근안이라는 인물이 그만큼 독재정권 치하의 인권유린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일 것이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교계에는 물론이고 사회에도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에 대한 교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비판적인 의견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들은 이근안의 목사 안수를 기독교 비방의 호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과연 이근안은 목사가 될 자격이 있는가? 필자는 이 글에서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한국교회의 수치임을 천명하면서 그의 목사 안수가 얼마나 부당하며 교계에 누를 끼치는 행위인지 밝히고자 한다. 

©정연우 기자

이근안의 행적과 고문의 실상

이근안은 1970년에 경찰에 입문하여 주로 대공수사 분야에서 일하며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재직기간 동안 청룡봉사상 등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간첩 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되어 있다. 순경으로 경찰생활을 시작했던 이근안이 경찰생활 15년만에 경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돌 정도로 대공수사 분야에서 맹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근안이 경관으로 재직했던 박정희ㆍ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은 정권안보 차원에서 간첩조작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간첩의 누명을 쓴 사람들이 허다했다. 이근안은 서슬퍼런 독재정권 치하에서 고문에 의한 간첩조작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22년 동안 간첩 누명을 쓰고 16년간의 옥고도 치른 후 지난 2005년 7월에 무죄선고를 받은 함주명씨는 이근안 전 경감의 고문에 못 이겨 간첩이라는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근안은 함주명씨에게 "북한의 지령을 받아 30년 동안 남파간첩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강요하며 온갖 잔인한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함주명씨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문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는데 이같은 간첩조작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이근안이었다. 이근안은 특히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열린우리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나섰던 김근태씨는 1985년 민청련 의장 시절에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이근안에게서 열흘 동안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근안이 대공수사관으로 재직하던 16년 동안 고문 피해자가 수백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만큼 이근안의 고문행각은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이근안은 특히 고문방법의 잔인함으로도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1983년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두 달 동안이나 고문을 당했던 함주명씨는 자신이 당한 고문의 끔찍함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5일쯤 잠을 일체 재우지 않고 의자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책상 모서리에 강력한 백열등을 켜놓고 그 백열등을 들여다보게 하고 졸면(일주일 이상 잠을 못 잤으니 자연히 눈이 감길 수 밖에요) 빨래 방망이로 손바닥을 내려치는가 하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칠성판'이라는 곳에 한 사람이 드러누울 수 있는 판에 손, 발과 온 몸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얼굴과 입에 수건을 대고 샤워꼭지를 트는 것입니다. 공기는 없고 물만 들어오는데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렵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고 참기 어려운 그 상황에서 양쪽 새끼발가락에는 +, - 전극을 넣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물음에 시인하면 손끝을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이근안이 하는 말이 서로 연락을 할 수 있는 무인포스트가 있어야지 지령을 받고 보고를 할 것이 아니냐며 또 고문을 하는데 이번에는 별실의 고문실로 데리고 가 역시 칠성판에 묶어놓고 수건을 입에 대고 샤워를 제 입 위 수건에다 틀어놓았습니다. 견디기 힘든 전기고문보다 더 힘든 것은 숨을 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숨을 쉬면 물만 들어오니 견딜 수가 없는 데다 밑에서는 새끼발가락에 전기 고문까지 겹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죽음 직전에서 풀어놓으면 물을 한 양동이 이상 토하고 실신상태에 있으면 더운 소금물을 가져다 강제로 먹입니다."<함주명의 재심재판 의견서 중에서>

또 다른 고문 피해자 김근태씨는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할 때는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연상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고문의 과정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케 할 정도라고 하니 김근태씨가 당한 고문이 얼마나 잔학했는지 느낄 수 있다.

이근안은 심지어 출장 고문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경찰서에는 물론이고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도 이근안에게 출장 고문을 의뢰한 바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이근안이 그만큼 고문을 전문으로 행한 경관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근안 하면 '고문기술자'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근안의 고문은 다른 고문경관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한다. 고문을 하는 사람도 인간인지라 나중에는 고문을 당한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기도 한다는데 이근안은 그런 인정은 추호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별명이 '지옥에서 온 장의사', '인간백정', '고문 대부'였다니 피의자를 얼마나 무자비하게 고문했는지 알 수 있다.

이근안의 고문행각은 1988년 12월에 고문 혐의로 수배를 받으면서 끝나게 된다. 그후 이근안은 1999년 10월에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를 할 때까지 10년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으며 법정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2007년 11월에 만기출소했다.

이근안의 고문행위는 인간으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중대한 악행에 다름 아니다. 특히 독재권력의 비호 아래 공권력을 남용한 행위이기에 그 죄질이 더욱 무겁다. 그러므로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면 이근안은 왜 목사가 되면 안되는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들고자 한다.  

▲ 10월3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한 분파에서 열린 목사 임직식이 열린 장소에 이근안씨의 동창들이 방명록을 마련했다. 이날 목사임직에서는 이근안씨의 동찰을 비롯해 지인들이 참석했다.     ©정연우 기자
첫째, 이근안은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볼 수 없다.

이근안이 비록 과거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을지라도 진정으로 회개를 했다면 그에게 돌을 던지기 어렵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있기 마련이다. 요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도 자신에게 나아오는 무리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다(눅 3:7-8).

그런데 출소 후 보여지는 이근안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디서도 회개의 열매를 발견할 수 없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를 했다면 자신에게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을 일일이 찾아가 용서를 빌었을 것이며, 고문행위의 동인(動因)이 된 공안의식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근안이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도리어 고문 피해자인 김근태씨가 이근안을 찾아와서 용서해 주었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를 했다면 목사가 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다.

이근안에 의해 고문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가정이 풍지박산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고문의 후유증은 평생 간다고 알려져 있다.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만 용서를 빈다면 이것이 과연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람에게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빌면 안된다. 피해자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비는 것은 가해자의 중요한 의무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만 용서를 빌고 피해자에게는 따로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언행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근안은 출소 후 160차례의 간증을 했는데 그는 이 간증에서 "빨갱이를 잡았을 뿐인데 정권이 바뀌니 죄인이 되어 있더라"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인터넷판 11월 8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근안은 간증집회에서 "임금이 바뀌면 충신이 역적 되고 역적이 충신 되는 수난의 역사 속에 두 시대를 사는 죄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행적을 여전히 애국행위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07/2008110701031.html : 목사된 고문기술자가 안중근 의사를 들먹인 이유는…)

김근태씨를 고문한 사실에 대해서도 "전기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있던 배터리를 썼다",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고 하는 등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내가 김근태를 심문해서 단 몇 시간만에 노동계와 학원에 침투한 양대 조직을 캐내 전원 검거했다"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이처럼 이근안은 자신의 과거행적을 애국행위라고 우기고 있다. 안중근 의사까지 들먹이면서 말이다.

"빨갱이를 잡았을 뿐인데 정권이 바뀌니 죄인이 되어 있더라"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이, 자신의 과거행적을 애국행위라고 자랑하듯이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볼 수 있는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란 과거의 죄로부터 완전히 돌이켜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는 의식의 전환도 포함된다. 바울도 한때 유대 율법에 대한 충성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죄를 지었지만 회심 후에는 율법주의를 완전히 버렸다. 그러나 이근안의 공안의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바울이 교회 박해의 동인이었던 율법주의를 버렸듯이 자신도 고문행위의 동인이었던 공안의식을 버렸어야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이근안은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깨어지고 볼품이 없는 그릇은 쓰실지언정 불결한 그릇은 쓰시지 않으신다. 이근안이 진정한 회개도 없이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기독교를 욕되게 하는 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성경이 정한 목사의 자격조건에 맞지 않다.

목사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다음과 같다.
 
  ① 책망할 것이 없음
  ② 한 아내의 남편
  ③ 절제
  ④ 근신
  ⑤ 아담
  ⑥ 나그네를 대접
  ⑦ 가르치기를 잘함
  ⑧ 술을 즐기지 아니함
  ⑨ 구타하지 아니함
  ⑩ 오직 관용함
  ⑪ 다투지 아니함
  ⑫ 돈을 사랑치 아니함
  ⑬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함
  ⑭ 새로 입교한 자는 안됨
  ⑮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함

위의 자격조건 가운데 이근안은 특히 "책망할 것이 없음", "구타하지 아니함",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함"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근안은 전기고문이라는 악행으로 불신자들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많은 책망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참하게 구타했으며, 외인들에게 지탄을 당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외인이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불신자를 가리킨다. 성경은 외인에게서 선한 증거를 얻은 자를 목사의 자격조건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함이라고 밝히고 있다(딤전 3:7).

이근안처럼 외인에게서 지탄을 받는 사람이 목사가 된다는 것은 위에 인용한 성경말씀처럼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는 것이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조롱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마귀가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성경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근안 같은 사람은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실로 한국교회의 수치이자 마귀의 올무가 아닐 수 없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로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조롱을 당할지, 앞으로 기독교를 대적하는 안티 세력이 또 얼마나 늘어날지 심히 우려된다.

▲ 10월3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한 분파에서 열린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있는 이근안씨.     ©정연우 기자
 
셋째, 소명의 진정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목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름, 즉 소명이 있어야 한다. 소명이 없는 사람은 비록 다른 모든 것을 충족시켰다고 할지라도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부르신 사람에게 일감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근안이 소명을 받았는지는 제3자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목사의 소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서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 17:24) 하는 말을 들었다. 이처럼 진정한 주의 종은 사람들에게서도 인정을 받는다.

목사의 소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 소명이 교회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을 때 비로소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스스로 목사라고 선언할 수 없다. 교회 공동체의 인정이 없이 스스로 목사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이단이요 사이비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목사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교회 공동체에서의 검증과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목사가 될 수 있다. 비록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그외 다른 자격을 모두 갖추었다 할지라도 자신을 목사로 청빙해주는 교회나 기관이 없으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이 교회법이다. 이처럼 소명은 교회 공동체의 인정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근안의 소명을 인정하는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근안의 목사 안수를 환영하는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적지 않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근안의 목사 안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예장 합동개혁이라는 일개 교단의 분별 없는 행위일 뿐이다.

이근안은 교도소 사역에만 전념할 뿐 교회 목회는 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상 이근안이 교회 목회를 한다면 어느 교회가 교회의 명예를 마다하고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그를 받아주겠는가? 장로교에서 목사가 교회의 청빙을 받으려면 당회의 결의와 제직회의 동의를 거쳐 교인들의 총회인 공동의회에서 ⅔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이근안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된 것이라면 자신의 과거행적을 철저하게 참회하고 행위와 사역의 열매를 통해 소명의 진정성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넷째, 사도 바울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르다.

혹자는 한때 교회를 박해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들며 이근안의 목사 안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근안과 바울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비약이자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한때 기독교를 박해한 바울의 행위는 유대 율법에 대한 충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도덕적인 범죄는 아니었다. 유대 율법의 관점에서는 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가두기만 했지 고문 등의 물리적인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 물리적인 폭력은 오히려 바울이 더 많이 당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고 고백했다(고후 11:24-25).

이에 비해 이근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갖가지 고문방법으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이것은 실로 도덕적 죄악이자 국법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악행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국가의 법과 도덕적인 법을 어기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울 시대에 복음전도자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었다.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위험과 고난을 당했는지 고백한 바 있다(고후 11:23-27). 그러므로 당시는 전도자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숭고한 일이었다. 전도자의 삶은 곧 순교자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목사가 된다고 해서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목회사역 또한 생명을 내어놓아야 할 만큼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목회자의 과잉 공급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도 사역할 교회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바울은 회개 후에는 충성의 대상이던 율법주의를 버렸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 예전에 그처럼 맹종하던 율법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근안은 고문의 동인이었던 공안의식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 도리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의 하나였던 이기풍 목사도 기독교를 믿기 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초대교장인 마포삼열 목사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도 한 깡패였지만 회심 후에는 그 삶과 의식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런데 이근안에게는 이같은 의식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이근안이 여전히 과거의 고문행적을 애국행위라고 주장하는 한 그는 결코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쓰시지 않기 때문이다.

▲ 10월3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한 분파에서 열린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근안씨.      ©정연우 기자
 
다섯째, 안수 과정에서 절차상의 하자가 많다.

안티들이 기독교를 비방할 때 자주 쓰는 말의 하나는 "개나 소나 목사가 된다"는 말이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안티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과거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며 세인들의 지탄을 받던 사람이 목사가 된 것도 그렇거니와 교도소에서 출소 후 2년도 채 안되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세인들에게 목사는 아무나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우리 나라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 과정은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교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목사가 되려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또는 신학원) 3년 과정(어떤 곳은 2년 과정)을 마쳐야 한다.
 
필자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는 목사가 되려면 많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내적인 자질 외에도 ① 무흠한 입교인으로 7년을 경과한 자, ② 총회직영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2년 이상의 교역 경험을 가진 자, ③ 총회 목사고시에 합격한 자 등등의 외적인 조건도 갖추어야 한다.
 
예장 통합 교단의 조건에 따르면 이근안의 경우는 ①항과 ②항에 위배된다. 이근안이 언제 입교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행위가 무흠하다고 할 수 없으며, 합동개혁 교단의 신학원을 2007년에 졸업했으므로(국민일보 인터넷판 2008년 10월 31일자 기사 참조) 졸업 후 2년 이상의 교역경험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예장 통합 교단의 신학대학원 수업연한은 3년인데 이근안이 2006년 11월에 출소해서 2007년에 졸업했다면 신학대학원 공부는 길어야 1년 남짓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근안은 교도소에서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국내의 중대형 교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국내의 중대형 교단의 목사 안수는 이처럼 허술하지 않다. 총회직영 신학대학원 졸업은 기본이고 최소 2년 이상의 교역 경험이 있어야 한다. 감리교의 경우는 3년 이상의 단독목회 경험이 있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어서 신학대학원 졸업에서 안수까지 더 많은 시일이 소요된다.
 
그런데 이근안은 신학대학원 졸업 후 2년도 안되어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이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더욱이 교도소에서 출소한 날로부터도 2년이 경과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목사 안수의 일반적인 절차에 비춰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예장 합동개혁 교단이 타교단에 비해 이처럼 목사 안수를 쉽게 허락해 준 것은 "개나 소나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안티들의 비아냥을 확인시켜 준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합동개혁 교단 역시 이근안의 목사 안수에 대한 세인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섯째, 기독교의 전도를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조선일보 인터넷판 2008년 11월 8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근안은 전도사업을 위해 신학을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근안은 전도를 위해서 목사가 된 셈인데 과연 이근안의 목사 안수가 기독교의 전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 뉴스에는 기독교에 대한 조롱과 비판적인 댓글이 무수히 달리고 있다. 특히 안티들은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이근안의 목사 안수를 기독교 비방의 호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근안의 과거행적을 빗대어 그가 목사가 된 것은 '본업'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조롱도 서슴치 않고 있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로 인해 기독교가 이처럼 조롱과 비방을 받고 있을진대 기독교의 전도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높아져서 전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
 
요즘 개신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이 늘고 있다. 이것은 통계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개신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한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는 목사의 자질에 대한 실망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안티 세력이 가톨릭교보다 개신교에 압도적으로 많이 집중된 원인은 무엇보다 목회자에게서 찾아야 한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낯뜨거운 범죄기사가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한국 개신교에 그만큼 함량 미달의 목회자가 많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목사의 자질이 기독교의 전도에 이처럼 큰 영향을 끼친다면 아무나 목사로 세워서는 안된다. 이근안은 과거에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고 과거의 고문행적을 애국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목사가 된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할 우려가 높다.
 
예수님은 실족하는 자보다 실족케 하는 사람에게 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8:7). 사도 바울은 우상의 음식을 먹는 문제를 논할 때 우상의 음식을 먹어도 상관이 없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것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고전 8:13). 이것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준다.

또 사도 바울은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고 권면했다. 이근안이 목사가 되는 것이 비록 본인의 자유라 할지라도 이것이 불신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면 차라리 되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길이다.

요즘 한국교회가 가뜩이나 전도가 안되고 교회 개척이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이근안처럼 과거의 죄악을 제대로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된다면 전도의 문을 막을 우려가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이근안은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목사직을 사퇴해야 한다

필자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근안은 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이근안의 출소 후 행적과 언행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행위는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목사의 자격에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깨어지고 볼품이 없는 그릇은 쓰실지언정 불결하고 더러운 그릇은 아무리 고급스럽고 아름다울지라도 쓰시지 않으신다. 즉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이 있어도 당신의 종으로 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 등은 모두 죄와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온전한 회개를 했기 때문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이다.

이근안은 혹 입으로는 과거의 행위를 회개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한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를 했다면 회개의 열매로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는 의식의 변화까지 포함된다. 그런데 이근안의 의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자신의 과거행적을 애국행위로 정당시하는 한 그는 여전히 과거의 죄를 참회하지 않은 고문기술자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목사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회개했다고 해서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부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름은 교회 공동체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근안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회개의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그의 목사 안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그의 목사 안수는 안티들에게 기독교를 비방할 구실을 제공하고 있어서 더욱 우려의 소리가 높다.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고문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용서를 비는 것이다. 지금도 그에게서 고문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그 후유증으로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목사가 된다면 과연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서 떳떳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근안이 진정으로 회개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로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회개하고 그 증표로 목사직을 사퇴해야 한다. 이근안이 목사가 된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할 수 없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쓰시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비춰보면 이근안은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고문기술자'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려고 목사가 된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목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소한 문제를 놓고서도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로 생각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근안이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목사가 됨으로 인해 실족하게 될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과거의 악행을 참회하지도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마음을 닫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것은 결국 전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는 한국교회의 치부를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범죄기사가 끊임없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기독교가 많은 안티세력을 양산한 것은 소명도 자격도 없는 목사들을 과잉 배출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무자격 목사의 과잉 배출은 한국교회의 분열상이 낳은 비극인 바 만일 한국교회가 수백개 교단으로 쪼개어지지 않고 가톨릭교처럼 단일 교단을 이루고 있었다면, 하다 못해 장로교라도 단일 교단을 이루고 있었다면 개나 소나 목사가 된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목사가 되는 길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다른 성품인 공평과 정의를 소홀히 한 한국교회의 가르침도 희대의 고문기술자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도 없이 목사가 되게 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근안의 목사 안수를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근안은 자신의 목사 안수가 가져올 사회적 파장과 한국교회에 끼치게 될 누를 생각한다면 목사직을 사퇴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여기 저기 간증을 한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고 참회하면서 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근안에게 있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김경호 샬롬방 신앙공동체 운영자 / 합정교회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