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주기/노인문제

“돈 때문에 말년 불행 많이 봐”

맑은샘77 2008. 6. 12. 10:24

“돈 때문에 말년 불행 많이 봐”

중앙일보 | 기사입력 2008.06.12 01:31 | 최종수정 2008.06.12 09:12

[중앙일보 강인식] 국내 대학 최초로 '기부자 만족형' 모금 프로그램을 도입한 서울대에 100억원대 거액을 내놓은 기부자가 나타났다.

11일 서울대 발전기금 관계자에 따르면 "개인 사업을 하는 이용희(70)씨가 서울 역삼동에 있는 100억원 상당의 6층 빌딩을 서울대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장학금 확충에 사용해야 한다'고 사용 목적을 명확히 했다. 이에 따라 서울대는 ▶기부금 사용 현황을 기부자에게 보고하고 ▶이씨를 명예 발전위원으로 위촉해 기부금 사용을 감독하도록 하고 ▶장례식 및 사후 관리까지 해주는 '맞춤 기부' 프로그램을 적용하기로 했다.

서울대는 4월 14일부터 기부자 뜻에 따라 기부 형태를 세분화한 '기부자 만족형'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세부사업을 제시한 뒤 기부자가 돈을 낼 항목을 고르는 것이다. 기부자의 가치와 신념에 맞는 분야에 기부금이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서울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기부자가 받을 혜택도 정확히 명시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던 '기부금 관리'와 '기부자 예우'를 체계화한 것이다. 예컨대 10억원 이상 기부하면 서울대병원에서 진료 예약과 종합건강검진을 비롯해 의전서비스까지 제공해주는 식이다. 거액 기부자에 대한 예우는 별도로 정해질 수 있다.

이씨는 "돈 때문에 말년을 불행히 보내는 부자를 많이 봤다. 자식에게 줘도 불화, 안 줘도 불화가 생기더라. 유산 문제 때문에 자식이 부모 장례식에도 안 오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에게는 기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노년에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수없이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3년 전 이미 기부를 결정했다. 그러고는 여러 대학과 병원을 돌아다니며 기부할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믿을 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이씨는 "지난 4월 '서울대에 기부하면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쓰이는 것은 물론 기부자 예우 프로그램도 체계적으로 마련돼 있다'는 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서울대에 연락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돈을 쓰고 죽을 것인가'였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지인 중에는 기부 사실을 알면 의외라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모은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씨는 "자식에게 돈을 주면 자식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돈의 귀함을 모르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기부를 결심한 이씨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가 이 원칙에 부합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직접 보고 싶었다. 기부자에 대한 예우도 좋았으면 바랐다.

서울대는 이씨를 전담하는 담당 직원을 뒀다. 발전기금 황신애 부장은 "기부 절차와 예우 프로그램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며 "형식적인 의례보다 기부자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애썼다"고 밝혔다. 서울대는 이씨에게 장례식과 사후 기일까지도 챙겨주는 장기적인 예우 프로그램을 내놨다. 이에 대해 이씨는 "자식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측이 기부자를 생각하는 진심이 느껴져 뿌듯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씨는 "나같이 돈은 있지만 마땅히 쓸 곳을 찾지 못하는 노인이 한국에 적지 않다.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뛰어난 인재가 내가 낸 돈으로 훌륭하게 크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좋은 노후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주종남(기계항공공학부 교수) 서울대 발전기금 상임이사는 "돈 있는 노년층이 보람 있게 돈을 쓸 수 있는 기부 문화가 한국에는 부족하다"며 "이씨의 기부가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안겨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