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사역/가정

어버이 날을 만든 1등 공신, 이돈희

맑은샘77 2008. 5. 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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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날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지난 4월 18일,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경로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인의 날’을 만들자고 외치던 이돈희 씨의 사연을 소개했었다.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050463) 78년 당시 서울 모대학 행정대학원을 나온 행정학 석사이자 토지평가사였던 그는 자비로 경로잔치를 여는가 하면 방송출연, 신문투고, 사회단체 및 저명인사 방문 등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노인문제를 역설했었다. 당시만 해도 노인문제에 대해 지금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터라 홀로 고군분투하던 그의 외침은 더욱 값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돈희 씨의 근황을 취재하던 중 그가 여전히 자활노인마을 건립에 인생의 마지막 꿈을 걸고 있으며 ‘노인의 날’뿐 아니라 ‘어버이 날’이 제정되는 데에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연중 기념일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것이기에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관계 부서의 실무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날’과 ‘어버이 날’이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주장이 결코 억지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어느덧 이순을 넘겨 머리가 희끗해진 이돈희 씨를 만나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았다.




노인의 날과 어버이 날을 직접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1991년 유엔에서 ‘세계노인의 날’을 만들기 23년 전, 우리나라에서 ‘노인의 날’을 만들기 29년 전에 혼자서 만들었습니다.(웃음) 꿈 많던 스물한 살 대학생 때였죠. 이후 몇 해가 더 지나 1971년 4월 8일을 노인의 날로 정하고 마포에서 제1회 노인의 날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또래의 여학생과 함께 가난한 노인 500 여분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도 나누는 자리였는데 당시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학비 40만원을 행사비로 내놨습니다. 매년 행사를 갖겠다고 다짐은 했으나 대학생 아르바이트 수입으로는 엄청난 경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밤에는 가정교사를 하고 주말에는 신문을 팔았으나 역부족이었죠. 결국 이듬해 행사는 취소되었지만 곧바로 ‘한국노인문제연구소’를 차리고 1976년 한국노인학회를 설립, 본격적으로 노인문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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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날 역시 혼자서 만드셨던 건가요?

그렇긴 한데 노인이 날이 만들어지던 과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원래 제가 만들자고 했던 건 ‘아버지 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1956년도부터 ‘어머니 날’이 있었죠. 제가 외아들이라 어릴 적부터 아주 외롭게 자랐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이 안 좋으셨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외가에 가 계셨고 아버지는 건축 일을 하셔서 늘 지방에 가 계셨기에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 가끔 집에 들어오시는 아버지로부터 크나큰 부정을 느꼈던 게 아버지 날을 만들자고 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날을 만들자고 신문 지면을 통해 투고를 하고 힘닿는 대로 광고를 냈습니다. 학생 1200 여명을 대상으로 “아버지 날을 언제로 하면 좋을까”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그 결과를 곳곳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이 합쳐져서 1972년 어버이 날이 된 것입니다.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제가 노인의 날을 만들자고 하던 당시에는 아무도 노인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저에 대한 시선 역시 곱지 않았고요. 요즘 말로 튀어보려는 사람 정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방송국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 쫓겨난 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인의 날 제정을 주장하다가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설 무렵 한국 노인학회장 자격으로 언론에 ‘대통령께 드리는 글’을 올렸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기 두 달 전의 일인데 대통령 임기 내의 업적으로 반드시 노인의 날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민정부의 마지막 해, 노인의 날이 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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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날 역시 제가 만들었던 아버지 날이 단초가 되어 모 여대에서 개최하였던 아버지 날 행사, 그리고 기존의 어머니 날이 하나로 통합해 어버이 날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날을 공인받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던 모 여대의 학보사를 쫓아다니며 기사로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비록 기사는 게재되지 않았지만 해당 학보에 아버지 날 광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3년 후 그 여대에서 아버지 날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고 각종 유력매체에서 기사로 다루게 됩니다. 후에 언론사 간부가 된 기자분들이 제가 언론에 투고 하고 광고를 하던 당시를 기억하시고는 후에 취재를 많이 오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노력을 뒤늦게 공인받은 셈이죠. 하하.



그는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에 ‘실버타운’이라는 말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동국대 상학과를 졸업한 그는 노인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마을을 건립하기 위해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부동산 전공 과정이 있던 대학원에 진학한다. 부동산을 알아야 실버타운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 토지평가사로 일하며 노인문제 해결을 병행해가던 그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각의 시선을 불식하고자 토지공사에 입사한다. 같은 주장이라도 공신력 있는 위치에서 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30여 년간 토지공사에 근무하다가 퇴임한 그는 한국노인학회장을 거쳐 현재도 토지평가사로 일하며 국민권익위원회 전문상담위원을 겸임하고 있다.



한 저명인사의 아버지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노인문제에 투신하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의 부정도 큰 영향을 미치셨다고요?

노인의 날이든 아버지 날이든 진짜 계기가 되었던 건 초등학교 재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던 저는 가족 간의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신다는 소식에 밥을 차렸습니다. 지금이야 쌀을 물로 몇 번 헹구고 바로 밥을 지으면 되지만 당시에는 쌀에 돌이 많이 섞여 있었어요. 그걸 신문지에 깔아 놓고 일일이 골라내고 나서야 밥을 짓는 겁니다. 그렇게 밥을 지어도 돌이 나와요. 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오드득’하고 돌을 씹으셨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죠. 그럴 때마다 아무 말씀 안하시고 그냥 드셨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져야 마땅한데 그냥 드시는 겁니다. 단지 그런 일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젖을 만지던 버릇에 잠결에 아버지의 젖을 만질 때도 있었어요. 만져보면 다르거든. 하하. 서로 얼마나 깜짝 놀라요. 그러면 무안하지 않게 저를 살며시 안아주시는 거예요. (감정에 복받친 듯 그는 잠시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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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그리우시겠습니다.

당시에는 6.25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서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부정의 소중함이 더욱 와 닿을 수밖에 없었죠.



어버이 날과 별도로 노인의 날을 만드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버이 날은 자식이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어버이 날이라 하면 1년에 하루만큼은 자식과 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사랑을 나누어야 할 텐데 고령의 부모들은 그렇지 못해요. 농사 지으며 같이 살던 시절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지금은 다들 바쁘잖아요. 노인들만을 위한 날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자식들과 만나기 위해 반드시 공휴일이어야 하고요. 공휴일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일요일로 다시 제정해 줄 것을 꾸준히 건의 중입니다.



경로사상이 갈수록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30년 전과 비교해서 감회가 어떠신지요.

요즘은 부모를 자식의 욕구 들어주는 사람으로 알아요. 얼마 전에는 한 대학생이 어머니를 때렸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또 노부모들이 자식, 손주 보고 싶어서 찾아가면 용돈 받으러 온 사람 취급을 해요. 사회의 기본은 가정입니다. 가정이 사회를 이루고 사회가 국가가 되지 않습니까. 나의 희생 없이 가정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제는 사랑을 베풀어 보세요.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기자에게 “나이 50만 되면 직장에서 나와야 하고 김장 서른 번 하면 누구나 시어머니가 된다”고 말했다. 모두가 노인이 된다는, 시간의 진리를 역설한 그의 일성은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어버이 날에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