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에 대한 신약신학적 성찰
--이 논문은 <박창건 교수님 은퇴 기념 논문집>에 기고한 논문으로서 주를 생략하고 본문만 이곳에 올린다. 김영봉
한국 교회에 부흥회를 통한 성령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미 한 세기 전의 일이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기도와 말씀 연구에 전념하는 방식의 사경회는 교인들의 영성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사경회는 급속하게 파급되어 한국 교회의 특별한 현상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약 100년 동안 부흥 운동은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의 한 주류를 형성해 왔다. 기도원 중심의 성령 운동도 그 성격에 있어서 부흥회식의 성령 운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부흥회식의 성령 운동과 성격을 달리하는 성령 운동들은 개신교 안에서 의혹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에 대하여 평가해 보려 한다. 이 평가는 순수히 신약성서 학자로서의 평가다. 즉, 신약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현재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한국 교회의 영성에 어떻게 공헌을 하였으며, 동시에 재고해 보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려 한다. 이 논의를 하는 데 있어서 필자는 특정한 부흥사의 신학을 문제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의 보편적인 흐름을 주목하려 한다. 따라서 그 동안 필자 자신이 경험해 온 부흥회의 일반적인 성격에 기초하여 논의를 펴 나갈 것이다. 사실, ‘부흥회’라는 하나의 단어로 한국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부흥회를 통틀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흥사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부흥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필자가 여기에서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회의 고도 성장이 밑거름이 되었던 주류 부흥운동을 가리킨다.
1.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공헌
우선,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한국 교회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다.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조명할 수도 있고, 교회 성장론의 빛에서 그 공헌을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신약성서의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 부흥 운동이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를 논할 것이다.
1)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성령론적 본질을 분명히 해 주었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가장 큰 공헌은 교회와 그리스도 신앙의 성령론적 본질을 분명히 해 주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영의 종교’였다. 예수께서는 유대교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율법주의의 멍에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책임적인 삶으로 초청하셨다.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였으며,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모국어인 아람어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수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이 땅에 충만하게 현존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면서, 눈을 떠서 영이신 하나님의 활동을 보라고 요청하셨다. 예수께 있어서 삶의 본질은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삶을 몸소 살았고, 또한 그러한 삶을 가르쳤다.
‘영의 종교’로서의 전통은 그 이후에 초대 교인들에 의해서 잘 계승되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영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에 초점을 맞추었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적은 과거의 위인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그 영적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그의 지상의 삶을 소개하였다 복음서의 이러한 성격을 가장 최근에 잘 묘사해 준 사람이 존슨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넘어서서 지금 성령 안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을 따랐다(고후 5:16). ‘예수’가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영적 현존(現存) 때문이다. 영적으로 그를 체험할 수 없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나 모세를 믿는 것이 크게 다를 이유가 없다. 바울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한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행 9:1-9)이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은 달리 말해서 그의 성령 체험이었다.
이렇듯, 신약성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과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도 역시 근본적으로 성령론적이다. 毬ご纛 영의 활동에 의해서 교회는 이루어지며, 또한 그 영의 활동 안에서 교회는 제 목적을 이루게 된다. 바울이 분명히 천명하고 있듯이,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써 제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교회를 통하여 높여지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요한복음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는 성령이어야 한다.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이든, 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삶의 중심이 성령론적이라는 점을 분명해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복음이 우리 나라에 전해질 당시, 우리 나라는 유교적 전통 안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경향으로 굳어버릴 소지가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영의 종교’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부흥 운동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영의 종교’가 초대 교회를 지나 고대 교회로 접어들면서 ‘책의 종교’, ‘교리의 종교’, ‘형식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부흥회식 성령 운동 덕분에, 베르자예프의 용어로 하면, ‘복종의 종교’가 아니라 ‘창조성의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사역을 증명해 보였다
신약성서는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적 일치’라는 말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종, 문화, 언어, 지역, 성별, 사회 계층 등의 모든 차별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수께서 천명한 바 있고(막 9:38-40//눅 9:49-50),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져 버렸음을 천명하였다(롬 10:12; 갈 3:28). 이 두 구절은 바울 자신의 혁명적 사상이라기보다는 바울이 원시 교회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됨의 이상을 그의 교회 안에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했다. 그의 편지마다 ‘하나를 이루라’(예컨대, 롬 15:7; 고전 3:21-23; 고후 13:11 등)는 요청이 빠지지 않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협력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신약성서를 보면,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능력은 성령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다’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 안에’ 혹은 ‘성령 안에’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게 되면 그 동안 인간들을 서로 구분시켰던 모든 차별들을 초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구실로 서로 차별하고 편을 나누는 이유는 우리의 안목이 좁기 때문이요 이기적인 욕심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교제를 나눔으로써 ‘볼 눈’을 뜨고 보면 그러한 차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이기심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며,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깨닫게 해 준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차별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과 형제, 자매로 연대하도록 도와 준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원리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한 성령 안에 들어가 그 성령의 새창조의 능력 안에 있게 되면, 교회는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하나됨의 능력 안에서 원시 교회는 특히 각 공동체 혹은 각 신자의 신학적, 실천적 다양성을 가능한 한 허용하였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허용하거나 구속할만한 교권 체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 정통성을 근거로 관리자의 역할을 자임하려 했지만, 그 권위를 모두가 다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원시 교회는 어느 정도의 테두리 안에서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고 할 수 있다. 정통이나 이단이니 하는 의식은 목회서신에 이르러야 비로소 뚜렷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학적 차이를 빌미로 편을 나누는 행동은 1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허용 범위가 꽤 넓었다. 2세기로 넘어가면서 이 허용 범위가 점차로 좁아지다가, 결국 ‘단일 정통’이라는 획일주의가 고대 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교회간의 분열 혹은 교파간의 분열은 이러한 획일주의적 사고가 만들어낸 열매다. ‘다른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가 수많은 교파들을 만들어냈고, 일단 하나의 교파로서 집단이 형성되면 그 집단을 지키고 세(勢)를 불리기 위해서 교리적 공격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러한 신학적, 실천적 이유로 인해 교파는 계속하여 갈라지고, 교파 간에는 형제애적 유대 의식보다는 적대감의 높은 벽을 쌓아가고 있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교파간의 분열과 교회간의 분열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같은 교파 내의 이웃 교회 교인들에게조차 형제애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교파적인 장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인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었다. 한국 교회는 대부분 일년에 한 두 차례씩 부흥회를 연다. 이런 상황에서 부흥회의 역사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같은 교파 안에서만 부흥사를 초빙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결국, 자파(自派)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까지도 타교파의 유명한 부흥사들을 초빙하여 부흥회를 여는 현상이 보편화되었고, 이렇게 됨으로써 교파간의 장벽이 많이 낮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우선 은혜 받고 보자’ 혹은 ‘우선 교회를 키우고 보자’는 실제적인 욕구가 크게 작용했지만, 여러 교파의 부흥사들이 다녀가는 사이에 다른 교파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한 정도로 해소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는 사이에, 중요한 것이 ‘교리’가 아니라 ‘영적 삶’에 있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교리를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교제하여 살아가는 데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영의 종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다만, 아직도 실천적인 연대와 일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교회들이 개교회중심적인 사고와 이기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의 문제이기보다는 실리(實利)의 문제다. 다시 말하면, 신학적으로는 원시 교회의 형제애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으나, 개체 교회의 지도자들의 소아적(小我的) 사고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러한 신학적 근거가 마련된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공의 상당한 부분은 부흥운동에 돌려져야 한다.
2.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문제점들
위와 같이 큰 공헌을 해 온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지만, 좋은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의 이목(耳目)을 집중시키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부작용들을 낳아왔고, 현재 한국 교회는 그 부작용의 여러 가지 증상들로 인하여 심하게 앓고 있다 최근에 잇따라 출판된 교회 비판서들을 그러한 부작용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제 이하에서는 신약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방식의 성령 운동이 중단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런 논의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부흥 운동이 좀 더 성서적이고 건강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성령에 대한 오해에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성령 운동의 원류(原流)요 본산(本山)으로 자처하고 있는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실제로는 성령에 대한 오해의 원천이 되어 왔다. 성령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성령론적 신앙을 회복시킨 점에서는 큰 공헌을 했으나, 정작 성령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활동하며 그 열매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를 양산(量産)해 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예수는 좋은데 성령은 싫다’거나 ‘믿고는 싶으나 성령이 무섭다’는 ‘성령기피증’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다. 무엇이 이러한 오해를 초래했는가?
1) 성령의 현존 방식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성령의 현존 방식 대한 오해에 있다. 부흥회에 참석해 보면,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마칠 때까지, 부흥사로부터 모든 참여자들이 성령의 강림을 구하면서 ‘주시옵소서’와 ‘오시옵소서’를 반복하여 갈구한다. 성령이 ‘강림’하기를 구한다는 말은 현재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사실, 부흥회에서의 기도나 설교를 보면, 이미 현존하시는 성령에 대한 인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령의 내주(內住)와 현존(現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이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신약성서적 증언을 철저히 도외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현존하고 계심을 증언한 바 있다(마 12:28//눅 11:20).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은 미래에 다가올 것이지만 그보다 앞서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눅 17:21).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 오시도록 간구하라고 요청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을 자각하고 그 영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도록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 승인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을 향해서 무엇을 요청하는 것이기보다는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의 영에 눈을 뜨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말씀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멀리 계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주었다, 뺏었다 할 수 없다. ‘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나 헬라어 ‘프뉴마’는 모두 ‘바람’ 혹은 ‘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령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요, 손에 넣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요 3:8). 따라서 성령의 현존을 깨닫고 그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구함’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영적 노력에 응답하여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 편에서의 부단한 노력(至誠不息)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합하여 구원의 사건은 실현된다. 위에서 인용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에 눈을 뜨고 그와의 교제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구하라는 뜻이지, ‘여기에 없는’ 성령을 보내 달라고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기에 ‘구하는 것’을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세 동사를 합하여 생각해 보면, 구하는 대상은 여기에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지만 아무나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의 현존에 대한 증언은 신약성서의 모든 문서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이다. 네 개의 복음서들은 모두 부활하신 주님 혹은 성령의 현존을 강조하면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거룩한 영과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도록 요청한다. 성령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는 누가문서과 요한복음인데, 이 두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여 그분의 역할을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눅 24:49; 요 14:16-17). 따라서 누가문서와 요한복음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면, 적어도 예수의 ‘떠남’과 함께 ‘임한’ 성령은 이 세상 끝까지 우리 중에 현존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혜사를 보내 주시리라’(요 14:16)는 말씀이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라’(눅 24:49)는 말씀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할 사건이 아니라 구원사적으로 전환적인 의미를 가지는 유일회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은 그런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 강림의 이야기를 전한다(행 2:1-4; 10:44-48). 이 사건들은 성령의 영원한 현존과 내주가 시작되는 사건이다. 그 이후에도 ‘강림’은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오시는 성령’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이미 계시는 성령’을 찾아야 한다.
성령의 현존에 대해서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명백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바울이 가장 자주 사용했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성령 안에’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이나 ‘그리스도의 영’은 같은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저 바깥 세계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부재하는 성령을 임재하도록 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성령을 자각하고 그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문제는 외면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가 되고, 그 새로운 존재에게는 모든 사물이 새로와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 새로운 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새로운 세계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계다. 하나님 없는 물질만의 세상을 경험하던 사람이 눈을 뜨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상을 보게 되니, ‘보라 새로운 세상이다!’라는 감탄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신약성서는 성령이 이미 이 세상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유물론적인 시각에 물들어 있는 마음을 정화하고 집중하여 영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목도하는 일이다. 이미 우리 중에 계신 성령을 인식하고 그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부흥회식의 성령 운동은 성령께서 이미 우리 중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성령의 강림만을 목청 높여 갈구하게 만든다. 그 결과, 어떤 뚜렷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의 현존을 망각한 채 평생을 ‘실패한 신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로써 그들이 이 세상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치명적인 왜곡이다. 기독교 신앙의 주된 목적은 우리만의 ‘게토’(ghetto)를 만들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2) 성령을 전달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또 다른 문제점은 부흥사들이 자주 스스로를 성령의 ‘전달자’ 혹은 ‘매개자’로 자처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부흥사의 안수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때에 따라서는 예수나 사도들에게 당시의 무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부흥사와 스치기만 해도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서 열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부흥사의 권위를 정도 이상으로 높여줌으로써 타락의 빌미가 될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자립적인 신앙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
개신교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떠한 중개자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신약성서의 근간이 되는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히브리서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힘 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4:14; 8:6; 9:15; 10:19-25). 누구든지 중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은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그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단지 성령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는 눈을 뜨도록 돕는 일뿐이다. 누군가가 성령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들(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안수를 할 때 성령이 임하였다는 사도행전의 보도(8:14-17; 19:1-7)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어떤 개인의 안수로 인하여 성령이 중개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문제는 이 보도를 읽는 사람의 선입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성령이 중개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보도를 읽을 때 분명한 증거를 찾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성령을 중개했다고 보는 것은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이 이야기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베소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간절히 기도해 줌으로써 영적 눈을 뜨도록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눈을 뜨자 마자 성령과의 깊은 교제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과 함께, 사도행전 안에서만 파악해 보더라도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2:1-4)에 혹은 말씀을 듣는 중(10:44-48)에 성령의 충만함에 잠기는 일도 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령의 현존을 자각하고 그와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각자가 할 일이지, 누가 중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부흥사들이 마치 성령의 중개자 혹은 전달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루 빨리 수정되어야 한다. 안수를 받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 눈을 뜨고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왔던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의 안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한 전심전력의 중보기도였다. 따라서 ‘내가 성령을 전달할 수 있다’는 의식을 버리고,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을 깨워 일으키겠다는 정신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3) 성령의 현존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부흥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광적으로 간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흥회에서 간증되는 모든 체험 이야기들은 천편일률적으로 간절한 간구를 강조한다. 기도와 찬송으로 열심의 정도를 보일 때,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으로 응답하신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집회는 항상 감정적인 흥분 상태에서 진행된다. 때로는 감정적인 흥분 상태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바람직하지 못한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것이 열심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그것이 성령을 받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기록되어 있는 성령 체험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그런 열광적인 간구가 필수적인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 체험의 이야기에 보면 그들이 열광적으로 기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2:1-4). 물론, 1장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14절)고 되어 있으므로, 열광적인 기도를 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이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도를 지속하였다”가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됨과 지속적인 기도이지, 감정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다 Ibid., p.62.
.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백 이십명 정도의 초기 추종자들이 함께 모여서 지속적으로 기도했을 때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을 때, 주의 영을 만났다(9:1-9). 사울의 다메섹 체험을 해석하는 입장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바울의 성령 체험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에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이 중심이었다. 반면,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중에 성령의 현존에 눈을 떴다. 조용히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에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라고 말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회개’를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해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가리킨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던 태도를 버리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개방하는 것이 ‘회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회개의 행동과 결합되어 있다. 회개를 일회적인 행동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이러한 전환 자체가 바로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행동이다. 그렇게 할 경우에 (심사에 합격하면)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이라고 단언하고 있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됨의 본질이 성령과의 교제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말이다. 바울의 믿음에 따르면, 한 사람이 성령의 현존에 들어갔는가를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질문은 ‘그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가?’이다.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면 성령과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언명(言明)은 분명히 바울 자신의 경험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를 만났고, 그 사건을 통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멀었던 눈이 떠지고 둔했던 마음이 녹여지고 몰랐던 진리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행동을 주문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려는 노력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노력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살아있는 믿음이 발생되며, 그러한 믿음의 생명성이 바로 성령의 현존의 증거가 된다.
따라서 열광주의 일변도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재고되어야 한다.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그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 전체가 감싸이는 성령의 충만은 꼭 감정적인 흥분 상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적인 흥분 상태는 참된 성령 체험에 이르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감정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을 속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추구를 지속해야 할 사람이 감정적인 어떤 느낌 때문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정지한다면, 그는 진정한 성령 체험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도록 눈을 열어주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성령의 사람이 되려면 감정적인 열광에 빠지기보다는, 항상 성령의 현존을 목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대감을 가지고 일상의 작은 것들까지 놓치지 않는 삶의 스타일을 익혀야 한다. 그럴 때 신자들은 진정으로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4) 성령의 체험을 감각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가는 방법을 오해함으로써 한국 교인들은 성령 체험의 성격을 오해하게 되었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에서는 성령의 체험을 다분히 감각적으로 이해한다. 부흥사들이 간증하는 성령 체험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감각적인 느낌을 동반한다. 이들에 의하면, 체험자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성령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한국 교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으며, 성령의 현존 가운데 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을 신앙적인 패배주의에 빠지게 함으로써, 건강한 영성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성령의 현존을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감각적 느낌은 실제로는 오감(五感)을 통한 느낌이 아니다. 예컨대,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때 감미로운 향기를 맡는 사람이 있다. 이럴 경우,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실제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육신의 코’로 그 향기를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현상으로서 그 향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곳에 있는 다른 사람은 그 향기를 맡지 못한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뜨거움을 느꼈다고 할 경우, 그 사람에게 체온계를 대면 정상 체온으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육신적인 감각으로 뜨거움을 느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상적으로 보더라도 성령의 현존 시에 일어날 수 있는 감각적인 느낌은 오감을 통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면서 감각적인 느낌을 기대하고, 그런 느낌이 있을 때에만 성령의 충만을 인정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
신약성서의 빛에서 보면,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경우, 그 사실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위험하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성령이 임할 때 여러 가지의 현상들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2:4; 10:46; 19:6). 하지만 오순절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성령의 현존 안에 있으면 반드시 방언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간 경험을 묘사하면서도 방언이나 다른 현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도 있다(8:18). 오늘날 부흥회식 성령운동에서 자주 거론하는 것처럼, 성령의 현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감각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다는 사상은 신약성서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성령의 현존 안에 들면 필연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러한 변화를 가리켜 바울은 ‘성령의 열매’(갈 5:22)라는 말과 ‘성령의 은사’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며, 그 변화를 주목하면 자신이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는 말을 ‘성령의 은사’라는 말과 정밀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열매’의 종류와 ‘은사’의 종류를 비교해보면 겹치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양자를 구분하려 한다면, ‘열매’는 성령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거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인격적인 변화에 좀 더 강조점을 두고 있고, ‘은사’는 성령의 현존 안에서 주어지는 어떤 능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성종현 교수는 신약성서에서 총 27가지의 은사를 찾아낸 적이 있는데, 이것이 성령의 은사의 전부가 아니다. 성서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은사를 총망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한 일부만을 기록한 것이다.
은사와 관계하여, 한국 교회는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감각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어떤 능력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비범한 어떤 행동을 해야만 그것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성령의 은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은사의 종류를 보면, 우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던 능력을 제공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을 더 고양(高揚)시켜주는 경우도 있다. 성종현 교수가 분류한 은사를 중심으로 이 둘을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 가르침, 지식, 믿음, 사랑, 찬양, 구제, 섬김, 목회직, 권면, 긍휼, 도움, 전도, 지도력, 독신생활
2.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던 능력이 주어지는 경우: 예언, 지혜, 방언찬양, 영분별, 능력행함, 신유, 방언, 방언통역, 계시, 귀신추방, 환상을 봄, 꿈 해석, 사도직
이렇게 보면, 신약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은사들 가운데 절반은 우리의 일상적인 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은사이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에게 없는 능력이 주어지는 경우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후자의 은사들만을 강조하고 전자의 은사들을 무시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경향이다. 따라서 이 경향은 어떤 특정의 문화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경향이 아니라, 감각주의적이고 현상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어느 교회든지 은사 현상이 일어날 경우, 후자의 은사들을 더 주목하고 그런 은사들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성령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던 한국 교회도 그것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서 구분한 두 종류의 은사들을 비교해 보면, 한 사람의 신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혹은 한 공동체가 교회의 본질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은사는 전자의 은사임을 발견하게 된다. 후자의 은사들은 어떤 특별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능력들이다. 그러한 은사들은 더 분명하게 성령의 현존을 계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삶을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이끄는 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신유의 은사는 그 공동체 내에 혹은 은사를 받은 그 사람의 주변에 질병에 걸린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 혹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가르침의 은사는 한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필요한 은사다. 가르침의 은사는 본래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덧입혀짐으로써 그 가르침을 통하여 더욱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따라서 성령 운동의 지도자들은 감각적이고 일회적이고 비범한 은사에 집중하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면서, 좀 더 일상적이고 지속적이고 평범한 은사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말은 비범한 은사에 대하여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런 은사에만 집중하게 되면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은사들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버린다는 점을 기억하고,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성령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은사들은 감각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변화, 인격적인 변화, 능력의 변화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가 성령의 현존 안에 있다는 사실은 어떤 느낌이나 감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또한 우리가 성령의 현존 안에 잠김으로써 얻은 능력이 무엇인지를 파악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때, 감각적인 느낌이 동반될 수는 있으나, 그런 감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진다. 그것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가장 안전한 지표가 될 것이다.
5) 성령의 사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오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오해로 연결된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 충만’은 곧 ‘능력 충만’과 동의어로 통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고, 모든 실패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다. 성령 충만하면 못할 일이 없다. 성령 충만은 이 세상에서 성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인 것처럼 생각한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모든 실패와 질병과 재앙은 죄의 결과라고 믿었는데, 한국의 신자들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흥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성령주의적인 분위기 안에 있는 교인들은 다분히 승리주의적인 열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이 그러한 믿음 안에서 비교적 활력 있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일지 모르나, 그것이 그들의 사회 생활 속에서 성공주의적으로 행동하게 함으로써, 성령 충만한 사람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성공주의적 인식은 정말 뿌리깊다. 부흥사들의 성공담을 들어 보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으면 윤리와 법과 질서를 초월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불법적으로) 군대 징집을 면할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불법 수입품을 몰래 들여올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관리들을 속여 넘길 수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공정 경쟁의 룰을 깨고 이길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힘 입으면, 공부하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고, 노력하지 않고도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고, 더 형편없는 제품을 가지고서도 경쟁 업체를 이길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윤리나 질서나 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령은 어떤 경우에서도 믿는 자의 손을 들어준다. 믿는 사람에게 명백한 과실이 있어도 성령이 역사하면 상대방의 과실로 처리되어 오히려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놀랍겠지만, 이상의 예들은 그 동안 필자가 부흥회를 통하여 들었던 예화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필자가 상상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류의 간증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 충만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혹자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어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보면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파수꾼들 모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성령의 승리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과 비슷한 16장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전혀 다르다. 바울과 실라는, 지진이 나서 그들을 매어 놓고 있던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감옥 안에 머물러 있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을 하려던 간수에게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16:28)고 말하면서 위로하고 그를 회심시켰다. 그러므로 12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초법적인 성령의 역할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악한 법에 순종하지 않지만, 그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은 당당하게 짊어 진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예수께서는 당시의 잘못된 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로 인하여 십자가 처형이 결정되자 그대로 받아 안았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보면, 성령은 언제나 승리하게 만들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예가 예수님 자신이다. 그분은 성령의 충만한 현존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이적을 행하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해치려는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무력하게 그들의 폭행을 그대로 받아 안았다. 왜냐하면 성령은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그 뜻을 따르게 해 주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광야의 시험 이야기의 초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진 예수는 그 능력을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유혹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은 나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폭행을 그대로 끌어 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갔다.
사도행전에도 주목할만한 이야기가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작별 인사를 한다. 이 때 바울은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20:22)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역이다. 원문을 제대로 번역하면,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가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성령께서 그 뜻을 이루도록 몰아세우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니”(23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환난과 결박을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미래를 보여 주시면서도 그 길로 가도록 등을 떠밀고 있다는 뜻이다. 그 후에 가이사랴에 머물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아가보가 성령의 계시를 받아서 바울이 예루살렘 가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21:11). 그러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고 대답한다. 성령께서는 성령 충만한 사들에게 미래의 일을 암시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은 다 고난을 받아도 너희는 피하라’고 일러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받아 안으라고 주시는 계시일 수도 있음을 여기서 확인한다.
바울의 편지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늘 승리한다는 사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자주 인용되는 빌립보서 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도 그 편지의 앞뒤 맥락에서 보면 승리주의적인 사상을 피력한 것이 아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곤궁한 상황에서나 풍요한 상황에서나 흔들림 없이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한다(12절). 어떻게 그런 비결을 배웠는가?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 안에서 그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늘 풍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비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먹고 살 것이 풍족한 상황에서도 타락하거나 안일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승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와 다르다. 바울은 “이 모든 일(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의 위협)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선언하였다. 이 이김은 성령의 능력으로 적대자들을 섬멸하는 이김이 아니다. 그 이후에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놓지 않고, 죽음을 무릎쓰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승리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했을 때에도 같은 의미다. 이 말씀을 하고 난 직후에 예수님은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한 이김은 적대자들을 무찌르고 목숨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김’은 목숨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는 것이었다. 바울의 편지에서나 요한복음에서나,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환난과 고통을 피해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온갖 박해와 고통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인물됨에 대하여 한국 교회는 매우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듯이(박경미, 최영실), 성령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의 영’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따라서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가 그로 인하여 충만해진다는 말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며, 참된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은 그 진리를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살아가도록 능력을 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진리를 산다는 것은 칭찬받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불의가 편만한 세상이므로, 순수한 진리에 접근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거부하고 박해하고 제거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반대로 진리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 놓는다. 예수, 바울, 그리고 요한은 바로 이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광신적인 교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리의 사람, 사랑의 사람, 창조성의 사람,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참 모습을 보게 해 주는 거울이 되는 사람이요, 세상의 불의함을 비추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 안으로 녹아들어가 세상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죄에 물든 세상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제거하려 하지만, 볼 눈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도한다.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이런 사람을 길러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성령 운동이 가야 할 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따라 재조정 해야 한다.
3.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한국 교회에 공헌한 점과 문제점들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지적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성령론적인 맥락에서만 고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지적하지 않았다.
필자는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그 동안 진실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따라서 앞으로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필자 자신도 부흥회식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아무리 부흥회의 해악(害惡)을 지적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한국 교회의 체질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부흥 운동은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동안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기존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을 바르게 잡아가는 것이다. 부흥회를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과 개체 교회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모두 기존의 부흥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수정해 나가는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영성을 건강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영성은 현세적이고 즉물적이며 소유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탈역사적이며 열광적이다. 이렇게 성격지어진 가장 큰 영향은 바로 부흥회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지난 몇 세대 동안의 부흥 운동의 결과로 이러한 열매들이 맺어졌다면, 아무리 부흥회 옹호론자라 하더라도 문제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영성, 특히 성령의 열매로써 맺어지는 영성은 위에서 말한 것과 정반대다. 성서적 영성, 성령 충만의 영성은 현세적이고 즉물적인 관심을 초월하게 만들며, 소유보다는 존재에 더 관심을 두고, 육체적인 감각에 속지 않고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게 되고, 자기를 떠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살게 되며, 역사적 책임을 더 적극적으로 떠맡고, 갈수록 더 조용히 그리고 신중히 살아가는 영성이다.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앞으로 이러한 영성으로 믿는 자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반성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 지금의 실추된 교회의 권위가 서서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은 바로 이러한 반성과 변혁을 위한 몇 가지의 지침일뿐이다.
--이 논문은 <박창건 교수님 은퇴 기념 논문집>에 기고한 논문으로서 주를 생략하고 본문만 이곳에 올린다. 김영봉
한국 교회에 부흥회를 통한 성령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미 한 세기 전의 일이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모여서 기도와 말씀 연구에 전념하는 방식의 사경회는 교인들의 영성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사경회는 급속하게 파급되어 한국 교회의 특별한 현상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약 100년 동안 부흥 운동은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의 한 주류를 형성해 왔다. 기도원 중심의 성령 운동도 그 성격에 있어서 부흥회식의 성령 운동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부흥회식의 성령 운동과 성격을 달리하는 성령 운동들은 개신교 안에서 의혹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에 대하여 평가해 보려 한다. 이 평가는 순수히 신약성서 학자로서의 평가다. 즉, 신약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현재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한국 교회의 영성에 어떻게 공헌을 하였으며, 동시에 재고해 보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려 한다. 이 논의를 하는 데 있어서 필자는 특정한 부흥사의 신학을 문제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의 보편적인 흐름을 주목하려 한다. 따라서 그 동안 필자 자신이 경험해 온 부흥회의 일반적인 성격에 기초하여 논의를 펴 나갈 것이다. 사실, ‘부흥회’라는 하나의 단어로 한국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부흥회를 통틀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흥사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의 부흥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필자가 여기에서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회의 고도 성장이 밑거름이 되었던 주류 부흥운동을 가리킨다.
1.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공헌
우선,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한국 교회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다.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조명할 수도 있고, 교회 성장론의 빛에서 그 공헌을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신약성서의 성령론적 관점에서 이 부흥 운동이 어떤 공헌을 하였는지를 논할 것이다.
1)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성령론적 본질을 분명히 해 주었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가장 큰 공헌은 교회와 그리스도 신앙의 성령론적 본질을 분명히 해 주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영의 종교’였다. 예수께서는 유대교로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율법주의의 멍에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책임적인 삶으로 초청하셨다.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였으며,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모국어인 아람어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수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이 땅에 충만하게 현존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면서, 눈을 떠서 영이신 하나님의 활동을 보라고 요청하셨다. 예수께 있어서 삶의 본질은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삶을 몸소 살았고, 또한 그러한 삶을 가르쳤다.
‘영의 종교’로서의 전통은 그 이후에 초대 교인들에 의해서 잘 계승되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영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에 초점을 맞추었다. 복음서 저자들의 목적은 과거의 위인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그 영적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그의 지상의 삶을 소개하였다 복음서의 이러한 성격을 가장 최근에 잘 묘사해 준 사람이 존슨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넘어서서 지금 성령 안에서 현존하시는 주님을 따랐다(고후 5:16). ‘예수’가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영적 현존(現存) 때문이다. 영적으로 그를 체험할 수 없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나 모세를 믿는 것이 크게 다를 이유가 없다. 바울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한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행 9:1-9)이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은 달리 말해서 그의 성령 체험이었다.
이렇듯, 신약성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과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도 역시 근본적으로 성령론적이다. 毬ご纛 영의 활동에 의해서 교회는 이루어지며, 또한 그 영의 활동 안에서 교회는 제 목적을 이루게 된다. 바울이 분명히 천명하고 있듯이,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써 제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교회를 통하여 높여지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요한복음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는 성령이어야 한다.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이든, 그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삶의 중심이 성령론적이라는 점을 분명해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복음이 우리 나라에 전해질 당시, 우리 나라는 유교적 전통 안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경향으로 굳어버릴 소지가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영의 종교’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부흥 운동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영의 종교’가 초대 교회를 지나 고대 교회로 접어들면서 ‘책의 종교’, ‘교리의 종교’, ‘형식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부흥회식 성령 운동 덕분에, 베르자예프의 용어로 하면, ‘복종의 종교’가 아니라 ‘창조성의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사역을 증명해 보였다
신약성서는 교회의 하나됨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적 일치’라는 말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종, 문화, 언어, 지역, 성별, 사회 계층 등의 모든 차별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수께서 천명한 바 있고(막 9:38-40//눅 9:49-50),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이 사라져 버렸음을 천명하였다(롬 10:12; 갈 3:28). 이 두 구절은 바울 자신의 혁명적 사상이라기보다는 바울이 원시 교회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됨의 이상을 그의 교회 안에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했다. 그의 편지마다 ‘하나를 이루라’(예컨대, 롬 15:7; 고전 3:21-23; 고후 13:11 등)는 요청이 빠지지 않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협력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신약성서를 보면, 교회의 하나됨을 이루는 능력은 성령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다’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 안에’ 혹은 ‘성령 안에’라는 뜻이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게 되면 그 동안 인간들을 서로 구분시켰던 모든 차별들을 초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구실로 서로 차별하고 편을 나누는 이유는 우리의 안목이 좁기 때문이요 이기적인 욕심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교제를 나눔으로써 ‘볼 눈’을 뜨고 보면 그러한 차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이기심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며,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깨닫게 해 준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차별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과 형제, 자매로 연대하도록 도와 준다. 에베소서는 이러한 원리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한 성령 안에 들어가 그 성령의 새창조의 능력 안에 있게 되면, 교회는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하나됨의 능력 안에서 원시 교회는 특히 각 공동체 혹은 각 신자의 신학적, 실천적 다양성을 가능한 한 허용하였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허용하거나 구속할만한 교권 체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 정통성을 근거로 관리자의 역할을 자임하려 했지만, 그 권위를 모두가 다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원시 교회는 어느 정도의 테두리 안에서 ‘각자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고 할 수 있다. 정통이나 이단이니 하는 의식은 목회서신에 이르러야 비로소 뚜렷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학적 차이를 빌미로 편을 나누는 행동은 1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허용 범위가 꽤 넓었다. 2세기로 넘어가면서 이 허용 범위가 점차로 좁아지다가, 결국 ‘단일 정통’이라는 획일주의가 고대 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교회간의 분열 혹은 교파간의 분열은 이러한 획일주의적 사고가 만들어낸 열매다. ‘다른 것은 모두 틀린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가 수많은 교파들을 만들어냈고, 일단 하나의 교파로서 집단이 형성되면 그 집단을 지키고 세(勢)를 불리기 위해서 교리적 공격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러한 신학적, 실천적 이유로 인해 교파는 계속하여 갈라지고, 교파 간에는 형제애적 유대 의식보다는 적대감의 높은 벽을 쌓아가고 있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교파간의 분열과 교회간의 분열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같은 교파 내의 이웃 교회 교인들에게조차 형제애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교파적인 장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인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었다. 한국 교회는 대부분 일년에 한 두 차례씩 부흥회를 연다. 이런 상황에서 부흥회의 역사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같은 교파 안에서만 부흥사를 초빙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결국, 자파(自派)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목회자들까지도 타교파의 유명한 부흥사들을 초빙하여 부흥회를 여는 현상이 보편화되었고, 이렇게 됨으로써 교파간의 장벽이 많이 낮아지게 되었다.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우선 은혜 받고 보자’ 혹은 ‘우선 교회를 키우고 보자’는 실제적인 욕구가 크게 작용했지만, 여러 교파의 부흥사들이 다녀가는 사이에 다른 교파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한 정도로 해소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는 사이에, 중요한 것이 ‘교리’가 아니라 ‘영적 삶’에 있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교리를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교제하여 살아가는 데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영의 종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능력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다만, 아직도 실천적인 연대와 일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교회들이 개교회중심적인 사고와 이기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의 문제이기보다는 실리(實利)의 문제다. 다시 말하면, 신학적으로는 원시 교회의 형제애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으나, 개체 교회의 지도자들의 소아적(小我的) 사고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러한 신학적 근거가 마련된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공의 상당한 부분은 부흥운동에 돌려져야 한다.
2.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문제점들
위와 같이 큰 공헌을 해 온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지만, 좋은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의 이목(耳目)을 집중시키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부작용들을 낳아왔고, 현재 한국 교회는 그 부작용의 여러 가지 증상들로 인하여 심하게 앓고 있다 최근에 잇따라 출판된 교회 비판서들을 그러한 부작용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제 이하에서는 신약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방식의 성령 운동이 중단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런 논의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부흥 운동이 좀 더 성서적이고 건강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성령에 대한 오해에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성령 운동의 원류(原流)요 본산(本山)으로 자처하고 있는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실제로는 성령에 대한 오해의 원천이 되어 왔다. 성령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성령론적 신앙을 회복시킨 점에서는 큰 공헌을 했으나, 정작 성령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활동하며 그 열매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를 양산(量産)해 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예수는 좋은데 성령은 싫다’거나 ‘믿고는 싶으나 성령이 무섭다’는 ‘성령기피증’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다. 무엇이 이러한 오해를 초래했는가?
1) 성령의 현존 방식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성령의 현존 방식 대한 오해에 있다. 부흥회에 참석해 보면,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마칠 때까지, 부흥사로부터 모든 참여자들이 성령의 강림을 구하면서 ‘주시옵소서’와 ‘오시옵소서’를 반복하여 갈구한다. 성령이 ‘강림’하기를 구한다는 말은 현재 우리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사실, 부흥회에서의 기도나 설교를 보면, 이미 현존하시는 성령에 대한 인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령의 내주(內住)와 현존(現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이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신약성서적 증언을 철저히 도외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현존하고 계심을 증언한 바 있다(마 12:28//눅 11:20).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은 미래에 다가올 것이지만 그보다 앞서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눅 17:21).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 오시도록 간구하라고 요청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을 자각하고 그 영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도록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 승인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을 향해서 무엇을 요청하는 것이기보다는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의 영에 눈을 뜨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말씀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멀리 계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주었다, 뺏었다 할 수 없다. ‘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나 헬라어 ‘프뉴마’는 모두 ‘바람’ 혹은 ‘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령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요, 손에 넣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요 3:8). 따라서 성령의 현존을 깨닫고 그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구함’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영적 노력에 응답하여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 편에서의 부단한 노력(至誠不息)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합하여 구원의 사건은 실현된다. 위에서 인용한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에 눈을 뜨고 그와의 교제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구하라는 뜻이지, ‘여기에 없는’ 성령을 보내 달라고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기에 ‘구하는 것’을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세 동사를 합하여 생각해 보면, 구하는 대상은 여기에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지만 아무나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의 현존에 대한 증언은 신약성서의 모든 문서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이다. 네 개의 복음서들은 모두 부활하신 주님 혹은 성령의 현존을 강조하면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거룩한 영과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도록 요청한다. 성령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복음서는 누가문서과 요한복음인데, 이 두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여 그분의 역할을 지속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눅 24:49; 요 14:16-17). 따라서 누가문서와 요한복음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면, 적어도 예수의 ‘떠남’과 함께 ‘임한’ 성령은 이 세상 끝까지 우리 중에 현존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혜사를 보내 주시리라’(요 14:16)는 말씀이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라’(눅 24:49)는 말씀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할 사건이 아니라 구원사적으로 전환적인 의미를 가지는 유일회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사도행전은 그런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 강림의 이야기를 전한다(행 2:1-4; 10:44-48). 이 사건들은 성령의 영원한 현존과 내주가 시작되는 사건이다. 그 이후에도 ‘강림’은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오시는 성령’을 기대해서는 안 되고, ‘이미 계시는 성령’을 찾아야 한다.
성령의 현존에 대해서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명백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바울이 가장 자주 사용했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성령 안에’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이나 ‘그리스도의 영’은 같은 말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저 바깥 세계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부재하는 성령을 임재하도록 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성령을 자각하고 그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문제는 외면적인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가 되고, 그 새로운 존재에게는 모든 사물이 새로와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 새로운 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새로운 세계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계다. 하나님 없는 물질만의 세상을 경험하던 사람이 눈을 뜨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세상을 보게 되니, ‘보라 새로운 세상이다!’라는 감탄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신약성서는 성령이 이미 이 세상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유물론적인 시각에 물들어 있는 마음을 정화하고 집중하여 영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목도하는 일이다. 이미 우리 중에 계신 성령을 인식하고 그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부흥회식의 성령 운동은 성령께서 이미 우리 중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성령의 강림만을 목청 높여 갈구하게 만든다. 그 결과, 어떤 뚜렷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의 현존을 망각한 채 평생을 ‘실패한 신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로써 그들이 이 세상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치명적인 왜곡이다. 기독교 신앙의 주된 목적은 우리만의 ‘게토’(ghetto)를 만들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2) 성령을 전달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의 또 다른 문제점은 부흥사들이 자주 스스로를 성령의 ‘전달자’ 혹은 ‘매개자’로 자처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부흥사의 안수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때에 따라서는 예수나 사도들에게 당시의 무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부흥사와 스치기만 해도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서 열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부흥사의 권위를 정도 이상으로 높여줌으로써 타락의 빌미가 될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자립적인 신앙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
개신교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떠한 중개자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신약성서의 근간이 되는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히브리서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힘 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4:14; 8:6; 9:15; 10:19-25). 누구든지 중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은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 자신을 그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단지 성령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는 눈을 뜨도록 돕는 일뿐이다. 누군가가 성령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들(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안수를 할 때 성령이 임하였다는 사도행전의 보도(8:14-17; 19:1-7)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어떤 개인의 안수로 인하여 성령이 중개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문제는 이 보도를 읽는 사람의 선입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성령이 중개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보도를 읽을 때 분명한 증거를 찾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성령을 중개했다고 보는 것은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이 이야기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베소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간절히 기도해 줌으로써 영적 눈을 뜨도록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눈을 뜨자 마자 성령과의 깊은 교제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과 함께, 사도행전 안에서만 파악해 보더라도 사람들이 기도하는 중(2:1-4)에 혹은 말씀을 듣는 중(10:44-48)에 성령의 충만함에 잠기는 일도 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령의 현존을 자각하고 그와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각자가 할 일이지, 누가 중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부흥사들이 마치 성령의 중개자 혹은 전달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루 빨리 수정되어야 한다. 안수를 받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 눈을 뜨고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왔던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의 안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한 전심전력의 중보기도였다. 따라서 ‘내가 성령을 전달할 수 있다’는 의식을 버리고,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을 깨워 일으키겠다는 정신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3) 성령의 현존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부흥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인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광적으로 간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흥회에서 간증되는 모든 체험 이야기들은 천편일률적으로 간절한 간구를 강조한다. 기도와 찬송으로 열심의 정도를 보일 때,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으로 응답하신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집회는 항상 감정적인 흥분 상태에서 진행된다. 때로는 감정적인 흥분 상태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바람직하지 못한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것이 열심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그것이 성령을 받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기록되어 있는 성령 체험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그런 열광적인 간구가 필수적인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 체험의 이야기에 보면 그들이 열광적으로 기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2:1-4). 물론, 1장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14절)고 되어 있으므로, 열광적인 기도를 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이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도를 지속하였다”가 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됨과 지속적인 기도이지, 감정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다 Ibid., p.62.
.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백 이십명 정도의 초기 추종자들이 함께 모여서 지속적으로 기도했을 때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을 때, 주의 영을 만났다(9:1-9). 사울의 다메섹 체험을 해석하는 입장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바울의 성령 체험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도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에는 성령의 주권적인 선택이 중심이었다. 반면, 고넬료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중에 성령의 현존에 눈을 떴다. 조용히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에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라고 말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회개’를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해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가리킨다.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가던 태도를 버리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개방하는 것이 ‘회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회개의 행동과 결합되어 있다. 회개를 일회적인 행동이라고 한다면, 믿음은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이러한 전환 자체가 바로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행동이다. 그렇게 할 경우에 (심사에 합격하면)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의 편지를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이라고 단언하고 있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됨의 본질이 성령과의 교제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말이다. 바울의 믿음에 따르면, 한 사람이 성령의 현존에 들어갔는가를 확인하는 가장 분명한 질문은 ‘그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가?’이다.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면 성령과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언명(言明)은 분명히 바울 자신의 경험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살아계신 예수를 만났고, 그 사건을 통하여 예수를 주님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멀었던 눈이 떠지고 둔했던 마음이 녹여지고 몰랐던 진리를 알게 될 때, 비로소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행동을 주문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으려는 노력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노력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살아있는 믿음이 발생되며, 그러한 믿음의 생명성이 바로 성령의 현존의 증거가 된다.
따라서 열광주의 일변도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재고되어야 한다. 성령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그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 전체가 감싸이는 성령의 충만은 꼭 감정적인 흥분 상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적인 흥분 상태는 참된 성령 체험에 이르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감정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을 속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추구를 지속해야 할 사람이 감정적인 어떤 느낌 때문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정지한다면, 그는 진정한 성령 체험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도록 눈을 열어주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성령의 사람이 되려면 감정적인 열광에 빠지기보다는, 항상 성령의 현존을 목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대감을 가지고 일상의 작은 것들까지 놓치지 않는 삶의 스타일을 익혀야 한다. 그럴 때 신자들은 진정으로 성령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4) 성령의 체험을 감각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가는 방법을 오해함으로써 한국 교인들은 성령 체험의 성격을 오해하게 되었다. 부흥회식 성령 운동에서는 성령의 체험을 다분히 감각적으로 이해한다. 부흥사들이 간증하는 성령 체험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감각적인 느낌을 동반한다. 이들에 의하면, 체험자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성령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한국 교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으며, 성령의 현존 가운데 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을 신앙적인 패배주의에 빠지게 함으로써, 건강한 영성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성령의 현존을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 감각적 느낌은 실제로는 오감(五感)을 통한 느낌이 아니다. 예컨대,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때 감미로운 향기를 맡는 사람이 있다. 이럴 경우,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실제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육신의 코’로 그 향기를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현상으로서 그 향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곳에 있는 다른 사람은 그 향기를 맡지 못한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뜨거움을 느꼈다고 할 경우, 그 사람에게 체온계를 대면 정상 체온으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육신적인 감각으로 뜨거움을 느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상적으로 보더라도 성령의 현존 시에 일어날 수 있는 감각적인 느낌은 오감을 통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면서 감각적인 느낌을 기대하고, 그런 느낌이 있을 때에만 성령의 충만을 인정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
신약성서의 빛에서 보면,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경우, 그 사실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위험하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성령이 임할 때 여러 가지의 현상들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2:4; 10:46; 19:6). 하지만 오순절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성령의 현존 안에 있으면 반드시 방언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간 경험을 묘사하면서도 방언이나 다른 현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도 있다(8:18). 오늘날 부흥회식 성령운동에서 자주 거론하는 것처럼, 성령의 현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감각적인 느낌으로 알 수 있다는 사상은 신약성서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성령의 현존 안에 들면 필연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러한 변화를 가리켜 바울은 ‘성령의 열매’(갈 5:22)라는 말과 ‘성령의 은사’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며, 그 변화를 주목하면 자신이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는 말을 ‘성령의 은사’라는 말과 정밀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열매’의 종류와 ‘은사’의 종류를 비교해보면 겹치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양자를 구분하려 한다면, ‘열매’는 성령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거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인격적인 변화에 좀 더 강조점을 두고 있고, ‘은사’는 성령의 현존 안에서 주어지는 어떤 능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성종현 교수는 신약성서에서 총 27가지의 은사를 찾아낸 적이 있는데, 이것이 성령의 은사의 전부가 아니다. 성서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은사를 총망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한 일부만을 기록한 것이다.
은사와 관계하여, 한국 교회는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감각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어떤 능력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비범한 어떤 행동을 해야만 그것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성령의 은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은사의 종류를 보면, 우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던 능력을 제공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을 더 고양(高揚)시켜주는 경우도 있다. 성종현 교수가 분류한 은사를 중심으로 이 둘을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 가르침, 지식, 믿음, 사랑, 찬양, 구제, 섬김, 목회직, 권면, 긍휼, 도움, 전도, 지도력, 독신생활
2.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던 능력이 주어지는 경우: 예언, 지혜, 방언찬양, 영분별, 능력행함, 신유, 방언, 방언통역, 계시, 귀신추방, 환상을 봄, 꿈 해석, 사도직
이렇게 보면, 신약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은사들 가운데 절반은 우리의 일상적인 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은사이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에게 없는 능력이 주어지는 경우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후자의 은사들만을 강조하고 전자의 은사들을 무시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경향이다. 따라서 이 경향은 어떤 특정의 문화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경향이 아니라, 감각주의적이고 현상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어느 교회든지 은사 현상이 일어날 경우, 후자의 은사들을 더 주목하고 그런 은사들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성령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던 한국 교회도 그것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서 구분한 두 종류의 은사들을 비교해 보면, 한 사람의 신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혹은 한 공동체가 교회의 본질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은사는 전자의 은사임을 발견하게 된다. 후자의 은사들은 어떤 특별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능력들이다. 그러한 은사들은 더 분명하게 성령의 현존을 계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삶을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이끄는 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신유의 은사는 그 공동체 내에 혹은 은사를 받은 그 사람의 주변에 질병에 걸린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 혹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가르침의 은사는 한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필요한 은사다. 가르침의 은사는 본래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덧입혀짐으로써 그 가르침을 통하여 더욱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따라서 성령 운동의 지도자들은 감각적이고 일회적이고 비범한 은사에 집중하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면서, 좀 더 일상적이고 지속적이고 평범한 은사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말은 비범한 은사에 대하여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런 은사에만 집중하게 되면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은사들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버린다는 점을 기억하고,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성령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은사들은 감각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변화, 인격적인 변화, 능력의 변화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가 성령의 현존 안에 있다는 사실은 어떤 느낌이나 감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또한 우리가 성령의 현존 안에 잠김으로써 얻은 능력이 무엇인지를 파악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가를 판단해야 한다. 성령의 현존 안에 있을 때, 감각적인 느낌이 동반될 수는 있으나, 그런 감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진다. 그것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꽤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가장 안전한 지표가 될 것이다.
5) 성령의 사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오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오해로 연결된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 충만’은 곧 ‘능력 충만’과 동의어로 통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고, 모든 실패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다. 성령 충만하면 못할 일이 없다. 성령 충만은 이 세상에서 성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인 것처럼 생각한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모든 실패와 질병과 재앙은 죄의 결과라고 믿었는데, 한국의 신자들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흥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성령주의적인 분위기 안에 있는 교인들은 다분히 승리주의적인 열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이 그러한 믿음 안에서 비교적 활력 있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일지 모르나, 그것이 그들의 사회 생활 속에서 성공주의적으로 행동하게 함으로써, 성령 충만한 사람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성공주의적 인식은 정말 뿌리깊다. 부흥사들의 성공담을 들어 보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으면 윤리와 법과 질서를 초월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불법적으로) 군대 징집을 면할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불법 수입품을 몰래 들여올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관리들을 속여 넘길 수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공정 경쟁의 룰을 깨고 이길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힘 입으면, 공부하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고, 노력하지 않고도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고, 더 형편없는 제품을 가지고서도 경쟁 업체를 이길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윤리나 질서나 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령은 어떤 경우에서도 믿는 자의 손을 들어준다. 믿는 사람에게 명백한 과실이 있어도 성령이 역사하면 상대방의 과실로 처리되어 오히려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놀랍겠지만, 이상의 예들은 그 동안 필자가 부흥회를 통하여 들었던 예화들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필자가 상상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류의 간증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 충만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혹자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어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보면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파수꾼들 모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성령의 승리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과 비슷한 16장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전혀 다르다. 바울과 실라는, 지진이 나서 그들을 매어 놓고 있던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감옥 안에 머물러 있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을 하려던 간수에게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16:28)고 말하면서 위로하고 그를 회심시켰다. 그러므로 12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초법적인 성령의 역할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악한 법에 순종하지 않지만, 그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책임은 당당하게 짊어 진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예수께서는 당시의 잘못된 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로 인하여 십자가 처형이 결정되자 그대로 받아 안았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보면, 성령은 언제나 승리하게 만들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예가 예수님 자신이다. 그분은 성령의 충만한 현존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이적을 행하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해치려는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무력하게 그들의 폭행을 그대로 받아 안았다. 왜냐하면 성령은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그 뜻을 따르게 해 주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광야의 시험 이야기의 초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진 예수는 그 능력을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유혹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은 나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그들의 폭행을 그대로 끌어 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길을 갔다.
사도행전에도 주목할만한 이야기가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작별 인사를 한다. 이 때 바울은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20:22)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역이다. 원문을 제대로 번역하면, “나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가 된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성령께서 그 뜻을 이루도록 몰아세우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니”(23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환난과 결박을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미래를 보여 주시면서도 그 길로 가도록 등을 떠밀고 있다는 뜻이다. 그 후에 가이사랴에 머물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아가보가 성령의 계시를 받아서 바울이 예루살렘 가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21:11). 그러자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고 대답한다. 성령께서는 성령 충만한 사들에게 미래의 일을 암시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은 다 고난을 받아도 너희는 피하라’고 일러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받아 안으라고 주시는 계시일 수도 있음을 여기서 확인한다.
바울의 편지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늘 승리한다는 사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자주 인용되는 빌립보서 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도 그 편지의 앞뒤 맥락에서 보면 승리주의적인 사상을 피력한 것이 아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곤궁한 상황에서나 풍요한 상황에서나 흔들림 없이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한다(12절). 어떻게 그런 비결을 배웠는가?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 안에서 그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늘 풍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비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먹고 살 것이 풍족한 상황에서도 타락하거나 안일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승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와 다르다. 바울은 “이 모든 일(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의 위협)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선언하였다. 이 이김은 성령의 능력으로 적대자들을 섬멸하는 이김이 아니다. 그 이후에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놓지 않고, 죽음을 무릎쓰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승리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했을 때에도 같은 의미다. 이 말씀을 하고 난 직후에 예수님은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한 이김은 적대자들을 무찌르고 목숨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김’은 목숨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는 것이었다. 바울의 편지에서나 요한복음에서나,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환난과 고통을 피해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온갖 박해와 고통을 무릎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인물됨에 대하여 한국 교회는 매우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듯이(박경미, 최영실), 성령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의 영’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따라서 성령의 현존 안에 들어가 그로 인하여 충만해진다는 말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며, 참된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은 그 진리를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살아가도록 능력을 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진리를 산다는 것은 칭찬받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불의가 편만한 세상이므로, 순수한 진리에 접근할수록 세상은 우리를 거부하고 박해하고 제거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반대로 진리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 놓는다. 예수, 바울, 그리고 요한은 바로 이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광신적인 교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리의 사람, 사랑의 사람, 창조성의 사람,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참 모습을 보게 해 주는 거울이 되는 사람이요, 세상의 불의함을 비추어주는 등불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 안으로 녹아들어가 세상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죄에 물든 세상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제거하려 하지만, 볼 눈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도한다.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이런 사람을 길러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성령 운동이 가야 할 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따라 재조정 해야 한다.
3.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한국 교회에 공헌한 점과 문제점들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지적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성령론적인 맥락에서만 고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지적하지 않았다.
필자는 부흥회식 성령 운동이 그 동안 진실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따라서 앞으로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필자 자신도 부흥회식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아무리 부흥회의 해악(害惡)을 지적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한국 교회의 체질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부흥 운동은 앞으로도 적지 않은 기간동안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기존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을 바르게 잡아가는 것이다. 부흥회를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과 개체 교회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모두 기존의 부흥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수정해 나가는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영성을 건강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영성은 현세적이고 즉물적이며 소유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탈역사적이며 열광적이다. 이렇게 성격지어진 가장 큰 영향은 바로 부흥회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지난 몇 세대 동안의 부흥 운동의 결과로 이러한 열매들이 맺어졌다면, 아무리 부흥회 옹호론자라 하더라도 문제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영성, 특히 성령의 열매로써 맺어지는 영성은 위에서 말한 것과 정반대다. 성서적 영성, 성령 충만의 영성은 현세적이고 즉물적인 관심을 초월하게 만들며, 소유보다는 존재에 더 관심을 두고, 육체적인 감각에 속지 않고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게 되고, 자기를 떠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살게 되며, 역사적 책임을 더 적극적으로 떠맡고, 갈수록 더 조용히 그리고 신중히 살아가는 영성이다. 한국 교회의 부흥회식 성령 운동은 앞으로 이러한 영성으로 믿는 자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반성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 지금의 실추된 교회의 권위가 서서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은 바로 이러한 반성과 변혁을 위한 몇 가지의 지침일뿐이다.
'People >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0) | 2008.04.06 |
---|---|
[스크랩] 기도하는 당신 (0) | 2008.04.03 |
천국의 영성 (0) | 2008.03.11 |
일중독과 성생활 (0) | 2008.02.21 |
목회자 세금 - 교회 재정 ‘신성불가침’ 논란 - (0) | 2008.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