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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영성

맑은샘77 2008. 3. 11. 23:16

천국의 영성
--천국과 지옥에 대한 최근의 관심에 대해


김영봉 (전 협성대 교수, 미국 뉴저지 벨마연합감리교회 목사)


최근에 기독교 서점가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책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면서 한국 교회 일각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바람을 일으킨 당사자는 토마스 주 남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녀는 과거 7년 동안 천국을 17번이나 다녀왔다고 고백하면서 이 특별한 경험을 통해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세계 최대의 교세를 자랑하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의 번역과 추천에 힘 입어 단박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와 함께 매리 백스터(Mary Baxter)가 지은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라는 책도 이 바람에 가세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상황은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팀 러헤이(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Jerry Jenkins)가 공동으로 저술한 ‘Left Behind' 시리즈가 폭발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하며 재림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1995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한 총 12권의 이 시리즈는 최근 마지막 권(Glorious Appearance)의 출판으로 완결되었는데, 미국인 8명 가운데 1명이 읽었다는 통계에서 보듯, 심각한 사회 문제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 기독교 출판계의 심각한 미국 의존성을 고려할 때, 이 책도 머지 않아 한국 교계를 강타할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언급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두 책의 공통점은 저자들의 영적 경험에 기초해서 쓰였다는 점이다. 사실,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약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내세 문제에 대해 히브리인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과 묘사는 초기 유대교(구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종교 전통들을 통해 내세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고 교리를 만들어갔다고 본다. 신약성경에서도 내세적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요한계시록은 예외로 보일 수 있으나, 정작 이 책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초점이 내세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계 안에서 인정받는 권위 있는 문서를 토대로 하여 내세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문학적 혹은 동화적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어떤 초월적 경험을 토대로 삼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종류의 천국 여행기 혹은 지옥 여행기는 초기 유대교 시대부터 끊임없이 출현해 왔다. 그 중 어떤 것은 독자들을 심각한 오류로 인도하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독자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선한 열매를 맺기도 했다. 나는 위의 두 책이 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나누려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우선, 이러한 책을 대할 때 우리는 보통 ‘입신 현상’이라고 부르는 초월적/영적 경험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초월적/영적 경험의 원천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단순한 심리 현상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즉,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심리 작용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 줄 때 보통의 환경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둘째, 악한 영에 의해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셋째,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초월적인 경험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보고 들은 것은 성령에 의한 영적 경험에 속한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는 동안 경험한 사탄의 유혹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70명의 제자가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수께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고 말씀하시는데, 신약학자들은 이것도 역시 예수께서 본 영적 경험에 속한다고 본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도, 삼층 천에 갔었다는 고백(고후 12:2)도 성령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 영적 체험에 속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한 사람이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그것이 위에서 말한 셋 중 어디에 속하는지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경험을 한 사람이나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영적 경험에 대해 기도와 성찰로써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도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오인할 수도, 악한 영에 의해 속을 수도 있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그리고 한국 기독교 100년의 역사를 통해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영성이 깊다고 자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일어나는 영적 현상에 대해 더욱 더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확인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영적 경험을 성찰할 때 성경은 가장 믿을만한 판단 기준이 된다. 아무리 경이로운 경험이라 하더라도 성경이 제시하는 영성과 차이가 있을 때는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배출된 영성가들의 글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며, 이성적인 성찰도 필요하다. 기독교 전통 안에는 이성을 신앙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늘 있어왔는데, 알고 보면 이성의 바른 활용 없이 바른 신앙에 이를 수 없다.
충분히 성찰한 결과 성령의 역사로 확인이 된 이후에도 영적 경험을 한 당사자는 여러 가지로 조심해야 하고, 그 사람의 간증을 듣는 사람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세심하게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를 이제 설명해 보겠다. 한 사람이 영적 경험을 통해 천국이나 지옥을 목격했다 하자.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천국’ 혹은 ‘지옥’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물리학의 개념을 사용해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는 3차원 공간이 아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자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은 현대 물리학으로 11차원까지 확인했다고 말하는데, 현대 과학이 11차원까지 확인했다면 하나님의 차원(divine dimension)은 그것을 초월하는 차원에 있다. 우리 인간은 3차원 공간만을 경험했기 때문에 4차원의 현상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11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차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 말은 영적 경험을 통해 본 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령께서 천국의 어떤 차원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실재를 보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인식 한계에 있다. 지금은 3차원 TV가 개발되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TV는 2차원 평면 공간을 통해 3차원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3차원을 모르는 사람이 TV 화면만을 보았다면 모든 것을 2차원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다. 3차원의 실재를 2차원의 스크린에 비추면 실재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를 본다고 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실재가 우리 인식의 화면에 비쳐질 때는 실재와 다르게 보인다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전하면서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라고 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경험을 당사자가 말로 표현한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또 한 번의 왜곡이 일어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왜곡이며, 그 말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이 자기 배경에서 받아들임으로 일어나는 또 한 번의 왜곡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언어는 3차원 공간에서 경험하는 것조차 만족스럽게 담아낼 수 없는 부족한 도구다. 게다가 사람마다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달라 전하는 사람의 의도가 그대로 전해지지도 않는다.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경이로운 노을을 보고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그 광경을 설명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내 언어가 그것을 제대로 담아낼 것이며, 내 말을 듣는 아내가 상상하는 노을은 내가 본 것과 얼마나 닮았겠는가? 하물며, 3차원 공간의 경험도 아닌 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 왜곡은 얼마나 심하게 될 것인가? 경험한 당사자가 아무리 정직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려 해도 그에게 비추어진 영상 자체가 실제와 다르기 때문에 그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영적 경험을 거친 사람은 자신의 인식에 남겨진 영상을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기보다는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잔영(殘影)에 대해 묵상하고 성찰해야 한다. 자신이 목격하거나 들은 것에서 천국에 관한 어떤 정보를 얻어내려 하지 말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암시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자신이 본 모습을 언어로써 묘사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해를 강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인정하고 말을 아끼는 편이 옳다. 그 경험에 대해 듣거나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런 간증에 그리 관심을 두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다. 일시적으로 경각심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방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혹시 그런 글을 접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20대의 외아들을 잃고 쓴 <한 말씀만 하소서>를 보면, 죽은 아들의 현재 상태를 알고 싶어 천국에 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하지만 천국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그녀의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책들을 모두 물리치고는 스스로 “천국은 아마 어릴 적에 놀던 고향 뒷동산과 같을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상으로부터 천국의 이미지를 도출해 낸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성찰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하늘과 창공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재림에 대해 말할 때도 똑 같은 오류가 발생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 하나님의 공간은 3차원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간도 1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용 가능한 용어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용어밖에 없으므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묘사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그 용어는 실재에 대한 직설적 묘사가 아니라 비유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들을 때 직설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저 위 공간 어디에 계신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공간이 인간의 3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표현을 쓸 방도가 없다. 언어적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경험의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경험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해서는 비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영어로 “Our Father in heaven"이라고 말하는 것과 ”Our Father in the sky"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 Sky는 비유적 의미의 여지가 없는 사실적 단어인 반면, heaven은 비유적 의미로 해석될 충분한 여지를 가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한다면, “창공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치는 이렇건만, 천국과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3차원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재림에 대해 말하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표현은 3차원의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 표현을 통해 전하려는 내용은 3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예컨대, 천국에서 우리가 먹게 될 음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다면(화제의 책 속에 한 장이 천국 음식에 대해 할애되어 있다) 그것은 3차원적 경험으로 천국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고, 천국을 3차원으로 그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오류다. 1961년에 구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을 하고 귀환한 후 “아무리 둘러보아도 천국은 없더라”는, 지극히 유물론자적인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었지만, 실상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 한 사람이 토로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이 지상에서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우주를 아무리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생을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1차원의 시간을 무한정 늘린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영생’이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얻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숨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논하면서 영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시간을 선으로 본다면--이것은 시간의 부분들이 연속되어 있으며 어떤 부분도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시간에는 폭이 없고 길이만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이미지입니다--아마도 영원은 면이나 입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2차원인지 3차원인지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1차원 시간의 연속은 아님이 분명하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을 표현할 상징으로서 우리는 영생이라는 말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무한정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옮겨간다는 뜻이다. 영생에 대한 헨리 나우엔(Henri Nouwen)의 성찰을 들어 보라.

"죽은 이후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두고 궁금해 하는 것 은 대개의 경우 헛된 것에 정신을 파는 일이다. 영생이 나의 명백한 목적이라면, 그 생명은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은 내가 존재하는 지금 여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영적 삶--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의 가장 큰 신비는 나중에 다가올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무엇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거하라.” 영생이라는 것은 이같은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말한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것은 내 존재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활동적으로 현존하는 것,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것이다"(Here and Now).

그러므로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개념으로 표현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들은 절대로 액면 그대로,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재림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그 그림들을 통해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언어들은 버려야 한다.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표면적 언어에 붙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는 천국, 오는 천국

또 하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대중적 사고방식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킬 지경까지 잘못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천당’이라는 말은 개역성경이나 개역 개정판에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천국’ 혹은 ‘하늘 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인데, 다른 복음서나 서신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되어 있다. 마태복음 저자가 ‘천국’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유대적 어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결국, ‘천당’, ‘천국’,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는 모두 동의어라는 뜻이다. 교회 현장에서 자주,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고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경험하는 곳이라는 설명을 접하는데, 이 설명은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설교의 중심 주제였다는 것은 20세기 신약학 연구의 몇 안 되는 합의점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 무엇이냐를 정확하게 요약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 신약학자 노만 페린(Norman Perrin)은 예수께서 사용한 아람어에서 이 용어는 어떤 개념을 전하는 사실적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를 전하는 상징적 언어라고 지적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한 논의에 쐐기를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전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노력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 활발하게 논의된 역사적 예수 연구 결과에 힘입어 예수님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우리 중에 임재 하는 하나님의 영의 현존에 눈을 뜨고 그분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 그분이 이끄는 대로 살아감으로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 삶은 우리 존재를 하나님의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 올린다.
이 개념에 기초하여 대중적 천국관의 문제를 몇 가지 짚어 보자. 우선, 예수님은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 ‘간다’는 표현보다는 ‘온다’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셨다. 그런데 대중적 천국관에서는 ‘간다’는 표현이 압도적이다. 천국의 진행 방향을 180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심각한 왜곡은 천국의 미래성과 내세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다. 천국은 미래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재적인 실재이며, ‘저 세상’에 있는 것인 동시에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어서 천국 간다”는 식의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다. 반면, “천국이 임한다” 혹은 “천국이 너희 중에 있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죽은 다음 천국 가게 하소서”가 아니라 “천국이 저희에게 임하게 하소서”(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천국의 진행 방향을 바꾸어 놓았고 초점을 현재에서 미래로 바꾸어 놓았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왜곡은 천국의 사회성을 망각하는 일이다. 천국을 죽은 다음에 가는 대상으로 생각하다 보니, 천국이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미래의 재앙에서 건지려는 것에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나라의 영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 받아 세상을 향해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삶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된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시험하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사회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천국의 영성이 가지는 중요한 차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차원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미래적 차원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다. 그것이 천국의 최종적 도래든 아니면 개인적인 죽음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적 차원의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히 있다. 다만,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 우선이며, 그것이 확보되지 않는 한 미래 천국에 대한 소망에 대해 아무런 보장도 할 수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1차원적인 시간만을 경험하는 우리이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나누어 생각하게 되지만, 면이나 입체 혹은 그 외의 다른 차원에 있을 하나님의 시간에는 그런 구분이 있을 리가 없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했듯,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영원한 오늘’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 천국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천국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천국의 영성

“그래도 천국에 대한 강력한 소망이 있어야 이생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목회자로서 여러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다 보면 이런 생각에 기울 수 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임종의 고통을 더 고결하게 견딜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믿음이 있다고 했던 사람들이 임종의 고통 앞에서 무장해제 되어 인간의 가장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믿음은 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자주 했었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더 강화시켜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나의 영적 여정은 그보다 더 강한 힘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다. 나는 최근에 평생토록 하나님과 함께 사귀는 영적 훈련을 지속해 온 한 사람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험적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지속하여 하늘나라의 삶을 심화시키게 되면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든든한 믿음이 형성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한 고백 즉 “그러나 이 모든 일[온갖 고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7-39)는 고백은 이러한 체험적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 믿음은 경험해 보지도 않은 미래적 천국에 대해 소망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결국, 내세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큰 위험을 안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전도의 결실 면에서 효율성을 강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세 천국의 지복(至福)과 지옥의 참상을 전하면서 전도하면 매우 신속한 결심을 유도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실제로는 천국의 지복보다 지옥의 참상을 더 강조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고, 듣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재앙을 피하려는 동기로써 결심하게 된다. 이러한 전도 방식은 실제적인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게 할 심각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복음(福音)을 화음(禍音)으로 대치시킨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게 한다. 기독교 신앙은 천국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이 천국임을 일깨우고 그 천국의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자는 것이다. 실제 사역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전도하는 것이 훨씬 느리고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름길로 가려 해서는 안 된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천국이라고 해서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천국의 영성은 이런 눈을 뜨는 것이다. 삐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heilhard de Chardin)처럼 "주님, 주님께서 저희 곁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저희가 알고 또한 느낍니다. 하지만 저희 눈앞에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얼굴빛이 저희를 환하게 비추게 하소서. 주님의 그 깊은 광채가 저희가 빠져 있는 이 거대한 어둠의 가장 깊은 곳을 비추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일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보고, 부질없어 보이는 생명을 통해 영생을 보고, 순간순간의 사건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고, 이생에서 내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간혹 천국의 보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영원을 보는 눈을 뜨라는 것이지 망연히 미래만을 바라보고 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수록, 그분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의 삶에 충실해지는 것,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른 삶(영생)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영성이다. “지금 여기서 천국을 누리라. 그 생명 안에 영원히 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