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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밀양> 과연 정직한 흥행인가?

맑은샘77 2007. 6. 18. 08:11

 

<밀양> 과연 정직한 흥행인가?

 

종교적 색채 마케팅차원에서 배제. 뛰어난 배급전략.

현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 요구.

아들 유괴장면. 개연성의 부재 아쉬워. 

  

 

 

  러닝타임 141분. 일반적인 영화들의 상영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기나긴 시간동안 나는 상영관의 무시무시한 에어콘이 뿜어내는 찬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뉴스의 핫이슈로까지 나올만한 대단한 작품일 것이라는 기대감은 내 피부에 맴돌고 있는 에어콘의 찬 기운과는 다르게 일치감치 멀어져 갔다.

 <밀양>. 대한민국 대표 남녀배우 송강호, 전도연 주연. 거기다가 현 정권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라는 멋들어지게 큰 간판은 해적과 거미인간에 맞서 싸우는 한국영화계에 단비이자 고마움 그자체일 것이다. 물론 <밀양>의 흥행에는 칸영화제에서의 활약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흥행에는 칸영화제의 수상만큼이나 큰 어떠한 요소가 숨어있었다. 그것은 바로 배급전략이었다.

 나는 상영관을 나오면서 신랄하게 만들어진 기독교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 <밀양>은 잘 만들어진 종교영화로 분류 할 필요가 있다. 만약 배급사측이 영화 속에서 종교적 내용이 이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홍보에 이용했다면 지금처럼 많은 흥행이 이루어 졌을까? 포스터나 홍보영상물 등 어디에도 종교에 관련된 문구는 찾기 힘들다. 배급사에 대한 본인 혼자의 배신감과, 칸에서의 한국영화위상에 대한 위업 그리고 작가주의 감독의 영화치고 대단한 흥행. 이렇게 3가지를 가지고 비평해 보겠다.

 

 

 

 

 여태까지의 한국 영화 내에서 기독교는 지극히 긍정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현실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직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미지를 영화에 그리면, 그렇지 않아도 몹시 따분한 종교적 아이템에 지루함까지 쌓아주는 꼴이 될 것이다. 즉 일탈적인 성직자는 관객들로 하여금 신선한 자극이나 충격을 줄 수 있지만, 찻길 건너의 교회 목사님의 딱딱한 설교는 교인으로서면 모를까 관객입장에서는 절대 원치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친절한 금자씨>에 등장하는 부패한 목사의 캐릭터가 바로 일탈적인 성직자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물론 <밀양>이 관객들이게 주는 message도 그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message는 종교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밀양>은 종교를 냉소적이거나 극단적으로 희화화시키지 않는다. 종교(극中에선 기독교)에 대해 지극히 이성적인 비판을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는 ‘고통과 구원 그리고 다시 절망’이다. 사고로 남편까지 잃은 여자주인공 신애가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와 아들까지 잃고 마는 개인적인 극도의 비극을 스크린을 통해 천연덕스럽게 옮기고 있다. 아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고통이 아니다. 아들이 죽은 후 신애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하루하루 의미를 두고 기도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종교활동은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범인을 용서를 하기 위해 면회를 신청한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안해 보이고 생기가 넘쳐 보인다. 그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신애가 면회를 신청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 눈물로서 구원받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신애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 자신이 용서하기 이전에 이미 용서받은 범인을 보고 견디지 못하고 미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와 다르게 표현했다. 원작에서의 아이엄마는 먼저 용서받은 범인을 보고 자살을 선택한다.

 다시 돌아와서 <밀양>의 신애는 그때부터 기독교를 부정하고 삶 자체의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여기서 영화가 관객에게 준 message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내가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그 행위가 무엇이라고 일컬어지는지 알지는 못하나 목사가 끊임없이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옆에 사람들은 “아멘”을 연발하며 심취하는 장명이 스크린에 투영되고 있을 때였다. 내 옆에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 中에 부인이 같이 “아멘”을 연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절실한 그리스도인임을 느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종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녹아 있는 영화이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영화가 끝난 후 노부인의 표정은 밝아 보이진 않았다. 영화에서는 현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신애가 고통을 당할 때 (앞에서 언급한 아들의 죽음) 교회에 의지하지만 결국 교회 안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신애는 항상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종찬(송강호)에게 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세계의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신애의 삶에 생명을 불어 넣는 존재는 치근덕거리는 종찬과 끈적한 밀양 지역의 이웃들이다. 이러한 내용을 본 실제 그리스도교인인 노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였겠는가? 또 타 종교인들은 또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이것들이 영화가 주는 message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한편으로 종교관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실적 비판을 보고 듣고 나면 기독교의 불합리한 모순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됨은 틀림없을 듯 하다. 어린 청소년들은 가치관이나 종교관이 확고히 확립되어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부정적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다. 한 예로 비슷한 이유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영화 <다빈치코드>의 배급사롤 상대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적이 있다. <다빈치코드>에 비하면 <밀양>에서는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으려고 대단히 노력 한 것으로 보여 진다.

 

 

 

 

 도입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줄거리에 대한 개연성의 부재이다. 특히 개연성이 너무도 드러나 있지 않은 부분은 신애의 아들 준의 유괴이다. 신애는 밀양 지역 사람들과의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주변 상인들과 음주가무를 즐긴다. 그 때 신애의 땅 투자 소식을 알고 있는 아들 준의 유치원 원장이 준을 납치한다. 사전에 조금의 암시를 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암시가 아니었다면 내용상 흐름의 분위기에 알맞은 개연성을 관객들로 하여금 이해 할 수 있는 암묵적 장치를 마련해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것이 ‘작가주의 감독의 스타일이자 위트이다’라고 말한 다면 그 말 또한 맞는 말이지 않는가. 반면에 유치원 원장의 딸의 투입은 신선하기도 했고 딱 떨어진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원장의 유괴 전에는 문제아인 딸이 부모로서의 위치에서 신애에게 동질감 내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면 유괴 후에는 딸의 존재 자체만으로 아들을 죽인 범인의 존재를 영원히 잊지 못 할 비극으로서 그 큰 비극을 더욱 극대화 시키고 있다. 나의 비평공간에선 본문의 종교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배재하고 내가 느낀 스토리상의 허와 실을 짧게나마 끄적이고 싶었다. 또 전체의 글에 있어 언론에서 집중 조명하는 전도연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 많이 노력했다. 영화자체를 보고 싶었고,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자체의 본질적인 요소들 보다 수상 때문에 관객이 몰리는 옳지 못한 흥행(?)에 작지만 소신 있는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

 

 

 

 

출처 : ^^석이의 세상돋보기
글쓴이 : 곧은석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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