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사역/가정

[스크랩] 행복을 낳는 아내의 십계명 (차윤순 지음)

맑은샘77 2006. 5. 22. 12:19

행복을 낳는 아내의 십계명
차 윤순 지음

 

 


서  문

사회가 복잡해져갑니다. 이런 문제들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그 해답을 전통이나 세상풍조와나 자기의 이성적 판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항상 그래왔는데", "남들이 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런 말들이 오는 우리 사회를 사는 많은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는 열쇠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런 열쇠들을 빌려쓴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 거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요8:31)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해답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시119:105)이 되는 성경을 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해답들이 금방 눈에 띄지 않으므로 다시 과거에 쓰던 전통의 등이나 세상풍조의 빛, 이성의 열쇠를 찾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두꺼운 책이나 커다란 건물 안에 갇혀버리고 말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여기 몇 권의 책을 내어놓습니다. 여기 내놓는 손안에 책(빛과 소금 특집 부록)들은 우리들이 당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들 자체가 열쇠가 되거나 등과 빛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차  례
지혜 있는 아내
신뢰받는 아내
선을 행하는 아내
아름다운 손을 가진 아내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는 아내
주인의 자리를 지키는 아내
치리 할 줄 아는 아내
힘있고 강한 아니
사랑 받게 하는 아내
소망을 주는 아내

 

지혜 있는 아내
한 가정의 참된 행복은 사회적 안정을 가져오며 이 안정이 모든 이에게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행복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한 가정의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행복은 아내가 되는 여성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정의 절대적인 책임자는 남편이 되며 아버지가 되는 남성에게 있다. 그러나 그 남성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내이다. 성경도 창세기 3장에는 남편에게 대하여 절대적인 불행의 나락으로 밀쳐버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아내는 환경적으로 완전한 조건 속에 아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하나님과 남편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있었다.. 불행해지는 요건은 그년에겐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축복된 조건 속에서 그녀는 불행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불행은 다름이 아닌  그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두운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밝고 평화로운 풍족한 사랑과 물질이 있는 동산의 아름다운 행복의 빛을 그녀 자신이 등지며 남편을 비롯하여 그 자식과 후손에 이르기까지 비극적인 삶을 살게 만들었다.
 불행을 낳는 아내.... 실로 이 아내는 온전히 행복한 동산에서 절망적인 불행을 낳았다. 그런데 이렇게 불행을 낳는 아내가 있는 반면 성경은 행복을 낳는 여인이 있음도 가르쳐준다. 나오미와 롯 , 다말 라합 에스더, 마리아 등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던 여인이건만 행복을 낳아 가족과 민족을 구하며 그 후손에 이르기까지 성스러운 핏줄이 되게 한 여인들, 그 외에도 성경은 행복을 낳은 여인들을 소개하며 이 여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영원토록 쇠하지 않는 행복을 다시 부활시켜 주시려는 큰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여인들은 행복을 낳는 아내가 되면 그것은 교회에 속한 여성들의 대명사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교회의 여성들로 인하여 가정이 변하며 나아가서는 사회가 변하며 이로 인하여 전인류 구원의 역사는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행복을 낳는 여성을 위하여 근본적이며 구체적인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실로 성경을 비켜 내놓고는 행복을 낳는 아내가 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온전한 지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성경이 제시하며 가르쳐주는 행복을 낳는 아내가 되기 위한 길을 배우기로 하자.
먼저 잠언 31:10-25절의 말씀에 기록된 행복을 낳는 아내의 10가지 조건을 살펴보기로 하자. 내 가정이 행복해지고 사회가 안정되고 온 인류가 구원을 받는 엄청난 역사가 작고 연약한 한 여인이 낳는 행복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감동적인 사실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역사를 개인적인 능력과 환경적으로 좋은 요건을 갖춘 유력한 인물들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연약한 여인들로 이루신다. 이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아직도 불신 속에 방황하며 불행을 낳고 있는 아내들에게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패역하는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2)
남자는 강자의 대명사요. 여자는 약한 자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오묘하신 역사는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하다 일컫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사60:22)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약산 여자이기에 그 사명은 더욱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겸손히 성경의 가르침인 행복을 낳는 아내의 길을 배워, 행하므로 하나님이 여성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큰 역사에 동참해야 되겠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잠31:10)
행복을 낳는 여성을 위한 10가지 조건 중에서 성경은 지혜를 그 첫번째로 지적하고 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12:4)
어진 여인은 덕이 있으며 지혜로운 여인을 가리키고, 욕을 끼치는 여인이란 무지하고 무분별한 여인을 가리키고 있다. 아내가 지혜스럽고 현명할 때 그 남편은 영광스러운 자가 되며, 무지하고 무분별한 여인은 남편에게 처참한 인생을 살게 한다. 이렇게 아내가 가지고 있는 성품이 남편의 행. 불행을 결정짓는 요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19:14)고, 지혜스러운 아내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요, 가장 귀한 보배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인류의 불행이 여성의 무지와 무분별로 인하여 시작되었다고 서슴없이 증언하고 있다.
창세기 3장 1절로부터 6절의 기록을 보면 사단의 사주(使嗾)를 받은 뱀과 여인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와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하고 시작된 대화의 중심 되는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성 여부인 것이다.
뱀의 질문이 그것을 문제삼고 잇다. 그러나 뱀의 질문의 핵심을 깨닫지 못하는 여자는 실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자신의 행위 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다. 여자에게 뱀의 질문의 핵심과 그 목적을 깨닫는 지혜가 있었다면 한 마디로 잘라 대답할 수 있었고 뱀의 입을 봉해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절대 권위를 경시한 자기중심적인 판단이 시험에 패하게 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려고 도전해오는 적의 공격 목적을 분별 못하고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가장 행복했던 여인 그리고 영원히 행복해야 할 여인에게서 불행이 시작되었고 그 불행이 남편을 비롯하여 그 후손과 온 인류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행을 낳게된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성경은 분명히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여인의 자기중심적인 판단에 의한 것, 이 자기중심으로 한 사고와 판단에 의하여 무지와 무분별이 비롯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불행은 자기중심적인 사고 속에 잉태되어 자기중심적인 판단에 의해 태어난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판단을 버리지 않고는 인간은 결코 불행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단정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행복의 동산에 살면서 불행을 낳은 여인이 뱀의 말을 듣고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를 얻고자 함에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준다.
"불행이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사고와 행위로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학력은 가지고 사는 여성들을 지식인이라고 한다.  현대는 과거의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여성들의 고학력을 자랑하는 시대이다. 결혼 상대자를 구할 때 첫째 조건이 상대방의 학력이요, 지식수준인 것이다.
이렇게 높은 학력과 지식 수준을 지닌 부부가 가정을 이루고 있는 현대임에도 부부의 갈등과 가정적 불안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비극적인 사건들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심각하다.
이 사실은 현대인이 고학력은 가지고 있지만 한 가정과 거기에 속한 가족들을 지키며 행복을 이루는 능력은 점점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중심의 지식의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결코 참 능력과 거기에서 오는 지혜는 인간중심의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지혜와 지식을 생각하며 그 근원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자가 지혜 있는 것이 아니요, 지혜 있는 자만이 참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행복의 동산 에덴에서 불행을 낳은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판단과 행위에 의하여 지식을 얻고자 했다. 이것을 통하여 인간중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립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결과를 가져옴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의 지식은 하나님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대립시키며 경쟁하게 하며 승자는 교만한자 되며 패자는 열등한 자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인간중심의 지식으로는 참된 인간관을 가질 수 없으면 결단코 절대적인 존귀한 생명의 가치와 그 존엄성을 가지고 사는 세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증명한다.
참으로 슬픔 일은 인간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때는 친한 사이에 있던 상대가 나보다 더 잘될 때 그것을 기뻐하기보다 상대적으로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절망하는 일이다.
즉 친한 자, 사랑하여야 할 사람의 성공이 내게는 불행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하고 잘못된 사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자기 중심의 사고의 세계요, 이 세계에서는 어떤 지식을 얻어도 경쟁의 상대가 있기에 평화와 참 안식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는 참된 가치관이나 인간관이나 또는 인생관이 있을 수 없으니 인간중심과 자기중심과 자기중심의 지식의 세계를 추구하면 할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 지혜에는 참된 인간관과 가치관과 인생관이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사고의 세계를 가진 자에게만 이 지혜는 있으니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자연계의 아름다운 조화와 그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바로 아는 참 지식의 소유자가 되며 그 지식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것이니 절대로 인간과 인간을 분열시켜 대립하게 하여 무서운 경쟁 속에 물아 넣는 불행은 낳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니 이 지혜 있는 곳에 참으로 안정된 가정과 사회가 이루워 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가장 번창하는 산업은 여성에게 관계된 상품이라는 말은 들었다. 의류, 화장품, 보석, 가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상품이 여성의 기호에 맞는 것을 개발하면 성공한다고 한다.
여성들의 경쟁심리를 교묘히 자극하면서 온갖 상품이 개발되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경쟁심리는 지혜 없는 여성들에게 더 강하며 이것을 견제(牽制) 할 줄 모르는 무분별로 인하여 퇴폐 된 물질문명과 도시문화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여성들의 경쟁심리는 자식을 양육하는 데까지도 미친다. 자식들의 인격적 토대는 참된 가치관과 인간관과 인생관으로 다져놓고 난 다음 지식을 더할 때 그 지식은 자식에게 유익한 것, 복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무시하고 높은 학력과 지식의 세계에서의 목적달성만을 위하여 서로 앞장서려고 하며 그 행위가 자식과 가정을, 나아가서는 사회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머니인 자신에게 이르기까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가를 자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오는가를 자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성경을 통하여 인류불행의 원인을 알고 있으며 지혜와 지식의 근원적인 뜻을 알고 있는 교회여성에게도 이 경쟁심리는 강하게 작용한다는 일이다.
하나님과 이 시대가 갈망하고 있는 것은 지식 있는 여성이 아니요, 행복을 낳는 지혜  있는 여성이다. 지혜 있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과 사회, 민족은 아무리 유능한 정치인이 있다 할지라도, 유능한 학자가 있다 할지라도, 또는 경영인이 있다 할지라도 행복은 존재하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여성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 어느 보석보다도 귀하고 아름답다. 이제 먼저 나부터 지혜 있는 여성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겸손을 갖자. 모든 교회여성이 이렇게 지혜스러워 질 때 인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신뢰받는 아내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잠31:11)
행복을 낳는 10가지 조건 중 두 번째 조건인 '신뢰받는 여성'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신뢰라는 것은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지속시킬 뿐 아니라 변함없이 더 깊고 두터운 사이로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조건이다. 신뢰 없는 곳에 불신, 증오, 분쟁, 분열 등의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뢰 없는 곳에 절대로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서로 다른  가정문화 속에서 자라나 의식이나 습관이 자칫하면 대립되기 쉬운 부부가 그 관계를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지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신뢰이다.
그런데 이 신뢰관계가 깨져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책임을 대부분 남편에게 둔다. 남자의 독선, 방탕, 무책임 등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불신하게 만들어 부부사이에 파탄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늘 아름다운 사랑으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아내가 남편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것이 표면상으로는 남편의 독선, 방탕, 무책임 등의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근원적인 이유를 잘 살펴보면 아내를 신뢰할 수 없는 남편들이 그릇된 길로 가기 쉽고 실족하기 쉽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돕는 배필의 자리에 있는 여자의 사명은 남자의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자로서 남편의 기쁨과 평화와 충만한 사랑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아내를 소유하고 있는 남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어 그 산업이 즉, 그 생활이 핍절치 아니한 것이다.
남편이 마음놓고 이야기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를 부여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더한 신뢰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서 한 몸 된 아내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남편이 이야기하기 가장 어려운 상대가 아내요, 있는 모습 그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가장 힘든 상대가  아내가 되고 있다. 밖에서 친구들과 기탄 없이 행동했던 남편이 가정에 돌아와서는 위축되어 입을 다물고 있으며, 아내가 없는 장소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민을 털어놓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남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남편뿐만 아니라 자녀들 중에도 밖에서 친구들에게는 마음놓고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며 마음 문을 닫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고학력의 부부 또는 고학력을 가진 부모의 자녀들에게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지식과 교양이 높으며 살수 있는 조건을 갖춘 가정에 오히려 불신의 벽이 두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볼 때 몇 가지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 '타산'(打算)을 들 수가 있다. 현대는 모든 이가 자신이 배운 만큼 수준에 합당한 보수를 타산하여 요구하며 결코 손해나 양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학력에 합당한 수준의 생활을 갖기 원하여 남편에게 능력 이상의 요구를 하며 자녀들에게도 능력 이상의 기대를 갖는다. 이러한 무리한 요구가 남편을 위축키며 아이들의 마음 문을 닫게 한다. 이렇게 타산적인 아내에게 남편이 있는 모습 그대로의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도 그것이 아내가 용납해주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아내의 감정을 상하게 하며 원치 않는 가정 불화를 야기 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게 된다. 이러한 심리는 자녀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남편과 자녀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아내요, 어머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심한 배신을 당했다고 비통해하면서 이야기하는 부인이 있었다.
"글세 감쪽같이 나를 속여 딴 여자와 눈이 맞아 애까지 낳았어요, 어쩌면 애가 태어나 세 살이 넘도록 시치미를 뚝 떼고 두 집 살림을 해왔을까요? 더  이상 나는 내 자신이 비참해서 이  남자와는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요. 이런 일이 없었다해도 그이와 나는 살기 힘들었던 사이예요. 개천에서 용(龍)난격으로 제 남편 혼자만 어쩌다 머리가 좋아 일류대학을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좋은 직장도 갖게 되어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는데 부모, 형제는 찢어지게 가난하니 항상 우리만 바라보고 있어요, 남편은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나는 마냥 그렇게 돕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잘 사는 제 동창들 보면 공연히 심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학창시절엔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 애들이 이것보라는 듯 사는 것을 보면 너무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사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너무도 좋은 조건의  사람들에게서 청혼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 사람과 결혼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이 바보짓을 했어요,"
온갖 푸념을 하면서 남편을 공격하는 것이 있지만 이 가정의 문제는 남편에게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이 부모와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타산이 문제였던 것이다. 자신은 윤택한 가문에서 자라 좋은 학벌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타산이 남편이 행하는 효도와 형제애에 대하여 반발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아내를 신뢰하고 안심하며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것. 그러므로 자연히 부부사이에 진실은 사라지고 그 결과 아니 아닌 사람에게서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구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는 비판을 들 수가 있다. 이 비판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데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남편을 비판하는 아내가 남편의 신뢰를 받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남편의 능력을 비판하며 행동을 비판하며 심지어는 생활습관까지 비판하는 아내, 이 아내의 자기중심적 판단은 객관적인 분별을 가지고 남편이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아내는 자기편에 서서 이해해주는 아내인 것이다.
이 비판은 나는 틀림이 없는 사람이라는 교만과 내가 더 알고 있다는 자만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아무리 인간적으로 의롭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인격은 남편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자기 중심적인 판단으로 비판하는 아내의 눈은 남편과 대립하는 자리에 서서 남편의 결점만을 보게 되니 부부사이에 평화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남편의 마음은 아내를 향해 더욱 굳게 마음 문을 닫고 부부 사이에 단절의 벽은 점점 높아지고 두꺼워지는 것이다.
세번째, 감정을 억제 못하는 정서 불안한 아내는 남편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 아내의 감정이 정서적으로 불안할 때 온 가족이 남편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잃게 된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정서가 불안한 사람의 특징은 나 자신이 받는 아픔은 날카롭게 느낄 줄 알아도 타인의 감정과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둔한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남편과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이해하기보다도 자신만을 알아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인내가 결여됨으로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흐트러지거나 폭발한다. 그러니 이러한 아내는 남편을 불안하게 하고 근심은 시켜도 기쁨이나 평화는 주지 못하니 남편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남편이 신뢰할 수 있는 여인은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며 가족과 주위의 사람을 위해 인내할 줄 아는 여인이다.
현대 여성들은 과거 어느 시대의 여성보다 예민하고 날카로우며 그 능력도 남자를 능가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담대하고 강인한 여성들이 각분야에 진출하여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다. 직장 여성뿐 아니라 가정에서 주부의 자리를 지키며 남편과 자녀를 돌보는 여성들도 과거의 소극적인 여성상과는 달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그 힘을 과시하는 현대 여성들에게서 결여되어가고 있는 것은 묵묵히 인내하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강인함인 것이다. 거침없이 자신의 의사를 발포하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즉각 반발하는 공격형의 여성보다 자신의 감정을 인내로 존경할 줄 아는 여성이 더 강한 여성이요. 이렇게 강한 아내는 남편을 안심시킬 줄 안다. 이러한 인내와 자중함을 가진 아내의 인격은 남편을 신뢰하여 안심하고 말할 수 있으며, 의논의 상대로 삶을 수 있다.
네 번째, 남편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아내는 모든 가치판단이 올바른 여성이다. 가치판단이 올바를 때 올바로 아내의 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이 그릇된 아내로 인하여 그 가정은 가치간이 혼돈 되어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천한 것을 천한 줄 모르는 무분별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가치판단이 잘못된 아내를 남편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가치판단이 잘못된 아내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남편들이 실족했으며 자녀들이 잘못 양육되어 사회악을 조성하고 불행한 결과를 갖게 했는가를 우리는 매일 듣고 보고 있다. 가치판단이 올바른 아내는 생명을 위해서 생활이 있는 것이지 생활을 위해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생의 올바른 목적을 알고 있으므로 결코 남편이나 자녀를 그릇되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안심하고 의논할 수 있으며 떠맡길 수 있다. 이러한 아내는 참으로 지혜롭게 처신하면서 남편을 돕고 자녀를 키우되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는 것은 천하만물보다 한 생명이 더 귀하다는 생명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올바른 가치판단이 남편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되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내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선을 행하는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의 세 번째 조건은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여성이다.
"그런 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31:12)
한 아내가 남편에게 행하는 선이란 무엇일까?
어떤 여인은 충실히 가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하고, 어떤 여인은 남편이 하는 일을 잘 거들고 협조함으로 선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아내에게 원하는 선은 그러한 차원의 선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행하는 선은 '남편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고 악을 행치 않게 하는 여인'인 것이다.
하와의 범죄 이후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남편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고 죄악의 길을 걷게 하고 있는가? 그로 인하여 인류는 파멸의 길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하는 길은 남편에게 선을 행하는 여인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선을 행하는 여인의 아름답고 강한 믿음은 남편에게 선을 행하되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갖게 한다. 이런 여인의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에 의지하는 진실함을 나타난다. 아내가 남편에게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선물은 바로 이 선을 행하게 함이니 이 선을 행하는 자만이 참으로 남편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남편에게 선을 행하므로 불행한 역사를 행복으로 바꾸어놓는 여인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 구체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생각해 보기로 하자.
경건한 신앙을 가진 장로님과 권사님의 따님 이야기이다.
서로 사랑하며 약혼을 한 장로의 딸이 약혼자로부터 돌연히 "약혼을 파기하자"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불치의 병인 암이 이미 온 몸에 전이(轉移)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도저히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약혼을 파기하고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불치의 병이 든 몸으로 결혼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 없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신부 되는 자매는 "그렇다면 더욱 빨리 결혼식을 서둘러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약혼식을 통하여 서로 남편과 아내 됨을 약속한 것이 이미 부부 된 것이요, 결혼식은 그 사실을 선포하고 구체적인 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요 약혼식을 통하여 이미 아내로서 남편에게 마음을 바친 이상 파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부뿐 아니라 그의 가족인 보모 형제가 모두 이에 동의하여 급히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 날, 병들어 야윈 몸으로 서 있는 신랑 곁으로 사랑하는 딸을 인도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랑 곁으로 향하는 신부의 모습에서는 추호도 어두운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화창한 봄날과 같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이들의 모습에 감동하여 객석의 여기저기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식이 끝나고 친족대표로 인사를 하시는 장로님은 진심으로 기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이 결혼식으로 인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신랑은 불치의 병이든 몸이지만 그 때문에 참으로 진실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같이 모여 생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두 생명이 하나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년을 해로했다. 해도 한 생명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결코 행복한 결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단 몇 일의 결혼생활이라 해도 두 사람이 한 생명이 되는 사랑으로 맺어졌다면 그 결혼은 영원히 축복 받으며 영원히 하나되어 사는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 쌍의 신랑 신부는 진정한 사랑으로 한 생명이 되어 참 축복 받는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사랑하는 내 딸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선을 행한 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 있건 내 생명을 온전히 남편에게 의탁하는 것, 이것만큼 아내로서 남편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것은 없으며, 이것이 곧 선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는 한 동산에 남편과 같이 있으면서도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을 신뢰하지 않고, 뱀의 유혹에 따라간 하와를 생각했다.
남편에 대한 그 불신이 남편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고 스스로도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되고 그 불행이 오늘날까지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아내로서 남편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생명을 바치는 것 이상의 선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남편에게 내 생명을 바치는 것에는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라는 사실이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의지하기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치는 것도 아니요, 예속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목적은 한 인격 한 생명이 되어 사랑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졌을 때 여성은 남편의 생명 안에 거하며 바로 남편의 생명이 되는 절대적인 인권 속에 존재하게 되며,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와 대립된 위치에 있어서 행해지는 악에서 구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손을 가진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의 네 번째 조건은 부지런한 손을 가진 여성임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잠31:13)
여성의 가슴에 넘치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손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이 된다. 그리고 사랑이 뜨거울수록 여성의 손은 부지런해지며 그 손끝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
새로 태어날 어린 생명을 위하여 밤새워 옷을 준비하며 덮을 이불을 마련하는 젊은 여성의 손, 한참 자랄 고비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장만하느라 부엌에서 분주히 일하는 어머니의 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알뜰히 살림을 가꾸는 아내의 손.... 실로 가정과 사회는 이 여성의 손이 있어 존재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된 아내와 어머니의 손이라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과 자식을 위해 늘 부지런히 일하며 가정을 지킨다. 그 손을 역사적 변천이 있어도 변함이 없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요동됨이 없는 진실을 가지고 남편과 자식을 지켜왔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여성의 손이 과거와는 다른 목적을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기계문명이 발달되어 여성이 손으로 직접 해왔던 작업들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직접 수고하지 않아도 돈만 있으면 의식주 생활은 거뜬히 해결되어 과거에 비길 수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니. 여성의 손은 돈 버는 것을 우선으로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돈을 잘 버는 손을 크게 평가하게 되어 여성의 손은 돈을 움켜 주는 데는 남성 이상으로 탐욕스러워지며, 그것을 베푸는 데는 남에게는 물론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냉혹하도록 타산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손은 타인에게는 지극히 인색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낭비한다. 그러니 여성을 위한 상품들, 그것도 여성의 사치성을 만족시켜주는 상품들을 철을 타는 일 없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여성의 손의 아름다움은 그 손이 남편과 자식의 마음에 직접 수놓는 사랑과 , 그 사랑으로 집안 구석구석이 가꾸어짐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근래에는 손톱을 갈고 다듬고 피부가 상할까봐 약용화장품을 바르고 가꿈으로 손을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가꾸어본들 손 자체는 늙어 시들어 가는 것, 그러므로 오히려 열심히 가꾸어 온 손일수록 그 끝은 처량하게 된다.
갈고 닦으며 손질하여야 할 것은 손 자체가 아니라 그 손을 필요로 하는 가정이요, 교회요, 사회인 것이다.
아무리 손을 소중히 여겨 닦고 씻어도 그 손을 통해서 행복을 낳을 수 없다. 행복은 그 손이 무엇을 하냐에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손의 존귀성은 이렇게 가족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나타난다. 한 여인의 손이 무엇을 위해 수고하느냐에 따라서 가정과 사회 전반에 걸쳐 행복과 불행을 가늠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만 예뻐지도록 닦고 씻으며 가꾸는 여인의 손에서 비롯되는 소비성이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악순환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그 소비성을 파급시키니 아이들에게도 밤을 새워 만든 옷을 입히는 즐거움보다도 유명메이커의 옷을 사서 입히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내 손을 가꾸어 예쁘게 보이려하는 심리는 자기과시에서 온다. 그렇게 생활전반에 걸친 자기 과시형의 가치관은 남편에게 부당한 짐으 지우게 하며 자식들의 인격은 자기 중심적인 경쟁의식을 따라 배우며 자라게 하는 불행을 낳게 한다. 이 말에 어떤 여성은 "내게는 충분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지우지도 아니하며 아이들도 풍족한 경제적 환경에서 그만한 것쯤은 당연히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지출하고 있는 데 무엇이 잘못인가"하고 반발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들이 자각하고 명심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사치성과 자기중심적인 소비성이 다른 가정의 생활을 불행하게 하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하는 무분별한 욕구를 자극시켜, 오로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어 급기야는 혼돈 된 사회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이야기하는 어느 정밀기계공장의 젊은 사장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우리 가정은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신비한 손으로 인하여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습니다. 가난한 우리 집 밥상이었지만 겨울에는 따뜻하고 훈훈한 음식으로 풍요했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산뜻한 음식으로 모든 더위를 잊게 해주었습니다.
실로 어머니의 신비한 손은 추위를 물리쳐주고 더위를 막아주었습니다. 겨울에는 헌 실이지만 내 몸에 맞게 잘 짜주신 스웨터로 나는 추운 줄 모르고 영하의 추위 속에 지냈습니다. 다음 겨울이 되자 어머니의 신비한 손은 그 스웨터를 다른 색깔이 섞인 새로운 모양의 것으로 바꾸어 주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늘 멋쟁이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여름은 여름대로 어머니의 손에서 태어난 옷들이 나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신비한 손은 가난한 우리 집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케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이라 돈을 들여 장난감을 살 수 없었는데 어머니는 그 손으로 집안에서 못 쓰게 된 폐품을 모아 장난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가게에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장난감을 우리가 어느 정도 가지고 논 뒤에는 모두 친구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장난감을 친구에게 나누어준 다음엔 반드시 어머니는 새장난감을 만들어주셨으니까요."이번에는 어머니가 어떤 것을 만들어주실까"하고 기대하며 아낌없이 가지고 있었던 장난감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지만 풍성하게 베풀면서 살았던 부잣집같이 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굵은 못이 박힌 것처럼 거칠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때마다 가난하나 풍요로운 생활을, 그리고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손은 살아 생전에 늘 베풀기 위해서 일하셨으며 그 생이 끝나는 날까지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자신의 손이 무엇을 하고 있나 돌아보게 되며 자기만을 즐겁게 하는 일을 할 때는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이 분이 이렇게 손으로 기계를 갈며 닦으며 손에 못이 박히는 일에 기뻐하며 종사하고 있는 것도 어머니의 손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큼을 알 수 있다. 가장 우수한 기술자이며, 종업원들에게 풍성하게 베풀 줄 아는 기업가라고 존경을 받게 된 것도 어머니의 삶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윤기를 주고 비록 가난하지만 늘 친구에게 베풀며 살 수 있도록  자식을 풍요하게 키울 줄 아는 어머니의 신비한 손은 그 마음과 성품이 어떠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혜와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마음이 움직이는 손은 이토록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 사장님뿐 아니라 과거에 가난하고 어두운 시대를 산 우리들의 기억 속에 오로지 어머니의 손만은 한줄기 빛과 같이 따뜻하며 아름다운 기억을 새겨주고 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약도 살 수 없는 빈곤 속에 이 따뜻한 어머니의 손은 신비한 능력을 발휘했다. 체해서 아픈 배를 쓸어주며 "썩썩 내려가라. 엄마 손은 약손이다. 엄마 손은 약손이다"하고 쓸어주시면 신통하게도 아팠던 배가 가라앉고 편히 잠을 잔 기억이 생생하다. 성경은 짧은 구절 속에 깊은 뜻을 담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이 말씀은 여인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손길로 남편과 가족이 겨울의 추위를 막으려 더운 여름의 햇볕을 막을 수 있는 가정을 그리게 한다. 이 여인의 손에 보호받는 가정의 행복이 과소비와 경쟁으로 시달리는 온 사회의 질서를 찾게하고 천정 모르는 물가고를 잡아 내릴 수 있는 비결임을 시사해준다.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는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의 다섯 번째 조건은 "상고(商高)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고 잠언 3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상고의 배와 같아서...."즉, '교역을 위해서 오가는 상인의 배와 같아서'란 뜻이다. 교역이란 필요한 것과 서고 가진 것을 주고 받으며 교역을 계속하려면 따르는 필수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진실'과 '화평'이다.
진실하게 서로를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불신이나 불안이 추호도 없는 화평한 관계를 이루어야 교역은 울어지는 것이다.
이 교역은 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니 인간은 교역 없이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서로 주고 받는 상호협조 없이는 인간은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역을 아름답게 이루고 그것도 넓은 범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이들은 늘 그 생활이 윤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아름다운 교제의 중심역할을 하는 여성을 '행복을 낳는 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들러리의 사람들과 진실과 화평을 가지고 교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정성과 사랑을 바칠 줄 아는 여인, 이 여인의 교제 범위는 자연히 그 원을 넓히게 되며 먼데 있는 이들에게도 흠모함을 받게 되며 서로 주고 받는 아름다운 상호협조 관계가 울어진다. 이 교제가 가정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윤택하게 하며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가정은 이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므로 서로 불신과 단절의 벽 속에서 거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온갖 악순환이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아파트라는 주거환경 속에 이웃과 이웃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갖고 지내며 그러한 관계가 냉혹한 개인주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협조하며 주고받는 관계가 이루어질 때 서로 상호 협조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고의 배와 같아서 먼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고 기록된 말씀대로 생활하는 여인은 먼저 가까운 혈육과 이웃들과의 관계가 진실과 화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결혼 전에는 친 부모님과 형제들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을 받고 생활하지만 결혼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결혼생활이란 나를 온전히 남편에게 바치며 시가의 모든 가족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함으로 친가에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갚을 수가 있는 것인데 결혼해서도 주기보다 받고자 하는데서 온갖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 말에 대하여 "그것은 너무도 고루한 옛사람들의 사고에서 오는 말이며 자신의 인권을 지키며 주장할 수 있는 현대에 그러한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적인 사고에 살며 분명하게 나를 주장할 줄 아는 지식여성들이 더 인간관계 속의 갈등으로 불행한 인생을 사는 이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핵가족 시대가 되어 부모형제와의 관계도 단절된 채, 나남의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가정일수록 부부 사이와 부모 자식 사이에 단절의 벽이 높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형제들과 단절된 관계, 심지어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과도 한 마디의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려 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관계가 아이들의 인격에 무서운 악영향을 끼친다. 받아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찬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여성이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난한 청년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자란 친정과는 너무 도 다른 생활환경에 실망하여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찬 생활을 했다. 자신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남편과 시집식구들을 향한 불만이 점점 더하여 결국은 미움으로 변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한 관계는 시집식구들 사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인간 관계에 미쳤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의 요구에 맞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단절된 관계를 이루고 혹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곧 그 교제를 끊고 등을 돌리는 인간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사람이 없었으며 안심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신뢰하며 교제하는 이가 없었다. 그녀는 가깝게는 가정에서, 멀리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고독하고 불행한 여인이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서로를 위해서 나를 바치며 주고받는 신뢰관계로 변화되기 전에는 가정과 사회에 참 화평과 질서를 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신뢰와 화평이 없는 가정에 경제적 질서와 안정이 있을 수 없으며 늘 불안과 혼돈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의 비리와 사회구조의 부조리를 탓하고 내 요구를 관철하려고 아우성 치기 전에 여성들이 근시안적인 생각을 버리고 멀리 바라보면서 내 가정과 자식들이 먼저 서로 신뢰하고 서로를 위해서 사는 자기희생의 삶을 삶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정치인이 될 때  진실로 나를 바치는 정치인이 될 것이요, 사업가가 되어도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도어 이 사회는 안정과 질서를 찾아 서로 양식이 궁핍하지 않는 윤택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이 시대의 그릇된 것만 탓하고 비판하기 전에 이 시대의 주인이 될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일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이며 개인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목적을 위해서 자녀를 키운다면 이 사회는 세월이 지날수록 악순환을 거듭하며 결국에는 자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진실한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을 아낌없이 바칠 줄 아는 여성의 존재는 어느 보배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진실로 나를 바쳐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원을 넓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치어 사회는 진실한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인 여성들의 사명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복음의 힘으로 아름다운 관계의 회복 즉,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드림으로 그분의 생명이 내 것이 됐을 때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먼 곳에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 속에 영원히 거하는 자가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까이 와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바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지며 인간 사이의 인간의 관계에도 진실한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고의 배는 오로지 서로의 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양쪽을 오간다. 이러한 상고의 배같이 서로를 필요로 하여 교류하는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사명을 다한다면 반드시 풍요롭고 행복이 넘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의 자리를 지키는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의 여섯 번째 조건은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잠31:15)라고 기록된 것같이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그 책임을 다하는 여성이다. 주인의식을 상실한 여성, 즉 예속된 자아의식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행복이 태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지으신 만물을 위탁하시고 만물의 주인으로서 정복하고 지배하는 자리에 세우셨을 때 홀로 서게 하지 아니하시고 아내를 아담 자신의 몸에서 취하신 갈빗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아내는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창2:23) 바로 남편 자신의 몸이요 같은 생명임을 말해주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요 동등한 인격체요, 남편과 함께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영광과 권위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주인의식을 상실할 때 여성은 자신의 고귀한 위치를 잊고 예속된 자된, 천한 자리로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행복은 주인의식을 가진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예속된 자. 즉 종의 자리에 있는 자의 의식 속에 행복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밤이 시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라는 짧은 구절을 통해서 주인의식을 가진 여성의 인격과 그 삶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먼저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라는 말씀은 주인의식을 가진 여성의 본이 되는 인격과 삶을 가르쳐준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가족들을 위해 준비하는 여인의 모습은 가족들을 지키며 보호하려는 손길과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수고는 결코 억지로 강요당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가족들을 사랑하기에 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책임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설사 역경 속에 있다 해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다하려고 하며 때문에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적극적인 삶을 사는 여성은 역경을 이기는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된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자기를 비하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여 가족들을 불행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다. 또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지를 범하지 않으며 결코 불만이나 불평을 말하지 않는다. 주인이기에 잘되건 못되건 상관없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식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인의식을 가진 여성은 끝내 인내할 줄 안다.
그러나 예속된 자의 의식을 가진 여성은 이와 반대가 되는 인격과 삶을 갖게 된다. 예속된 자는 늘 강요당하는 수고를 어쩔 수 없이 행하며 자발적인 사랑이 없는 인격과 삶 속에 적극적인 삶의 의욕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능력도, 지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삶은 부정적이며 따라서 늘 불만과 불평이 따른다. 절대로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남에게 전가시키며 비판을 가한다.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함을 분별하며, 부리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스릴 줄 아는 분별과 능력이 있는 여성이 행복을 낳는 것이다. 스스로 해야 할 바를 아는 능동적 사고가 주인의식을 가진 여성에게 있으니 그 삶은 창의성과 진취성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그 삶은 후퇴함이 없고 늘 새로운 발전과 번영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노예적 근성을 가진 여성은 스스로 할 바를 찾아하려는 분별과 능력이 없으므로 그 삶에 창의성이나 진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속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은 영광된 주인의 자리를 부여받고 있으면서도 주인의식을 갖지 못하고 노예적 근성을 가진 무분별한 여인으로 인하여 온 인류가 불행해진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온 인류의 어머니로 성별 된 여인 하와가 이 불행을 가져온 여인인데,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을 전복하고 지배하는 권위와 특권을 받은 영광스러운 자이며 아담의 절대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피조물 중에 가장 행복하고 존귀한 자리에 있는 여인 만물 위에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그토록 존귀하며 영광스러운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여인이었고 고로 인하여 반드시 지나고 있어야 할 주인의식은 전혀 없었던 무지한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과, 자신과 한 몸인 남편 아담과의 영적 일치를 갖지 못했었다. 주인의식을 가진 여성은 당연히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며 영적 일치를 갖게 되는 것인데 하와의 무분별한 주인의식의 상실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단절되고 있었음을 에덴동산에서의 불행한 사건이 증명하고 있다.
불행으로 얼룩진 여성의 역사를 바꾸어 여성들의 인권을 되찾고자 근년에 와서는 활발한 여성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의 지위는 과거에 비길 수 없이 향상되었고 그 영향력도 매우 커졌다. 그런데도 여성들이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없음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오늘날의 세계에는 부모와 형제, 남편과 자식보다 내 감정과 내 욕구를 더 중히 여기는 개인주의적인 가장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정이 원인이 되어 점점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문제를 놓고 모든 식자(識者)들이 연구하며 방법을 모색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찾을 길 없어 속수무책(束手無策)의 형편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속된 노예근성적 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길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만물을 지으시고 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 받았다는 인간의 절대적인 존엄성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 이상의 존재요, 하나님께 속하여 주인 된 권위가 영광을 부여받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결코 피조물의 어떤 것에도 예속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진리를 비켜놓고 인간은 절대로 주인의식을 되찾을 수 없다. 모든 것에 예속되는 불행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중심적이며 현실위주의 사고의 세계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감정조차 지배할 수 없는 무력한 자가 되어 감정에 예속되어 사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고 욕망에 예속되어 사는 무분별한 인격을 소유하게 되었다.
실로 이 불행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길은 지식이나 방법이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인간 스스로가 만물의 주인이라는 주인의식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오랜 세월 동안 남성에게 예속된 역사 속에서 원망하고 비판하며 자기비하의 불행한 의식의 세계를 형성하고 살아온 여성들이 주인의식을 되찾을 때는 남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다시 주인의식을 찾아 하나님께서 맡기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럴 때 남성과 하나된 생명 그리고 하나님께 근원을 둔 거룩한 생명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치리(治理)할 줄 아는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의 일곱 번째 조건은 치리 할 줄 아는 여성이다. "밭을 간품(看品)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잠31:16)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같이 여성의 중요한 책임이 치리에 있음을 알수 있다.
행복을 낳는 여성이 "밭을 간품하여 사며"한 말은 의미가 깊다. 덮어놓고 밭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간품하여 사는 지혜, 즉 절제와 분별을 가지고 그 가정에 필요한 것을 살 줄 아는 여성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욕심에 지배되어서 사는 것도 아니요 분별없이 불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 아니요 절제와 분별을 가지고 필요와 적절한 것을 살 줄 아는 여성이 행복을 낳는 여성인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또한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라고 기록돼 있는데 번 것이라는 것은 가정을 버리고 나아가서 수익을 얻어 포도원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가정을 바로 다스려 잘 치리 할 줄 아는 여성은 남편의 적은 수익을 풍성하게 불릴 줄 아는 지혜가 있다.
밭이라 함은 삶의 터전이며 거기에 심어지는 포도나무는 가족들의 생활을 즐겁게 하주는 조건이 된다. 지혜로운 여성이 가정을 치리 할 때 그 가정의 삶의 터전은 늘 안정되며 그 생활은 늘 즐거움이 넘침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로 십만 원의 수익으로 백만 원의 효과를 올리는 치리의 능력을 가진 여성이 있는가 하면 백만 원의 수익을 가지고 십만 원의 가치도 못 되게 허비하는 어리석은 여성도 있다. 즉 지혜로운 여성은 작은 것으로 큰 행복을 창조해내며 어리석은 여성은 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은 행복조차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것으로 큰 행복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은 행복의 참 의미를 아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그 본질을 아는 여성만이 작은 것으로 큰 행복을 이루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복의 본질은 결코 개인적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가족들과 하나된 관계성 안에 있다는 것을 본문의 말씀이 시사해주고 있다. "밭을 간품하여 사며"이 밭은 결코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요, 가족을 위한 것이요, 가족들의 공동의 삶의 터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여성, 작은 것으로 큰 행복을 창조해내는 능력을 가진 여성은 진정으로 가족을 위해 자신의 존재가 귀한 것이며 가족의 행복이 바로 자신의 행복임을 알아 가족을 위하여 사는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은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여 사는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여성인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여 생각하며 행동하니 결코 개인의 욕망이나 욕구에 지배받아 자신조차도 가늠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것은 혼돈과 무질서 속에는 거할 수 없는 것이다. 조화와 질서 안에서만 행복은 존재한다. 그리고 조화와 질서는 아름답고 의로운 관계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인격과 개인주의적 삶을 갖는 이는 결코 이 아름답고 의로운 관계 속에 거할 수가 없다.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이 여인은 동거하고 있는 시어머니와 진종일 한 집에서 얼굴을 대하기가 싫어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직장에서 이 여인은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지위도 높아지고 받는 보수도 고액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편보다 고소득을 얻게 되니 이 여인은 가족을 자기 혼자 살리고 있는 듯 교만해졌다. 집을 넓혀갈 수 있었던 것도, 남부럽지 않은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도 자신의 수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가시가 되어 남편과 시어머니를 찌르고 가정은 평화와 즐거움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정의 괴롭고 무거운 분위기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잘못으로 공격하고 자신이 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 여인은 집을 뛰쳐나와 별거를 하기에 이르럿다. 시어머니는 할 수 없이 며느리가 두고 나간 어린 두 손자와 손녀를 돌보아야 했다. 그런데 어린것들을 집에 두고 장을 보러 갈 수가 없어 데리고 다닌 시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어린 자녀와 함께 생명을 잃고만 것이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자신이해야 할 사명과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없었던 여인, 자기중심적인 인격과 개인주의적 사고로 인하여 시어머니와 남편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린 이 여인은 결국 사랑해야 할 가족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단절을 갖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낳고 만 것이다.
여성의 사명과 의무는 그 가정에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를 우리고 그것을 지키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먼저 가족관계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어리석은 여인의 고민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여인은 일용할 약식에 근심이 없으며 성실한 남편과 착한 자녀를 둔 행복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대학을 나온 그녀의 동창들의 호화스러운 생활 때문에 비참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자와 잘 사는 동창들의 처지를 비교하고 자신이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낙담하고 남편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화살을 쏘아댔다. 이러한 그녀로 인해 남편과 자식들의 마음은 멀어져가고 그 가정 안에 가족끼리 오가는 정다운 대화는 없어졌다. 서로서로 마음의 벽을 쌓고 살며 남편과 자녀는 그 괴로움을 밖에서 해소하려고 하다보니 생활이 물질서해 지고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무질서해져서 살림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여인은 그 불행이 자신으로 인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한 결과 정신적 질환을 얻는 몸이 되어버렸다.
이 여인의 경우를 통해서 가정을 바로 치리 할 줄 아는 여인, 그 손길로 즐거움의 포도나무를 그 가정에 심는 여인은 가치관이 올바른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질은 무엇에 필요하며, 또 내 가정에 얼마만큼 필요한가를 간품(看品)할 줄 아는 여인이 가정과 가족들을 바로 치리하며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
참으로 무질서와 혼란 된 사회를 구할 수 있는 길은 행복을 낳는 지혜스러운 여성에 의해서 가정이 먼저 바로 치리 되며 그 손길로 심겨진 즐거움에 온 가족이 만족함으로 모든 욕구불만이 해소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은 생명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알고 있으므로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비교하여 자식들에게 부당한 짐을 지게하고 불행에 몰아넣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다.
자식들의 인생을 잘 치리 하여 인도하므로 자식들에게 칭송을 받는 여인이 된다. 또한 내 남편을 남의 남편과 비교하므로 남편으로 하여금 절망케 하여 절망하는 남편의 불행한 아내가 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않는다. 내 남편과 자식. 그리고 모든 가족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을 아는 여인은 자신을 가장 고귀한 자리에 살게 할 수 있는 행복한 여인인 것이다.
약한 자의 대명사인 여자. 그러나 그 여자가 만물을 지배하는 남자에게 없어서 아니 될 돕는 배필로 삼으시고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바로 돕고 그 가정을 올바로 치리 함으로써 인류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아는 교회여성이 모든 여성의 빛이 되어 지혜스러운 아내와 어머니가 되어 가정을 바로 치리 해야 할 사명을 하나님은 위탁하고 계시다는 것을 자가해야만 한다.

힘있고 강한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의 여덟 번째 조건은 힘을 가진 여성이다.
"힘으로 허리를 묶으며 그 팔을 강하게 하며"(잠31:17)라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 가정을 지키며 남편과 자식들에게 행복을 주는 여성은 힘있고 강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약하며 힘없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 아니라 분명히 힘 잇는 허리와 강한 팔을 가진 여성이라고 이 말씀은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자칫하면 힘있고 강한 여성이라면 능력 있고 생활력이 강한 억척스러운 여성을 상상하게 되는데, 성경이 말하는 힘있고 강한 여성은 이러한 여성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힘있고 강한 여성을 이해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힘과 강함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을 부정한다. 인간적인 것이 바로 죄요, 인간중심이 죄의 본질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죄의 본질엔 불신으로 인한 두려움이 있고 이것들로 인하여 온갓 죄악이 발생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계21:8) 반대로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 선 사람에게 주신 것은 다음의 말씀과 같다."...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라와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힘있고 강한 여성은 철저하게 자기 부정을 하므로,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 안에 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영을 가진 여성은 힘있고 강한 여성이며, 다음과 같은 강한 힘을 행사한다.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 힘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 안에 거하는 여성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평화를 이루며, 이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역경이나 고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 분열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러한 여성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가정의 평화를 지켜내고 남편과 자식의 마음에 평화를 준다. 현대는 여성에게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주어졌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능력과 힘이 두드러 진다.
이 힘을 얻는 길은 여성 스스로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의식의 세계를 버림으로 얻을 수 잇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된 관계 속에 있다.
다시 말하면 여성 스스로 자기중심적 사고와 의식의 세계를 버릴 때 주시는 하나님의 영과의 화합, 거기서 비롯되는 평화를 내 것으로 한 여성에게만이 평화를 주고 평화를 지키며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만드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2.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평강케 하기 위해 부르셨고 그 평강이 모든 사람을 주장하게 하심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세계가 이루어지는 진리를 생각할 때 이 평강의 능력을 가진 여성들만큼 힘 있고 강하며 또 절대적으로 존귀한 존재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강한 자의 능력과 힘으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시지 않는 다. 힘으로 이룬 평화는 반드시 또 다른 힘에 의하여 파괴되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평화를 가진 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한 자인 여자를 통해서 평화의 세계를 이루시고자 하신다. 약한 자인 여자에게 평화를 주시어 그 평화로 '강하다 일컫는 자가 절대로 이루지 못하는 평화'를 이루고자 하시는 오묘한 섭리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1장 22절의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여자란 약한 자를 나타냄이니 하나님은 약한 자의 가슴에 있는 평화로 강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약한 자여, 약하다고 방황하여 불신의 길로 가지 말고 약하기 에 하나님께 의탁할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로 힘을 삼고 강한 자라 일컬음을 받으며 평화 없는 자들을 그 평화 안에 거하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일이요, 이것으로 평화와 안식이 넘치는 새 세계가 탄생한다고 하신 말씀에 어찌 가슴이 뛰지 않으랴.  이 말씀을 통해서 약한 자라 불리우는 여성들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사명을 자각할 수 있으니 평화를 이루는 일인 것이다. 이 평화를 이루는 일을 여성 각자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남편이 지위와 명예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그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이요, 자녀들을 명문학교에 보내고 좋은 학벌을 차지하게 하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은 자녀들 마음에 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부귀도 영화도 아니요, 지위도 명예도 아니요. 바로 평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과 그 본질은 평화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평화는 어떠한 사람도 용납하고 안고 품을 줄 아는 강한 팔과 가슴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난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연약한 여성에게는 평화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남편의 잘못도 자식의 잘못도 용납 못하는 약하디 약한 여자에게 결코 평화는 머무르지 않는다. 거리를 다니면서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이 거리를 걷는 여성들의 표정에 평화가 넘쳐흘렀으면..."하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거리를 걷는 여성들 중에서 평화가 넘쳐 있어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평강을 주는 얼굴을 찾아보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손톱만큼도 남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차갑고 굳은 표정들은 혹시 잘못하여 조금이라도 부딪히고 밀치는 일이 생기면 칼날 같은 감정을 곤두세워 공격해올 듯하다. 그러한 여성들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 가정을 생각할 때 마음은 암담해진다. 그 가정에 평화스러운 대화가 있을 리 없으며 평화스러운 대하가 없는 가정에 진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에는 반드시 거짓이 따르는 것, 그러므로 가보지 않아도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거짓으로 자기를 지키려하며 자녀들은 엄마의 눈치를 살펴 적당히 꾸며대는 말로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할 것이니 진실이 사라진 가정에 행복도 사랑도 있을 리가 없다.
그 가정은 분열과 단절의 불행만이 있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암담해지는 것이다. 실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곳은 평화를 거부하는 절망의 세계가 된다는 사실을 현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평화스러운 생명의 빛을 거부하여 표정 없는 인조 인간같이. 또는 심장이 멈추고 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색(死色)의 얼굴을 강조한 화장들, 질서와 조화를 무시한 복장들, 그리고 정상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분열증상의 예술들....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평화의 절대적 고귀성과 그 절대적인 힘과 역사를 자각할 줄 모른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나 이 자각은 능력 있다는 정치인이나 학자 또는 군사전문가나 과학자들이 자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힘 있노라"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을 통해서 인류의 평화도 행복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약하기에 누구보다 평화를 갈망하고 찾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여성'에게 임한다. 그리하여 평화를 이루는 사명을 주시고 그 가정을 살리며 거기에서부터 인류를 살리는 새 역사를 시작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평화와 행복을 이루는 여성에게 인류를 다시 살리는 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힘이 있는 여인에게 반드시 따르는 것이 슬기이다.
남편을 바로 도우며 자식을 바로 키우며 이웃을 위하여 필요한 존재가 도는 여인이 모든 면에 화평 스러운 관계를 이루는 데 절대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 슬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기로운 여인을 찾아보기 힘들고 슬기롭지 못한 여인이 많음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남편으로 하여금 나 외에는 부모와 형제도 사랑할 수 없도록 하여 절대로 끊어서는 안될 핏줄관계를 단절시켜 천륜을 범하게 하는 아내, 나와 내 자식만을 위해서 일할 것을 강요하며 그 외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희생이나 봉사는 용납할 수 없는 아내, 남편은 내 가정에만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하므로 모든 대인관계를 이기주의로 대립하게 해서 불행한 존재로 만들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 가정에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 가정에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아내. 자신의 성공만을 목표로 하여 교육시키며 그 뒷바라지를 하여 키운 자녀가 극도로 이기주의적인 인격으로 성장한 뒤엔 결국 부모와도 단절된 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어머니, 이런 여인들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가, 이로 인하여 대립하고 분쟁하여 황폐해 가는 사회에 남편과 자식에게 참 지혜를 제공하고 모든 이와 평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슬기로운 여인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에게나 있는 힘이 아니다. 남편과 자녀에게 지혜를 제공하고 모든 이로 화평케 하는 평화를 창조해내는 아내, 사랑으로 인하여 일하는 힘의 팔을 가진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다.


사랑 받게 하는 아내

행복을 낳는 아내는 가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되게 한다. 사랑하는 가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할 가족사랑이요, 영원히 변치 않는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독점이 되어도 독선이 도어도 안 된다. 사랑한다면서 독점하고자 할 때 그리고 독선을 행할 때 온갖 불행과 부작용을 일어나게 한다.
진실한 사랑엔 절대로 독점이나 독선이 있을 수 없으며 사랑하는 자를 모든 이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며 사랑 받는 자가 되게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다른 이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자가 되게 하며, 또는 사랑해야 하는 자를 다른 이에게 비판받도록 만드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때가 많다. 전 재산을 바친다해도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희생이 있다해도 사랑하는 자가 모든 이에게 사랑 받는 자가 되게 하지 못하면 그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된다.(고전13:1-3) 
시부모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 받게 하는 며느리, 남편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 어디에 가든지 어떤 자리에 서든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는 아내,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게 하는 어머니, 이러한 여성으로 인하여가정과 사회는 안정되고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곳에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지적(知的) 분별을 지니고 있다 하는데도 가정과 사회 속의 인간관계는 불신관계를 이루고 삶에 있어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하고 있음은 사랑이 학력이나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다.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은 여성이라 해도 가지고 있는 성품이 자기중심적인 것이고, 그로 인하여서 가족들에게 상처를 줄지언정 평화와 기쁨을 줄 수 없다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여성, 그래서 사랑으로 행할 줄 모르는 여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통해서 사랑이란 성품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언 31장 18-25절의 말씀은 가족으로 하여금 모든 이의 사랑을 받게 하는 여성의 기본적인 성품이 소개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믿음에서 비롯된 성품인 것이다.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18절)라고 기록된 대로 그 가정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이라는 어두움에 덮히지 않게 하고 늘 밝은 등불이 있게 하는 여성이다. 등불은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늘 밝은 여성자신이며 그 빛은 그녀의 믿음에서 오는 빛인 것이다.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119:105-112) 이 말씀대로 말씀에 의지하고 의심치 않는 자, 말씀 안에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등불이 되어 흑암을 비추되 결코 어두움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
믿음에서 비롯된 여성의 성품이 얼마나 고귀하여 아름다운 것인가를 본문의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다.
18절의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 깨닫고..."즉 물질의 교통에 있어서도 무분별하지 않고 이롭고 해로움을 가릴 줄 아는 여성, 19절의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가족을 위해 근로함을 즐기는 여성, 20절의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에서처럼 그 마음 긍휼이 있어 간곤한 자 궁핍한 자를 위해 아낌없이 바칠 줄 아는 여성, 21절의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가족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며..." 와 같이 그 여성의 믿음이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되 가족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홍색 옷,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변화 받은 성스러운 성품을 옷 입게 하는 여성, 22절의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자신의 본질적 성품을 위하여 가장 겸손하며 정결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여성, 이러한 성품을 가진 여성이야말로 남편으로 하여금 "그 땅의 장로들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사람의 아는 바 되는..."(23절) 사람이 되게 하는 여성, 즉 남편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자리에 서게 하는 여성이다.
이렇게 진실한 믿음을 가지 여성의 성품은 가족을 비롯하여 관계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거룩한 변화를 일으킨다.
진실한 믿음은 먼저 지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성품을 형성하고 그 성품으로 관계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되는 관계를 더욱 변성시킨다. 그러나 그릇된 믿음은 편협한 교리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거기에서 비롯되는 독선적인 성품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비판하며 정죄 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품은 관계를 맺는 이들로 하여금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졌는가. 또는 그릇된 믿음을 가졌는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소망을 주는 아내

가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랑 받고 모든 이의 사랑을 받게 하는 여성은 그 겸손한 성품, 베옷으로 표현된 자기부정에서 오는 겸손과 순종의 성품이 모든 이를 맺는 띠가 되어 멀리 있는 자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관계 맺게 함을 "베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고에게 맡기며..."(잠31:24)하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말씀에 겸허하게 자신을 맡기며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여인의 성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역서를 시사해주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겸허와 순종이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에 웃으며..."(25절)하는 데까지 이르게 됨을 가르쳐주신다. 참된 능력과 존귀는 베옷을 입고 통회하는 성품, 그 통회가 있기 때문에 진실하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로부터 시작되어 그 성품과 삶이 모든 이에게 영향을 끼치며 역사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인격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단절된 것에는 결코 겸허와 순종에서만이 나오는 능력과 존귀의 성품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생각과 현실주의적 삶을 살뿐 결코 가족들에게 소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온전히 말씀에 맡기는 겸허한 성품을 가진 여성,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여성은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말씀에 약속된 후일의 영광과 인식을 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후일을 생각하며 웃을 수 있는 여인, 이 여성이 참으로 행복한 여성인 것이다. 후일의 소망을 가진 여성이 참된 능력을 가진 여성인 것이다. 이 여성만이 가족들에게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소망을 가진 여성만이 참된 지혜를 가진 여성이며 참된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여성인 것이다.
26절의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는 가족을 지킬 줄 아는 아내와 어머니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다.
무섭도록 이기주의가 되고 현실위주의 삶을 사는 여성들에게는 결코 후일을 생각할 중 아는 지혜도 인애의 법을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 만족과 물질적 충족만을 추구하는 가치관에 사는 여성들이 아무리 고학력을 통한 교육을 받았다해도 이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말씀을 믿고 신뢰하되 온전히 의탁하는 여성, 그래서 현실의 삶의 과정일 뿐, 참된 삶은 그 과정의 끝에 있는 것, 그래서 말씀에 약속된 그 후일을 현재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여성, 이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지혜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가진 여성이 지키는 가정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가족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자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이에게 참된 지혜와 인애를 베풀 수 있는 성품과 인격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성품과 인격을 사랑하신다. 사람들은 이 성품과 인격을 필요로 하며, 이 성품과 인격이 사회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이 있는 곳에 참사랑은 존재한다.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잠31:28-29)
게을리 얻은 양식이란 사랑이 없는 손으로 공급되는 양식인데 참 사랑의 손을 가진 여성에게서 이런 아내와 어머니의 사랑을 양식으로 하여 사는 가족들이다. 세상에 똑똑한 여성이 많이 있고 사회사업가, 자선사업가, 교육가 등으로 일생을 바치는 여성은 많이 있지만 그들은 가족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양식으로 삼아 먹게 하는 여성만큼 뛰어나지 못하다. 그 이유는 사회는 사회사업, 자선사업, 교육사업으로 평화와 기쁨과 참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요, 가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을 양식으로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족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 받고 그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는 평화와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세계로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정을 바로 지키는 아내와 어머니보다 뛰어난 여성은 없다.
가정은 하나되어 영원히 아름답게 번성해야 될 인간관계의 기본 단위가 된다. 그러므로 가정을 비켜놓고 인류의 행복, 사회질서의 회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그 가정의 행 불행을 좌우하는 아내이며 어머니인 여성의 존재는 절대적인 존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31:30-31)
행복한 가정을 낳는 여성의 절대적인 조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만이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인격을 소유하며 거기에서부터 가정의 행복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행복은 이렇게 자신의 성품과 인격에서부터 시작되며 열매를 맺는다. 가정의 행.불행은 여성 자신의 열매인 것이다.
도시화되는 사회 속에 여성들의 자아표현이 강해지고 미적 표현이 말씀을 떠난 인간 중심적인 것이 됨으로 하나된 공동체이어야 할 가정은 속박과 대립에 갈등하며 가장 이기적이며 타산적인 인간들의 동거처로 변질되고 있다. 이러한 가정의 모습이 바로 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모든 이의 칭찬과 칭송을 받으며 가장 존귀한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성인 것이다.
감동스러운 결혼식에 두 번 참석한 일이 있었다.
첫 번째 결혼식은 크리스챤인 처녀와 믿지 않는 청년의 결혼식이었다. 그 여성을 생명 다해 요청하는 청년에게 그 처녀는 결심했다고 한다. 그 가정에 선교사가 된 심정으로 결혼하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가정에 시집을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온전히 나를 죽임으로서 갈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선교사의 삶인 것이다. 이 처녀가 그렇게 결심한 것은 그 청년의 구혼을 거절하면 그의 인생은 그릇될 것이라는 근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인생을 그릇되게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행복이 있을 리 없으나 한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죽음은 맹목적인 감정에서 오는 죽음이 아니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명의 절대가치를 아는 자만이 갈 수 있는 죽음의 자리인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 처녀로 인하여 그 청년만이 산 것이 아니라 시부모와 형제들까지 생명 가진 자 되며 그 처녀는 칭송 받는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 높임을 받고 있다.
또 하나는 약혼한 후 발병하여 불치의 악성종양으로 진단을 받은 신랑과 그래도 결혼할 것을 원하되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결혼하는 신부의 결혼식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부의 결혼관은 '결혼생활은 이 땅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 속에 계속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얼마나 결혼생활을 오래 했는가가 문제가 아니요, 진실로 하나가 된 부부였는가가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진실로 하나된 관계가 영원한 생명 속에서 무한히 번성하는 축복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손톱만큼의 그늘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꿈과 소망을 안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신부를 통해 타종교를 믿고 있었던 가정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의 지혜와 능력, 그것이 모든 이에게 행복을 주는 원동력이 됨을 가르침 받는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에게 행복을 낳는 성품과 인격을 형성하는 10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여성을 가장 아름답게 하고 고귀하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절대조건인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여기에만 여성의 온전한 이권부활이 있는 것이다.


                               차윤순/소설가, 일본순회선교사

 

 

출처 : 치유사역
글쓴이 : 병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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