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 그리스도론 ) --> 서론(Introduction) 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수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묻고 신앙고백을 그 물음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고백한 그대로 살았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고백을 실천하다 순교한 주의 증인 이었다. 그는 1906년 2월4일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1945년 4월9일에 나치에 의해 처형되어 그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나인홀드 니버는 본회퍼를 순교자라 칭하면서 그이 삶을 ‘현대의 사도행전’ 이라고 하였다. 1. 그리스도론의 물음의 전개 그리스도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와 이야기 그리고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로고스 론이다. 그리스도론은 학문자체이다 .그리스도론은 외적으로 보자면 초월성을 통해 학문의 중심이 된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가 되는 로고스는 인격이다 이 인간은 초월적 존재다. 초월은 항상 우리의 사고의 전체로서 존재하며 결코 증명될 수 없다. 교회의 영역 내에서 실행되는 학문만이 그리스도론이 모든 학문의 중심을 이룬다는 사실에 동의 할 수 있다. 모든 학문적인 물음은 두 가지로 소급할 수 있다. 첫째는 물음은 원인이 무엇인가? 둘째의 물음은 의미가 무엇인? 이다 첫번째 물음은 자연가학의 영역을 두 번째 물음은 정신과학의 영역을 포괄한다. 자연과학에서는 다른 대상들과의 인격적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바면 정신과학에서는 다른 대상과의 의미맥락 속에서 이해될 때에만 파악할 수 있다. 양자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이 내가 알고 있는 질서에 어떻게 편입되는 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대상을 이와 같이 그어떤 편입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은 그리스도론 물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론의 대상은 그의 가능성과 그의 어떻게 그리고 그 인간의 내재적 로고스를 통해 규정되고 인식되며 파악된다. 마지막 전제는 인간의 로고스에 의해 규정된다. 마지막 전제는 인간적인 로고스에 의해 규정된다. 인간로고스가 죽었고 심판받았으며 지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로고스는 자신을 부정함으로서 그의 주장을 앞지른다. 이것이 로고스이 능역이다. 로고스의 자기부정이란 곧 자기긍정을 의미한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적 로고스에 대한 심판자로 자처하면서 다음과같이 말하면 어떤 이리 생기는가? “나는 진리요 나는 인간적 로고스의 죽음이며 나는 신적로고스의 생명이고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인간은 죽음을 피해갈수 없으며 자신의 로고스와 함께 내 손안으로 떨어 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여기서는 단지 ”다신을 누구십니까? 라는 물음만이 가능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하나님 자신입니까? 그리스도론에서는 오직 이런 물음만이 중요하다. 일상 언어 속에서도 당신은 누십니까? 라는 물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물음은 때때로 어떻게 물음으로 용해되어버린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말해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한 교회에서 인간로고스는 물음을 제기한다. 예수그리스도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론의 물음은 본질상 존재론적 물음이다. 여기서 이 물음은 인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주위 너머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물음으로 존재하게 된다.
실존의 물음은 인간의 초월 물음이다. 초월은 내게 주어진 존재의 한계이다. 나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나의 실존을 의문 시하는 물음은 동시에 초월에 대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오직 초월로 부터만 내 고유란 존재가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누구십니까 물음은 동시에 초월과 실존에 대한 물음이기도하다. 누구십니까 물음은 인간에 의해 대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실존은 자신의 테두리를 빠져나올 수 없으며 전적으로 자신에게 예속되어 있고 자신 안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분으로 인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로써 그리스도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역질문을 받는 사람의 물음이기도하다. “누구-물음”은 오직 이 물음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곳에서만 –예수에게 제기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예수를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인간을 끝장내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누구-물음”은 오직신앙 속에서만 그 질문의 답을 가지고 있는 제기될 수 있다. 그리스도론의 물음이 우리 로고스의 물음으로 남는 한 그 물음은 “어떻게- 물음”의 모호성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리스도론의 물음은 오직 신앙의 행위 속에서만 학문으로서 “누구-물음”을 제기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아들자신이 최고의 권위가 된다. 그 곳에서는 이제 당신이 무엇이냐?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 물음이 물어지지 않는다. 그 곳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에 개한 물음이 제기된다. ) --> Ⅱ.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사역이 인격을 해석하는가 아니면 인격이 사역을 좌우하는가? 루터는 말한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인격에, 즉 인격이 선한지에 달려 있다. 인격이 선하면 사역도 선하다는 것이다.비록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러나 사역이 선하다 해도 그 사역으로 인격을 평가 할 수 없다. 선한 사역처럼 보이는 것도 때로는 악마의 사역일 수 있다.천사 탈을 쓴 악마도 있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다른 이론들은 모두 인간을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행위 의인 사상으로 빠뜨린다. 루터의 사고에서는 인격이 사역을 해석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덧붙여야한다. 인격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인격 외에 다른 길로 사역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인격으로 나아가는 길은 신비로 가득 찬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만 열려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하나님을 닮아가거나 본받아야할 필요가 내게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사역 속에서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 것을 행할 수 없었던 자로서 만나진다. 나는 이러한 인식과 이러한 사역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내 죄는 용서되고 나는 죽음이아니라 생명 속에 거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옛 세계 속에 사라져가든지 아니면 생명의 새세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지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달려있다. 오직 그의 인격이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를 내게 계시하시는 장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만 그의 인격과 사역이 내게 해명될 수 있다 ) --> 제1부 현재하는 그리스도-나를 위한존재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한 예수는 동시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현재하는 교회 내에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현재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현재를 그로부터 나오는 영향력 즉 공동체에 이르기 까지 확장되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현재를 그리스도 자신이아니라 그의 역사적이며 효율적인 활동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역동적으로 사고되며 역사적 네너지 그러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전달되는 에너지로 해석된다. 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형상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그리스도상이든 아니면 그리스도 내적 삶에 대한 형상 이든 간에-거듭 새롭게 초역사적으로 표상하려 했다. 사람들은 여기서 이 형상을 통해 결국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려했다. 바로 여기에 이러한 그리스도론의 오류가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본질적 힘이지 인격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의 인격이 아니라 행위로 파악 된다. 이러한 힘은 –그의 역사적 힘이든 아니면 새롭게 빛을 발하는 이상적 예수의 형상 즉 이상적인 힘이든 간에 상이하게 사고될 수 있다. 이렇게 표상하는 현재의 그리스도론은 잘 못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인격이 아니라 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본질적으로 힘이라면 그의 존재는 행위 속에서 소진 된다. 이러한 사고가 거부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현재의 개념을 승천 개념으로부터 전개시키려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써 현존하는 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계셨을 때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분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기에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리스도가 멀리 떨어져 계시기에 그리스도의 편재가 가능해 졌다는 사실을 말한다. 학자들은 부활을 제처 놓으며 슐라이어마허 같은 신학자들은 부활을 상징화시킨다.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현재한다는 것은 동시적으로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며 부활하신 예수도 인간예수로 존재 하신다 .그는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현재적일 수가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현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강요한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현재적일 수 없다. Ⅰ그리스도의 모습 1,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1)그리스도를 말씀이라 함은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말한다. 진리는 오직 말씀 안에서만 존재하며 말씀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영은 말씀으로만 힘과 행위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 좌우의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쪼개기 까지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파괴시키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파괴시키는 섬광과 살리는 비를 갖고 계시다. 2)그리스도가 말씀이며 ef이 아니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 때문에 존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로고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로고스를 안에서 인간을 만난다. 따라서 인간은 호모사피엔스다 인간 로고스의 진리는 근원적으로 말씀 안에 존재한다. 3)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 로고스와 구분되며 분리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을 향한 살아 있는 말씀의 형태로 있는 말씀이지만 인간의 말은 관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계시의 우연성과 말씀을 통해서 인간에게 묶여진 속박을 표현한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4)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하나님 개념이나 도덕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책임으로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을 걺이 중요하다. 이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계명인 동시에 용서라는 명제의 의미이다. 5)말씀과 그리스도의 인격의 관계는 상이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관념 자나 운반자나 예언자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것이야 말로 인격 속에 계신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간주된다. 6)인격 안에 말씀인 그리스도교회의 말씀 속에서 또는 교회의 말씀으로 현재한다. 그의 현재는 본질상 설교로서의 현존한다. 그의 현재는 힘이나 객관적 영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가 .이러한 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ㅡ그러나 그리스도의 현재는 설교다. 그렇지 않다면 설교는 종교개혁자들이 부여했던 독점적인 지위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설교는 우리교회의 빈곤함인 동시에 부요함이다. ) --> ◇성례전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말씀이며 성례전 또한 전적인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례전내의 말씀은 육신이 된 말씀이다. 예수그리스도로서의 ㅅㅇ례전은 본질적으로 말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일반적인 진리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맞서 성례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주장한다. 성례전이란 비신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신체 속에 감춰져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2의 성육신의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성례전은 그리스도의 인간화가 아니라 하나님-인간이신 분의 궁극적인 낮아지심이다. 개신교의 신학에서는 잘 못된 물음으로 인해 생겨난 물음으로 인해 생겨난 물음의 미로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나를 위한 존재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루터는 하나님을 새장 속에 있는 새처럼 공간적으로 표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개혁교회는 그리스도가 로고스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 전 밖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로고스의 신체성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개혁교회의 물음에 편재론으로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인간 몸으로서 그리고 신성과 교류 속에서 신적속성도 받아드렸다. 그리스도의 몸은 신체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동시적으로 영광의 형태로서 현존한다. 부활한 몸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현존한다. 도처에 존재하면서도 파악할 수없이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자루 속에 지푸라기가 들어가 있듯이 빵 속에 들어가 잇는 분이 아니다. 속(in)에 라는 단어는 신학적이며 영적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현재한다. 그러나 오직 자신을 계시하는 곳에서만 즉 그분의 말씀 속에서만 존재한다. 본회퍼는 루터의 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루터는 “중요한 것은 오직 계시뿐이다 그분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분이 자신을 너에게 계시하거나 너에게 말씀을 통해 빵을 해석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분을 더듬어 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자신을 너에게 계시해주기를 원치 않는다면 당신은 그분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현존하느냐는 물음에 두 가지 상이한 대답을 내놓았다. a)실체적의미의 편재론 b)그리스도는 오직 그분이 너에게 현존하려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임의적 현존론 그러나 이 두이론은 형이상학적 실체화에 불과하다. Ⅱ.그리스도의 위치- 그리스도의 장소적이며 시간적인 우연성이 부활하신 그분의 인격으로서의 실존반식임을 신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어디에 계신가? 나를 위해 내가 있어야할 곳에서 내 자리에 있다. 우리의 실존의 중심은 우리 인간성의 중심이 아니다. 이러한 진술은 심리적인 진술이 아니라 존재론적이며 신학적 진술이다. 왜냐하면 이 진술은 우리의 인격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선 우리의 인격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중심이 아니라 신앙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중심 이시고 역사의 중심이며 자연 중심이시다. ) --> 본회퍼의 그리스도론 이라는 신학의 중신주제를 읽으며 이 책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상들 가운데 본회퍼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현존사상을 새롭게 하였다. 본회퍼는 루터의 그리스도론은 루터의 입장에 서있으며 바르트 부르너 등과 가깝게 접촉했고 교회의 일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의 성만찬 사상은 루터적 원리위에서서 개혁주의 신학의 공격에 대해 루터교회의 편재론을 변호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현재에 관심을 가졌으며 후반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가 젊은 나이에 순교하지 않았다면 재림에 대해서도 다루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가 무엇인가를 했는데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물었다 그는 예수를 중심 중보자로 파악하였다. 예수는 나를 위한 누리를 위한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이다. 이 책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신앙 확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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