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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잃어버린 한국인

맑은샘77 2019. 8. 10. 23:54

'관계'를 잃어버린 한국인

김태훈 기자 입력 2019.08.10. 10:08

               

[경향신문] OECD 국가 중 공동체 부문 수년째 최하위… 청년층 이성교제 기회마저 줄어

한 유튜버가 서울 강남역 일대에서 리얼돌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돈과 시간이 없으면 인간관계도 맺기 어려워진다. “1인가구와 혼밥, 혼술의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관계’는 이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재화를 뜻하는 ‘관계재’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한다.” 노혜진 KC대학교 교수(사회복지학)는 빈곤과 관계 단절이 이미 한국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현상의 양면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모태솔로’를 자처하는 청년층이 늘어난 현상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지는 정도를 넘어서는 셈이다. ‘외로움’이란 감정으로 나타나는 빈곤의 한 단면이 사회 곳곳을 잠식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리얼돌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인의 인간관계 빈곤 또는 단절과 연결될 수 있을까. 리얼돌이 진짜 사람의 모습을 더욱 정교하게 재현할 정도가 되고, 보다 다양하고 진전된 기술이 적용된 ‘섹스로봇’들이 세계 곳곳에서 개발되는 양상은 단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산업이 발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미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통해 성적 대상도 보다 입체적이고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서비스 업체들이 자리를 잡은 현실도 단지 기술 발달만으로 관계 빈곤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로봇 또는 가상현실 등을 통해 이뤄지는 성관계가 거꾸로 인간관계의 근본적 형태를 바꿀 수도 있다는 지적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한국인 삶의 만족도 10점 만점에 5.9점

문제는 향후 로봇과의 성관계가 어떤 양상으로 변형될지를 차치하더라도 이미 한국 사회가 외로움에 익숙해진 관계 빈곤 사회라는 점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데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들의 각종 사회적 지표들을 취합해 비교 공개하는 ‘더 나은 삶 지수’를 보면 한국은 공동체 부문에서 줄곧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 각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원망이 갖춰져 있는지에 대한 이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40개국 중 40위를 수년째 지키는 중이다. 한국인의 21.6%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이 되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이 전혀 없다고 답한 조사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반영한 듯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 중 5.9점으로 33위에 머물렀다. 이전 조사에서 OECD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했던 데 비하면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하위권이다. 관계 단절이 미치는 영향이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불협화음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OECD의 <삶의 질(How’s life)> 보고서 최신판인 2017년도 자료를 보면 법원까지 가는 소송이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분쟁을 겪는 비율은 한국이 34%로 가장 높았다. 특히 ‘사업 및 고용’, ‘이웃 및 주거환경’ 문제로 분쟁을 겪은 비율이 각각 10%, 6%로 다른 나라들보다 높아 한국 사회의 가장 주된 일상적 갈등요인으로 나타났다. 요약하면 일을 하는 직장에서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집에서나 크고 작은 갈등과 다툼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많은 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은 받기 어려운 사회라는 점이 통계로 드러난 것이다.

한국인의 전반적인 인간관계가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다양한 어려움에 노출돼 있다는 점은 청년층의 이성교제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이 교제의 어려움으로 직결되는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성호 연구위원이 올해 발표한 ‘청년층의 경제적 자립과 이성교제에 관한 한·일 비교연구’ 보고서를 보면 이성교제를 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남성 33%, 여성 37%에 불과했다. 30∼34세 남성의 이성교제 비율은 31%이지만 35∼39세에서 14%로 절반 아래까지 떨어졌고, 여성은 비율이 감소하는 연령대가 더 낮아져 25∼29세 41.8%에서 30∼34세 29.5%로 급감했다.

분석 결과 이성교제 여부에 영향을 주는 요인 가운데서는 경제적 요인의 영향이 가장 컸다. 남녀 모두 취업을 한 경우 이성교제 비율이 높았고, 특히 남성은 소득이 많은 경우에 교제를 할 확률이 높았다. 조 연구위원은 “한국 남성은 소득 및 대기업 근무 등의 경제적 능력이 이성교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취업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후에야 이성교제가 가능하다고 보면 이성교제에 대한 특별한 정책을 시행하기보다는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것이 유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빈곤이 이성교제에 영향

청년층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그에 따라 연애 기회마저 잃게 되는 현실이 이성을 향한 혐오로까지 번지는 등 인간관계를 지탱하는 여러 요소가 무너진 데에는 다른 요인도 작용한다. 연애가 가능한 마지노선이자 결혼을 더 늦출 수 없다고 인식하는 연령대는 남성 35세, 여성 30세로 조사됐다. 이 연령대를 전후한 34~39세의 남성인구는 28~34세의 여성인구보다 42만여명이나 많다. 수치로만 보면 해당 연령대 남성 가운데 15% 이상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처럼 한국인의 인간관계, 특히 결혼 또는 이성교제를 중심으로 한 성적인 관계까지도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유로 위축되고 있어 역설적으로 로봇이나 자위기구 등을 이용해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는 2015년 기준 전세계 ‘섹스 토이’ 시장규모는 약 210억 달러(약 25조2000억원)에 달했고, 2020년에는 290억 달러(약 34조8000억원)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지난 6월 열린 대한성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는 다가올 공산이 높은 섹스로봇 시대를 맞아 우려되는 법률적·윤리적 논란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발표에 나선 이원기 한림대 의대 교수(비뇨의학과)는 “섹스로봇이 가져올 여러 가지 병폐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며 “윤리적·사회적 측면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규제할 것인지를 두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리얼돌 수입 통관을 가능하게 한 법원의 판결이 나왔듯 로봇이나 기계, 기구 등을 이용한 성관계가 점차 일반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는 관련 전문가들도 대체로 동의했다. 다만 법이나 정책으로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점이 달랐다. 관련법이 미비한 상태여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한둘이 아니다. 한진 변호사(법무법인 세승)는 “대체로 법률은 기술 발전의 속도를 못따라간다”면서 “로봇과의 결혼이 가능할지, 로봇과의 성관계가 이혼사유가 될 수 있을지 등 산재한 법적·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