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주기/여성문제

끝이 없고 ‘불평등’하다면, 도망치는 건 어때?

맑은샘77 2018. 7. 28. 11:25

끝이 없고 ‘불평등’하다면, 도망치는 건 어때?

등록 :2018-07-28 09:24수정 :2018-07-28 09:51


[토요판] 이런,홀로!?
나의 가사노동
*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이 어렵다. ‘제대로 살기 위한’ 가사노동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깨달았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을 최소한의 ‘임무’처럼 수행하며 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이 어렵다. ‘제대로 살기 위한’ 가사노동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깨달았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을 최소한의 ‘임무’처럼 수행하며 살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10년을 꽉 채운 자취생활 덕이다. 가만히 잘 있는 줄 알았던 텔레비전 위에는 어김없이 먼지가 쌓였고, 청소기가 닿지 않는 책장 밑에선 대청소 때마다 그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책과 볼펜이 먼지 더미와 함께 발견됐다. 여름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장실 흰색 타일엔 항상 검은색 곰팡이와 붉은 물때가 꼈다.

이상했다. 분명히 가족과 함께 살 땐 그렇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검은 곰팡이를 어떻게든 청소 솔로 박박 문질러 닦고 나서야,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치우길 수백번 반복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생각했던 ‘깨끗한 집’은, 실로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담당했던 엄마의 손길이 숱하게 묻어난 결과물이라는 것을.

10년이 지나도 ‘일’ 같은 가사노동

해도 해도 눈에 띄지 않는 가사노동의 무게를 깨닫는 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이유는, 전적으로 내가 ‘더러움’에 둔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 방은 항상 더러웠고 나는 뭔가를 잘 치우지 못하는 아이였다. 책상 위엔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먼 온갖 물건이 어질러져 있었고, 심지어 방바닥에는 읽다 만 책을 차곡차곡 쌓아둔 덕에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부모님조차 내 방을 열길 꺼렸는데, 나는 매번 “청소 좀 하라”는 부모님의 타박에 “어질러져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일관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저게 혼자 살아봐야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지 알지….”

TV엔 먼지가, 화장실엔 물때가
가족과 함께 살 땐 없던 것들
가사노동의 무게를 깨닫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생존을 위한 임무였던 가사노동
결혼 이후엔 누가 하게 될까
정당하게 분담할 수 없다면
적당하게 ‘도망’치는 건 어떨까

엄마의 예언은 대학을 가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적확하게 들어맞았다. 혼자 살면서 비염이 심해졌는데, 나는 막연히 비염의 원인이 ‘서울의 매연과 미세먼지 때문이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환절기마다 이비인후과를 전전하던 내 비염의 원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엄마가 처음 자취방에 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집 안이 너무 매캐해.”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던 엄마는 내 침대 밑을 보더니 기함을 했다. 침대 밑에 몇 개월간 쌓여 있던 온갖 먼지 뭉치가 발견된 것이다. 좁은 자취방에서 침대를 옮기고, 물걸레로 비염의 원인을 박박 닦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미세먼지 탓이라고 하지 마라. 지나가던 미세먼지가 억울해하겠다.” 먼지를 싹 닦아내는 대청소를 끝내자 집에만 오면 심해졌던 비염 증세는 조금씩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지 않으면 침대 밑에 먼지가 쌓이는구나.’ 더러움에 둔감한 사람이 살림의 기본 원리를 깨닫는 속도는 먼지가 쌓이는 속도보다 굼떴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이 어렵다. 먹은 걸 바로바로 치우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싱크대에 그릇이 쌓인다. 세탁기를 제때 돌린 다음 제때 건조대에 널고 제때 개어놓으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내일 입을 옷이 없다. 곰팡이·물때 제거를 위한 화장실 청소는 3시간 정도 마음을 먹어야 시작할 수 있다. 정전기 청소포로 방을 닦더라도 방구석은 쿨하게 건너뛰어서 꼭 먼지가 쌓인다. ‘제대로 살기 위한’ 가사노동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깨달았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을 최소한의 ‘임무’처럼 수행하며 살고 있다.

그간 엄마가 도맡아온 가사노동에 돈을 지급한다면 얼마나 될까? 최근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약칭 ‘도망부끄’)를 보면서 떠올린 질문이다. 2016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도망부끄’의 주된 소재는 드라마의 영어 제목인 ‘We married as a job!’처럼, ‘고용관계를 통한 계약결혼’이다. 여자 주인공인 모리야마 미쿠리는 번번이 구직활동에 실패한 뒤, 우연히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는 쓰자키 히라마사의 집에서 가사 대행 도우미로 일하게 된다. 히라마사는 가사노동을 하기 싫어서 금요일에 3시간씩 미쿠리에게 가사대행을 맡긴다. 구직활동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미쿠리는 히라마사에게 ‘결혼이라는 영구 취업을 통해 취직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제안을 농담처럼 하게 되고, 마침 가사노동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히라마사는 이를 받아들여 사실혼 관계로서 동거하자고 제안한다. 겉으로는 부부관계이지만 속으로는 ‘가사노동’을 매개로 급료를 주고받는 고용주와 노동자인 셈이다.

순탄할 줄 알았던 이들의 계약결혼은 고용주-노동자인 둘이 점점 사랑에 빠지고, 히라마사가 직장에서 해고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히라마사는 ‘마침 우리가 서로 좋아하게 됐고’ ‘내가 직장에서 해고됐으니’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그냥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를 하게 되는데, 이 제안에 대한 미쿠리의 대사가 압권이다. “결혼을 하면 급료를 지급하지 않고 저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합리적이다, 그런 말씀이신 거죠? 그건 ‘좋아함의 착취’예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받고도 떨떠름함을 떨치지 못하는 미쿠리. 그것은 언제든 가사노동을 ‘비용 절약이 가능한’ ‘무급의 노동’으로 보는 히라마사의 태도 때문이었던 것이다. 미쿠리는 그런 히라마사에게 고백한다. “사실 나는 네모난 방을 동그랗게 닦을 법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는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가사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거고요.”

적당히 도망치는 것도 필요하다

<도망부끄>를 보고 나서 가사노동에 대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됐다. 혼자서는 겨우겨우, 주말에 몰아서, 생존을 위한 퀘스트(임무)처럼 해냈던 가사노동이 결혼 이후엔 어떻게 될까? 지금 애인은 자취 경력이 1도 없다. 그럼 자연스럽게 가사노동에 익숙한 내가 더 하게 될까? ‘버는 돈’을 기준으로 가사노동의 비율을 분담한다면? 만약 상대방이 나보다 더 가사노동을 많이 하게 되면, 나 역시 <도망부끄>의 남자 주인공처럼 파트너가 하는 가사노동을 평가절하하지는 않을까.

이 고민은 최근 비혼을 선언한 친구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친구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삼포세대’라는 말 많이 하잖아. 돈 없어서 연애, 결혼, 출산 3가지 다 포기한다고. 근데 적어도 여성들이 삼포세대가 되는 건 ‘돈’ 때문만은 아니라고 봐. 돈 때문에 연애 못할 수도 있지만, 사실 데이트폭력이 더 무서워. 돈 없어서 결혼 못 하는 거 맞지만, 파트너와 정당하게 가사노동을 분담할 수 없는 현실이 더 끔찍해. 돈 없어서 애 안 낳는 거 맞지만, 출산 때문에 경력단절 되는 게 더 무서운 거야. 현실이 이런데 나라에서 결혼하거나 애 낳으면 지원금 준다고 하는 게 도움이 되겠냐? 나 같으면 그 돈 안 받고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고 만다.” 이 얘기를 듣고 친구를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도망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예를 들어 ‘사랑’의 순간)엔 도망치면 안 된다’는 교훈으로 쓰이는 제목이다. 하지만 조금 도망치면 뭐 어떤가. 현실은 드라마처럼 낭만적이지도, 완결성을 갖지도 않는데.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가사노동만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로부터 적당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도 않고’ ‘역시나 도움이 된다’고 깨닫는 요즘이다.

가사노동 무능력자

홀로 머리띠
홀로 머리띠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259.html?_fr=st3#csidxbe9868763e3a585b2f2b9acebf79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