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일반/히브리서강해

히 7:26-28 제사에서 예배로

맑은샘77 2016. 1. 6. 00:22
박봉수 목사 설교 ] 제사에서 예배로
2015년 11월 25일 (수) 11:33:08 박봉수 목사 pspark@sdja.or.kr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히브리서 7장 26-28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이 정말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제사에 대한 규례를 지키는 일 자체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사의 종류가 다양하고 제사에 대한 규정이 복잡했기 때문에 그 규례를 정확하게 지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사 드리는 일 자체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직접 제물을 끌고 성전에 와야 했습니다. 제사장 앞으로 끌고 와서 제물 머리에 안수하고 자기가 직접 잡았습니다. 그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이 제단 사방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떴습니다. 각을 뜬 제물을 받은 제사장은 제단에서 이것을 불살랐습니다.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예배드리러 나올 때 소나 양 같은 제물을 한 마리씩 끌고 와서 직접 잡아야 한다면 과연 예배드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예배 때마다 제물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제물을 불태워 드려야 한다면 예배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목사가 당시 제사장처럼 예배 때마다 성도들이 제물을 잡아 가지고 오는 피를 제단 사방에 뿌려야 하고, 성도들이 전해 주는 제물을 제단에 불을 피워놓고 태워야 한다면 어떨까요? 게다가 제사장은 상번제라 해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두 차례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오늘도 목사가 매일 두 차례 제물을 잡아 제단에서 불태워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어떨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제사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큰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들도 제사 드리지 않고 예배드리게 된 것이 큰 은혜이고, 목사들의 경우 제사 드리지 않고 예배드리게 된 것이 더 큰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사가 아니라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더욱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구약시대의 제사가 신약시대의 예배로 바뀌게 된 것일까요?

요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대화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지만 자기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어서 여기 사마리아에 있는 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는데 정말 잘못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예루살렘이냐 이 산이냐는 예배의 장소나 형식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와 다르게 전혀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전혀 새로운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예배로 바꾸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과거 모세의 율법을 통해 구원의 길을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새롭게 구원의 길을 여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예배를 계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새로운 예배를 디자인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과거처럼 제물을 잡아 불태워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형식과 절차를 앞세워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영으로 임재하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예배입니다. 그야말로 영적인 예배인 것입니다.

저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C.S. 루이스는 <잘 드리는 예배>에 대해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좋은 구두는 신어도 신은 줄 모르게 발이 편하고 걷고 싶은 데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좋은 독서는 눈이나 불빛이나 활자에는 정신을 안 쓰고 그 의미에만 정신을 모으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도 그렇습니다. 좌석이나 건물이나 인도하는 사람이나 옆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안 쏠리고 오직 주 예수님과 하나님께만 정성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디자인하신 새로운 예배는 과거 구약시대의 제사와는 다른 예배입니다. 제사처럼 형식에 마음 빼앗기고, 사람들을 의식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영으로 예배하며, 진리로 예배하며 오직 예배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께만 정성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새로운 예배를 받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영으로 예배하며 진리로 예배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정성을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약의 제사가 신약의 예배로 바뀌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제사가 끝나고 새로운 신약의 예배가 시작된 근본적은 원인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완전한 제사장 예수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는 불완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제사장이 불완전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 중 아론의 후손들이 맡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광야에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장차 그 후손으로 하여금 대를 이어 제사장직을 맡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론과 그 후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제사를 집전하기 전에 먼저 자기들의 죄를 씻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은 이 아론의 후손으로서 아론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으로 세움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히 7:1-3에서 이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멜기세덱은 모세시대에 본격적인 제사제도가 시작되기 훨씬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세우신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제사 제도에 의해 세워진 아론의 자손과 같은 제사장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없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여느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이 멜기세덱과 같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시고,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시고, 연약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를 따로 드려야 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신약의 예배와 다른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배를 집례하는 제사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은 죄인이고 또 죽을 수밖에 없어서 계속 바뀝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를 집례하시는 제사장은 죄가 없는 분이시고 영원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완전한 제사장이 집례하는 예배는 차원이 다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것이 이것입니다. 완전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완전한 예배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완전한 제사장이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축복기도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교우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지만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우들의 형편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카드에 적어주신 내용과 교역자님들의 보고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 제가 아는 정보의 전부입니다. 또 어떤 분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드리지만 때로는 막연한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교우들을 위해 꼭 필요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제가 나름대로 중보기도를 드린다고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고 때로는 정말 교우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신다는 말씀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배가 복된 것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이 예배에 참여한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참여한 우리를 위해 꼭 필요한 기도를 드려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지만 놓치고 있는 부분을 주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지만 엉뚱한 기도를 드리는 부분을 주님께서 바로 잡아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완전한 제사장이 베푸시는 은혜는 새 언약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히 8:10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한 마디로 말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예배자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며 세상 바라보며 사는 중에 어느새 예배자들의 마음속에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부대끼며 사는 동안 어느새 예배자들의 생각 속에 세상의 야망과 세상적인 꾀가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 드리는 중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잡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예배를 예배답게 드려야 합니다.

완전한 제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사는 불완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제물이 불완전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 때마다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물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 제물은 한 번의 제사를 위한 속죄 밖에는 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27절을 보면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의 효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사를 드려서 속죄를 했다고 해도 오늘 또 죄를 지으면 다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제 드렸던 제물의 효력이 어제까지의 죄를 속죄하는 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제물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예수님께서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모든 죄를 속죄하는 효력을 나타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모든 죄를 속죄하는 효력을 나타내신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세워진 제도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지은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속죄하려고 할 때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 앞에 왔습니다. 자기의 죄를 다 고백하고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죄를 속죄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은 단지 그가 손을 얹고 고백한 죄만을 속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 1:29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6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다 담당시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대속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요일 4: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할 효력을 가진 제물이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속죄할 효력을 가진 제물이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나올 때 다른 제물을 가지고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시라는 것을 믿고,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배의 현장에서 속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깨달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거룩한 교환”, “복된 교환”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주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할 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되시고, 우리는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순교자 저스틴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오 복됨이여!, 오 달콤한 교환이여!...”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현장에서 저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이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이 복되고 달콤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다 저 십자가에 덧입혀지고, 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거룩한 의가 우리의 심령 위에 덧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금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제사대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이 예배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교환을 체험케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아주 특별한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