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상담/분노-불안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view 발행

맑은샘77 2015. 1. 16. 18:22

 

  차라리 무관심하다면, 당장의 불편함과 부당함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루쉰의 철벽상자를 생각한다.  한치의 틈도 없는 철벽의 상자안에서 보충되는 산소없이 자신들이 내뱉은 이산화탄소에 몽롱함을 느끼며 서서히, 그리고 별다른 고통없이 죽어가는 이들을 깨워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보이는 탈출을 위해 괴로운 움직임을 권유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그의 고민..


  어쩌면 우리는 이 노장의 시대보다 저항해야 할 명분에 대해 인식이 희박한지 모르겠다.  사실 노장의 투사시대에는 저항해야 할 대상이 분명했고 싸움의 방법이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의 자본시대에는 무엇을 대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엉켜버리기만 하는 저항의 몸짓은 나와 대상을 구분짓지 못하게 하고, 그 모습은 종종 저항이 아닌 합의의 모습으로도 비추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과 무의식속에서 저항하기를 포기해버린 듯 하다. 


  다시금 생각해본다.  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엔가 저항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지금 당장의 어떤 불편함과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기에 소극적이나마 끊임없는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자식들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공유하기 위해 저항한다는 명분은 과연 나의 마음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나의 저항은 내가 바라는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저항인가? 


  그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항한다.  나는 분명 자본의 속성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자본의 한 톱니바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하나의 작은 경제를 이루고 있고, 자본의 구조속에 몸이 뒤엉켜 저항인지 타협인지 모를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씩 자본의 구조속에서 벗어나오려는 나름의 저항을 이어나간다.  무관심을 넘어 분노해야 한다는 노투사의 주장에 동의하며 또다른 저항의 이유를 덧붙이고 싶은 나의 마음이랄까?  그리고 부조리하기에 몽환의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깨워 함께 철벽을 두드려야 한다는 루쉰의 결론에도 함께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너무도 당연한 마음으로 읽어냈다.  저항의 대상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저항해야만 하는 이유가 명백히 존재하기에 당연하면서도 그 이유를 좀 더 분명히 상기시기는 마음으로 읽어내었다.


  하지만 노투사의 주장을 진보연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공감으로 이어가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자본의 비인간적 속성을 인정하면서, 작금의 상황이 자본의 비인간성 자체에서 기인함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정치사회적 구조비판에만 천착하는 그들의 공감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노투사의 저항을 마음깊이 받아들이다가 뜽금없이 덧붙여진 조국 교수의 글은, '금권'이라 표현했으면 했지 절대 '자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던 그의 글을 읽어나가며 개인적으로는 어색한 마음을 왠지 피할 수가 없었다.  책의 맥락면에서 그의 글이 무리가 될 정도의 어색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주장하며 정치사회적 현실아래의 근원적 문제를 외면한 그의 조급하면서도 시대현실에 대해 다분히 의도가 느껴지는 글이 나에게는 불편함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노투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와 편집자에 대한 아쉬움이 공존했던 책이었달까?  적은 분량이면서도 커다란 의미와 함께 계륵같은 군더더기가 조금 거슬렸달까?  어쨌든 나를 간결복잡하게 만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