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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 -서정운

맑은샘77 2013. 6. 22. 20:41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

서 정 운 교수(장신대 명예총장)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13:14-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들어가는 말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는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이 둘은 동일한 일이며 불가분리적인 연관성을 가졌다. 우리의 처지에서 민족복음화를 포기하고 세계선교에 진력하기도 어렵고 세계선교를 중단한 민족복음화도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들어선 21세기는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차원에서 우리 교회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통일논의가 더 구체화 될 상황에서의 북한 선교를 포함한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한 책임이 가중되는 현실 때문이다.

우리가 선교대회로 모이고 있는 세계교회협력센타가 이 같은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21세기에 세계 교회가 협력하기 위해 그 중심에 서게될 한국교회를 바라본 미국의 헨리 루스 재단이 헌금한 100만불을 착수금으로 건축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헌금도 귀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도 21세기 한국교회의 위상과 책임의 중대성에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의 한국교회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총력을 기울여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창출할 사명이 있다.

1. 민족복음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롬9:3 -

민족복음화의 과제는 세 차원이 있다. 분단되어 있는 남북한과 한반도 밖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이다. 세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는 민족복음화가 복잡하고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과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 대한민국 복음화한국의 복음화가 없이 다른 차원의 민족복음화나 세계선교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의 성숙과 부흥과 복음화가 북한 및 한인 디아스포라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기본적인 연관성을 갖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기본적인 성격을 가진 한국복음화의 활력이 약화되는 조짐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교회성장의 둔화, 대형 교회들이 있다하나 대체로 교인 이동현상이라는 지적, 출산율의 저하, 여러 가지 요인으로 교회 내에서 청소년층의 감소, 전에 비해 전도에 대한 무반응 현상 및 교회의 영적, 윤리적 수준저하 등이 나타나고 있다.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우리가 다음의 몇 가지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① 바른 선교관의 확립선교관이 선교의 내용, 이유 및 방식을 지시하는 지침이 되기 때문에 바른 선교관의 정립이 없는 선교는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고 부정적인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우리가 교파와 신학전통보다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해야 하는데 성경적인 선교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람과 사람들 및 하나님과 사람들과 피조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고 온전케 하는 것이다. 창조신학이나 족장들의 역사에 나타난 대로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들과 피조세계의 온전한 조화(total harmony of the creation)가 하나님의 뜻이고 족장들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이었다. 구약전체의 교훈도 이 세 차원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선교 주제도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가 전한 복음은 회개하고 구주이며 왕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람들끼리,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과 만물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와 왕으로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에 동참하게 하여 전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간에 인종, 문화, 국적 및 계층을 초월한 사랑과 조화와 평화를 이룩하는 일과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목적을 보전하고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일이다. 그 같은 통전적인 내용 속에서 전도가 중심, 심장, 핵심(D. Bosch)이 된다.

선교관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간에 상당한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동안 우리가 소홀히 여겨온 피조세계와의 문제만을 간단히 언급하고 싶은 데 지구의 온난화현상은 핵전쟁과 별과의 충돌 다음으로 지구파멸의 위험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4월 9일자 TIME에 의하면 지구표면의 온도는 57。F가량인데 전문가들의 예측으로는 100년 내에 2.5-10.4。F쯤 상승할 것으로 본다.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산정의 얼음이 1912년부터 15%가 녹았으며 15년 내에 없어질 것 같고,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가 한 세기 전에 비해서 11일정도 늦게 결빙하고 있다. 이것은 기후 온난화현상을 나타내는 증거들인데 해수면의 상승, 태풍과 홍수와 가뭄, 혹서와 혹한 등으로 인해 농작물, 가축, 동식물의 생태계변화는 물론이고, 열대지방의 풍토병이던 골통열병(dengue fever)이 북미지역까지 확산되는 등 자연계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TIME이 몇 해 전에 "올해의 인물" 대신 위협받고 있는 지구를 "올해의 지구"(planet of the year)로 선정했던 것도 이 같은 위기를 경고한 것이다. 헨리 누우엔(Henry Nouwen)이 13세 때 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 그가 어른이 된 후에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 알고 그때 '기독교인들은 뭘 했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서 심각한 재난을 겪을 경우, '그 때(20세기말-21세기초)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개탄 어린 질문을 던지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로 관리하고 보호해 나가야 할 것이다.

② 신학의 정상화간단히 말하면 우선 신학 자체가 원래대로 선교적 목표와 의도를 회복해야 한다. 신학은 선교의 산물이다. 신학의 원본인 성경은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는 선교문서이다. 교회의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였던 선교가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국가적 사업으로 변하면서 교회의 선교의식이 약화되고 신학도 선교적 차원과 열의를 잃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서구신학은 그같은 전통 속에서 발전했는데 신학자체가 선교적 차원과 정열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근자에 이르러 독자적 발전을 보이고 있는 선교신학도 일부의 비선교성과 반선교적 도전을 극복해야 하는데 종교다원주의를 대표적인 도전으로 들 수 있다. 존스톤(Patrik Johnstone)은 오늘의 세계선교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을 영원한 멸망과 지옥에 대한 신학적 모호성(theological fluffiness),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비젼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근거의 상실이라고 했는데 한국교회의 신학도 성경 위에 정립(正立)해 선교중심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③ 교회다운 교회.

교회다운 교회는 선교적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의 기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기본적인 과제는 선교하는 것이다. 주님의 지상명령(마28:19-20, 막16:15, 눅24:44-48, 요20:19-23, 행1:8)이 선언되고 교회가 존재한지 59세대(generation), 2000년이 지났으나 이 명령은 미완상태에 있다.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지 못했고(being) 교회답게 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function). 키엘케골(S. Kierkegaard)은 루터교가 국교였던 19세기의 덴마크에서 신약성경이 뜻하는 기독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질타했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되어야 한다. 초기교회시대에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생동력 있는 선교가 가능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다운 생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범람현상이다. 반성경적 인격과 삶이 우리들에게 타성이 되어 한국교회를 안락사 시키고 있다. 나는 남미 콜롬비아의 시골도시인 후사(Fusa)근처의 외진 선교사 집에서 이 글을 쓰다가 한달쯤 지난 기독공보를 보았다. 일면에 "제비뽑기 찬반 팽팽"이라는 제목이 있고 기사 중에 "현행선거제도로는 금품타락선거를 방지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불법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7월 7일자)는 말이 있었다. 7월 14일자 사설에도 교계인사에 금품이 끼어드는 것을 염려하며 "돈받고 자리를 만들어 줄 때 이는 바로 성직매매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뽑는 일이 온 교회의 고통과 수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헨리 7세와 8세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리나크르(Thomas Linacre)가 말년에 처음으로 복음서를 읽고 충격을 받아 "이것이 복음서가 아니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했었다. 우리도 그런 충격을 받는 현실에 처해 있다.

반정부 게릴라들이 활동하는 위험한 남의 나라 시골에 묻혀있는 선교사와 교회지도급 인사를 자처하며 자리를 구하여 온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사역자이며 지도자인가. 이들이 지도하는 교회가 민족과 세계를 구원할 권능이 있겠는가. 교회 안에서 입신양명한 사람들 중에 그 이름이 땅에만 기록되고 하늘에는 기록되지 않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눅10:20).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수준이 낮게 된 데는 교회가 비선교적으로 제도화된 것과 관계가 깊다. 그러므로 교리화되고, 제도화되고, 세속화 되어온 교회가 이제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한번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해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 정신이 실천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미국교회-유럽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중세교회-초기교회-예수그리스도로 계속 올라가 근원적(origin)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기능을 실천하는 교회로 지속적인 개혁과 변화를 거듭해야 한다. 처음의 교회(행2장)는 형태나 제도보다 기능위주의 교회였다. 교회가 무엇이며, 왜 존재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것들에 충실하였다. 초대교회의 기본사역은 예배(46, 47), 전도(41, 47), 가르침(42), 기도(42), 교제(42, 44, 46) 및 봉사(44, 45)등이 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으로 나아가는 세계선교의 운동을 일으킨 선교적인 초기 교회였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기구화된 형태의 제약과 경직성을 벗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선교하는 근원적인 원형(original pattern)을 갖추기 위해 사역의 우선순위와 통상적인 교회구조에 대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전도가 선교의 중심이면, 교회사역과 예산편성과 구조가 교회의 현상유지위주에서 복음화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의 상황은 비정상적이고 비극적이고 불안한 파라독스(disturbing paradox)를 지니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깊이 없는 성장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는 적절한 제자도가 결여되어 있다"라고 한 존 스토트(John stott)의 지적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우리교회가 선교적 목표와 동기와 열의를 가진 교회다운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④ 현장화(Contextualization)교회가 일정한 현장(context) 속에 존재하며 선교하기 때문에 현장을 이해하고 현장에 맞도록 선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때 유행했던 토착화란 현재나 미래보다 과거의 문화와 전통에 유의한 한계가 있었는데, 현장화가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이 개념이 과거와 연결된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현장이란 시간과 공간으로 짜여진 현실(historical reality 또는 historical-now)을 뜻한다. 우리교회가 "우리가 어릴 때는", "전에는", "지금까지" 등으로 고집되는 경직성을 버리고, 현장에 맞는 사고로 예배, 교육 및 제반사역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생동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법, 제도, 의식, 조직 등에 있어서 전통과 관행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형식주의에서 자유하여, 고치고 새롭게 하고 변화시켜, 교회가 부흥하고 선교가 활력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컨데 선교는 증거다. 이 증거는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인, 집합적으로는 교회의 말(saying), 인격(being), 그리고 행동(doing)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개인적인 차원과 함께 교회 공동체적으로 날마다 현장에 새롭게 대응하지 않고는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중책을 수행해내기가 어렵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회의와 연구와 토론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화와 지도에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복종하고, 그 내용을 실천하는 믿음과 용기를 가질 때 더 쉽고 빨리 이루어 질 것이다.

⑤ 기독교문화의 창달지구화 시대와 정보사회가 몰아오는 많은 문제들과 과학발달이 안겨주는 새로운 질문들과 더불어 일상생활에 보편화되고 있는 퇴폐적인 문화의 파급 속에서 교회가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회가 세속문화에 대한 바른 대안의 제시보다 오히려 세상 풍조에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이 세대를 본받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사태에 대한 대역전(the great reversal)이 시급하다. 교회가 능동적으로 성경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제시하고 모범을 보임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가는 길이다. 그같은 능동적인 문화의 변화력과 창조력이 없이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밀고 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 북한의 복음화북한선교는 독특한 점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후에 동구권을 위시한 구 공산권은 공산화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잔류했었다. 북한의 경우는 해방직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 중에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월남하였다. 현지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를 거점으로 선교할 수 있는 다른 공산권과는 달리 북한 선교는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선교를 우리(사람)가 마음대로 하는 일로 생각하는 무지, "통일 즉시 북한 선교 개시" 같은 사고, 한국교회와 기관들의 경쟁, 북에 대한 견해차이들과 선교 부자유 등으로 북한선교가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기본적인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통일운동

통일에 대해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교회 안의 통일의식과 추진력을 더 결속시켜 통일운동에 교회가 더 능동적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통일을 정치나 경제적 차원 이상으로 가족이산과 민족분열을 끝내는 혈육의 민족 공동체의 하나됨의 추구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위해서도 더 열의있고 구체적인 통일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2) 통전적 선교직접적으로 전도가 어려운 상태에서는 구제와 개발과 친교 차원의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 지금까지 상당한 노력이 있었는데 개별적으로, 분산된 형태로, 북한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행해지고 있는 활동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가능한 한 협동적으로, 상대도 북한의 기독교기구로 집중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이 선교를 보다 효능있게 하며, 북한 주민에게 교회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갖게 할 수 있으며 북한에서의 기독교 기구의 위상을 높이고 언권과 영향력을 강화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 이후에 기독교선교에도 북한주민 등의 우호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3) 평화롭게 하나되는 기도운동기도는 운동이다. 개인과 역사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운동이다. 마가 다락방의 기도모임에서 공회가 시작되고 선교운동이 퍼져간 이후, 모든 형태의 선교운동은 기도운동과 직결되어 있다. 통일과 북한동포와 복음화를 위한 기도운동이 보다 구체적이고 열정적으로 살아나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통일과 북한을 위한 기도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우리 교회에서 약화되어 왔다. 일부에서는 통일에 대한 무관심, 무감각, 또는 반감 같은 분위기마저 감지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가1:12)라고 성경은 묻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시122:2) 라는 감격을 서울과 평양에서 외치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도다. 우리는 기뻐하도다"(시126:3)하고 찬양할 때까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시3:1)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자기 아들을 북에 두고 온 어머니(백홍용)의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딱 한번만 이 지친 품안에 내 아들을 안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고 나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린다"는 기도처럼 뜨겁고 간절한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4) 닫힌 문 안에서흔히 북한선교의 문이 닫혀있다고 한다. 그러나 선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는 것이고 열린 곳과 닫힌 곳을 가리지 않고 행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내린 최초의 파송명령은 닫힌 문 안에서 하셨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닫아둔 문 안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증인이기 때문에 닫힌 북한 선교의 문 안으로 이런 저런 일로 출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선교의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역자들의 활성화와 중국 조선족교회의 협력이 중요하다. 베어낸 바 된 나무의 그루터기나 잔가지처럼 남은 북한의 교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의 일을 계속하신다. 위대한 선교적 교회였던 안디옥교회나 로마교회가 무명의 여행자 사업자, 피란민, 이민자 등에 의해 시작되었듯이, 기독교 선교의 중대한 일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지금도 북한 복음화의 중요한 사건들이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며 사랑으로 느끼며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다.

3. 흩어져 있는 동포들의 복음화세계에 흩어져 있는 700만명 가량의 교포들과 한인 후손들의 복음화를 민족복음화의 범주로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의 복음화는 우리와 아주 문화가 다른 민족선교보다 언어나 습관이나 정(情) 때문에 더 용이한 편이다. 물론 한인 디아스포라라고 해도 한국을 떠난 시기나 교육, 경제, 문화, 거주지 등에 있어서 다양한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게 남아있는 공통성이 있다. 한국인 또는 한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성 또는 민족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상당기간 외국에 살아도 완전한 민족성으로부터의 해방(liberation from ethnicity)이 어려운 것 같다. '당신은 한국인이냐?'는 질문에 볼고그라드의 어떤 고려인 3세가 말만 러시아어로 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한 것은 우리가 뜻깊게 보아야 할 요소이다(중앙일보 2001. 8. 15, 13-26). 러시아의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킴이 1989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썼던 글 "신이시여 제가 정말 한국에 왔습니까"(동아일보 1989. 9.30)에서도 우리는 그같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러시아 사회에서 당당하고 확고하게 존재한다.···그렇지만 소련의 한인에게는 영혼의 슬픔과 감추어진 마음의 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한국인, 브라질이나 일본에 사는 한국인의 영혼에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떠나온 머나먼 조국의 조용한 부름은 어머니의 소리없는 호소처럼 들리지만, 우리에게 평온만을 주지는 않는다. 조국 땅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들은 그런 경험을 모두 갖고 있다. 아무리 평안하게 산다할지라도 조국에 대한 특별하고 우울한 향수는 퉁소 소리처럼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선교는 민족복음화의 차원과 더불어 세계선교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미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그곳에서 현지선교를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문화, 언어, 생활구조 등에서 적응이 쉬우며, 일상적으로 현지인에게 선교할 수 있다. 실제로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들이 주목할 만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가령 미국거주한인 중에 약70%가 교인인데(Stephen Warner), 약3,000개의 한인교회 중에 1/3정도가 있는 남가주에 연 예산 100만불 이상의 교회가 20여 군데에 달한다. 크고 작은 교회들이 이들은 물론이고 많은 디아스포라교회들이 원주민선교와 다른지역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데, 온두라스 한인장로교회의 예를 보면 창립 10년 된 교회로 10 곳에 원주민교회를 개척했고, 3 곳에 신학교를 세워 지도자 육성에 힘쓰고 있다.

조선족교회가 건재한 중국과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아세아 및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한인교회가 있고 세계 선교적 차원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디아스포라교회는 한국교회와 세계를 연결하는 교회로서 선교적으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 한인 디아스포라의 수가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특히 신자들의 해외 진출이 증가되어야 한다. 그들이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교회를 형성하고 그 지역과 주변을 복음화하는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더 많은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나가도록 선교적 열정을 분출시키고 선교적 동기부여를 해야한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객으로 사는 우리의 정체가 선교적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초기에 선교의 중심교회들이었던 안디옥교회, 로마교회 및 알렉산드리아교회들이 나그네와 객처럼 나간 사람들이 시작한 교회였다는 것은 오늘의 세계선교에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4. 세계 복음화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들을 기대하라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들을 시도하라 -윌리암 케리-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선교현장에서 위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서구위주, 교파중심 및 이데올로기 중심의 시대에서 세계적, 초교파적, 다양한 문화적 상황에서 세계선교가 전개되고 있다.

지난 수 백년 간의 서구교회 선교의 결과로 형성된 2/3세계교회와 선교사들의 선교참여가 세계선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교회와 한인 디아스포라교회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2/3세계교회들 중에서 한국교회의 성장, 선교자원의 축척, 선교인력의 증가, 비교적 건실한 신학성향과 높은 선교열정 때문이다. 더구나 신속하고 편리하게 된 교통 통신수단이나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는 선교의 하부구조들과 세계화의 인식 및 세계 인류생활구조의 변화 등은 이전의 선교운동에서 없던 여건들이다. 우리는 이런 특징들에 있어서 세계 일류의 수준에 있으며 특히 만방에 산재한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존재와 역할 때문에 세계선교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마28:18)는 분부를 따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설 것"(계7:9)을 바라보고 모든 인종과 문화와 국경과 계층을 초월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구현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60억 정도로 추정되는 세계인구 중에 약 33% 정도를 신자로 보는데(David Barrett), 67% 정도의 불신자들에 대한 선교는 전략적으로 볼 때 ① 전도하기가 미전도지역보다 더 어렵게 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의 부활 ② 회교, 불교, 힌두교권 등으로 된 타종교권 ③ 밀림과 산 속에 소외되어 있는 오지 인구 ④ 많은 인구가 집중되고 있는 대도시들 ⑤ 청소년들 ⑥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⑦ 구 공산권 지역 등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 같은 세계선교의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 해야 될 중요한 일들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통전적 사역선교의 중심이 전도이지만 우리의 은사와 능력과 기회에 맞추어 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행해져야 한다. 다른 사람과 교파와 단체를 복음적 또는 비복음적으로 속단하고 분쟁하기보다 전도, 사회봉사 및 환경보전 등을 협동적으로 상호 보완하는 신학적 이해와 선교적 역량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교는 여러 가지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다양한 상황에 있는 연령과 계층과 사회적 신분과 교회의 직분을 초월한 전 교회(the whole church)가 회개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추구하는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을 많은 인종과 문화와 국적과 계층으로 이루어진 전 세계(the whole world)의 살아있는 영육적 존재(living body-soul)로 영적, 신체적, 문화적, 경제적 및 정치적차원에 결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the whole people)에게 증거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선교는 전체교회의 생활(life of the whole church)이며 교회의 전체생활(the whole life of the church)인 것이다. 온교회의 말과 삶과 행동이 포괄된 증거이다.

2) 선교적 교회의 개척과 부흥모든 족속의 신앙 순종과 그리스도의 주권 확립을 위한 선교는 그 지역의 교회가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예배와 성경 읽기와 기도와 섬김과 전도에 힘쓰며 그들의 사회변화를 담당하는 현지인들의 자립교회의 개척과 성장과 성숙은 세계선교운동의 기초작업이다. 초기 한국교회가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비교적 이상적인 선교지의 개척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미전도 지역에 이 같은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키는 노력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였던 서구교회의 재건과 부흥에도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랄프 윈터(Ralph Winter)의 주장에 의하면 인구비례로 볼 때 폴란드에 네팔보다 기독교인의 수가 적고 스페인이 일본보다 신자의 수가 적다고 했다. 오늘의 서구사회가 '기독교이후시대'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99년 여름에 개혁교회의 요람이었던 제네바교회에서 목사의 주일예배설교 대신 달라이라마가 설법을 했고, 약 5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경청한 사실은 오늘날 유럽의 교회와 사회의 영적 상태를 짐작케 하는 사건이었다. 고색 창연한 기독교 전통을 짊어지고 땅에 주저 앉아있는 서구교회를 성경중심의 기도와 교육과 전도에 열의 있는 교회로 부추겨 세우는 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3) 지도자(사역자)육성현지 교회지도자 육성은 교회개척과 함께 선교운동의 기본원리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택해 그의 일을 시키셨고 예수선교의 기본에 제자 양성이 있었다. 윌리암 케리(W. Carey)의 선교원리에도 현지 지도자 육성을 중시했었다. 처음에 평양신학교를 위시한 지도자 양성기관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선교사들이 여러 지역에서 신학교를 세워 교육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지도자 양성이 핵심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우려되는 현상은 적지 않은 경우에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거의 일률적으로 행해지는 재정지원이다. 누구에게나 장학금이 지급되거나 학비가 무료이면 소명이 없거나 불투명한 사람들을 형식적인 지도자로 세우는 위험이 생긴다. rice-christian의 해독을 이야기하거니와 rice-seminarian, rice-minister가 양성되면 그 지역의 교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예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명 때문에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났고, 사도들은 가족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나섰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소명 없이 나서는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 용병, 가라지들이라 했다. 요한 웨슬러(John Wesley)는 소명을 받은 자는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야 하고, 무엇이든지 잃을 준비가 되어야 하고, 어떤 고난도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현지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학비부담이 어렵다거나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재정지원을 해야한다는 판단은 선교지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오늘날 돈 문제는 선교사에게나 현지교회 지도자나 신학생들에게 선교의식과 사명감의 진정성(眞正性-authenticity)을 가름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가난해도 소명을 받은 사람은 나선다. 길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지도하고 교육시켜야 한다. 그 같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지도자와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남미 콜롬비아에 있는 장로교신학교는 이런 면에서 모범적인 예가 된다. 콜롬비아는 전 인구의 5%미만이 기독교인인 전통적인 카톨릭국가이다. 계속되고 있는 내란과 정치적 불안 때문에 경제적 수준은 중남미에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1992년에 수도 보고타에서 시작한 이 학교는 처음부터 학생들의 학비부담을 원칙으로 하였다. 입학생 중에는 4년 동안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중도휴학이나 탈락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학비부담도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러나 2000년 현재 본교에 55명, 후사분교에 27명이 공부하고 있고 졸업생들은 자기 지역에서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 선교비로 학생들을 도와주는 신학교보다 이 학교에 목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더 모여들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생 수보다 신학생다운 신학생을 교육시켜 현지 지도자로 삼는 일이 긴요한데 가시적인 양적 성과나 사업위주의 선교의 유혹 때문에 비정상적인 지도자 육성방식을 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칫하면 "rice-christian"→"rice-seminarian"→"rice-minister"→"rice missionary"들이 주고받는 악순환이 전개될 수 있다.

4) 집중력과 통제력과 협력집중력과 통제력과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운동 팀이 우승하거나 그런 집단이나 기관이 성공하는 예를 보지 못했다. 세계선교의 효율과 건실함을 위해 우리의 선교가 집중력과 통제력을 가지고 협력해야 한다.

우선 집중력을 갖추어야 한다. 전문가들의 집계에 의하면 2000년 현재 세계인구 중 기독교인의 수를 약1만 족속, 20억 정도이고, 회교도가 4100족속 11억명, 힌두교도들이 3400족속 886백만명, 불교도가 1300족속 3억 4천만명 나머지는 여러 다른 종교의 신봉자이거나 무 종교인들이다.(R. Winster/ Bruce A. Koch) 이들에게 선교하는 한인 선교사의 수는 2001년 2월 현재, 9250명에 달하며(KWMA제공), 예장 총회파송 선교사 수는 2001년 6월 현재 장단기 선교사를 합해 80개국에 720명이 파송되었다(총회세계선교부) .

선교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가장 넓은 지역에서 가장 많은 족속들에게 선교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집중력의 결여이다. 각기 장기적이고 신중한 검토없는 사역, 경쟁, 중복 등으로 인력과 자원의 과용과 손실이 많다. 서구교회가 전에는 경쟁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지역분할 정책(comity)을 썼으나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실상을 파고 들어가 보면 비조직적이고 산만한 선교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세계선교사의 25%정도가 미전도 종족지역에서 사역하고, 75%정도가 이미 상당히 복음화된 지역(riched people)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다. 한국선교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데, 1999년 서울에서 모였던 한국장로교 세계선교 국제협의회에서 지적된 문제 중에 하나도 그런 것이었다. 둘째로, 집중력 있는 선교를 위해 통제력이 필요하다. 지역과 사역과 선교사간에 문제가 생기고 지역에 따라 선교가 부실하게 되는데는 통제력의 결여로 인한 경우가 많다. 한국선교사들도 어떤 지역에는 필요 이상으로 편재되어 있고, 다른 지역에서는 더 많은 선교사를 요청하는 데도 파송되지 않고 있다. 가령,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큰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교포교회가 파송한 한인교회 목회자 외에 현지인 대상의 한국 사역자는 3가족 밖에 없다. 현지 상황에 적절한 선교사의 수, 선교의 형태, 선교비 사용 등이 조정되고 지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선교의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는 협력하는 일이다.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협력하시고, 사람들을 선택하여 협력하신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협력자로 삼으셨다. 1947년, 휫트비(Whitby) 선교대회가 동역(partnership in obedience)을 강조하며 여러 가지 제안들을 했으나 지금까지 세계선교는 원만한 협력을 이루지 못했다. 협력이 안되면 선교인력과 선교자원의 낭비는 물론이고 서로 당사자들끼리의 반목과 갈등이 생기고 선교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교사를 파송한 각 교단 등과, 교단과 선교회들과 선교회들이 협력해야 한다. 선교현장에서도 선교사들끼리, 교파와 선교회의 소속과 사역의 차이를 극복한 협력이 필요하고, 현지교회와의 협동도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롬8:17)라 했는데 이 말은 상속자라는 뜻이다. 상속자들끼리 다투고 반목하는 것은 추태요, 비극이며, 불상사다.

지난 6월 5일까지 제네바에서 "재 유럽 한인교회 선교협력 증진을 위한 협의회"가 처음으로 모여 한국교회와 유럽 한인교회 및 현지교회 대표들이 상호협력을 모색했었다. 그곳에서 함께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비젼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이러한 근원적 도전은 이민과 다인종공동체 현장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들을 내놓았었다. 이 물음들에 대한 간단한 답은 교회와 선교회가 협력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존재하고 사역하며 자기지역과 세계 복음화에 매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교회(the whole church)의 모든 선교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집행해 나가기 위해 모든 교회가 협동해야 하며, 이상적인 협력은 각 교단이나 선교회가 집중력과 통제력을 가질 때 가능하다. 4) 선교사다운 선교사'선교사가 누구냐'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의 여건보다 선교사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여건이 험난했지만 위대한 선교를 했던 것은 그들이 충직한 헌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암 케리나 데이빗 리빙스톤(D. Livingstone)이나 허드슨 테일러(H. Taylor)같은 분들의 선교조건은 극난했으나 그들이 모두 성실한 헌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위대한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단순한 윤리적 요구나 종교적 교리의 전파를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파송자의 인격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보낸다"(요20:21)는 파송에 아버지와 아들과 보냄을 받은 자(선교사)의 "같다"(as)는 연결고리에 주님과 같은 인격이 포함되어진다. 선교사는 성육신하신 내용(what)과 이유(why)와 방식(how)으로 살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최전방에 서 있는 사람(frontier)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원래의 그 분처럼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의 증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믿게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와 같은 인격자(messageful-person)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증거이다. 그같은 증거는 자기가 죽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부정이다. 모든 증인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기를 비우고 약하게 되는 용기(the courage to be weak)를 강조했다. 그는 내가 약할 때 강해진다(고후12:9-10)고 확신하고 살았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고(마18:1-4)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련한 자(바보)가 되고(고전1:18-2:5) 아테네의 지식인들과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 분은 그 사람에게 와서 죽으라고 말씀하신다(나를 따르라)"는 본 회퍼(D. Bonhoeffer)의 말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문장이며 그는 히틀러에게 저항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로 이 글에 친히 서명했다고 한 오스 기니스(Os. Guiness)의 말이 과찬일지 모르나, 사도들과 많은 충성스러운 증인들과 선교사들은 그런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었다. "반복해서 우리는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요20:2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하며, 복음의 진정한 전달자는 능숙한 지배자나 관리자가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이라"고 하면서 칼카타나 산 파오로의 빈민굴에 묻혀 사는 사역자들이야말로 온갖 현대식 장비를 갖추고 자기를 과시하는 선교사들보다 선교의 사도적 모델(the apostolic model of mission)에 가깝다고 한 뉴비긴(L. Newbigin)의 견해에 우리는 동의한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팔레스틴 땅에 유대인으로 사셨듯이 성육신적 선교는 현지인과 같이 동족(同族)이 되어 사는 것이다.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그들과 같이 사는 선교사들이 많아져야 한다.

자기 한 몸을 바쳐 많은 이들을 구원(一身奉獻 天 得生)하는 직무에 부름받아 헌신하는 선교사들은 선교사다운 선교사가 되고, 선교사답게 살고, 선교사답게 일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께서 보장하셨다. 선교사다운 선교사들의 헌신이 21세기 세계 복음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맺는 말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대한 현황보고보다는 우리가 그 자명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유의하고 힘쓸 몇 가지 기본적인 일들에 대해 말했다. 세계복음화의 책임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부과된 이 시대에 우리 교회가 이상과 같은 도전들을 건실하게 극복해 갈 수 있으면 21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