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죽음-장례

[스크랩] 장례식 설교 모음 / 주용수목사

맑은샘77 2013. 2. 13. 18:55

  장례식 설교/주용수목사


설교내용 또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장례식 설교를 몇편 올려 봅니다. 장례를 치룰 때마다 아버지는 껍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봄에 내리는 비같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축축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는 메마른 가을 같습니다. 눈물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자식들의 살에, 피에 어머니의 정성이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자식들의 마음에, 영혼에 어머니의 손때가 잔잔하게 묻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장례에는 눈물이 묻어 나나 봅니다.

설교 1

생명!- 그것은 한 뼘의 길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 그것은 직조기의 베틀과 같은 것입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결에 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아니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은 언제나 시간의 고비 고비를 넘나들면서 생의 파편을 모으지만 결과는 언제나 죽음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서서 우리를 삼키려고 영원한 원수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렇고, 미래를 소망하는 미래에도 죽음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원수입니다.
우리는 슬픈 존재입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여린 살을 가진 생에 비해 죽음의 칼과 창은 얼마나 광대한 대양의 말입니까? 누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 넓이를 측량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뉘라서 능히 이 험한 죽음의 바다를 헤치고 소망의 바다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 인류 공동의 적인 죽음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거푸 다짐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죽음과 파멸이 우리의 삶에 틈을 내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슬퍼하고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자식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유족에게 위로를 유족은 성도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강해집니다. 죽음의 결과를 이깁니다. 죽음의 슬픔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단의 강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소망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죽음이 아무리 강해도 부활의 권세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부활의 권세에는 죽음을 무릎을 꿇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을 것이 아니요, 부활의 나팔 소리에 홀연히 변화하여 썩지 아니할 것,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일찌라도 빛에는 굴복하듯이, 죽음의 권세는 부활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로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보낸 성도를 주님의 영광중에 만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약속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주님의 부활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유족과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믿음 외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갈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랑을 굳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험한 세상을 이길 능력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길 힘도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사단의 악한 계교를 이기는 힘도 믿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소망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흔들리지 않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족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울 때가 아닙니다. 눈물을 삼키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눈물을 닦고 살아 갈 용기를 다져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어떻게 여러분을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 주님의 위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일어서려는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 차시기를 기원합니다.


설교 2

모든 인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각기 자신의 독특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을 귀중히 여기며 열심히 자신의 길을 걸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걸어가는 길을 미리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당장 지금 어떤 길에 들어 설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미리 앞서서 꼬불꼬불한 길, 급작스레 도는 길, 지루한 산 길, 깊고 으슥한 두려움의 골자기를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간 우리의 모든 인생들이 시간의 형틀에 어떠한 인상도, 이정표도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연약한 인생들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데 아무 누구도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산자건 죽은 자건, 먼저 간 자는 교훈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고 _______ ___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차라리 원망이 앞섰습니다. 왜냐 하면 아직도 그분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장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삶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질병이나, 쇠퇴, 노년의 의식적인 위험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고 왕성할 때는 죽음을 우리와 동떨어진 원수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몽롱한 세계의 어슴푸레 깔려 있는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하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삼킬 자를 찾고자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같이 우리 가까이에, 아니 우리 가운데 항상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위독한 병실이나, 사경을 헤메는 침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인생의 거친 삶의 현장을 걸어 갈 때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나, 쉬고 있는 거리에나, 언제나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행로에 올무를 두고 걸려 넘어질 자를 찾는 사냥꾼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이다”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듣습니다. “인생은 그 날의 들의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둘째로,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죽어가는 것들, 소멸하는 것들, 사라져 가는 것들 뿐입니다. 배움이 그러하고, 명성이 그러하고, 권력도 그러합니다. 여기에는 사라져 가는 것뿐 쉼도 없고, 유업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안식이 없는 곳에서 안식을 기대하기 쉽고, 부패할 것들로부터 영원을 기대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흙으로, 티끌에서 티끌로라는 말을 압니다. 우리는 먼지에서 먼지로, 재에서 재로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새로운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에는 애통과 수고와,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 소멸하지 않는 것, 쇠하지 않는 유업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저 하늘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이 땅이 아니라, 저기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천국의 안식은 이땅 아닌 저 하늘나라에 간직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영원한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나비에게 허물이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듯이 죽음은 비상이요, 초월입니다. 죽음은 허무요, 암흑이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관문이요, 필사에서 영생으로 가는 통로이며, 멸사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이제 ______ ____님은 인생의 역중에서 우리보다 먼저 내려가서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곧 그 역에서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영생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먼저 가신 그분과 같이 천국에 들어가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나는 이제 비로소 빛으로 들어 가누나. 저 영광의 세계로 어린 양의 피로 씻긴 문을 통과하노라!!

설교 3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가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한세상 살다 가는 것이 나그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집이 없는 사람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디 하나 정 둘 데가 없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이곳 저곳 정 둘 곳을 찾아 헤매지만 우리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는 정 둘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재물도 만져보고, 명예도 얻어보고, 세도도 부려 보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정둘 곳이 없습니다.
평생을 이 집, 저 집 기웃거려 보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 곳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이나, 친구, 권력... 그 어느 것도 정을 둘 곳은 아닙니다.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고통만 있습니다. 얻으려는 갈망만 있을 뿐입니다. 얻었는가 하면 우리는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우리 인생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으며, 욥은 우리가 주 앞에서 그림자 같다고 말했습니다. 있는가 하면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왔는가 하면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어느 결에 갔는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시간은 언제나 사망과 한편이 되어 짧은 우리의 인생을 좀먹는 것입니다.
또, 우리 인생은 쇠하여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바람결에 지나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느절에 비단같은 살결은 삼베같이 거칠어지고, 맷돌같이 단단하던 치아가 빠지고, 해같이 밝던 눈은 저녁안개같이 뿌옇게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방금 친 장막같이 팽팽하던 우리의 피부는 막 입은 헌 옷같이 주름이 잡히고, 시냇물같이 맑던 음성은 조율 풀린 악기같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어느새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백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압니다.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로 바다로 돌아 갑니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로 태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저의 육신은 흙으로부터 왔기로 흙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령을 불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혼은 하늘나라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릅니다. 그러나 영혼은 하늘나라로 갈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우리는 다 홀연히 변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을 것입니다.
아담으로 죽음이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믿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우리는 이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며,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성도 여러분! 이 소망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가 심령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인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각지의 독특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걸어가는 길을 미리 알지는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미리 앞서서 꼬불꼬불한 길, 지루한 산 길, 깊고 으슥한 두려움의 골짜기를 추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서간 모든 인생들이 시간의 형틀에 어떠한 인상도, 이정표도 만들어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건데 그래도 아무도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산 자이건, 죽은 자건 먼저 간 사람은 교훈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산자의 웅변이건, 죽은 자의 웅변이건 교훈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고 _______ 성도님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입니까?
산자의 웅변이건 죽은자의 웅변이건 거의 동일 합니다만은 후자의 웅변은 대부분의 경우 여운이 좀더 길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고 _______성도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차라리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가 이 세상에서 할일이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관을 하면서 그의 웅변을 듣습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질병이나 쇠퇴, 노년의 의식적인 위험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고 패기가 왕성할때, 죽음은 우리와 동떨어진 원수로만 생각합니다. 몰롱한 세계의 어슴프레한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사경을 헤매는 응급실의 병실이서나, 삶의 거친 들판을 걸어갈 때나, 하루 일을 마치고 평안히 잠드는 침상에서나, 쉬고 있는 거리에서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삶의 길목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현장 현장에서 으르렁거리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순간 순간에 화살을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습니다.“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둘째로,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땅에 영원히 살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는 죽어가는 것들 뿐입니다. 소멸하는 것, 늙어가는 것들, 망가지는 것들 뿐입니다. 배움이 그러하고, 쾌락이 그러하고, 능력이 명성이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모든 것에 착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얻지 못할 것, 가지지 못할 것, 가지고 가지 못할 것에 착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원하지 않은 것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순간의 것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까? 부패할 것들로부터 영원의 조각을 찾으려고 헤매는 것입니까? 이땅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영원이 없습니다.
우리는‘땅에서 땅으로, 흙에서 흙으로 라는 말을 압니다. 재에서 재로, 티끌에서 티끌로’라는 말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것은 여기 없습니다. 새로운 땅, 새로운 소유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입니다. 피곤하지 않고 싱싱한 것,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것, 슬퍼하지 않고 웃음안 있는 곳,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흥하는 것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_______성도님은 그것을 소유하러 간 것입니다. 누리러 간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애통이 없습니다.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그분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출처 : 섬김...그 아름다운 향기로...
글쓴이 : 주님의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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