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료/목회

교회세습, 담임목사, 은퇴 및 선정 어떻게 할 것인가?

맑은샘77 2011. 3. 18. 21:30

 

담임목사, 은퇴 및 선정 어떻게 할 것인가?

 

 

<차  례>

초대하는 말씀

일정과 광고

차  례

제1강좌 : 담임목사의 은퇴와 은퇴후의 목회 참여(이기춘교수)

제2강좌 : 담임목사의 선정 및 청빙(이성희 목사)

제3강좌 : 담임목사 부자승게에 대한 종합정리(정진경 원로목사)

부  록

  

담임목사의 은퇴와 은퇴후의 목회참여

 

 

이 기 춘(감신대 교수)

 

 

I. 시작하는 변(辯)

 

죤 브록만(John Brockman)이 엮은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 속에는 세계의 지성인 110명이 꼽은 121가지의 발명품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에는 인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과 나란히 지우개가 끼어있다. 지우개를 위대한 발명품으로 추천한 더글러스 러쉬코프(Douglas Rushkoff)의 변에 따르면 지우개가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품의 한 가지가 되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1). 실수의 뒤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에는 가설-실험에 바탕을 둔 과학의 발전이나, 짓고 허물면서 이어져 온 찬란한 문화나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지우개는 종교적으로 말하면 참회의 밀실이며, 신앙적으로는 용서의 은총이며, 과학적으로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2000년 통계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 40년 간 생활수준, 위생상태, 의료기술 등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되어 전체인구의 7.1%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바야흐로 한국사회가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로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령화 사회는 노인들에 대한 경제문제, 건강문제, 여가문제, 역할상실의 문제, 고독과 소외와 갈등의 문제, 죽음과 궁극적 관심의 문제 등 대처하기가 힘든 난제들을 집단적으로 발생시킨다. 노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면서도 사회적인 문제이며, 가족의 문제이면서도 국가의 문제이다. "담임목사의 은퇴와 은퇴후의 목회참여"라는 주제도 노인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은퇴 이후의 목회자는 한 자연인으로서의 노인기의 심리-사회적 특징들을 체험하면서 오류와 목회의 과오들을 지우고, 재정리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은퇴와 목회참여"라는 상반된 주제를 하나로 엮는 과제는 노인복지와 목회의 정체성, 교회 공동체의 돌봄과 창조적 노인기를 탐색하는 이중적 과제를 좌우에다 설정하고 문제를 탐색하게 된다.

 

II. 노인기의 특징과 목회자

 

에릭슨(E. Erikson)의 생애주기 이론에 따르면 유아기로부터 노인기에 이르는 삶의 과정은 단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마치 호수에 던진 돌맹이 하나가 작은 동그라미로부터 큰 동그라미를 연속적인 파장으로 그려내는 것과 같다.

에릭슨의 인생여정의 8단계는 다음과 같다.

 

 

 

단     계

심리사회적 위기

덕    목

관계의 범의

1

유 아 기

(2세까지)

기본적 신뢰 대

기본적 불신

희    망

어 머 니

2

초기아동기

(2-3세)

자발성 대

수치심및의심

의    지

부    모

3

놀 이 기

(3-5세)

주도성 대

죄책감

목    표

기본가족

4

취 학 기

(6-12세)

근면성 대

열등감

실    력

이웃,학교

5

청소년기

(12-18세)

정체성 대

정체성혼란

충 성 심

동    료

6

초기성인기

(19-35세)

친밀감 대

소외감

사    랑

삶의 반려자,

경쟁자,협조자

7

성 인 기

(35-65세)

창출성 대

침체성

돌    봄

가정과직장

8

노 인 기

(65세이후)

자아통합 대

절망감

지    혜

인류, 동조자와

비동조자

 

에릭슨은 노인기의 사회 심리적 특성을 '자아통합 대 절망감 또는 혐오감'이라고 한다. 자아통합은 젊은 날로부터 몸에 밴 갈등이나 모순이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상태이다. 이는 자신의 얼굴을 생긴 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의미를 준 사람까지도 받아들이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 책임을 지며, 불원간에 닥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태는 유년기의 순진성까지도 회복해서 '노숙한 순진성'(senile childishness)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혐오감이나 절망감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못 받아들이고, 남을 원망하고 무익한 증오를 발산하게 된다. 따라서 자아통합이 이루어지면 지혜가 터져 나오고, 절망감과 혐오감이 나타나면 우울증이 엄습한다. 사람은 신비스럽고 궁극적인 타자(Ultimate Other)와 대화를 나누려고 속마음으로 시도한다. 타자가 없는 '나'란 있을 수 없고 나누어 가진 '타자'가 없이는 '우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약속에 따르면 이것이 노인의 희망이다2). 노인에게 있는 이러한 자아통합의 덕목 때문에 레위기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다(레19:32). 칼빈은 이 구절에 근거해서 부모를 공경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며, 노인을 존경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했다.

위의 8단계를 노인기를 중심으로 도식을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기본적신뢰

      대

 기본적 불신

 

 자 발 성

       대

 수치심 및 의심

 

 자아통합

      대

  절 망 감

 

  주도성

      대

  죄 책 감

 

  근면성

      대

  열등감

 

  정체성

      대

  정체성혼란

 

  친밀감

      대

   고 립 감

 

  창출성

       대

   침 체 성

 

위와 같은 여정에서 볼 때 목회자의 은퇴시기는 마지막 단계인 노인기에 해당된다. 세실 폴(Cecil R. Paul)은 이 노인기의 은퇴전환점(retirement transitions)에 나타나는 변화와 상실을 3가지로 적고 있다3).

 

       변화요인                           상    실

A.   신체적 변화                        1. 건강 상실

                                        2. 에너지 상실

                                        3. 기동력 상실

                                        4. 예민성 상실

                                        5. 용모 상실

 

B.   환경적 변화                        1. 직업 상실

                                         2. 역할 및 기능상실

                                        3. 주거 상실

                                        4. 경제적 상실

 

C.   사회적,문화적 변화                 1. 가족 상실

                                        2. 자녀, 배우자, 확대가족상실

                                        3. 사회적 집단상실

                                        4. 공동체 상실

 

목회자도 예외 없이 위의 세 가지 변화를 겪게 되면 위기의식에 휩싸이게 되어 당황하거나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체적 변화는 우울증, 무력감을 유발시키고, 환경적 변화는 적응능력을 떨어뜨리고 삶의 연속성을 단절시킨다.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가족관계를 하나 둘씩 퇴거시키고, 정들었던 교회와 교단과 동역자들과의 관계를 축소시키기 때문에 소외와 고독감을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은퇴기의 교역자에게는 노인복지적인 대응책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III. 노인복지의 신학

 

목회상담학자인 클라인벨(H. Clinebell)의 [전인건강](Well Being)이라는 책에는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지에 실렸던 로자 베이어(Rosa Beyer)에 대한 멋진 기사가 소개되어 있다. 로자 베이어는 자신의 106번째의 생일날에 특별히 원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밖에 나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산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무언가를 해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죠. 그런데 난 아직 그 일을 다하지 못했어요. 내가 비록 그게 뭔지 알게 된다 하더라도 일을 하려면 몇 해를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4) 로자 베이어는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어머니는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철도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는 쟁기로 농토를 일구어 채소, 꽃, 과일, 우유 등을 생산해서 팔았다. 남편은 걸어서 출근하다가 자동차에 치어 죽었다. 병들어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그녀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그녀가 105살 되던 어머니 주일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닌 이유를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그 이유는 별로 다른 일이 할게 없었기 때문이죠."5) 로자 베이어의 이야기는 노인복지가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노인복지란 노인들에게 제도적인 복지혜택을 베풀어주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노인 스스로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망과 인간적인 자질을 발휘하여 스스로가 복지적인 삶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곧 노인기에 이루어야 할 삶의 목표를 성취하도록 돕는 것이다. 노인복지는 인간복지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복지적인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어린이 복지, 청소년 복지, 성인 복지와 더불어 노인복지는 전인적인 복지의 한 부분이 된다.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생의 어느 부분은 복지를 누리고 어는 부분은 복지를 빼앗긴다면 그런 삶은 삶의 목표를 성취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노인복지를 마치 별개의 것으로 본다든지, 노인기에만 특별히 복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복지란 바로 자아통합의 특성을 유지시켜주고 지혜로 삶을 대처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로자 베이어의 이야기는 이러한 특성을 실현한 탁월한 예증이다.

어거스틴은 [참된 종교](Of Ture Religion)라는 글 속에서 사람을 "외적이고 땅에 속한 사람"과 "내적이고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전자는 연대기적인 세월에 속한 사람이어서 육체의 질서를 따르기 때문에 열등하고, 유약하고, 질병에 걸리지만, 후자는 세월에 속하지 않고 영적인 진보를 이룩한다고 했다. 암브로스(Ambrose)는 진정한 노인은 날자와 달수로 측정된 사람이 아니어서 끝을 모르는 인내심과 유약함을 모르는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따라서 노인은 오래 산만큼 강건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성장하려고 더욱 애쓰게 된다는 것이다6).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히브리서 4:11-13에 대해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경주자 같아서 오직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서 비록 나이가 들면 육체는 쇠잔해지나 영은 강성해 진다고 했다. 이 모든 노인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해석은 노인기를 상실의 패러다임(aging as loss paradigm)으로 보지 않고 성취의 패러다임(aging as fulfillment paradigm)으로 본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노인기를 인생의 성취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은 노인기의 가능성과 유효성을 확증하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라이온(K. Brynolf Lyon)은 노년기의 복지를 추구하는 신학의 지향점을 희망, 축복 및 구속으로 제시하고 있다7). 희망은 절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무기이다. 희망은 현실성을 뛰어넘어 가능성을 폭발시킨다. 희망은 기대의식을 앞세우고 현재에서 체험하거나 성취 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해준다. 그러므로 희망은 노인기의 막다른 골목 같은 현실을 뛰어 넘어 우울증을 물리치고 자아통합과 자기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해준다. 축복(blessing)은 어느 시기, 어느 토막의 인생의 주기에도 하나님이 임재해 주신다는 것이다. 마터(Cotton Mather)가 말한 대로 "노인기는 언제나 향수상자와 같은 것이다. 열 때마다 사람들에게 향기를 뿜어내고 신선함을 선사해 준다." 이것이 바로 노인기의 지혜이며, 미학적으로 늙어 가는 자태이다. 구속은 희망으로 가득 차고 축복으로 가득한 인생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확인하며 노인기의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비스러운 궁극적 타자를 만나는 사건으로 확인된다. 구속은 노인기의 신체적, 영적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어 잠재력을 발휘하고, 마지막 성장의 단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노인복지는 복지의 조건들을 노인들에게 베푸는 시점을 넘어서 노인기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동원하여 자기성취와 가치실현의 목표를 향해 나아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인생의 종말과 신앙의 결론에 접근하고 있는 은퇴 교역자들에게 희망과 축복과 구속이라는 가치들은 도전해 볼 만한 복지의 목표로서 아주 적합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IV. 노화의 과정에 어울리는 은퇴와 은퇴후의 사역

 

노인학의 이론들에 의하면 노화의 과정은 흔히 3단계로 분류된다 : 초기 노인기(young old age), 중기 노인기(middle old age), 쇠퇴기(frail old age). 초기 노인기는 60중반-73세까지 이어진다. 중기 노인기는 73세-81세까지 지속된다. 쇠퇴기는 81세 이상을 포함한다. 찰스 거킨(Charles V. Gerkin)은 이런 노화의 과정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8).

1. 연속적 노화유형 : 이 유형은 은퇴 전에 했던 일이나 이와 비슷한 유형의 일을 계속하는 상태이다.

2. 급변적 노화유형 : 이 유형은 은퇴 전에 미리 계획을 하여 하는 일과 사는 장소까지를 완전히 바꾸는 과정이다.

3. 퇴거(withdrawal)적 노화유형 : 이 유형은 은퇴 전에 했던 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서 편안한 안식을 취하는 과정이다.

4. 용기 있는(heroic)노화유형 : 이 유형은 인생의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비범하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불행한 이웃을 도우면서 유용하게 노인기를 대처하는 과정이다.

5. 비극적 노화유형 : 이 유형은 건강의 악화나 비극적 사건이나 경제적 결핍 등으로 노인기의 품위를 유지 할 수 없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제1형이나 제2형을 이상적인 은퇴유형으로 선호하고, 예외적으로 제4형을 선망하기도 한다. 제3형은 얼마 뒤 권태를 느끼게 되고, 제일 피하고 싶은 유형은 제5형이다. 거킨은 3단계 노인기에 대한 목양적 돌봄의 방법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9).

1. 초기 노인기에 대한 돌봄 : 이 시기는 노인기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노화의 현실을 수용하고 주변환경도 자신을 노인으로 대한다는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교회는 노화의 문제에 따라 오는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세대간에 이런 문제를 두려움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대회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신앙의 전통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 이 시기의 노인들의 견해를 들어보는 일은 중요한 과정이 된다. 또한 이시기는 죽음의 필연성과 타협해야 하는 과제가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삶이 진행된다.

2. 중기 노인기에 대한 돌봄 : 이 시기는 노인기의 현상이 개인차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정과 공동체, 사회적인 조건들이 이 시기의 노인들의 쇠약현상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 내지는 문화적 태풍이 노화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고, 죽음의 필연성과 매일매일 대면해야 하는 현상이 전개된다. 이런 문제들과 대결하는 일이 힘들게 되면 절망감이 강화된다. 따라서 교회는 노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서 온 세계와 연결되는 인간관계를 지속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주변환경과 계속해서 참여할 수 있는 활동에 접촉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3. 쇠퇴기 노인기에 대한 돌봄 : 이 시기는 인생의 한계를 넘어선 여분의 인생계절이다. 이 시기는 어느 때 보다도 안정감으로 죽음의 위협을 대처해 가는 때이다. 이 시기는 노인을 돌볼 수 있는 공동체가 어느 시기보다도 더욱 요청된다. 노인이란 인생이 여전히 사람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있다는 확증이 느껴지는 돌봄이 교회에 의해서 베풀어져야 한다.

앞에 언급한 5가지의 노화유형과 3가지 노인기에 대한 돌봄을 근거로 해서 담임목사의 은퇴와 은퇴후의 목회참여를 생각해 본다면 대략 그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현대 한국교회의 목회구조에서 보면 각 교단의 전통과 규칙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경우에 따라 담임목사의 은퇴는 "은퇴와 은퇴후의 사역을 혼합한 은퇴의 형태"를 많은 교회가 선택하고 있다. 곧 은퇴를 한 담임목사가 월 1회 내지는 2회의 주일예배설교를 하거나, 일정양의 사례금이나 보너스를 받고, 목회활동의 한 부분을 팀미니스트리의 형식으로 담당하고 있다. 어떤 교단도 이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관례와 예우의 차원에서 개교회별로 시행하고 있다. 이런 관례와 예우는 은퇴 교역자와 현직 교역자 사이에 불편을 야기시키기도 하고, 분쟁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사실상 이런 예우와 관례는 한국 교회에만 있는 특수한 사례로 가부장적 관습과 정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의 유형으로부터 나온 관행이라고 보여진다.

이를 노화의 유형에서 본다면 현직시절에 수행했던 목회사역을 지속함으로써 연속선상에서 노화기를 맞고 싶어하는 은퇴 목사의 희망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다. 이는 반대 급부적으로 퇴거적 노화유형과 비극적 노화유형을 예방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고 보여진다. 연속선상의 노인기를 맞게 해주는 은퇴교역자는 수적으로는 미미하다. 이런 유형의 은퇴는 규모가 있고, 담임목사와 특정한 유대(개척, 장기목회, 교회성장공로등)가 있는 경우에 한정되어 있다. 노인복지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예우를 받는 목회자는 노인기를 지나는데 필요한 복지의 조건을 다른 교역자에 비해 잘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지의 혜택은 보편적으로 시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무조건 적극적인 의미만 부여할 수는 없다. 은퇴란 은퇴이다. 은퇴란 지금까지 수행해온 과업과 그에 따르는 권리와 책임과 지위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은퇴의 본래적 의미대로 은퇴의 경계선을 긋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는 정으로 맺어진 인간관계에 치중한 나머지 복지적 배려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교단적 입장에서 보면 은퇴라는 정년기에 대비하기 위해 은퇴금을 제도적으로 적정선에서 지급하는 일은 물론 은퇴기의 삶을 준비하고 이에 적응하는 방식에 대한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은퇴는 어떤 형태로든지 완전 은퇴여야 한다. 은퇴 후에도 자신이 담임했던 교회에서 공식적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은퇴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퇴후의 목회참여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형식과 내용이 되어야 하는가? 이미 앞에서 세실 풀이 언급한 대로 노인기는 신체적 변화, 환경적변화, 사회적 내지는 문화적 변화 요인에 의해 다방면의 상실을 경험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게 된다. 노인기 목회참여는 이런 인간적인 한계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교회의 상황과 기능의 특성에 따라 목회에 참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외국의 사례에서는 흔히 대교회의 담임목사나 유능한 목회자들이 은퇴 후에 다른 지역의 다른 교회와 계약을 맺고 부교역자나 특수한 영역을 담당하는 보조교역자로 사역을 계속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계약직이고 담임목사의 보조자이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인간관계의 위계질서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은퇴후의 목회참여는 기능으로 가늠하지 않고 예우로 처리하게 된다. 그러나 새 시대의 목회상황은 다원화 시대를 맞게 되고 회중들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은퇴교역자의 지혜와 경험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창구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보다는 교단적, 거교회적차원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은퇴후의 목회참여에 대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해 볼 수 있다.

1. 은퇴목회자의 포럼개설 : 이는 은퇴교역자들의 활성화된 친교와 교제를 통해 교단과 교회, 선교와 교육, 교회일치운동 등에 관한 의견을 협의를 거처 원로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조직적 채널의 목회이다. 이런 채널은 교역자 세대간의 대화의 창구도 되고, 은퇴 교역자들의 자기표현의 기회를 제공 할 수 있다. 적절한 공간과 시설만 갖추면 정보통신의 이기를 이용하여 여론에 의한 목회참여가 가능하다.

2. 노인기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특수영역의 목회 : 이는 현직시절의 교회와 지역을 달리하는 상황에서 계약에 의해 특정한 목회를 수행하는 목회참여이다.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을 필요로 하는 상담분야의 사역, 소외감과 우울증으로 인생의 무상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노인회중들을 위한 노인목회, 한국교회의 전통과 영성적 강점으로 부각된 노인 중심의 새벽기도사역등 담임목사의 사각지대에 속하기 쉬운 틈새를 메워 주는 보조적 목회를 개발, 수행 할 수 있다.

3. 사회봉사 목회 : 이는 현대의 조직사회가 미처 배려하지 못하는 분야를 봉사의 차원에서 수행하는 목회이다. 헤셀(Dieter T. Hessel)은 미국적 상황에서 노인들이 할 수 있는 봉사의 역할로 자연환경 보존운동, 노부부의 집에서 정상을 이탈한 청소년 보호와 선도,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봉사 프로그램 등을 들고 있다10). 한국적 목회 상황에서도 자연환경 보존과 생태학적 운동, 자살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상담센터에서의 봉사, 세대를 뛰어넘는 청소년 보호나 교육 등의 분야에서 봉사적 목회에 참여 할 수 있다.

완전한 은퇴와 후속적인 목회참여 중 어느 것을 택하든지 목회자의 은퇴는 노화의 과정에 어울리게 배려되어야 한다. 초기 노인기에 제도적인 은퇴기를 맞게 괴고 그 이후 노화현상기를 살아가는 다른 노인과 별 차이 없는 노인기를 맞게 된다. 자연스러운 은퇴나 필요한 경우에 조기은퇴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노인복지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은퇴한 교역자들을 위해 그들의 생활사(life history)였던 교회 공동체가 노인기의 목회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헌신을 자긍심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다는 유대감을 보여 주여야 한다. 은퇴와 은퇴후의 사역은 모두가 건강하게 노인기를 소화하면서 노인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노인복지의 시각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은퇴는 완전한 은퇴이어야 하며, 은퇴후의 사역은 노인기의 잠재력과 지혜와 경험을 교회 공동체와 나눈다는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V. 맺는 말

 

노인기는 발달심리학적 주기이론에서 보면 자아통합과 절망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또한 노인기는 신학적으로는 삶의 축복과 구속을 재현하는 자기실현의 기회이기도 하다. 노인기의 자기실현은 개인적인 차원이나 특수한 사례에 의존하기보다는 제도적, 공동체적의 체계를 필요로 한다. 목회자의 은퇴와 은퇴후의 사역은 노화의 과정과 노인기의 심리, 사회적 환경과 신앙적 덕목이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40년 간의 여정을 끝내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전수하는 사건은 목회자의 은퇴와 지도력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전통이라 할 것이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34:9)

 

 

 

 

 

 

 

 

담임목사 선정 및 청빙

 

 

이 성 희목사(연동교회)

 

 

  최근 한국교회의 화두는 단연 소위 '목회직의 세습' 문제일 것이다. 담임목사의 선정 및 청빙의 과제도 목회직의 승계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목회자직의 부자 승계나 담임목사의 청빙 문제도 한국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발생된 것으로서 교회성장이 나은 또 다른 과제인 것이다. 우선 문제의 발단은 교회 성장으로 인한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차별성이 담임목사의 청빙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하고 있으며, 당회의 권위주의가 담임목사의 청빙을 권위적으로 만들고 있다. 오랜 전통의 개혁교회들은 한국교회와 같은 청빙의 절차나 위임이란 과정을 생략한다. 단지 부임(installation)으로 청빙 절차를 마친다. 지나친 권위주의는 과정의 혼란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특수성에 비춰본 선정 및 청빙에 대하여 몇 가지로 분류하여 문제점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1. 담임목사 청빙 유형

 

  (1) 승계

 

  한국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의 첫 번째 유형은 승계이다. 승계란 부자간의 목회직 승계 외에 부목사가 담임목사로 승계 되는 경우 혹은 친족이 승계하는 경우 또는 사제지간의 승계 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승계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특수한 경우의 승계가 문제가 되고 그 문제가 일반화 되는 것이 문제이다.

  사제지간 혹은 그 외의 관계의 승계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다. 성경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를 통하여 승계의 유형을 제시한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나 그들의 사역은 팀의 성격을 띄고 있었고 엘리야의 승천으로 엘리사가 사역을 승계한다. 그러나 그 지위(position)는 승계가 되지만 그 역할(role)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다. 지금도 승계란 그 지위이지 그 역할은 아니다. 목회자란 지위와 역할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으므로 한 가지만의 승계로 완전한 승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공모

 

  많은 교회들이 공모라는 형식을 통하여 담임목사를 청빙한다. 공모란 가장 공정한 청빙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담임목사로 자격을 갖춘 인물에게 가장 형평성 있는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고, 가장 적격한 인물을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성경적 원리를 적용한다면 공모란 성경적 청빙 과정은 아니다. 담임목사로 당사자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임명(designation)을 통하여 어느 개인에게 지위가 주어지고 그 지위와 함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준비되고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으로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선지자나 사사가 그러하였고 왕도 세습하였지만 사울이나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의 일방적 자격 부여에 의한 임명이었다.

  또 한가지의 문제는 공모가 요식 행위로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모 이전에 담임목사 후보를 내략적으로 결정하고 들러리로 공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에 청빙공고가 나지만 청빙공고는 형식적이고 실제로는 이미 결정해 놓은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3) 추천

 

  추천은 담임목사 청빙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흔한 사례일 것이다. 교단이나 교계의 원로들이나 신망 있는 인물들로부터 담임목사 후보를 소위 '알름'을 통하여 추천 받는 것이다. 해당 교회를 잘 이해하는 존경받는 인물의 천거는 가장 바람직하고 권위 있는 청빙의 형식이 될 것이다.

  성경도 추천의 경우가 있다.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하였다(롬 16:1). 물론 로마 교회의 담임 교역자는 아니었지만 바울이란 권위 있는 사도의 추천은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교회는 바나바란 당대의 가장 지적인 목회자를 고린도교회에 청빙하려고 바울에게 의뢰한 흔적이 나타난다. 고린도교회는 바나바를 원했고 바나바는 당장은 갈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갈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16:12).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바나바를 추천하고 그에게 권고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후에 바나바는 바울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자천하거나 천거서를 부치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고후 3:1).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추천서를 받아 교회에 왔고 바울은 추천서가 없다고 하여 반대를 받은 듯하다.

  추천은 지금도 많이 이용되고 있는 청빙의 방식이며 가장 용이하고 권위적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후보자에 대한 추천자의 주관적 판단이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추천자가 판단하는 후보자의 자질이 교회의 정서나 성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권위 있는 다수의 추천자의 추천이 오히려 선택에 혼돈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2. 담임목사 청빙 과정의 문제점

 

  (1) 채용

 

  담임목사는 청빙에서부터 성직자로서의 예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일반 직장에서의 형식을 교회가 도입하여 청빙이 아니라 채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빙이란 모셔오는 것이고 채용은 고용하는 것이다. 청빙의 경우는 담임목사를 모시는 교회의 입장(좁은 의미로는 당회의 입장)이나 목회자의 입장이 동일하게 청지기가 되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지만 채용의 경우는 교회는 고용주가 되고 목사는 고용자가 되기 쉽다. 실제로 사람이란 칼자루를 쥔 사람은 칼날을 쥔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힘을 사용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된다.

 

  (2) 경쟁

 

  공모나 추천 등의 청빙 방식은 가장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게 된다. 공모의 경우는 후보자들 사이의 자기 과시 내지는 상대방 비방이 가능하게 된다. 추천의 경우는 후보자들을 내세운 추천자들 사이의 대리전(代理戰)의 양상을 띠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현실적인 면에서 청빙 과정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생존경쟁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최근 교회의 개척과 증가의 수에 비하여 목회자의 증가가 상대적으로 월등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 심리는 결국 교회로 하여금 목회자의 선택자가 되게 하고 목회자의 자질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3) 기준

 

  목회자의 청빙 공고의 내용에서 청빙 대상의 기준은 비 현실적이며 비 성경적인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전통 있는 교회들이나 나름대로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이런 유의 오류를 쉽게 범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발표한 기준과 그 후에 청빙한 목사의 자격은 실제의 거리가 먼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교회가 공개한 청빙의 기준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감독자의 자격은 도덕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딤전 3:1-7, 딛 1:5-7). 그리고 성경에 타나난 초대교회의 일곱 사람(집사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집사라는 말은 없다. 그리고 디아코노스는 '집사'라기 보다 '목회자'가 더 가까운 의미이다)의 자격은 영성과 도덕성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영성과 도덕성보다는 지성에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다. 이런 비성경적인 기준이 비인격적인 목회자를 양산해내는 결과를 낳게 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런 그릇된 기준이 목회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뿐만 아니라 영적 해이(spiritual hazard)를 촉발하는 것이다.

  

  (4) 개교회주의

 

  교회란 공교회이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교회란 노회이다. 교회란 지교회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단에 따라서 목사의 소속이나 위치 그리고 청빙의 절차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공감(consensus)이 있다. 그 것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내 교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중요하며 내 교회만 잘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잘 되어야 내 교회가 잘 될 수 있다는 교회관이 우선되어야 한다.

  더구나 새로운 시대, 세계화의 시대란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인 새로운 구도의 시대이므로 개체와 더불어 연합체가 더불어 중요한 시대이다. 정보시대는 일치와 공동창조의 시대이며 연합과 조화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내 교회만 생각하고 흔히 '목사 빼오기', '스카웃 경쟁'등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교회가 목회자에 대한 예우를 미끼로 기관이나 학교 등에 가장 적격인 목사를 교회로 모셔오기는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목회 혹은 사역이라고 볼 때에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개교회가 덕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관점은 하나님이 덕보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손해보시는 일은 교회도 결과적으로 덕이 되지 못한다.

 

 

  3. 담임목사 청빙의 대안

 

  (1) 청빙 예의

 

  담임목사 청빙의 대안은 위에서 거론한 청빙의 문제점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는 성경 시대와 같은 직접 계시 시대가 아니므로 하나님이 어떤 목사에게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로 계시하셨는지 알 수는 없다. 청빙의 방법이 승계이든, 공모이든, 추천이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최선의 방법은 성경적이 말하는 원리에 합하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합리적이며,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인격적이어야 한다. 우선 청빙의 예의를 갖추게 되면 상당히 많은 청빙 과정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고용한 목회자들 통하여 교인 스스로가 은혜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고용된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존경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교회와 담임목사 사이의 청빙의 예의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심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모세의 호렙산 조우(遭遇)는 이러한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부적격을 들어 끝까지 거절하는 모세와 그에게 자격 부여를 들어 마침내 보내시는 하나님의 관계가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이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편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두려운 마음으로 고사(固辭)할 수 있는 겸허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교회의 편에서는 교회를 위하여 목사를 깍듯한 예로 모시고 올 수 있는 자세가 엿보여야 할 것이다.

      

  (2) 객관적 추천

 

  교회가 교회의 직원을 선택할 때 필요한 성경적 자세가 사도행전 6장의 일곱 사람의 선택에서 나타난다. 첫째, 교회가 정한 자격에 정확하게 합치한 인물을 뽑는 것이다. 둘째, 교회에 적합한 인물을 뽑는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뽑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교회가 정한 수대로 뽑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담임목사의 청빙 절차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우선 그 자격이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승계나 추천의 경우는 객관적 자격이 결여될 확률이 상당히 크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자격의 객관성보다 흔히 우리 사회의 병리라고 하는 삼연(三緣) 즉 혈연, 지연, 학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자격의 객관성이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적합한 인물을 청빙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보자의 자격을 선정할 때에 그 자격이 객관성이 있어야 하며 그 자격을 정한 다음에는 모든 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자격 심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이 교회와 담임목사와의 조화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지명

 

  위에서 말한 청빙 과정의 폐해는 거의가 무계획한 목회자의 수급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 시대나 초대교회 그리고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60년대까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까지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목회자의 수는 공급과잉 상태에 이르렀고 채용과 경쟁의 반복이 이루어졌다.

  초대교회의 문헌에 나타난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의 예는 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목회자가 부임하는 단순한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라는 보편적 직분(universal office)이 있어서 모든 교회를 섬길 수 있었고 그 기능이 어느 한 교회에 제한되지 않았다. 동시에 감독, 장로, 집사, 목사 등의 지역적 직분(local office)이 있어서 그 기능이 어느 한 교회에 제한되는 직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직분이 무엇이든지 철저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부르심의 응답이었지 자신의 지원에 의한 직분의 수행이 아니었다.

  성경 시대나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나라의 경우도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수요과잉에 비하여 공급부족 현상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교회의 급속 성장은 수요와 공급의 반전 현상을 나타내었다. 수요부족에 비한 공급과잉 현상이 뚜렷하게 된 것이다. 이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담임목사 청빙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직접 계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목회자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명이라는 절대적 의존이 필요할 것이여 이러한 자세가 가장 은혜로운 청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4. 담임목사 제도의 새로운 패러다임

 

  (1) 팀

 

  미래 목회는 철저하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는 새로운 목회이다. 기존의 산업 사회 유형의 목회는 더 이상 정보 사회에 적응력과 경쟁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산업 사회 형태의 목회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수용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본질의 상실이 아니라 본질의 보존을 위한 부대를 새 것으로 준비하는 것이며, 물동이를 버리는 일이다.

  새 패러다임 요청의 당위성은 정보 사회로의 변화는 이전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 현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정보 사회의 특징은 조화와 일치의 사회이며. 세계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경쟁과 분리의 패러다임에서 조화와 일치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보 사회는 철저하게 전문성을 요청하므로 혼자서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정보 사회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요청하는 시대이므로 팀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한 목회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는 담임목사 제도의 개혁은 팀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수용이다. 티드웰(Charles Tidwell)은 바람직한 팀 구성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팀을 구성한 목회자는 서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이런 인정과 존경 없이는 팀을 이룰 수 없다. 둘째, 모든 목회자는 교회에 의하여 청빙을 받은 의식을 가져야 하며 특정한 업무의 부서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거나 부서에만 소속되었다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셋째,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상호 신뢰를 유지하고 신뢰감을 넓혀 나가야 한다. 넷째,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규칙적이며 빈번하고 명확한 의사소통이 있어야 한다.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오해가 생기고 업무의 중복이나 공백이 생기고 팀이 와해된다. 다섯째,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서로 친근하게 가까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비록 육체적으로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늘 친밀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가 말한 위와 같은 팀의 원리를 통하여 담임목사의 청빙의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담임목사 제도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성화

 

  영성이란 말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언어이다. 영이란 원래 하나님의 숨을 의미하듯이 영성이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고대 교부의 위대한 교부인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영적, 종교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한다.

  기독교의 기능을 두 가지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성적 기능을 가진 영성적 종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가진 예언자적 종교라고 한다. 그러므로 담임목사의 자격도 영성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으로 가늠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정보 사회인 동시에 영성 시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21세기를 영성 시대라고 정의한다. 영성이 중요한 사회 구성 요인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21세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는 영성이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고 사회가 이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같은 맥락이다. 같은 의미에서 영성의 양극화(polarization)도 극대화할 것이 분명하다. 영성적 양과 질도 시간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서 영성적으로 충만한 사람과 영성적으로 빈곤한 사람의 간격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정보 사회는 기술시대이다. 과학기술이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고 기술이 가치를 동반하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들에게는 목회 기술을 요청하고 기술 목회에 익숙해져 간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목회 상황을 바라보면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자료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집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무한한 목회자료들과 CD Rom에 저장된 목회 기술들이 목회에 도움도 되겠지만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목회의 기능공이 되게 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은 이런 유의 목회 자료가 없었고 목회 자료 없이도 훌륭하게 목회하였지만 거의 모든 목회를 자료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는 목회 기술이 아니라 목회 영성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목회자의 영성은 미래 교회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영성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영성 시대 즉 정보 시대를 목회하는 목회자들의 책임이며 하나님의 요청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영성이 극대화된다면 담임목사의 청빙의 요건이나 과정의 영성적으로 변하며 은혜롭게 될 것이다.

 

 

  (3) 전문화

   

  지난 세기까지의 한국신학은 교역자 양성이라는 폐쇄적 의미밖에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신학이란 성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으로 좁은 의미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신학이 사회변동에 적응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으며 이러한 자구적 노력은 신학적 사고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사고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증대되고 있다.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미래현상을 바라보면서 시대적 긴급성 가운데서 한국신학은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신학이야말로 사회를 알고 사회를 안고 해야 하는 학문이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한국신학은 세계 안의 신학, 세계를 위한 신학, 세계와 더불어 가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세계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며 세계화를 수용할 수 있는 포괄적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신학은 이제 한국이나 아시아라는 좁은 궤도를 벗어나서 세계라는 넓은 궤도로의 진입을 서둘러야 하며 담임목사의 기능도 다양한 전문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래사회는 극도로 발전하는 전문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육은 비전문적으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가 수업연한에 비하여 가장 전문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전문화 교육은 전문직으로서의 목회를 인정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목회를 위하여 신앙과 영성을 겸비한 '인간형성'이 어떤 차원에서든 보완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문직 양성'이 지금까지보다는 강조될 수밖에 없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성이 요구되는 이때에 한국의 신학교육은 아직도 모든 신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담임목사이고 목회자 양성은 당회장 양성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대학교에는 '당회장과' 밖에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런 근시안적 전세대적 사고를 미래를 위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이다. 나아가서 한국신학은 미래목회를 위한 전문화를 위하여 전문목회를 광범위하게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목회자의 최종 목표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전문화 목회를 지향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통하여 목회에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담임목사 부자승계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

 

 

정 진 경(신촌교회 원로목사)

 

 

들어가는말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룬 교회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사실 한국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이룬 것은 60년대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60년대부터 시작된 도시화와 더불어서 대형교회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교회들을 세운 목회자들이 은퇴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들의 리더쉽 이양이 중대한 문제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에 있어서 담임목사의 청빙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천주교와 비교해 보면 잘 들어난다. 성례전을 예배의 본질로 하는 천주교에서는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직능은 성례전 집전이다. 그리고 이 성례전은 예식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어느 신부가 부임하든지에 관계없이 교회는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서 개신교는 설교를 예배의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이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적인 확신이나, 스타일에 따라서 다양해진다. 따라서 어떤 목회자를 담임목사로 모시는가 하는 것은 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또한 개신교는 담임교역자를 청빙하는 문제에 있어서 천주교와 매우 다르다. 천주교의 본당사제는 주교가 한다. 천주교는 교회를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나눈다. 가르치는 교회는 교황에서 신부에 이르는 성직구조이며, 배우는 교회는 평신도들로 이루어진다. 천주교는 평신도에게 성직자를 청빙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직자만이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따라서 누구나 누가 참된 성직자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담임목사를 신자들이 청빙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담임목사의 청빙은 근본적으로 그 교회 공동체의 자율권에 속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교회의 자율권이 충분하게 고려되어야 된다는 점도 분명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율권이란 그 교회에 속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통해서 담임목사가 선출되었는가 하는 점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이런 담임목사의 승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보고, 아울러서 이것에 관한 찬반의견을 종합한 다음에 필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한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논의가 어떤 특정교회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Ⅰ. 부자승계에 대한 역사적 개괄

 

성서시대의 지도자들을 어떻게 선출하였는가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다. 사사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지도자가 선출되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었다. 여기에서 지도자가 되는 일차적인 조건은 영적인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면서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지도자가 등장한다. 그것은 혈연을 통한 지도자의 선출이다. 왕위는 자동적으로 아들에게 세습되었고, 제사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은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의 정통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는 계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서에서는 혈연적인 정통성보다는 계약 적인 정통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항상 왕권이나 교권이 계약 적인 정통성에 충실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리더십의 부자승계를 찾아볼 수 없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였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앙공동체가 지도자를 선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사사시대나, 초대교회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능력을 갖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지만 안정된 시대에는 혈연을 통한 부자승계가 이루어져왔고, 이것은 곧바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본질적으로 담임목사의 자리가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만일 어려운 교회, 아무도 오지 않으려고 하는 교회에서 자신의 아들을 후임목회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미담에 속할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로마카톨릭교회는 부자승계는 없었다. 천주교는 신부의 주장하기 때문에 교회를 물려 줄 대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독신이었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신부 가운데 결혼한 사람은 종종 이었다. 결혼한 신부들은 교회의 재산을 자기의 자녀에게 물려주고자 하였다. 이것이 부패의 근원이 되었다.

그래서 황제와 교황은 성직자의 결혼을 교회법으로 정하고 이것을 강화하였다(1049). 이후부터 천주교에서 산부의 독신은 의무조항이 되었다.

동방교회는 좀더 달랐다. 동방교회는 결혼한 사람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고위성직자는 될 수 없었다. 대부분 동방교회에서 고위성직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 가운데서 나온다. 따라서 동방교회에서 성직의 부자승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국성공회의 경우도 동방교회와 비슷하다.

성직자가 결혼할 수 있도록 만든 최초의 사람은 개혁자 루터이다. 성직자가 결혼하면 가정에 메이기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고 해서 초대교회 이래로 교회는 결혼을 금해왔다. 하지만 개교회 공동체가 원하는 경우에는 청빙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유명한 부흥사요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외할아버지가 목회 하는 교회의 부목사로 들러가서 할아버지의 사후에 담임목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혈연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개교회의 결의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교회사에 보면 개신교에서 부자승계의 경우가 많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선교단체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긴다. 중국내지선교회(지금은 OMF)는 창립자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과 손자가 계속 대표를 맞고 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의회의 경우도 그의 아들에게 리더십의 이양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성결교회의 모체가 되는 동양선교회의 경우도 창립자 카우만의 아내가 후에 총재가 되어서 활동하였다. 이것은 선교단체뿐만이 아니라 신생교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많은 오순절교파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감독의 직분을 맡아서 하는 경우가 있다. 구세군의 경우도 한동안 창립자 윌리암 부드의 자녀들이 대장을 하였다. 또한 이런 부자승계의 경우는 새로 급성장한 교회나 단체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미국의 유명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나, 신유운동가인 오랄 로버츠의 경우도 아들이 아버지의 직을 계승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사의 입장에서 성직의 부자승계는 근세의 개념이라는 곳아 확실하다.  그러면 왜 근대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필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격이 변화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교회는 공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정교의 분리이후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물론 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측면에서 공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는 강제력이 없이 신앙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든 사적공동체인 것이다.

교회가 사적인 공동체가 되면서 그 공동체가 되면서 그 공동체를 움직이는 법은 그 공동체가 스스로 정한다. 물론 전체 사회가 제정한 기준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법이 정하는 범주 내에서 사적인 규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의 경우에는 기독교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자세습을 하는 많은 교회나 단체들의 경우에는 그 단체들의 성장이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빌리 그래함과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 중국내자선교회와 허드슨 테일러, 로버트 슐러와 수정교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런 단체의 성장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 후계자 임명에 개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론 과정에서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Ⅱ. 부자승계를 찬성하는 입장과 그 문제점

 

그러면 부자승계를 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개교회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개 대형교회는 담임목사의 독특한 카리스마에 의해서 발전되어왔다. 따라서 담임목사의 목회철학과 그 스타일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는 그 교회의 미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부자승계를 원하는 교회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목회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계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여기에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개교회의 강한 특성이 있다. 그리고 그 특성이야말로 그 교회의 존재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일세대에는 그런 특성이 있다가 2,3세대로 이어오면서 그 특성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를 보게된다. 이런점에서 교회는 그 교회의 특성을 잘 발전시킬 수 있는 후임자를 찾게되고, 그 가운데 전임자의 아들이 지명될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다. 과연 아들을 세운다고 해서 그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물론 아버지가 세운 목회정신을 잘 이어받아서 계승하는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부자승계가 이런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원로목사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경우, 교단법에 의해서 은퇴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원로목사의 영향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후임에게 온전히 물려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아들을 후임으로 정했다면 상호 신뢰와 혈연관계라는 정 때문에 서로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의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원로목사의 참여가 매우 여려워지게 된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전임자와 후임자자 사이의 갈등이 큰 문제로 등장하고, 많은 후임자들은 전임자의 영향 때문에 마음놓고, 목회하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한국의 몇몇 대교회들이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아들을 후임자로 선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법의 경직성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의 경우 대학교수도 본인이 원하고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정년을 넘어서서 계속할 수 있다. 빌리 그래함은 고령인데도 여전히 그 단체를 책임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을 법적으로 제한하여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다. 법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교회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년문제도 개교회의 결정에 맡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법으로 정년을 정해 놓지 않으면 담임목사가 능력이 없는데도 은퇴하지 않고 계속 머물려고 한다면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민주적인 절차가 한국교회에서는 없다. 따라서 최선은 아니지만 법으로 획일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법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아들목사다 자격이 충분하다면 오히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 보다 못한 아들도 있지만 또한 아버지 보다 나은 아들도 있다.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후임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다. 한국사회는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엄격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관대하다. 다시 말하면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을 보지 않고, 문자만 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아들에게 후임을 열어주는 경우에 많은 담임목사들이 자신들의 아들을 후임으로 세우려고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좋은 목회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갖은 이권이 오가는 현실에서 자신의 아들을 목회자로 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부정적인 측면을 염려하는 것이다.

현실 목회에서 교회의 인사이동이 영향력 있는 목회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목회자의 자녀들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소외된 수많은 목사들은 이런 불공정 경쟁에 대해서 분개할 것이다. 사실 대형교회의 부자계승문제는 이런 불공정경쟁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넷째 후임자 선정은 근본적으로 개교회의 자율권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특별히 개신교는 개교회의 자율권을 존중한다. 이런 자율권 때문에 개신교회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갖는다. 또한 개교회마다 거기에 독특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개교회는 자신에 합당한 담임목사를 선출할 수 잇다.

하지만 지금 거론되고 있는 대형교회는 이것을 단지 개교회만의 문제라고 못 밖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들이 갖고 있는 한국교회에서의 대표성 때문이다. 아직도 획일화된 한국 사회에서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는 많은 교회들에게 후임자 선정의 모델로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대형교회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다. 이미 거론되고 있는 대형교회들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임을 자임하여 왔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런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Ⅲ. 부자승계에 대한 반대입장과 문제점

 

그러면 부자승계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사유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맞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부자승계를 반대하는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부자승계자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해치는 것이라는 것을 전체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목회자라면 전임자의 아들이라고 해서 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괴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후임자의 생성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자연스러운 승계는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들어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참된 목자 상을 보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자란 아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참된 목자 상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따라서 무조건 부자승계는 반신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는 교회를 사유화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말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것처럼 행세한다. 사실 이런 담임목사직의 부자계승에 대한 논란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담임목사의 권한의 비대화 때문이다. 때로는 대기업의 사장 같고, 때로는 국가기관의 권력자와 같은 대교회의 목사에게서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둘째로 교회는 근본적으로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언약공동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스라엘은 신앙공동체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는 언약에 기초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후임자 선정에는 언약에 얼마나 충실할 것인가를 따져야지 혈연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따져서는 인된다.

하지만 부자승계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언약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서적으로 보더라도 아버지를 계승한 아들들도 언약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자녀교육은 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해서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승계는 교회를 언약공동체라기 보다는 혈연공동체로 전략시킬 위험을 갖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중시하는 전통에서 때때로 자식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아버지 역시 자식이라는 정에 끌려서 올바른 판단을 못할 염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언약공동체를 파괴할 상당한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순 있다.

셋째로 부자승계는 대형교회가 갖고 있는 폐단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대형교회의 문제이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작은 교회에 아들이라도 보내서 섬기게 하는 일에 누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대형교회는 많은 사람이 가려고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지금에 이루어지고 있는 대형교회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는 옳지 못하다고 생간 한다. 오늘날의 대형교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독을 겪어야 했는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나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회성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람을 택해서 그의 일을 감당하신 단다. 오늘날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들은 다 큰 사람이 갖지 못하는 영적인 힘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혼에 대한 열정도 많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양적 성장=기업확장=부도덕한 종교라는 도식이 팽배해있다. 하지만 이런 도식은 잘못이다. 오히려 영혼에 대한 열정=철저한 헌신=교회의 성장=한국교회에 대한 공헌으로 바꾸어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열심히 해도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교회에는 열심히 없고, 대형교회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대형교회가 일종의 기업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효율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다보면 획일화되기 쉽고, 진정한 성서적인 사랑이 결핍되기 쉽다. 이것이 오래가면 교회는 격식화되고, 관료화되며, 기업화된다. 이런 교회는 세상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형교회들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항상 경계하며,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담임목사의 부자계승은 교회의 잘못된 지도체제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요 구주라고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한 개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서는 인된다. 하지만 부자계승은 지나친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의 지도체제를 왜곡시키며, 결과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대형교회들이 절대적인 카리스마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교회들이 성장하여온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부작용도 많이 있다. 만일 그 한사람의 지도자가 잘못되면 그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장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도력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 그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사회는 회중이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 지도자는 그 지도력을 가지고 그 단체를 이끌어가며 나중에  그 결과를 다시금 회중이 평가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런 것이 효과적으로 잘 이루어지면 그것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독재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런 건전한 지도체제 구축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Ⅳ. 부자승계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 및 결론

 

A. 종합적인 정리

이상에서 필자는 담임목사직의 부자승계에 대한 역사속인 흐름과 찬반 양론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를 종합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첫째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최선의 부자승계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볼 때 리더십의 이양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부자승계가 최고의 정당성을 가질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민주적인 선출이 최고의 정당성을 가질 때가 있다. 문제는 어떤 것이 그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적합한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를 교리나 신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둘째 담임목사의 부자승계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것, 교회의 민주화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사실 진정으로 교회가 민주화가 되어있다면,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아들목사를 아버지 목사의 후임으로 선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대형교회에 그런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보다는 교회의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하되. 이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문제는 대형교회의 구조적인 문제, 즉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진다는데 있다. 개신교는 교회 개척자의 신학, 설교 특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담임목사의 개인의 특성에서 벗어나서 교회공동체의 특성으로 바꾸어져야 하며,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정신에 의해서 움직여지게 된다. 그래서 담임목사 개인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정신으로 이끌러져야 한다. 교회가 공동목회가 되지 않으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이런 문제가 유발된다. 따라서 전환해야 할 것이다.

넷째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문제는 부나 권력의 승계로 이루어지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승계를 반대하는 이유는 부자승계를 통해서 막대한 권력이 세습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담임목사에게 지나친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신껏 목회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목사직은 근본적으로 성직이다. 성직은 겸손과 청렴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목사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아니 대형교회의 목사일수록 이것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B. 결론

이상에서 지적한 대로 담임목사의 부자계승은 좋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교회가 이것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에서 이것은 긍정적인 방향보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가 쉽다.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잇는 혈연주의와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를 나쁜 쪽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한국교회의 부자승계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부자승계가 용납된다면 수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자신의 아들을 담임으로 세우려고 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담임목사의 의사를 따르게 된다. 이것은 교회에도 불행한 일이요,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될 만한 많은 사람들의 기회는 원칙적으로 봉쇄되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는 담임목사의 부자승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부   록

 

 

♧ 자료제공 ♧

 * 제8차 포럼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여기에 그간 발표된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는 신촌포럼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다.

 

♧ 그간 발표된 글들에 대한 분석 ♧

   다루어진 테마의 범주는: 담임목사 부자 계승[세습] 및 한국교회의 후임자 문제

 

계승 찬성 쪽: 차종률(새순교회)     [누구에게나 열린 문이어야 한다]

                                  [한국교회 후임자 선정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승준(서울대 사회교육학과교수)   

              이철현(명지대교수)           

              신동희(광주상무교회)      

계승 반대 쪽: 박득훈(웨스터민스터대학원대학 교수)

                                      [일부 대형교회 담임목사 세습을 반대한다]

              신민범(경신교회, 기윤실)

              김동호(동안교회)         [담임목사 부자계승에 대하여 말한다]

                                       [목회세습 막지 못하면 하나님이 심판]

              옥한흠목사(사랑의 교회)  [목회권 대물림 신뢰 못얻는다]

              이진(아름다운교회)

              유선웅목사

기타:

              김삼환목사(명성교회)

                 [부자승계 자체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안타깝다]

              박영률목사(한기총 총무)

 

일반기사들(신문과 인터넷)

   * 해당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검색 난에서 주어진 제목으로 검색하여 보십시오

 

MBC

[광장]담임목사 세습 비판 여론/  [뉴스데스크]대형교회 '목사세습' 반발확산

조선일보

교회 담임목사 세습 논란 (2000.6.30)/ 교회까지 세습하다니(7.4)/ 담임목사세습논쟁(8.25)/ "교회는 이웃사랑부터"-김삼환(9.1)

중앙일보

개신교단, 일부 대형교회 관행에 반대 움직임

한국일보

기윤실, 담임목사 세습반대 운동 돌입/   목사도 세습하나?/ 목회자 세습 파문  

동아일보

큰 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사회문제로 비화/ 목사세습(2000. 7. 15)/ 목사 '세습' 토론회 신도들 방해로 무산(2000. 9. 5)

국민일보

교회세습 반대운동 본격화/ 기윤실, 교회세습 반대운동 확산/  감목협, "교회세습 절대 안 된다"/  [이의용의 문화이야기] 기업의 경영권 세습도 허물이거늘…(2000.5.29)/ [현장기자] 광림교회, 담임목사 세습 논란

한겨레

대형교회 세습 '파문'

 

 

1) 국민일보(2000.09.01, 16:13)

 

[여의도 초대석-김동호] 목회세습 막지 못하면 하나님이 심판  

 

  요즘 교계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담임목사 세습 문제다. 이 문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 정도가 아니라 교회 발전의 성패가 걸린 아주 중요한 문제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은 현상을 보며 재벌과 대형교회와 북한의 경우가 매우 흡사하다고 비판한다.

  재벌과 교회와 북한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부자세습, 독재와 무비판, 크기 숭배, 증식에의 욕망, 칼 같은 위계 질서,비이성적인 숭배, 그리고 파쇼적 통치에 있어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안타깝지만 그러한 비판을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선교적 측면에서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교회에 끼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옳지 않은 담임목사 세습의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세습문제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세습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세습문제를 비판할 논리적 근거가 완벽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 상대측에서 얼마든지 방어하고 합리화해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것이다.

  세습이 이뤄지는 대부분의 교회에 있어 실제로는 세습이면서도 나름대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세습이 아닌 청빙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나 법적으로는 담임목사의 아들도 담임목사로 청빙받을 수 있는 객관적 자격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당한 절차를 통해 담임목사의 아들을 후임으로 청빙했다고 이야기하면 뻔히 알면서도 반증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법적으로만 이야기하자면 담임목사의 아들은 후임 목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면 모르기는 해도 그것은 위헌의 소지가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옳지 않은 세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누구나 다 정확한 설명 없이 이해하지만 ‘담임목사 세습’이라는 용어나 타겟을 가지고는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옳지 않은 담임목사 세습의 고리를 끊으려면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부터 분석해 그 원인을 없애야만 한다. 그 원인은 교회행정과 목회의 비민주성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은 교회는 신본주의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가 맞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신 신본주의를 하려면 사람들끼리는 민주주의를 해야만 한다. 사람들끼리 정확한 민주주의를 할 수 있어야만 정확한 신본주의를 할 수 있다.

  대부분 신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빙자해 목회자나 당회가 하나님의 자리와 권위를 대신해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그것을 신본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신본주의자들은 엄격히 말하자면 인본주의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재벌과 대형교회와 북한의 공통점이 파쇼라고 비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교회에는 목회자가 거의 왕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많다. 교회를 개척하여 대형교회를 이룬 교회는 거의 예외가 없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담임목사가 왕 같은 힘을 가진 교회는 담임목사 세습을 할 수밖에 없다.

  교회법에 의해 언젠가 은퇴를 하게 되겠지만 목회적인 영향력에 있어서 은퇴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원로목사가 되어 교회를 이끌어나가려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때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후임으로 와 목회를 한다면 교회가 평안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담임목사 세습이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담임목사의 아들이 담임목사가 되어야 그나마 교회가 평안할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담임목사 세습이 문제가 아니라 담임목사의 비민주적인 교회 운영이 문제다. 신본주의를 빙자해 목회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교회 세습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교회 세습의 문제만 해결한다면 더 큰 문제가 교회에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담임목사의 전횡을 막지 않는다면 차라리 교회와 담임목사 자리는 세습되는 것이 교회를 위해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동안교회가 전문목회를 도입하여 담임목사의 역할과 권한을 분산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몇 년에 한번씩이라도 교인들의 재신임을 묻게 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신임 투표는 목사는 교회의 대표는 될 수 있어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주 상징적으로 그리고 아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단 총회가 이 일을 가로막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교회의 힘과 권한이 어떤 특정한 한 두 사람과 집단에 집중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교회가 특정한 한 두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작금에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예수님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돈을 바꾸어 주고 비둘기와 양을 팔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이 진노하셔서 채찍질하시고 저들의 상을 뒤엎으시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스스로 깨어 이 일을 막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한국 교회의 상을 뒤엎으시는 심판의 날도 멀지 않다는 사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교회 복된 교회를 물려주기 위해 이 옳지 않은 일들을 과감하게 앞장서서 막아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김동호(목사·동안교회)

 

 

II. 한국기독교 총연합회가 주최한

    "목회자 후임(소위 '세습') 문제에 관한 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

 

(1) 일부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을 반대한다        

박 득 훈 목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일부대형교회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담임목사직을 이어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현재 교회 안에서는 찬반의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매우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안인데다가 양쪽 다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안일수록 감정을 절제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보면서 자신의 입장이 정말 옳은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논쟁이 생길 때마다 생각나는 말씀은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이다. 그 당시 할례문제는 교회를 둘로 가르기에 충분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하고 열린 대화를 통하여 아름다운 결론에 도달하였다. 초대교회에 그것이 가능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우선 찬성하는 입장을 살펴보면서 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가를 밝힌 다음 반대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세습 찬성론에 대한 반론

 

첫째로 제시되는 것은 단어의 정의와 관련해서 한국교회에서 세습이란 없다는 주장이다. 세습에는 통상 재산권이 관련되어 있는데 교회의 경우 이 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어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단어의 뜻은 사용되는 정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뜻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제법 많다. 그래서 사전적 정의를 인용할 때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세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정한 특권이 혈연적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의 정권이양도 세습이라는 말로 표현해오는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세습반대를 특별히 대형교회에 국한시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직에는 시골의 가난하고 작은 교회의 경우와는 달리 세상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다양한 특권과 기득권이 내포되어 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첫 번째 이유와 연결해서 제시되는 두 번째 주장은 담임목사직 이양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습이란 표현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 목사가 직권을 남용하거나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교단법과 교회법에 의거한 절차를 밟아 자발적으로 아들 목사를 후임목사로 초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우선 합법적인 절차의 내용이 문제이다. 즉 한국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거의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감안할 때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는 것은 단순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가능성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절대적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자 하는 심정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공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절차가 진실로 교인들의 뜻을 수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회구조를 감안할 때 아들의 승계자격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아버지 목사가 은퇴하고 그의 실질적 영향력이 확실히 사라진 후에 절차를 밟아야 한다. 더 나아가 설사 교인들의 뜻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다고 해도 그들의 뜻이 개교회의 진정한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지대하다고 판단될 때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아래에서 살펴 볼 것이다.

셋째로 아들 목사의 능력과 자질이 세습을 정당화 시켜준다는 것이다. 능력도 없는 목사를 단지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후임으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부와 빈곤의 세습으로 말미암아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적 현실을 감안 할 때는 아버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훨씬 덕스럽다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가난하고 연약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들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이요(레 25 장), 다른 이의 덕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사랑의 정신인 것이다(롬 15:1,2; 고전 10:23-24).

넷째로 아버지 목사와 아들 목사의 목회철학의 공통점과 친밀한 관계가 대형교회의 성격상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하나 됨 그리고 안정을 유지하는데 매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말이지만 오히려 이 점이 대형교회의 약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교회의 성장과 연합 그리고 안정은 누가 목회자가 되든지 머리되신 예수님을 철저히 붙들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공통점과 친밀한 관계에 의존하려고 한다면 이는 벌써 그 동안 대형교회가 얼마나 예수님의 권위보다는 아버지 목사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존해왔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다섯째로 아들은 최후의 선택이었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 후임자로 은밀히 길러왔던 이들이 다른 길을 갖고 초빙하기를 원했던 목회자들이 사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그 부럽고 매력적인 자리를 마다했을까? 이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대형교회일수록 전임자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후임자가 도저히 적응해나가기가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대형교회 후임 목회자 자리를 사양한 사람들은 현명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한번 대형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여섯째로 아들이라고 해서 후임자가 되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는 항변이다. 세습을 반대하는 것은 세속적 논리를 교회 안으로 끌어드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의 전형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침묵을 바로 허용으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고 하더라도 세습이 성경전체의 정신과 사상에 과연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편 일반적 상식과 양심이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고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롬 2:14-15; 13:5). 하나님은 비기독교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양심 혹은 자연법을 통해서 병들어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부끄럽게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습의 성공사례를 든다. 우선 소위 성공사례로 여겨지는 교회의 담임목사직이 세습될 때 그 교회가 대형교회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소·중형교회의 세습도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권위의 집중현상과 기득권의 혈연적 이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 전체에 미치는 여파에 있어서 대형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적합치 않다. 더구나 성공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교인의 수가 늘고 표면적으로 평화로우면 성공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상의 현상들은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공을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만 의존해서 해석하는 데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도들의 구체적인 나눔의 삶이 나타나고 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훈련되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행 2:42-47; 4:31-37). 이렇게 볼 때 소위 세습의 성공사례도 현재의 대형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을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

 

   2. 세습 불가론

 

이제 세습을 저지해야 하는 보다 적극적인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세습은  교회론의 핵심 중에 하나인 예수님의 교회 머리되심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엡 1:2-23; 5:23).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끊임없이 권력과 명예에 대한 유혹을 받고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자간의 세습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위치를 지나치게 강화함으로서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 진다. 이러한 위험성을 알고서도 그 길로 굳이 가려는 것이나 이를 방치하는 것은 모두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설사 교인들이 원한다고 해도 교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이는 억제되어야만 한다.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빠져서 교회가 객관적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성도들은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주님의 영광보다는 서로의 영광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요 5:44).

둘째로 세습은 교회의 언약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는 혈연적인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성도들이 가정을 잘 세우도록 권면하고 지도해야 한다(눅 2:51; 요 19:26-27; 막 7:9-13; 엡 5:21-6:9). 가정에서 모범적인 남편이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다(딤전 3:2, 4-5). 그러나 교회는 혈연관계에 의해 좌지우지 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언약을 맺은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이지 혈연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막 3:31-35).

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지금도 매우 혈연중심적이다. 가족경영체제인 재벌은 전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래서 재벌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기 때문에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사전에 등록되기까지 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정권이 세습되는 것은 전세계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혈연관계에 의해 정치와 경제가 주도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어떠한 폐단을 가져왔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혈연체제가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세습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성사되었고 부자(父子)가 모두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문제가 전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관적 확신이 바탕에 깔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인간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한 결과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거듭난 성도와 목회자도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으로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신본주의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끼리는 명목상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해야한다. 대형교회에서의 세습은 한국의 혈연중심적 문화를 감안할 때 실질적 민주주의가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는 일에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습은 저지되어야 한다.

셋째로 세습은 한국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나라의 원칙보다는 자본주의적 원칙에 은연중에 익숙해져왔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축적한 부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합법화 되어있고 자연스럽다. 사실 그것이 부의 축적의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원칙은 그렇지 않다. 안식년과 희년 법칙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실상 재산권 상속을 제한시키는 법이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자 관원에게 재산을 팔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에 따라오라고 했다(마 19:21). 예수님의 정신을 잘 이어받은 초대교회는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나누었다. 그들은 상속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을 사유재산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 자본주의사회의 원칙과는 얼마나 다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 희년을 목회세습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교회의 경우는 담임목사직을 돌려줄 원래의 주인도 없다. 그러나 직접대형교회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담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희년의 <정신>을 실현하는 좋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세습을 추진하는 분들은 이러한 특권의 이양이라는 요소가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항변이 진실하다고 해도 세습은 포기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자식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은 대다수 목회자들의 본능적인 마음에 불을 붙일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지도자는 자신의 결정에 아무리 꺼림이 없다고 해도 그 결정이 공동체 전체에 어떤 여파를 끼칠 것인가를 예리하게 판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한국교회의 지도자이다.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지키고 세상의 빛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한다면 세습은 당연히 포기되어야 한다.

넷째로 세습은 이미 왜곡된 교회의 지도체제에 도장을 찍어주는 행위로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을 반영구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체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진리를 받혀주는 기둥이요 터전이기 때문이다(딤전 3:15).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진리도 함께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교회가 바로 서려면 교회의 지도체제가 건전해야 하고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를 아주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딤전 3:1-13). 더 나아가 지도자를 바로 세우는 것은 교회의 구원과도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딤전 4:16). 중세교회의 타락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교황의 권위가 절대화 될 때 교회는 부패했고 진리는 무너졌다. 심지어는 구원의 진리까지 위태롭게 흔들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형 대형교회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담임목사의 카리스마가 너무 막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확신가운데 빗나가면 진리가 흔들리고 해결의 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해당교회를 떠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세습의 문제점은 바로 이렇게 일그러진 지도체제를 굳히는 행위라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실질적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되었는데 누가 감히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아들을 중심으로 한 팀목회라는 것도 사실은 실세를 포장하는 눈가림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은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이다. 그래서 현명한 지도자는 자신이 잘못 했을 경우 실제로 견제와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실질적 분위기와 여건을 조성해 놓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병폐의 한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대형교회가 한국교회의 성장에 미친 긍정적인 기여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그 동안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규모는 세계적인데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왔다. 그 원인을 분석해 들어가면 한국형 대형교회주의와 맞물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해서 단기에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축복과 고난을 함께 이야기하고 전도 및 선교와 사회참여를 같이 말하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온전한 복음은 매우 도전적이고 특히 기득권 층에게는 상당한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속한 숫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이로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로서의 건강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조금씩 타협할 수밖에는 없게 된다. 소위 부담 없는 반쪽 복음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나머지 반쪽은 적당히 양념 치듯이 넘어가곤 한다. 결국에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함으로서 자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대형교회 담임목회자가 진리를 왜곡시킬 때 개혁은 요원해 진다. 담임목회자의 적당한 타협으로 말미암아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게된 세력과 무지한 대중은 어느새 담임목사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고 개혁세력은 쉽게 거세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형교회의 담임목회자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세습을 방치할 수 있겠는가? 이는 대형교회 자체를 반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만일 한국의 대형교회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형교회와 같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슬픈 것은 그 교회들이 오늘 한국의 대형교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형교회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주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된 결과일 뿐이었다. 한국적 분위기에서 수적 성장을 교회의 신년목표로 삼는 것과 순수하게 결과로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한 사람에게 권위가 지나치게 집중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행 2:42; 6:2; 15:6-29). 초대교회는 교회의 대형화를 은근히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행 2:41-47). 그러므로 오늘 한국의 대형교회의 출현과 세습을 통해 대형교회 담임목사에게 지나치게 권위를 집중시키려는 현상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변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한다.

 

 

   맺음말

 

세습을 정당화하는 논증들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세습을 저지해야하는 적극적인 이유들도 살펴보았다. 일부대형교회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 동안의 한국교회의 병폐가 집약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다. 지금은 뒷짐을 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국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울어야 한다. 그리고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세습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교회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전적인 은혜의 결과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가 자신의 삶을 걸고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당의 문에 붙이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이 가능했겠는지를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는 그의 능력을 의지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국 교회의 후임자 선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차 종 율 목사(전 개혁신학연구원 교수, 새순교회 담임목사)

 

 

   한국인은 혈연, 지연, 학연 등 인간관계를 중시하면서 자신과 연관된 사람들을 선호하는 사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대두가 되고 있는 "교회내의 세습"도 바로 이런 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먼저 본인은 목사가 은퇴하면서 아들을 후임자로 삼는 것을 북한의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과 재벌들이 이세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것과 같은 세습이라고 말한다면 본인도 이에 반대한다.  영국의 귀족 신분을 자녀들이 승계 하듯 아버지의 지위와 이뤄놓은 명예와 부를 자녀들이 정당한 절차와 충분한 노력이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임승차와 같은 자동 승계 하는 행위는 지탄받아야 하고 금해야 한다고 본다.  

   최근 기윤실이 발표한 세습 반대 성명서의 본래 의도는 이런 세습으로 인해 발생한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이해하고 싶고 그런 의도에는 본인도 동의하고 그 용기를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몇몇 초대형 교회에서 발생되었던 문제를 북한의 김정일과 재벌의 후계자와 대형교회를 연계하여  "교회에서의 세습"으로 인식하게 함으로 해당 개 교회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고 나가서는 한국 교회의 전체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크리스챤 뉴스위크(7월 29일자 사설)에서는 이 문제를 "개혁이라는 기치아래 다양한 일반 언론매체들의 밥"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교회가 아니니까 마구 내씹는 것은 무책임이며 책임질 수 없는 심한 발언들은 한국교회 전체를 손해보게 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8월19일자 한겨례 신문의 김선주(모태신앙인 친정 어머니)는 아침햇발에서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목사세습은 사이비나 이단 쪽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목회를 잘 이끌고 교세를 확장하고 교인을 늘린 보수교단의 이름난

   목사들이 그 장본인들이다. 정통교리를 갖고 있다는 교회일수록 물신주의적

   이어서 무엇이 성이고 무엇이 속인지 구별이 안 된다. 사이비와 이단을

   구별하는 방법이 많겠지만 영혼에 간여하기보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약속이

   많으면 그것이 바로 사이비고 이단이 아닐까.  요즈음은 어떤 교회가 사이비

   인지 이단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라고 질타하였다.

 

   한편 어떤  대형교회의 국부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 너는 나쁘고 나는 옳다는 반사적 이익을 기대하는 숨은 의도는 없으리라고 보지만 또 다른 대형교회들의 위상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단순한 우려일까?

   기윤실에서 제기한 소위 "세습"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실재로 문제는 교회의 대형화로 인해 발생한 "후임자의 선정"에 관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보는데 "세습"이라는 용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함으로 본래 의도를 너무 벗어난 것 같다.  대형 교회의 목사들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퇴색케 하는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아들을 후임자로 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세습"이라는 사회적인 용어를 교회에다 적용함으로 본질을 벗어나서 혼란을 초래한 것이 안타깝다.  

 

 

  이에 대해서는 기윤실의 임성빈 교수(장신대)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담임목사세습의 문제에 있어서 먼저

   '세습'의 개념을 보다 엄밀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습이란 말이

   가지는 부정적 이미지를 감안하고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중략..

   원칙적인 의미에서 세습의 문제는 분명히 지적될 수 있지만,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겸손한 분별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습"의 의미는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  리용덕 목사(법학박사, 도봉중앙교회)는 "학문이나 서예, 미술, 기예의 경우는 전수 또는 사사, 신관이나 무격 세습의 경우는 일상생활의 용어인 대물림, 대이음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면서 "좁게는 한 혈연(가문), 넓게는 지연, 학연에 의해 이어졌고, 때로는 혼합형식"으로 이어져 왔다고 하면서 세습이 나쁜 의미의 개념화가 된 원인을 "권력이나 부의 기득권자의 대물림의 정당성 결여에서 온 것이다"고 하였다.

   교회에서 세습의 논쟁이 시작 된 것은 (초)대형 교회에서 이루어진 후임자 선정으로 인해 발생했거나 발생하게 될 부정적인 영향 때문이다. 대형 교회에서의 후임 목사의 선정을 세습으로 보는 것은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권"을 물려받는다는 시각 때문이다. 이것은 대형 교회가 만들어낸 폐해 중의 하나로서 세습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세습" 이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후임자" 선정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한 부분으로 봐야한다.   

   그렇다면 후임 담임목사를 구할 때 전임자가 행사하는 이런 영향력이 문제의 본질이 아닐까? 아들 목사가 후임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부수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목사라면 아버지이든 아들이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가 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감당할 동등한 사명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자격을 갖췄고 정당한 법적 절차(예: 교인총회의 무기명 투표)를 통해 그 교회가 원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담임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후임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와 주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공개 모집을 통해 후임자를 뽑아야만 그것이 가장 개혁적이고 합당한 후임자 선정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전임 목사의 영향으로 아들은 아니지만 선배, 동창, 친구, 제자 등을 후임자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하였고, 바나나는 다소에 가서 사울(바울)을 데려와서 함께 목회를 하였고, 나중에는 함께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훈련하여 목회지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바울의 목회 철학은 특정한 인물보다는 어떤 자질과 훈련을 가진 사람이 목회를 해야 하는 데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음(딤후 2:2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을 알아야 한다. 그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향해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디도를 "나의 참아들"(디도서 1:4)로 말하면서 감독의 자질을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디도서 1:9)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후임자의 문제는 "아들"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보다는 후임자로서 그의 자질과 역량과 훈련 및 품성과 인격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아들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담임목사의 자리가 얻게 되었다 해도 그 역량이 그 교회의 형편에 부족하다면 그 교회는 또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나는 아들이 대를 이어 같은 교회에서 목회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요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측면만을 내세워서 긍정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본인의 경우(아버지가 대형교회 목사가 아니었기 때문에)는 좀 다를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본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개척했던 교회에서 아버지께서 소천하고 몇 명의 목사들이 바뀐 후에 나를 후임자로 오라고 했지만 그 교회로 가지 않고 친구를 소개했다. 그 이유는 그 교회에는 나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친인척과 선후배인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었다. 내가 그 교회의 후임자로 갔다면 다른 목사가 와서 그 교회의 특성을 이해하고 교인들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고 적극적 지원을 받아 목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습 반대론의 주장 반박

 

  먼저 박 교수가 주장하는 소위 "세습" 반대론의 진정한 의도는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열정과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에 근거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 주장이 본질을 벗어난 비본질의 문제와 혼동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후임자 선정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1. 예수님의 교회의 머리되심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원로목사와 아들 담임목사가 마치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부각시키고 있는데 대형교회가 무슨 사교집단인가?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약화시킬 그럴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는 전제는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그런 경우를 확인하고 주장하는가?  단순히 그럴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주장한다면 이는 엄청난 피해를 해당 교회에 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가?

  다른 한편 그럴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그 반대의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음은 문제의 본질을 오해하도록 한다. 이 주장은 마치 대형교회의 목사가 사교집단의 교주가 될 것으로 우려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교회의 교인들은 누구인가? 이런 문제는 최근에 발생한 것이 아닌데 왜 그전에는 침묵하다가 이제 그렇게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길이 건강한 교회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고 아들이 뒤를 이어 목회 하는 교회는 병든 교회인가? 그래서 반대한다는 주장은 마치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과 같다.  

   아들이기 때문에 되서는 안 된다는 주장보다는 그가 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목사로서 덕과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소양과 적절한 훈련과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지도력의 여부를 문제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만 가지고 반대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고 음식 먹다가 식중독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금식하라고 하는 것과 다른 바가 없다.

   본인은 박 교수의 주장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문제의 본질을 다시 인식하고 싶다.

   이런 문제는 일부 대형교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대형 교회의 1대 목사들 가운데 자기가 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켰기 때문에 그 교회는 자기교회이고 개척한 목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식이 더 큰 문제이고 그런 의식에서 이런 문제도 기인한 것으로 본다.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기윤실 생활신앙운동 운영위원장)도 지적하였듯이 "사랑의 교회는 옥한흠 목사 교회, 온누리 교회는 하용조 목사 교회"라고 하는 우리 나라의 현실이 더 큰 문제이다. 교회를 개척한 목사의 개인적 소유로 생각하게 하는 현실적인 상황의 문제의 심각성과 방목사도 지적하였듯이 아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목사들이 자신과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은 더 위험한 세습이다. 왜 이 부분에는 침묵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박 교수가 우려하고 있는 아들이 후임자가 되었을 때 있게 될 가능성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교회의 주인의식을 새롭게 하는데서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교회가 교회로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2. 교회의 언약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 이 문화적인 요소를 거부하려고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혈연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아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 혈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종을 고향 땅 하란까지 보낸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타민족과 혼인을 금하셨던 것은 언약의 자손들이 가족관계를 통해 이어져 감을 전혀 무시하고 했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대를 이어져서 내려오는 언약관계를 말하고 유아세례(반대하는 교단도 있지만)를 베푸는 근거도 혈연/가족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관계가 이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언약이 혈연만을 통해 이뤄진다는 주장은 아니다.

   언약의 공동체 안에는 부모, 자식, 손자, 며느리 할 것 없이 모두가 포함될 수 있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가족적 언약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34-35)만 보면 주님은 육신적인 가족을 무시한 것 같지만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한 모습(요 19:26-27)은 가족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사도 바울도 가정교회(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를 언급하였다.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은 사도 바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뿐만 아니라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게 하야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던 일(행 16:33-34)을 혈연/가족 문화가 교회의 장애 요소가 아님을 말한다.

   박 교수는 이런 혈연적 가족 문화와 언약의 공동체가 무관한 것처럼 말하고 오히려 이런 혈연관계와 후임자를 연계하여 교회 내에서 신본주의를 방해하는 사회 문화적 부정적인 요인으로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는 장애요소로 꼽고 있는데 교회가 민주주의인가 또는 신본주의인가 아니면 반 혈연주의인가를 혼동하게 만들고 있다.

   언약의 공동체의 개념을 후임자의 선정과 혼동하여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의 가족적 특성마져도 왜곡시킬 가능성이 더 많다.

 

   3. 한국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보다는 자본주의적 원칙에 익숙해져 왔        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후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배경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됨으로 박 교수가 지적하는 "특권"이라고 말하는 누릴 수 있는 권력이나 영화 또는 이권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아버지의 막강한 후광을 통해 아들이 그것을 얻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형교회의 특성으로 봐서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나 영향력을 권력이나 이권으로 본다면 그렇게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박 교수는 마태복음 19장에서 나오는 예수님께서 부자관원에게 말씀하셨던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21절)는 정신과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사유 재산의 공동분배를 근거로 상속에 관심이 없었으니 대형교회 목사들도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상속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을 "희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국회의원들처럼 어떤 특권이 있는가? 아니면 그런 특권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아들을 목사로 만들어서 대기시켰다가 때가 되어 그에게 준다는 말인가?

   교회는 재벌 회사나 이권 기관이 아니다. 아버지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회사나 권력기관의 장이 됨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생각하고 자식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는 목사가 과연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그 아버지의 문제이지 후임자 선정과 연계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이 또한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고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과연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아버지의 목회를 권력이나 이권으로 생각하고 그 목사직이 부러워서 목사가 되었을까? 내가 잘 모르고 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목회를 보면서 아들들이 자신도 저런 영광과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목사가 되겠다고 해서 목사가 되는 경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그런 대형교회의 목사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목사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 나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은 세상적인 부귀영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사도바울이 꿈꾸어 왔던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빌 3:14)을 받기 위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셨다.  

   어떤 교회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고 즐거움과 고통과 어려움은 있다. 그 어려움은 그 교회의 사이즈와 비례할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에게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고 지금도 없을까? 그래서 아들에게 그 영광스러운 특권을 주려고 하는 것일까?  목사 아들로서 겪었던 아픔과 어려움으로 인해 목사가 되지 않는 목사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이나 현재 당면하는 문제들보다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영광의 단편만을 보면서 특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 아들을 후임 목사로 세우려고 한다면 이는 세습보다 더 나쁘고 하나님께서 엘리의 두 아들을 향하여 내리신 심판(삼상 5:17-18)의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들(부자)에게 적절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본인이외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심중의 의도를 추정해서 몰아 붙이는 것보다 그런 의혹과 확증이 있으면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본다.  진정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리 대형교회 목사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대형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보다 무명의 목사가 더 행복한 목사라고 할 수 있다.

 

   4. 이미 왜곡된 교회의 지도체제에 도장을 찍어주는 행위로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        을 반영구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교회가 바로 서려면 교회의 지도체제가 건전해야 하고 지도자가 바로 서야한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또 그가 지적한 대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음에 뜻을 같이 한다. 대형교회 목사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에 따라 진리가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부자간의 한 몸이 되어 움직일 때 누가 도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대형교회의 교회의 대형화에 따른 부정적인 상황을 지적함에는 상당한 부분에 동감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럴 수 있는 가능성만 가지고 단정적으로 정죄하려는 듯한 인상은 유감스럽다. 고세훈 교수(고려대)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문제에 대한 기윤실 내부 토론회(6월 3일)에서 말한 대로 특정목사의 자질이 아니라 제도와 관행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교회가 소속된 교단의 제도와 관행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먼저 제시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후임자 문제의 지적하면서 그 해결의 방법으로 "성도들을 자극하여 교회내의 분열을 일으키고 소모적이고 부정적인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 자체가 징계"로 보는 기윤실의 이승종 교수(서울대)의 의도는 기윤실의 사역을 동조하는 한사람으로 자칫 기윤실의 방향 전체를 왜곡시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최근 문제가 되고있는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들을 후임자로 세우는 것이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교회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목사는 사이비 교주나 다른바 없을 것이고 한국 교회에서는 이미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윤실에서 피켓을 들고 교인들을 선동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라고 한다면 교회 내부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은 뻔한 결과라고 본다. 강남의 대형교회는 목사가 진리를 왜곡시키고 교회를 사설 기관화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능과 무능의 정도조차 판단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교인들로 구성되었다는 말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결과만 초래한다. 차라리 그 교회의 목사 개인의 신학적인 입장의 오류와 목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지적하면서 그럴 가능성의 근거로 제시하면서 반대해야 한다.  

   한편 소형교회나 시골교회에는 이런 대형화에 따른 특권이나 어떤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뒤를 이어 후임자가 되는 것은 세습이 아니고 대형교회에서 이뤄진 것만을 세습이라고 반대하는 것은 합당한 주장이 되지 못한다. 전임 목사가 담임 목사 자리를 선배에게 물려주는 것은 상납, 친구에게는 선물, 후배에게는 기증이라고 할 것인가?  

   교회의 (담임)목사를 일반 회사에서 사원을 공채하고 대학교에서 교수를 공채하듯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택을 위한 대안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많은 교회들이 그런 방법으로 인해 담임 목사를 선정하므로 겪는 부정적인 결과가 더 많다. 결혼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 방법처럼 누구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애 결혼의 방법만이 가장 좋다고 하거나 옳다고 할 수 없듯 교회에서도 오직 한가지 방법만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택할 때에 이삭에게 맡기지 않고 아브라함이 그의 종을 멀리 고향 하란까지 보내어 선택하였을까? 왜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하도록 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여호수아를 선택할 때는 모세의 아들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은 왜 그랬을까?

   우리는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이며 개 교회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면서 한국교회에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비록 대형교회라고 하더라도 교회가 로마 제국이나 대기업과 비교하면서 세습이라는 세속적인 용어로 사용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의 부정적인 면들을 세상사람들에게 들쳐 냄으로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피켓을 들고 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고 서명을 받는 행동이 과연 기독교적인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그 교회가 성경적으로 잘못되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일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오히려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후임자 선정"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성도들과 함께 아픔을 같이 하거나 위로하면서 성경적인 대안을 주는 것이 더 기독교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세습이라는 방법을 통해 후임자가 정해진 교회가 한국 내에서 얼마나 많은가? 몇 교회의 부정적인 경우를 가지고 전체 한국교회의 모습을 사회에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하는 주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결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그 개 교회의 문제로 봐야하고 그 교회의 역량이며 개 교회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과연 한국교회 내에서 세습할 만큼 얼마나 많은 담임목사들이 아들들을 목사로 만들어 세습하기를 원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까? 그렇다고 한국교회가 그것을 무조건 용납하리라고 보는 것은 한국교회 수준과 성도들의 의식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후임자를 말하면서 마치 한국교회의 부나 권력을 아들에게 이양하기 위해 아들을 담임목사로 세우는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주장이다.  

   후계자 또는 후임자 선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보다는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부수적으로 생겨난 부정적인 역기능적인 폐해가 더 많다고 본다. 문제의 본질적인 핵심을 놔두고 부수적인 결과로 생긴 하나의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마치 한국교회가 병들어 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로 인해 교회가 당하는 부정적인 평판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닐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하게 반대운동을 펼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전병욱 목사는 "대형교회 목회 세습을 비판만 하지 말라. 그보다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하라. 나는 목회 세습이 일종의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일련의 비상식적인 행태가 교회 안에서 지속되면, 양식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는가?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대안만 제시해 보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모든 시도들이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비판의 목소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 했다.

   박종구 목사(월간 목회)는 향후 5-10년간에 한국교회의 대교회의 담임 목사들의 80퍼센트 이상이 현역에서 은퇴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다가오는 문제를 후계자 선정으로 보았다. 자신의 후임자 또는 후계자를 직계 가족에서나 방계 친척 중에서 찾는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임을 감안할 때 한국교회가 아들을 세우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이기보다는 이는 과도기적인 하나의 선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임자의 선정과정에서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아버지의 후광과 특혜와 이권을 우려한다면 아들도 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정당한 선출 과정을 거치는 제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세습이라고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 발전에 긍정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본인은 아들을 후임자로 삼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개 교회의 형편과 수준에 따라 합당하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긍정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다.  

 

 

III.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2000년 6월 22일)

 

 

일부 대형 교회 담임 목사직 세습에 대한 우리의 입장

 

 

주안에서 형제·자매된 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천년의 벽두부터 몇몇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목사직 세습이라는 세계교회사상 초유의 상황을 접하면서 한국교회 앞날에 대해 심심한 우려와 아픔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버지를 이어 아들도 함께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용기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해하며 환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목사라는 일반적인 '직분'이 아닌 동일교회의 담임목사라는 특정 '직책'을 세습시키는 것은 언약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매우 위험하고도 불행한 사태라고 규정합니다. 기윤실은 이미 1998년에 발표한 <한국교회 개혁선언문>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회개와 자성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호소하던 그 때의 심정으로 한국 교회와 일천만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혈연의 종교가 아닌 언약의 종교입니다. 세습이라는 혈연적 요인이 목회자 선택의 기준으로 되는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역사가 설 자리를 없게 만드는 반성경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2세 목사가 훌륭한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선대의 담임 목사직 세습은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출중한 2세 목사일수록 새로운 목회의 길을 겸손히 택함으로써 지금도 숫한 역경 속에서 말없이 종의 사역을 감당해 가거나 그 길을 준비하는 수많은 동역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신앙의 모범을 보였던 목사님들로부터 목회자의 길이 결코 용이하거나 안락한 길이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2. 교회는 예배드리는 장소를 필요로 하지만 물적인 공간 자체는 아니며, 더구나 물려주고 물려받는 재산이 아닌 신앙공동체입니다. 담임목사직 세습의 이면에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목사 또한 신앙공동체를 섬기는 하나님의 불완전한 종일 뿐,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적으로 대변하는 신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열어주신 만인제사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직 세습을 들어 담임 목사직의 세습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새시대와 신약교회를 부정하고 기독교를 구약의 율법 종교로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그간 한국교회에 만연되어온 물량주의와 특정 목사에 의한 강단권 독점이라는 잘못된 관행이 낳은 결과로서 마땅히 철회되어야 합니다.

 

3. 재벌총수마저도 스스로 경영권을 포기하는 오늘날, 혈연관계에 의지해서 교회의 평안을 추구하려는 것은 이미 교회가 깊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담임목사직의 세습을 결정했거나 결정하려는 교회들 안에서 교인들 상호간의 극심한 분열과 한국교회 전체가 그로 인해 당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세상의 웃음거리로 되고 복음의 선포와 확장이 심각한 장애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관련된 대형교회들이 자신의 인본주의적 현실을 직시하고 예수님을 명실상부한 교회의 머리로 모셔드리는 결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교단도 이번 가을의 총회를 통해서 목회세습에 대한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소속교회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지않도록 지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한국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국 교회 앞에서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합시다.  아직도 우리의 모습 속에는 잘못된 주인 의식, 공로사상, 권위주의적 습관, 그릇된 정치가 심어준 성장이데올로기와 맹목적인 반공주의의 잔재들이 남아있음을 인정합시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부정과 타락, 비민주적 관행에 대해 먼저 경고하고 철저한 개혁을 촉구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담임 목사직을 세습함으로 이 시대의 양심과 구원의 방주로써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는 슬픈 현실에 대해 통회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방법에 좀 더 민감해 질 수 있기를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땅끝까지 선포되는 역사적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다 같이 힘을 모읍시다.

 

 

 

2000년  월   일

 

사단법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1) 죤 브록만, 이창희 옮김,『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The Greatest Inventions of the Past 2000 years), 해냄, 2000, 47

2) Erik H. Erikson, ed., Adult (New York : W. W. Norton, 1981), 81

3) Cecil R. Paul, Passages of A Pastor (Grand Rapids, Michigan : The Zondervan corporation, 1981), 81

4) 하워드 클라인벨, 이종헌,오성춘 옮김,『전인건강』(Well Being), 성장상담연구소, 1995, 21

5) 클라인벨, 전인건강, 22

6) K. Brynolf Lyon, Toward a Practical Theology of Aging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5), 42-43

7) Lyon, Toward a Theology of Aging, 46-47

8) Charles V. Gerkin, An Introduction to Pastoral Care (Nashville : Abingdon Press, 1997), 208-214

9) Gerkin, An Introduction to Pastoral Care, 214-223

10) Dieter T. Hessel, Social Ministry (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82), 1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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