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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사랑의 자전거 대장정 10년째 개그맨 황기순

맑은샘77 2010. 9. 3. 19:55

[피플] 사랑의 자전거 대장정 10년째 개그맨 황기순

스포츠한국 | 입력 2010.09.03 17:05

 

"힘들었던 과거 전화위복… 삶의 가치 깨달았어요"
반성 의미로 시작… 이젠 새로운 목표
그동안 총2억여원 모금해 전달
수많은 동료·지인들 도움으로 지속
"아들이 성장하면 같이 달리고 싶어요"

길위에서 사람을 만났다. 삶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휠체어 바퀴에, 자전거 바퀴에 지난 날의 잘못을 싣고 달렸다. 반성의 길이요, 꿈의 길이었다.

↑ 개그맨 황기순이 지난달 23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2010년 사랑 더하기 국토대장전을 통해 모금한 성금을 박상민(오른쪽)과 함께 개봉하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개그맨 황기순(47)은 10년 동안 해마다 광복절을 전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있다. 2000년 휠체어로 시작한 속죄의 대장정을 2002년부터 자전거로 바꿔 이제는 사랑 나눔으로 정례화했다.

지난달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출발해 17일 부산 해운대까지 올해도 '황기순의 사랑 더하기 자전거 국토 대장정'을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수원, 대전, 대구, 부산 등 중간 지점과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서의 거리 모금을 통해 마련한 성금 3683만 9830원은 23일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그동안 모금한 성금은 총 2억여원이다.

-벌써 10년이다.

"잘못된 시간을 반성하는 의미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 해가 거듭될수록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는 분이 많아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또 다른 목표 의식까지 생겼다."

- 어떤 목표 의식인가.

"지난해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 3~4년 뒤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내 체력이 허락한다면 함께 달리고 싶다. 아버지의 과거를 숨기는 것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자식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싶은 모든 아버지의 마음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잘 나가던 개그맨 황기순은 1997년 1월2일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도피한다.

방송 출연 등으로 수입이 좋아진 뒤 고향인 대전에서 나이트클럽을 인수한 것이 화를 불러왔다. 사업이 망했다. 동업자를 믿었지만 일이 꼬였다. 갈수록 임대료, 주류대, 출연료 등 빚만 늘었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빚더미 위에 앉자 판단력도 흐려졌다. '일확천금'만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한다. 필리핀에서 도박에 손을 댄다. 카지노를 들락거리며 '대박의 꿈'을 꾸지만 자꾸자꾸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도박 빚까지 보태진 채 무일푼의 거지가 된다.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다.

발 빠른 소문은 전국으로 퍼졌다. 개그맨 황기순이 필리핀에서 도박에 빠져 폐인이 됐다더라, 한국에 올 수도 없다더라.

황기순은 우여곡절 끝에 1998년 12월31일 귀국한다.

- 지우고 싶은 지난 날일 것이다.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필리핀'이 사람을 제대로 만든 것 같다. 극과 극을 체험하고 나니 참을 수 있는 힘이 강해졌다. 한탕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음을 알게 한 계기였다. 머리로는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마음 속에선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

-필리핀의 기억들이 생활에 영향을 주는가.

"일상 생활에선 거의 없는 편이지만 방송에선 간혹 나타난다. 수동적이고 조심스런 성격이라 아직도 훌훌 털어내지 못한 탓이다. 특히 여러 명의 출연자가 주고 받는 말이 많은 예능 프로에서 식은 땀을 흘린 적이 있다.

함께 출연한 연예인들은 우스개 소리로 '필리핀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 잠재 의식이 선뜻 받아들이질 못해 한 박자, 두 박자 대응이 늦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소심함 탓에 개그 프로나 예능 프로는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사랑 더하기 국토 대장정 때 모금 활동을 하면서도 언급하지 않나.

"거리 모금 때는 혼자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 가끔 분위기를 띠우기 위한 개그의 소재로'필리핀 이야기'를 한다. 이것도 많이 변한 것이다."

-지금도 힘이 돼 주는 분들이 많다고 했는데.

"워낙 험한 일을 겪다 보니까 처음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용식, 김정렬, 최양락, 이봉원, 엄용수 등 선후배 개그맨들이 응원해주고 힘이 돼 주었다. 따뜻하게 품어주고, 주저 앉으려 하면 일으켜 세워졌다. 이제라도 반듯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 분들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황기순은 그대로 살 수 없었다. 추악해진 이미지를 바꿔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2000년 길을 택했다. 마라톤도 있고, 자전거도 있었지만 휠체어를 타고 돌아보라는 조언을 받아들였다.

니가 얼마나 하는지 보자, 조금 하다 말겠지, 쇼하는구만. 주변의 눈길은 싸늘했다.

죽기 살기로 하자, 이대론 살 수 없다, 양심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마음 다잡았다.

처음엔 서울에서 출발한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옆에선 이 일을 끝까지 해내고 서울에 도착하는 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격려해 줄 수도 있다는 희망의 말도 흘렸다.

-10년 전을 되돌아 본다면.

"지금 다시 휠체어를 다고 전국을 돌라면 할 수 없을 것 같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휠체어를 타고 가면 많은 생각을 했다.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너무 힘이 들면 서울에 도착해 추기경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가슴 벅찬 희망으로 참았다. 중간에 포기하면 재기할 수 없다고 되 뇌였다. 독을 품고 휠체어를 굴렸다. 서울까지 오는 동안 봐주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모금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처음엔 모금함도 없었다. 그저 휠체어를 타고 반성한다는데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모금 활동을 하냐는 자격지심도 있었다. 어떤 일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작은 자신감을 얻고 그제서야 모금함을 준비했다."

황기순은 다시 휠체어를 탔다. 서울, 대전, 전주, 광주를 거쳐 목포로 내려간 뒤 남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갔다. 매일 7~8시간 동안, 40km 안팎 휠체어를 밀었다.

수원에서 첫 가두 모금을 할 때는 앞에 나서지도 못했다. 김정렬, 서승만, 오승환 등이 앞에 나서 웃기고, 노래하고, 모금을 독려하는 동안 뒤에 숨어 있었다. 용기가 없었다. 강제로 마이크를 건네주면 겨우 몇 마디 이야기했다. 돈에 관해 다시금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기 만을 바랐다.

땡볕이 내리쬐는 길에서 두달 반을 휠체어로 달리며 모금한 성금은 통째로 신문사로 들고가 개봉했더니 600백5만여원이었다. 휠체어를 사 장애인 단체에 기부했다.

-첫 사랑 나눔이었다.

"전남 광주의 장애인 단체에 기증하기로 하고, 휠체어만 보내려고 했는데 전달식장에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식장에 들어선 순간 '아~'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또 이런 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온몸에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황기순은 바쁘다는 이유로 2001년 대장정을 접었다. 슬쩍 넘어가려고 했지만 아니었다. 다시 첫 반성의 시간으로 돌아가 2002년부터 자전거 대장정에 오른다. 하루에 100km 이상 페달을 밟는다.

병천에서 아우네 펜션을 운영하며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맹영준씨, '평생 자전거 순례를 하라'고 정색을 하면서도 잠자리와 식사는 물론 모금 활동에 적극 동참하는 천안의 친구 전흥재씨, 유성에서 대전 시내까지 긴 자전거 행렬을 만들어주며 힘을 보태주는 라이온스 클럽 회원들.

그리고 올해 대장정을 함께 한 남양주 동화 중고등학교 사이클부의 방주원, 이병탁(이상 중2), 김승국(고1)은 물론 지방 소도시의 상가 앞에서 만난 상인들, '사랑의 열매 홍보대사'라는 과분한 직책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전거를 타고 대장정을 도와준 공동모금회 직원들, 비를 맞으면 노래할 만큼 매사에 적극적인 가수 박상민과 유지나 등 뜻을 함께 하는 동료 연예인까지 모두가 황기순의 든든한 후원자요, 동반자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황기순의 사랑 더하기 국토 대장정'의 끊이지 않는 '연료'인 셈이다.

글=이창호기자
사진=김지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