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세상 읽기

신해철 - 헬렌켈러

맑은샘77 2010. 1. 12. 22:33

신해철, 국가보안법 피해자 되나? - 지식채널e 미국의우상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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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blog.ohmynews.com/peoplepower/315727

     

     

     


    마왕 신해철, 국가보안법 피해자 되나?

    Posted at 2010/01/11 09:53// Posted in 국민주권시대/정치/사회 Posted by 우물


    마왕 신해철, 국가보안법 피해자 되나?

    '로켓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 경축한다.' - 마왕 신해철 -

    기억 나시죠? 작년에 고무찬양(?) 발언으로 들썩였던 사건이요.



    가수 신해철...

    국가보안법이 2010년 새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몇 년 전인가요? 여의도에서 한겨울에 천명이 넘는 단식을 하며 국회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했으나,
    결국 없던 일이 되었을 때...
    그 장면을 보던 한 사람. "분명히 국가보안법으로 사람들 또 죽어날 텐데..."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6일 사회주의 노동자신문 기자로 일하던 궎호영씨가 사무실에서 긴급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0일 가수 신해철씨가 보수단체 라이트코리아와 탈북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해철씨는 4월 5일 북한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바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 절차에 따라 로켓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근거로 보수단체는 국가보안법에 있는 '고무 찬양'을 위반했다고 고말한 것이지요.



    작년 말 부터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또는 기소된 사람들...
    12월 30일 2005년 한총련 의장 구속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12/30/200912300966.asp
    12월 31일 범민련 간부 3명 기소
      http://www.ytn.co.kr/_ln/0103_200912311043218448
    1월 8일 2009년도 한신대 총학생회장(한별) 긴급체포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8161






    정운찬 총리,
    2000년에 국가보안법 폐지 서명에 동참?

    정운찬 총리가 국가보안법 폐지 서명에 동참한 성명서가 한 보수인터넷 매체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이 성명서에 있는 정운찬 이라는 이름이 지금의 국무총리와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정운찬 총리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노력을 하지는 못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 부활하려는 것은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작년 12월에는 보안법 제정 61년을 맞아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61년이라니요. 참 오래됐습니다. 이제 그만 국민들 괴롭히고 좀 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하는 전국교수일동 성명서(2000.7.18)



    [반민주적 위헌악법 국가보안법은 전면폐지 되어야 한다.]

    지난 6월 15일 남북한 정상회담은 민족의 공존과 협력, 상호발전을 전 세계에 공표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약속하였으며, 남과 북의 국체를 상호 인정하는 등 예전에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던 변화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만큼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의 존재를 빌미로 국민생활을 처참하게 옥죄어 오던 국가보안법도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실질적으로 무력화되고 사문화되었다. 최근에는 한나라당의 일부의원조차 폐지를 주장하고 나설 만큼,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부여당은 김영삼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보법의 전면폐지에는 소극적이며, 부분개정 내지는 대체입법을 추진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국보법의 반국가단체조항에서 북한을 제외하고, 가장 독소조항으로 지적되어 온 제7조의 요건을 다소 명확히 규정하면서,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위헌논란이 되어 온 불고지죄를 폐지하는 수준에 그치려 하고 있다. 게다가 반국가단체활동의 범위를 보다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등 일부조항은 개악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국보법은 부분적으로 개정되거나 대체 입법되기 보다는 완벽하게 철폐되어야 함을 다시 한번 천명하는 바이다.

    - 이하 생략 -

    2000년 7월 18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하는 전국교수일동
    (2000년 7월 18일 현재 전국 75개 대학 1,472명)



    아래는 서울대 63명

    강명구 강정원 계승혁 고철환 김민수 김세균 김수행 김용덕 김용익
    김은경 김인걸 김진균 김현철 김형종 김희숙 박명규 박찬욱 박희병
    배영수 백낙청 백도명 소광섭 송영배 송호근 신광현 신욱희 안경환
    안병직 안삼환 양동휴 오순희 오종환 윤여탁 윤영관 윤원철 이 근
    이남인 이성원 이애주 이인성 이종숙 이창복 이형목 임경훈 임현진
    임홍배 장경섭 장회익 전영애 정운찬 조동일 조흥식 주경철 최갑수
    최권행 최무영 최정운 한인섭 한정숙 허남진 홍기선 홍재성 황상익



    * 보수신문 기사 및 성명서 전문보기
      http://www.newstown.co.kr/newsbuilder/service/article/mess_main.asp?P_Index=77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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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번째글  :  지식채널e " 미국의 우상 "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보수주의 언론들은 “헬렌 켈러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라며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헬렌은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에도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 헬렌 켈러 ]

     

    교과서도, ‘세계위인전기’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녀의 신체적 장애만 부각시켰을 뿐 정작 장애를 극복한 그녀가 지키고 설파하고자 했던 이념은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어린이용 위인전처럼 헬렌 켈러 역시 위인전에서 장애를 이겨내고 인간적 승리를 거둔 여성이자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천사 같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역사 속의 헬렌은 진보적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유행할 때 몇 차례 FBI의 혐의 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체제 비판적인 인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한 헬렌 켈러에 대해 우리 사회는 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동영상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헬렌 켈러의 감춰진 삶은 FBI(연방수사국)의 감시 속에서 이뤄졌다”고 설명합니다. 사회와 여론은 그녀가 ‘투사’가 되는 것보다는 ‘기적의 여인’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또한 한국사회의 비정상적인 근대화과정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 비정상적인 근대화과정 ]

     

    일제 시대에 사회 상층부에 진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점령 세력인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친일파’라고 불리는 민족반역자들이 그 뒤 줄곧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서 전혀 처벌받지 않고 사회의 주역으로 행세합니다.

     

    경제와 정치와 언론과 교육과 문화에 대한 거의 모든 권한을 다 가지게 됩니다. 그 자손들 역시 공부 많이 하고 해외 유학도 다녀오고 기업을 물려받음으로써 우리 사회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독립 투사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십시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독립 운동했던 사람들의 자녀들 절반 이상의 학력이 중졸입니다. 독립유공자 60퍼센트가 극빈자로 살았습니다.

     

    그 전통을 이승만 정부가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 그 이후에 군사 독재 정권이 역시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백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집단이었습니다. 식민지 부역세력이 해방된 뒤에 그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지배한 나라는 전 세계에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과 월남이 그 드문 예에 속합니다.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세력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 비도덕성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근대적 합리성과 이성적 상식이 자리잡지 못하는 비극이 초래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육, 언론, 경제, 정치, 각종 제도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부도덕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절대로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방식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부당한 수단으로 권력을 탈취한 사람들에게는 국민의 대부분이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형성된다는 것이 거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자신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내용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인력을 어느 곳에서도 양성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불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 여성참정권 지지하는 체제비판적 인사였던 헬렌 켈러 ]

     

    시각장애인 협회 임원 중 누군가는 이천 장이 넘는 헬렌의 아름다운 사진 가운데 딱 한 장,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흘리는 사진에 대해 “너무 심각. 치워버릴 것.”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나머지 사진 속에서 헬렌은 육체적인 정상성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춘 ‘성인’ 이미지였다.

     

     

     

    ■ 위인전 속의 헬렌 켈러와 세상 속의 그녀

     

     

    1880년 미국 알라바마주 투스쿰비아에서 태어난 헬렌은 원래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건강한 아이였다. 잘 자라던 헬렌은 19개월 되던 1882년 2월 심한 열병을 앓게 된다. 당시 주치의가 며칠 안에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진단할 정도였다. 열병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이때의 열병으로 헬렌은 시력과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 헬렌은 촉각과 후각 등으로 세상을 느끼고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헬렌은 5살이 돼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족들이 자기처럼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가족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을 따라할 수도 없었던 헬렌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발버둥을 치는 등 점차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다

     

    그렇게 7살이 됐을 때 헬렌은, 그 후 50여년 동안 선생님이자, 친구로 지낸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게 된다. 아일랜드 고아출신으로 빈민보호시설에서 자라난 설리번도 5살 때 앓은 결막염으로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설리번이 알파벳을 헬렌의 손바닥에 써주면서 헬렌은 글을 터득하게 됐다.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보스톤의 퍼킨스 학교와 뉴욕의 라이트-휴머슨 학교에 졸업한 헬렌은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헬렌이 1904년 졸업할 무렵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시각, 청각 장애인이었다. 이후 1968년 숨을 거두기까지 헬렌은 미국시각장애인협회 일을 하며 국제적인 장애인 복지사업을 펼쳤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렌 켈러의 위대한 생애이다. 장애를 극복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가려져 왔던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삶’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헬렌이 사회운동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헬렌은 여성의 권리, 특히 참정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펼쳤다. 당시는 미국, 영국 등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을 때였다. 영국은 1919년, 미국은 1920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헬렌은 1909년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12년 사회주의 신문 <뉴욕 콜>에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몇달 동안 내 이름과 사회주의가 신문에 같이 올라왔다. 한 친구는 내가 야구, 루스벨트 대통령, 뉴욕 경찰 스캔들 기사와 함께 1면을 장식했다고 말해줬다.…악평도 이익이 될 수 있다. 내 활동을 기록하는 신문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기사에 자주 쓴다면 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 헬렌 켈러의 손에 존 메이시가 편지의 글귀를 적어주고 있다. 오른쪽이 앤 설리번.

     

    이 글에서 헬렌은 설리번의 추천으로 웰스(H. G. Wells)의 <신세계(New World for Old)>를 읽으면서 사회주의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설리번은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헬렌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 준 장본인이었다. 설리번과 1905년에 결혼한 사회주의자 존 메이시 역시 헬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헬렌은 이후 독일에서 발행되는 점자로 된 사회주의 격월간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읽으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 나를 이용한 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언론

     

     

    당시 헬렌은 이미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주류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신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볼셰비키'가 헬렌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하며, 헬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해서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사를 썼다.

     

    이를테면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25년 동안 켈러양의 선생님이자 영원한 동반자는 메이시 부인(설리번)이었다. 메이시 부부는 둘 다 마르크스주의의 열광적인 선전가이며, 이 평생지기에게 의존하고 있는 켈러양이 그런 생각에 동화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헬렌은 “존 메이시는 열광적인 마르크스주의 선전가일 수 있지만 메이시 부인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라며 “편집자는 사회주의자 또는 다른 지적인 인물이 되기에는 사실에 대한 감각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고 비꼬았다.

     

    헬렌은 또 사회주의자들이 주목을 끌기 위해 “불쌍한 헬렌 켈러를 이용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와 같은 위선적인 동정은 거절한다”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은 자본주의 언론”이라고 반박했다.

     

     

    ■ 돈에 순종하는 편집자들은 사회주의 비방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

     

    그녀는 자본주의 신문의 이같은 보도에 대해 “신문 뒤의 금권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자신을 먹여 살릴 돈에 순종하는 편집자들은 사회주의를 비방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훼손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헬렌이 사회주의자로 활동할 당시는 미국사회에서 사회주의가 어느 때보다 힘을 발휘하고 있던 때였다. 1912년 대통령선거에서 사회당의 유진 V. 뎁스 후보는 1백만 표 가까이 득표했고 1천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공무원으로 일했다.

     

    또한 노동운동에서도 새로운 힘이 넘쳐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투적 노동조합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은 1905년 설립돼 숙련공 중심의 미국노동총연맹(AFL)과는 달리 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시켰다.

     

    유진 뎁스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헬렌은 “사회당이 점점 정치적 늪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탈당하고 IWW에 가입했다. <뉴욕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헬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IWW에 가입한 것은 사회당이 너무 더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회당은 정치적 늪에 빠져들고 있다. 사회당이 정치체제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한 자리를 얻으려 애쓰는 한 변혁적 성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진정한 임무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모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단결시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정치적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왜 생디칼리스트 조직인 IWW에 가입한 이유를 알게 해준다.

     

     

    ■ FBI 보고서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다”

     

    물론 사회주의는 여전히 그녀의 나침반이었다. 참정권 시위에 참여했던 헬렌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투적 참정권론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라고 말했다.

     

    헬렌은 이후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저널리스트 존 리드를 비롯한 당시 미국의 급진적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맞서 윌슨 대통령에 항의하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소비에트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됐다.

     

    헬렌의 이후 활동은 사형제도, 아동노동,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1940년대 헬렌은 스페인 공화주의자 석방운동,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사회주의자 석방운동에 동참했다.

     

    1924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8년 동안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 색출에 앞장섰던 존 에드거 후버에게 헬렌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연방수사국은 헬렌이 존경받는 장애인 활동가라는 점에서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지는 못했지만 사찰을 진행해 43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서 헬렌은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 정당 당원"으로 분류돼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헬렌은 1943년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명인사들과 함께 의회반미활동위원회를 해체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장애를 극복한 여인으로만 알려졌던 헬렌 켈러. 여성운동가로서, 평화주의자로서 그리고 사회주의자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가 극복하고 했던 것은 자기의 신체장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각장애를 가진 경제와 청각장애를 가진 사회” 바로 '자본주의'였다.

     

     

    출처 :   공돌이님 글중에서  여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