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세상 읽기

변호사 한승헌 ‘사법부에 이의 있소!’

맑은샘77 2009. 6. 12. 21:10

변호사 한승헌 ‘사법부에 이의 있소!’

“사법 독립은 ‘죄인’들 피눈물로 이뤄낸 것, 욕 먹으니 답답”
평생 인권위해 헌신… “피고 복이 많다”고 자랑하는 자칭 ‘지기만 하는 변호사’
“난 ‘색깔’ 없다, 옳다고 생각하면 일탈 안하는 촌놈기질이지”

경향신문 | 글 유인경·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 입력 2009.06.11 09:43 | 수정 2009.06.11 14:26 |

 

2009년 대한민국 사법부의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고 구차스럽다. 박연차 사건에서 보듯 판검사가 사업가의 로비 대상이 되고, 신영철 대법관 사건은 사법관료화의 심각한 단면을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서도 국민들의 대다수는 검찰의 수사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이제 환갑을 넘기고 21세기가 되었어도 대한민국 사법부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공명정대, 법 앞의 평등이 아니라 전관예우,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데는 법조인들도 공감한다. 왜 사법부는 60년이 넘었어도 '오욕과 회환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일까.

아프면 의사가 떠오르듯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사법부를 보며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현대사 격랑 속에 항상 꼿꼿하게 서 있던 사람, 한승헌 변호사. 그는 40여년 동안 권력의 탄압을 받은 지식인과 정치인, 억압의 시대를 헤쳐간 재야 운동가들을 변호하며 법정 안팎에서 불의에 맞서면서 시대정신과 민주주의를 웅변했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투사면서도 그는 유머리스트로 불리울 만큼 곳곳에 웃음을 나줘주는 이중인격자(?)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도 역임한 한승헌 변호사를 만나 우리 사법부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처방을 들어봤다. 한 변호사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켜낸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유죄를 선고한 정치적 사건의 피고인들의 싸움으로 쟁취한 것임을 잊지 말고 엄숙한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자기변호 아닌 자기성찰을 할 때다

- 봉하마을에 다녀오셨지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87년 6월 항쟁후에 그 분이 거제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변호를 맡으셨고 재임중에는 탄핵사건때 대통령측 대리인을 맡아 인연이 깊으신데요.

"그 분이 어려울 때 자리를 함께 한 인연도 있고 해서 봉하마을에 갔습니다. 유난히 더운 날, 전국에서 모인 조문객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먼 길을 차타고 달려온 다음 또 몇 킬로를 걸어서 몇 시간씩 기다렸다가 숙연하게 분향하는데 국민들의 그런 마음이 어데서 울어났을까 궁금했지요. 인정과 감성이 메말랐다는 현대인들인데 헌화하고 절하고 우는 모습은 진정 감동적이더군요. 노 전 대통령 서거에서 오는 슬픔과 아픔 외에도 지금 우리네 현실이 너무 어둡다보니 더 울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봉하마을 만이 아니라 전국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이 수백만이나 된 데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도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서울대 조국 교수는 한 컬럼에서 '단지 전직 대통령의 부패혐의에 대한 엄정한 수사 차원이 아니라 현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퇴임 대통령에게 '개망신'을 주고 그를 물고(物故)내자는 정치적 결정이 검찰윗선에서 이뤄지고 검찰은 이를 집행하려했다는 정황이 엿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세간의 평을 정리하자면 노 전 대통령 사건수사는 여러모로 지나쳤다, 반면 천신일씨에 대한 수사는 허술했다는 것이 중평입니다. 두 사건 수사가 다 의혹만 사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을 결심한 데는 검찰수사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편향된 수사, 표적수사, 망신주기. 피의사실 공표 등은 명백한 수사권 남용이자 인권침해였죠. 이 점은 아마도 검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것으로 봅니다. 외부의 이런 비판에 대해 검찰은 수사의 정당성을 내세우려하기보다는 이제라도 겸허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장례절차 등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그토록 강조했는데 그런 예우는 생전에 했어야 하죠"

-왜 검찰, 심지어 법관들까지 사법부가 정치적이다, 권력의 시녀가 됐다란 비판을 듣게 되었을까요.

"검찰 수사를 무조건 정치적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수사에 무리가 겹치다보니, 노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인물, 즉 소위 '죽은 권력'에 대한 부관참시 비슷한 느낌을 주었고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도 생기고 수사의 공정성을 의심받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그와 대조적인 점이 연달아 보이니 형평성이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죠. 검찰이 보다 더 중립적이고 냉철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특히 수사내용을 심지어 피의자 신문 중에도 생중계하듯 피의사실은 물론 사건의 본질과 관계가 없는 내용들까지 발표하거나 흘리는 일은 앞으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검찰은 지금 유례를 찾기 힘든 고비를 맞고 있다고 봅니다. 수사권과 소추권을 한손에 쥐고 있는 권력기관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권위와 신뢰가 크게 손상당한 때문이죠. 검찰이 준사법기관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의 도구처럼 비치게 됐다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죠. 검찰이 정치권력의 뜻을 좇아 표적수사와 청부수사를 예사롭게 한다는 비난은 진작부터 공공연했는데 이번 일로 그런 인식이 더 굳어졌습니다. 이런 마당에 검찰이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 '이런저런 이유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변명이나 받아치기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기회에 수십년 묵은 검찰의 타성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검찰도 스스로 과감한 자기쇄신에 나서야 합니다."

-지난 8일에는 전국의 법대 교수를 비롯한 법학자들이 신영철 대법관의 자진사퇴와 탄핵소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사법의 관료화를 막기 위한 제도적 개혁방안을 촉구했습니다. 명단을 보니 학계중진은 물론 보수파로 분류되는 교수들도 많아 이번 선언의 무게감을 더하는데요.

"신영철 대법관 사건은 사법권에 대한 외부작용 즉 외풍뿐만이 아니라 내부의 간섭 즉 내풍도 큰 위험요소라는 것을 절감케 해주었습니다. 법관 한사람 한사람의 재판권 독립을 위해서는 외풍의 배제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에 못지않게 내풍도 배격해야 합니다. 엄연히 헌법에 명시된 법관의 독립성을 내부의 상사가 간섭하는 것은 안되죠. 이 사건은 이메일을 통해서 했기에 증거가 명확히 드러났지만, 그냥 불러서 흔적 없는 말로만 지시했다면 간섭했다는 증거도 남지 않아서 그냥 묻혀 버렸을 겁니다. 사실 우리 사법부는 건국 초기 이승만정권 때부터 문제를 안고 출범했습니다. 그동안 사법부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법조인들도 많았지만, 과거 박정희정권 때 시국사건들에 대한 재판은 심지어 대법원장을 지낸 분의 입에서 '오욕과 회한의 역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의 규범의식이나 민주적 욕구가 높아져서 사소한 불공정이나 월권도 용남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오늘날 사법부의 독립은 스스로 지켜내고 쟁취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가 죄인이라고 판결하고 낙인찍은 이들을 중심으로 싸워서 얻어낸 것입니다. 언젠가 나온 법관들의 성명에도 그 점을 자인하는 문구가 들어있었어요. 법관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법권의 독립을 해치는 외부요인이 생겼을 때 법관 스스로 지켜내야 했죠. 개개인의 법관 자신이 구체적 사건의 재판을 통해서 사법부 안팎의 간섭을 단호히 배제하지 못하고 나중에 '가서 그땐 할 수 없었다'고 옹색한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촌놈 기질로 묵묵히 걸어온 외길

-뜬금없는 질문이긴한데 왜 변호사가 되셨나요. 그때까지의 살아오신 과정도 듣고 싶습니다.
"제 고향이 시골인 전북 진안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 모시고 농사짓고 사는 게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진학을 포기했는데, 부모님과 숙부님의 강권으로 진학을 했지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와 대학 때까지 이런저런 고학을 했습니다. 취직 걱정을 면하려고 고등고시(지금의 사법시험) 공부를 해서 대학 졸업 직전에 용케도 합격을 했습니다. 검사로 발령받아 통영지청, 법무부, 서울지검에서 5년간 검사생활을 했는데 저에게는 유능한 검사가 될 자질이 없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1965년에 제 성미나 적성에 맞는 변호사로 전신을 했습니다."

-2007년에 펴낸 '한승헌 변호사의 변론사건 실록'을 보니 정말 굵직한 시국사건을 주로 맡으셨더군요. 동백림 간첩단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김지하 시인의 오적 사건, 유신반대 야당의원 구속 사건, 민청학련 사건, 부천서 성고문 재정신청 사건, 보도지침 폭로사건, 문익화, 임수경, 황석영 방북사건 등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는데 어떻게 그 엄혹했던 시절을 견뎌내셨나요.

"정말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면 법의 심판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불의가 정의를 핍박하던 시대에 내가 어느 편에 서는 사람을 변호해야야 하는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정치적 사건 또는 시국사건을 많이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사건의 실록에는 40년 동안 제가 변호한 시국사건, 정치적 사건의 재판기록 등 자료가 망라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지난날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실상이 담겨있는 사료(史料)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찰과 사법부가 집권세력의 눈치를 보며 억압에 일조를 하던 시절에는 법정은 그저 유죄판결의 산실이었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뒤바뀐 그 시대의 부끄러운 재판을 법정 밖으로 끌어내 역사의 재심·재평가를 받도록 하겠다는 일념으로 실록을 냈습니다. 법정에서의 변론도 중요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국민과 역사 앞에 제대로 알리는 것도 법조인의 한 책무라고 생각해서 글을 쓰고 자료도 계속 모아왔습니다."

-변호만 하신 게 아니라 직접 피고도 되셨잖아요.
"제가 우스개를 겸해서 말하지요. 나는 민간교도소, 육군교도소에다 소년교도소까지 순례를 하고 오직 한 군데만 못가 봤는데, 거긴 청주 여자교도소라 내 힘으로는 못가는 곳이라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지요. 한 잡지에 쓴 글 때문에 1975년에 반공법 위반으로 첫 옥살이를 했어요. 반공법 전문 변호사인데 바로 그 반공법에 걸려 옥살이를 하다니 인명구조대원이 바다물에 빠진 셈이라고 웃기도 했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도 법정에 섰는데 저는 조연급으로 스카웃되었었지요. 그때 전두환 소장은 자신의 집권 야욕을 채우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인 김대중 선생과 그 세력을 일망타진하려 했는데, 그 후 대통령까지 지낸 그 사람이 내란과 군사반란으로 당대에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습니까? 어쨌던 나는 두 번에 걸쳐 교도소의 독방 생활을 한 덕분에 저작권법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과분하게도 전문가 대접을 받기도 했으니, 세상은 참 사람 살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번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를 인터뷰할 때도 나왔지만, 친구에게 술값 500원을 달라는 것도 공갈범으로 잡아넣는 등 지금 와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기소와 판결이 많은데 가장 황당한 사건은 어떤 것인가요.

"그 시절의 시국 사건을 다룬 법정에서는 단상과 단하가 뒤바뀌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74년에 나온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죠. 그런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법은 세계에도 유례가 없을 것입니다. 민청학련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에는 학생의 무단 결석이나 시험 거부도 사형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니까요.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했다고 해서 군 검찰이 긴급조치 1호를 걸어 기소하고 15년 구형을 하면 바로 다음날 군법회의에서 15년 형을 선고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힐난해서 그 후 정찰제 판결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한 재일동포 유학생이 방학 때 일본에 가서 '한국에서는 혼분식 장려로 대학 근처에 분식집이 많다'고 한 것도 한국의 식량사정에 대한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라는 유죄판결을 받았을 정도였지요. 그때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가지고 유죄의 증거로 써먹는 일이 다반사였죠. "

-그래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아 상당한 성과를 이뤘지 않습니까.
"2005년 초부터 2년동안 큰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10여년 전부터 거론되어 오던 사법개혁의 과제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는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사개추위가 성안해서 정부안으로 국회에 보낸 여러 법안 중 일부만 입법화된 것이 아쉽지만 그 중 중요 법안이 통과되어 지금 시행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성과라고 생각해요. 입법이 된 사법개혁 과제 중에서도 형사재판의 공판중심주의 확립, 국민의 형사재참여제도 신설, 로스쿨제도의 도입 등이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공판중심주의는 재판과정에서 수사기관 작성의 각종 조서를 재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과 증거를 존중하는 것이죠. 그 제도가 검찰이나 법원에 많은 부담을 주지만 그러나 재판이란 인간의 생명과 권리에 직접 관계되는 것이므로 생산원가 줄이는 식의 타산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국민참여재판이란 배심원제도를 뜻합니다. 종래 재판의 객체로만 여겨져온 국민들이 스스로 심판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국민주권주의를 재판의 영역에까지 확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시행 초기단계이지만 매우 성공적으로 연착륙하고 있다고 봅니다. 처음 5년간은 배심원의 평결에 권고적 효력만인정하고 있는데,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국민들의 참여도와 판단수준이 생각보다 높아요. 이젠 검사나 변호인이 판사와의 소통에 안주하지 않고 배심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간결한 언어로 호소력을 높이는 새로운 법정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스쿨은 법조인 양성제도를 바꾸자는 취지였어요. 답안지 몇장으로 법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하여 전문인력을 양성하자는 것인데, 앞으로 졸업생이 배출되고 변호사자격시험제도가 연륜을 쌓게 되면, 그 성패가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사법개혁법안은 여야가 모두 투표를 통하여 원만하게 입법화되었기에 아무런 정치적 후유증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법대에서도 강의를 하시지만 로스쿨에 꼭 추가할 과목이 있다면 어떤 과목을 개설하고 싶습니까.

"교육부나 대학이 각 로스쿨의 특성에 맞게 과목들을 배정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법조인으로 갖춰야할 역사인식과 정의감을 함양하기 위해서 역사과목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며, 특히 우라나라의 사법의 역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사법사가 정규과목에 들어가야겠지요. 명암이 뒤얽힌 우리의 사법사 속에서 부끄러움도 배우는 한편 훌륭한 법조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직업관과 사명감을 키우길 바라서죠. "

-사법부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사회의 양극화와 편가르기가 아닐까요. 요즘처럼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개인이나 단체를 양분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좌파우파의 개념설정조차 매우 부정확하고 그저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위해 편가르기식의 구분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진보와 보수 역시 용어의 통일이나 정확성도 갖추지 않은채 오용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적 풍토에서는 마음에 안들면 좌파요, 좌파는 용공 찬북이라는 식으로 채색하는데,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노무현정부를 좌파라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국가정책에서 한미에프티에이, 이락 파병, 신자유주의 등 우파적 요소가 병행되지 않았습니까? 기준도, 개념 설정도 모호한 그런 편가르기식, 감정적 양분법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통합과 포용의 길을 모색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 변호사님이 변호한 시국사건을 다시 보니 김진홍, 서경석 목사와 김지하 시인들의 민주화 운동이나 진보적 모습이 새삼스럽더군요. 그분들은 굳이 편가르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로 전향한듯한데 한변호사만 늘 진보진영에 서 있는 이유는 뭘까요.

"제가 한겨레신문에 과거 이야기를 연재하니까 거기 나오는 김진홍목사가 뉴라이트 김진홍목사와 동일인이냐고 묻는 댓글도 있더군요. 언론을 통해 접하는 몇 마디 말로 지식인들의 언동 변화를 규정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봅니다. 세월이 가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잣대가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분들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지위와 영향력 때문에 때론 당혹감을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변절했다, 보수로 돌아섰다고 쉽게 단정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좀 더 시간을 갖고 긴 안목으로 지켜보고 그들의 생각의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변한 이들과의 대화도 중요합니다. 저는 진보, 보수의 뚜렷한 색깔이 없는 사람이어서 특별히 생각이나 마음 바꿀 일이 없었답니다. 제가 항상 그대로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 촌놈기질 때문이겠지요. 그저 한번 마음먹으면 그 길로만 간다고 할까요. 비록 어떤 일에 앞장서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내가 가는 그 대열의 지향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면 후미에서나마 일탈하지 않고 뚜벅뚜벅 따라 온 셈입니다. 그게 촌놈기질입니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시대, 고문으로 뼈가 으스러지는 상황에서도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셨어요. 성탄절 특사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석가탄신일 특사로 나오시고도 '하나님이 성탄절에 바빠서 부처님에게 업무협조를 해서 나온 것'이라거나 '오십이 가까와서 소년교도소에 간 것은 전두환정권도 내가 소년처럼 천진한 것을 인정했기 때문' 등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비결은 뭔지요.

"탄압과 투옥, 고문 등은 원해서 겪은 게 아니었습니다. 만약 감옥이 원서 써내고 가는 곳이라면 절대 안 갔을 거예요. 무도하게 끌고 가서 무조건 고문을 가하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이 없으니 그 공간에서 나름대로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 혼자의 힘이나 의지로만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항복하지 않고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유머는 즐겁고 기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어려울 때 그늘 속에서 나옵니다. 유머를 생산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 각박한 현실 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위로와 여유와 화합의 신호등 같은 것이었지요. 암울하고 억울한 세상과 화해도 하고요. 유머는 한 인간의 품성과 교양의 수준을 보여주는 면도 있습니다. 유머는 원가가 안 들고 아무리 즐겨도 아직은 면세인 만큼 널리 활용되길 바랍니다. 한국 정치인이나 법조인들은 틀에 박힌 개념이나 용어에만 익숙한 나머지 유머나 해학을 활용할 줄 몰라서 정치도 사법부도 이렇게 살벌하가니 답답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미국의 경우엔 대통령은 물론 영부인에게도 유머 원고를 써주는 작가가 따로 있고 심지어 미리 연습도 시킨다고 하지 않아요? 국민들과 소통은 물론 친화력도 좋아지고 자기 이미지도 높이는 훌륭한 수단이죠. 그런데 우리가 티브이에서도 보듯이 한국 정치인들은 그저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식으로 살벌한 언어가 너무 난무하는데, 이 시대의 '블루오션'인 유머 분야를 개척해서 활용하기를 권합니다. 표를 얻는데도 유용할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이런저런 우스개 소리를 잡지에 연재하고 그것을 묶어서 유머집을 냈더니 무려 10쇄나 팔려서 절로 웃음이 나더군요. 이렇게 유머는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제발 이제는 국민을 어이없는 일로 웃기는 정치 그만하고 진심과 품격이 담긴 유머를 체질화하여 국민과 소통하고 친근해지는 정치, 국민에 친근감을 주고 신뢰도 받는 그런 사법을 이루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한승헌은 누구인가

1965년에 변호사 개업을 한 후 100여건의 시국사건을 맡은 그는 자칭 '지기만 하는 변호사'다. 법정에서 그의 의뢰인들은 매번 유죄를 받아 '늘 실패하는 변호사'였지만 "징역 가면서도 다들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고 적어도 만기복역을 마치고라도 다 나왔으니 피고 복이 많다"고 자랑하는 이가 한승헌 변호사다. 34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 전북대 법정대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명예법학박사도 받았다. 반공법 위반, 김대중내란음모죄로 고문과 감옥살이를 반복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과 동시에 감사원장을 역임했고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관료사회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지금껏 자신이 만난 피고인들 대부분이 정의를 추구하다 핍박받은 사람들이었던 덕분에, 그들에게 '오염'(?)돼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곧은 길'을 살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평생을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으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시빗거리보다 웃을 거리를 찾는 유머리스트다. 현재 법무법인 광장의 고문변호사, 경원대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글 유인경·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